본사 김양희 객원기자가, <겨레하나>가 주최한 북측 협력사업장 방문단 일원으로 5월4일부터 7일까지 3박4일간 평양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지난해 11월달 이후 두 번째다. 평양방문 신청부터 소감을 정리한 김양희 객원기자의 평양방문기를 일기식으로 순차적으로 싣는다. 제목을 편의상 지난해와 구분하기 위해 <김양희 기자의 평양일기 Ⅱ>로 한다. / 편집자 주

“북에까지 와서 자본주의 식으로 따진다”

▲  환송만찬을 마치고 숙소인 양각도 호텔1층에 모여 뒷풀이를 진행했다. [사진-통일뉴스 김양희객원기자]
아직 뒷풀이가 계속되고 있었다.

그동안 우리 3조는 일정이 늦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모이기로 한 시간에 모이지를 않으면 가차 없이 벌금을 걷어 마지막 뒷풀이 비용을 마련하고 있었다.

공공직업훈련을 전담해 온 기능대학과 직업전문학교 등 43개 기관이 통합한 한국폴리텍대학의 박좌진 노조위원장은 “폴리텍대학의 기술력을 가지고 북녘과 교류 사업을 진행하고 싶어 어떤 부분이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살펴보려고 평양에 왔다”고 했는데, 우리 조의 벌금을 어찌나 잘 걷어내는지, 평양을 살펴보는 일보다 벌금 걷는 일을 더 열심히 하신 듯하다면 화내실까?ㅋㅋ

우리의 이 같은 모습에 안내원들은 “이곳까지 와서 자본주의 식으로 따진다”며 “일정이 늦어지면 계획된 것을 다 볼 수 없으니 일찍 오시라”고 했다.

그러나 자본주의 식대로 살아온 우리는 이전에는 아무리 빨리 오라해도 정신없이 사진 찍기 바빠 늦곤 했지만 벌금제를 도입하고부터는 신기하게도 모두들 일찌감치 와 앉아있어 “이러다간 비용이 모자라겠다”며 “너무 일찍 와서 앉아 있어도 벌금을 내자”고 할 정도였다.

환송만찬 직후 바로 시작된 뒷풀이는 조 구분 없이 모두 모여 양각도 호텔 1층의 식당에서 진행되고 있다.

취재 후 사진정리 등으로 늦게 도착한 나는 광주에서 온 일행들 사이에 자리 잡았다.

광주에서는 오종렬 대표를 비롯, 겨레하나광주전남운동본부 현지 상임대표, 이상갑 공동대표, 주관철 사무국장, 박정애 조직국장 등 총 6명이 이곳을 찾았다.

▲ 오종렬 한상렬 대표와 함께 '광주전남겨레하나' 회원들이 멀리 보이는 주체탑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사진-통일뉴스 김양희객원기자]
2005년 8월 4일 창립한 우리겨레하나되기 광주전남운동본부는 창립 이전 준비위원회 시절부터 지난 5년여 간 지속적으로 ‘남녘의 비닐이 북녘의 싹들에게 달려갑니다’라는 슬로건을 걸고 북녘에 통일쌀, 비닐 보내기 운동을 진행하고 있다.

지난해 광주전남겨레하나가 북녘에 보낸 물품은 통일쌀 63톤(시가 8000여만원 상당), 농업용 보온 비닐 55톤(1억여원) 규모로 회원수는 160여명 정도지만 이들은 광주전남 지역의 도민 2만여명의 성금을 모아내 해마다 1억원어치 이상의 비닐을 보낸다고 한다.

특히 이들은 이번에 서울겨레하나(준)와 마찬가지로 통일돼지농장의 건립을 위해 북녘과 실무협의차 이곳에 왔다고 하니 앞으로 광주전남겨레하나의 돼지농장도 평양 어딘가에 들어설 것으로 기대가된다.

뒷풀이는 조별로 서로 번갈아가면서 노래를 부르며 진행되고 있었는데 벌써 막바지에 치닫고 있었다.

마지막이라는 아쉬움이 컸던지 한상렬 대표는 북녘 접대원들에게 노래를 한 곡조 부탁했다.

