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사 김양희 객원기자가, <겨레하나>가 주최한 북측 협력사업장 방문단 일원으로 5월4일부터 7일까지 3박4일간 평양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지난해 11월달 이후 두 번째다. 평양방문 신청부터 소감을 정리한 김양희 객원기자의 평양방문기를 일기식으로 순차적으로 싣는다. 제목을 편의상 지난해와 구분하기 위해 <김양희 기자의 평양일기 Ⅱ>로 한다. / 편집자 주

하루 백 원으로 기적 만드는 ‘평양돼지농장’

▲ 서울겨레하나(준) 박진영 집행위원장.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객원기자]
묘향산에서 다시 평양으로 돌아오는 길, 갈 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이곳의 풍경을 잊지 않기 위해, 또 그동안 이야기를 나눠보지 못한 이들과 대화를 시도했다.

일정 중 내내 참관단의 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없던 박진영 서울겨레하나(준)<*준비위원회, 서울겨레하나는 오는 7월에 정식 발족을 목표로 하고 있다> 집행위원장은 우리 일행이 ‘김원균명칭 평양음악대학’을 참관을 하는 동안 돼지농장 건설 부지를 돌아보고 왔다고 한다.

올해 1월 26일 발족한 서울겨레하나(준)는 지난 2월 1일, 북측 민화협과의 통일돼지농장 건설에 관한 의향서를 체결하고 북에서는 공장부지와 인력을 제공하고 남에서는 돼지공장 건설에 필요한 설비자재를 지원하기로 했다.

돼지농장 건립 시 보내는 돼지는 암컷 50마리, 수컷 4마리를 계획하고 있단다. 돼지는 한번에 10마리 정도 새끼를 낳아 암컷이 일 년에 2번 새끼돼지를 낳으면 한해 총 1000마리의 돼지가 생산된다.

그러나 똑같은 사료를 먹인다고 해도 지속적으로 품종 개량을 진행한 남녘의 돼지와 북녘 돼지의 성장속도가 다르다는 것이 그의 설명.

이번 결연사업으로 북녘돼지 품종 개량을 진행, 북의 식량 자급뿐 아니라 수출을 통한 북의 경제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우선은 축사 자재를 보내고 축사가 건립되면 돼지를 보내며 아울러 지속적으로 사료를 보낸다. 이같이 진행되는 돼지농장 사업은 농촌과 도시가 함께 통일운동을 하는 매개체가 되는 것으로 서울겨레하나(준)는 앞으로 전농, 민주노총 등과 함께 사업을 진행하길 바라고 있다.

이의 일환으로 돼지농장 건설에 관한 두 번째 실무협의차 평양을 방문한 박 위원장은 이번에 평양 사동구역의 장천리에 마련된 부지를 둘러보고 왔다고 한다.

부지 2000평에 건평 400평 규모로 지어질 돼지농장은 올해 말까지 건립하는 것이 목표다. 총 건립비용은 4억~4억5000만 원정도가 예상되는데 이중에 정부기금으로 책정된 8000만원 외에 나머지 비용은 서울겨레하나(준)의 300여명 회원들과 각지에서 모금하고 있는 후원금 등을 통해 마련하고 있다.

서울 겨레하나(준)는 하루 백 원 통일운동이라는 개념으로 월 3000원 1구좌 단위의 CMS회원을 모집하는데 올해 말까지 6000구좌를 목표로 하고 있다고 한다.

박진영 집행위원장은 “북측 관계자들로부터 이곳이 김일성 주석이 마지막으로 현지지도를 한 곳이라고 들었다”며 “농장 건립 예정지 주변에는 평양지역의 남새(채소) 공급을 도맡고 있다는데 돼지농장이 건립되면 축사에서 나오는 거름들로 주변의 채소밭에도 도움이 될 거라고 들었다”고 말한다.

“민화협에 잘 생긴 영철이를 왜 몰라요?”

전경수 안내원에게는 계원삼 아저씨와 영철이의 안부를 물었다. 계원삼 아저씨와 영철이는 지난 2004년 평양 방문 당시 만난 안내원이다.

계원삼 아저씨는 이번에 만난 고경훈 안내원 못지않은 익살꾼이며(굳이 자세히 표현을 하자면 고경훈 안내원은 계원삼 아저씨에 비해 담백하고 정말 내가 배 아플 정도로 파격적인 웃음을 주는 반면 계원삼 아저씨는 웃기긴 웃긴데 아저씨들 능글맞은 것처럼 조금은 느끼한 웃음을 구사한다), 영철이는 나와 동갑내기 친구이다.

전경수 안내원은 계원삼이라는 이름이 채 다 불리기 전에 웃음부터 터트렸다.

남녘에서만이 아니라 북녘에서도 통하는 재미있는 사람인지, 사실 전경수 안내원 이전에도 여러 안내원들에게 안부를 물었으나 계원삼 아저씨를 모르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이 미소를 짓곤 했다.

전 안내원은 “계원삼 안내원은 좋은 사람”이라고 소개한 뒤 “요즘 6.15 행사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며 “6.15때 평양에 오면 만날 수 있을 것이다”고 전한다.

그는 또 내가 지난해 만났던 “김종수 안내원은 현재 남녘의 어깨동무 방북단의 안내를 맡고 있다고도 얘기해줬다.

그러나 전경수 안내원은 아무리 훤칠하고 잘생겼다고 설명해도 내가 아는 영철이는 모르고 있었다.

“아니 민화협에 잘 생긴 영철이를 왜 몰라요?”
“북녘에서 영철이, 특히 김영철이라는 이름은 너무 흔해 누구를 말하는지를 모르겠는데. 그런데 어떻게 알고 왜 물어보나?”

“아니 처음 평양 왔을 때 알게 된 친구인데 궁금해서요. 작년에 선보러 다닌다고 들었는데 장가는 갔는지도 궁금하고.”
“아 그게 궁금한 거군. 나이가 몇인데?”

“북녘에서 30살 넘도록 장가 안 갔으면 병신이야”

▲ 33살에 장가를 들었다는 리동혁 안내원.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객원기자]
“30대 초반이죠.”
“그럼 장가갔지!”

“누군지도 모르시면서 장가갔는지 어떻게 아세요?”
“왜 모르나? 북녘에서 30살 넘도록 장가 안 갔으면 병신이야.”

헉~나는 충격을 추스르고 33살에 장가를 들었다는 리동혁 안내원에게 말을 건넨다.
“30살 넘도록 장가를 못가면 병신이라는데요.”
“맞다구, 나는 딱 병신이 될 뻔하다가 간신히 면했지! 김 기자도 지금 병신의 기로에 서 있으니 어서 분발하라구.”

모야~북