이들은 통일무지개 등 남녘에도 알려진 노래 몇 곡을 뽑았다. 우리의 흥취도 극에 달해 박수를 치며 따라했다. 마지막에는 모두 다함께 손을 맞잡고 ‘우리의 소원’을 목이 터져라 열창했다.

▲ 양각도 호텔 접대원들이 일행에게 노래를 선물했다. [사진-통일뉴스 김양희객원기자]
통일농수산사업단


이곳에서 나는 통일농수산사업단의 양돈팀장 김준영 준동물병원 수의사와 박종대 기술자문위원과 인사를 나눴다.

통일농수산사업단(http://tong1nong.or.kr/)은 2005년 창립된 단체로 남북 간의 농수산분야 교류협력이 신뢰구축과 공동번영을 이루고 평화와 통일을 앞당기는데 기여한다는 신념으로 결성됐다.

농수산업은 겨레의 먹거리를 책임지는 산업으로 식량을 포함한 농수산 분야의 교류와 협력이야말로 다른 어떤 분야보다도 민족의 화해와 공동번영, 평화와 통일을 앞당기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할 것이라고 확신하며 이들은 관련기관, 단체, 기업, 전문가 등 각계각층의 힘과 지혜를 모아 통일농수산업 기반을 조성하고 이를 통해 동북아 농업 클러스터까지 실현시켜 장차 통일에 이바지 할 수 있도록 박차를 가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 나는 그동안 통일농수산사업단을 잘 몰랐고, 통일농수산사업단 측은 통일뉴스를 잘 몰랐다고 하니 앞으로 남쪽에 가서 서로 교류를 할 방법을 모색하자는 이야기도 나눴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평양에 오면 북녘 사람들과 늘 새로운 북녘의 모습을 만나는 것도 즐거운 일이지만 짧은 기간 동안이지만 빠듯한 일정을 소화하면서 남녘에서 잘 몰랐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것 역시 매력적인 일이다.

특히 기자라는 직업적인 특성 상 사람을 많이 만나는 것이 재산인데 이렇게 한꺼번에 많은 재산을 얻을 수 있는 기회는 그리 많지 않다. 이래저래 내게 평양은 특별한 곳이다.

이곳에서의 뒷풀이 비용을 권영진 겨레하나 콩우유사업본부 후원회원이 냈다.

“아리랑의 공연, 국제친선전람관 등 북녘의 스케일이 굉장히 크다”고 하던 그는 “여기 권 선생님(통일광장 권낙기 대표)과 같은 권씨”라며 “많이 느끼고 배웠다”고 한다.

‘양각도 호텔엔 5층이 없다(?)’

▲양각도 호텔 화장실의 남녀구분 표지판.  [사진-통일뉴스 김양희객원기자]
마지막 날인 만큼 2차를 즐기기 위해 이동하는 사람들, 빠듯한 일정에 피곤하다며 방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뒤로 하고 나는 차분히 양각도 호텔 곳곳을 둘러보기로 했다.

키 크고 멋진 벨보이와도 인사를 나누고 찻집, 상점 등을 지나 화장실까지, 이곳에서는 간결하고 단순한 우리와 달리 멋진 남녀의 옆모습을 자세히 묘사한 남녀구분 표지가 있는데 이 역시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는 표지이기에 사진으로 한 장 남긴다.

또 양각도 호텔은 3번째고 올 때마다 수차례 엘리베이터를 오르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에야 알아차린, 양각도 호텔은 5층이 없다(?)는 재미난 사실을 알리기 위해 이 역시 사진을 찍는다.

물론 양각도 호텔에도 5층은 있지만 그곳에는 기계실 등이 위치하고 있어 일반 투숙객들이 오르내리는 엘리베이터에는 아예 5층 버튼이 빠진 것이다. 또한 3층부터 4층까지는 호텔 종사자들의 숙소로 이용되고 있다고 한다.

▲양각도 호텔5층은 기계실등이 있어 일반 투숙객이 출입할 수  없다. 호텔 내부 엘리베이터에도 5층 버튼은 아예 없다.  [사진-통일뉴스 김양희객원기자]
숙소로 올라와 언제 또 느껴볼지 모를 평양의 밤공기를 한껏 마시기 위해 창문을 여니 황홀한 야경이 펼쳐진다.

지난 2005년, 평양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때 묘향산에 위치한 향산호텔에서 하루 밤 묵는데 산속이라 그런지 창밖을 내다보니 눈을 떴는지 감았는지 느끼지도 못할 만큼 어두워 딱히 야경이랄 게 없었다.

워낙 어두운 탓에 사람들이 “김 기자, 영철 안내원이랑 결혼하고 싶으면 지금 호텔 밖으로 나가. 아무도 절대 찾지 못하겠다. 우린 나중에 뉴스로 ‘사랑이 분단을 넘어섰다’는 내용을 보겠군. 이것은 세계적인 이슈감인 걸” 하기도 하고 그 와중에도 “흠~ 이것은 월북을 모의하는 국가보안법 위반사항이다. 난 빠지겠다”며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였다.

'조작했다고 할 정도로 대단한' 평양의 야경

▲양각도 호텔에서 내려다 본 평양의 야경.  [사진-통일뉴스 김양희객원기자]
▲평양의 해돋이.  [사진-통일뉴스 김양희객원기자]
그런 어두운 평양의 기억을 갖고 있는 내게 이번 야경은 특별했다.

현순이와 송연이의 집단체조연습 과정을 그린 다큐영화 ‘어떤 나라’에서 현순가족들이 한참 밥을 먹다가도 정전이 돼 촛불을 켜고 밥을 먹는 장면이 나온다. 전력난도 전력난이지만 당시는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던 때라 갑작스런 공습에 대비하기 위해 매일 실전에 대비하는 훈련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송연 엄마는 처음으로 외국인에게 ‘딸의 생일인데 먹을 것이 없어 강냉이죽을 쑤어 생일 당사자에겐 한 그릇을 나머지 사람들은 반 그릇씩 나눠먹었다’고 고난의 행군 당시를 설명했다. 그런 북이 ‘우리식대로 살아 나간다’ ‘자력갱생’의 구호 아래 미국과도 당당히 맞서고 거침없이 2.13합의를 이끌어내며 만든 불빛들이기에 불빛 하나마다 소중하고 자랑스러웠다.

그러나 사진을 찍기엔 나의 카메라가 성능이 떨어져 도저히 평양의 야경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있다. 몇 번을 시도하다 포기하고는 탁무건 콩우유사업본부 운영이사에게 부탁했다.

나온 사진을 보고는 탁무건 이사는 “야~ 이 사진을 남쪽에서 보도하면 우리가 조작했다고 할 정도로 대단하다”고 말한다. 그의 말대로 이 사진을 보면 누군가 ‘거짓말일 것이다, 사진조작이다, 이도저도 아니라면 분명 명절 같은 날 선전용으로 환하게 불을 밝힌 후 찍었을 것이다’고 할 지 모르겠지만 이는 특별할 것 없는 평양의 야경을 찍은 것이라고 밝힌다.

‘대동강은 조용한 혁명을 하고 있는 북의 모습’

▲속이 훤히 보이는 대동강의 고요한 모습.  [사진-통일뉴스 김양희객원기자]
나의 룸메이트인 박숙이 수협 노조위원장과 나는 일찍 일어나 대동 강가를 산책하기로 했다. 호텔 밖을 나와 강가로 내려가는데 뭔가 살에 닿아 보니 거미줄이었다.

어제 마지막 밤을 아쉬워하며 다들 무리를 해서인지 강가에 나온 이들은 우리 밖에 없었고 적어도 오늘 이 길을 우리가 처음 지나고 있음을 거미줄이 알려주고 있다.

어제 리충복 민화협 부의장이 말한 통일의 선구자라는 말이 떠올라서 일까, 아직은 아무도 오지 않은 이 길을 지나다가 살에 닿은 거미줄이 별로 기분에 거슬리지 않다.

너무 깨끗해 바닥의 모래알까지 보이는 물, 그리고 청명한 하늘, 맑은 공기 등 일행 중 누군가 ‘유럽의 어떤 전원도시보다도 아름다운 곳이다’고 감탄을 연발했을 만큼 아름다운 풍경을 간직하기 위해 우린 열심히 사진을 찍고 또 찍었다.

▲해가 떠오른 대동강가 위로 새벽 물안개가 어슴푸레 올라왔다.  [사진-통일뉴스 김양희객원기자]
대동강은 조용한 혁명을 하고 있는 북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정지된 화면처럼 조용하지만 여러 대의 모래채취선은 북녘의 활발한 경제활동을 보여주는 동시에 변화하고 있는 북녘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다음번에 평양을 또 방문하게 된다면 그때 역시 깜짝 놀랄 정도로 많이 바뀌어져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노숙자나 거지가 없는 평양역’

오늘의 마지막 일정은 동명왕릉 참관팀과 병원진료팀으로 나뉜다. 일행의 대부분은 동명왕릉으로 향하지만 대표단을 비롯, 배탈 증세를 보이고 있는 환자 몇은 병원으로 가 건강검진을 받게 된다.

박숙이 부위원장과 나는 서울이었으면 정신없이 출근 준비에 한창이었을 이 시간에 한가로이 대동강가를 거니는 호사스러운 여유를 만끽하고는 일행이 모여 있는 호텔 로비 앞으로 향했다.

일행들은 벌써 모여 공항에 실어 보낼 짐 가방을 따로 모아두고 차에 오르고 있었다.

이미 짐을 챙겨 놓았던 우리 역시 차에 올랐다. 오늘은 월요일, 평양시민들은 다른 때보다도 더 활기찬 하루를 맞고 있다. 평양시민들도 우리와 똑같이 출근채비와 등교로 분주하다. 이 많은 사람들이 다 어디서 쏟아져 나왔나 할 정도로 거리에는 자전거, 전차, 버스 할 것 없이 수많은 시민들이 오가고 있었다.

대형 김일성화(花,), 김정일화 간판과 올해 신년사설에서 강조한 경제강국 건설을 주요 내용으로 한 구호판 등이 서 있는 평양역 역시 광장이 북적거릴 정도로 많은 사람이 있다.

분명 너무 당연한 거 아냐? 소리를 들을 만큼 너무 당연한 것이지만 3박4일 일정동안 평양역을 수차례 오가면서 유심히 지켜봤지만 볼 수 없었던 것 한 가지는 바로 거지. 거지가 없다는 것은 놀랄 것 많은 평양에서 놀라운 일 중의 하나였다.

나는 서울역을 비롯, 주요 역마다 추위를 피해 박스를 깔고 자는 노숙자들을 보면 마음이 쓰이면서도 선뜻 돈을 꺼내줄 용기조차 없이 소심하지만 그저 마음만 아파하며 ‘그들에게도 인권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때문에 스스로 노숙자들에게 따뜻한 시선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어느 날 지하철에 앉아 있는 노숙자의 냄새에 옆에 자리가 났는데도 나도 선뜻 가서 앉지 못하고, 또 이런 시선들이 불편해 몹시 추운 날씨임에도 그냥 나가버리는 노숙자를 보면서 우리의 시선이 따뜻하기는커녕 차갑기 그지없다는 것을 알기도 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대학생시절 배낭여행을 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도 각 나라마다 제일 먼저 반긴 것은 역에서 노숙을 하던 거지였던 것 같다. 심지어 기념사진을 찍는데 맨발에 오줌까지 싼 거지가 나와 일행인 것처럼 다가와 함께 찍은 사진도 있을 정도다.

세계 최강대국이라는 미국에서도 지난해 노숙 인구가 300만명에 이른다는 기사를 봤다. 이들 중 30%는 마약 중독자들로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묘책을 찾을 수 없어 미국 정부가 애를 먹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당국의 공식적인 통계는 없지만 시민단체의 조사결과 매년 거리에서 죽어가는 노숙자가 지난해 현재 350명에 이른다고 한다.

함께 일하고 똑같이 분배한다는 사회주의 국가에서 노숙자와 거지가 없다는 것이 당연한 일일 수 있으나 ‘가난은 나랏님도 구제하지 못 한다’는데 평양역을 비롯, 각 지하철역마다 노숙자나 거지가 없다는 것은 신기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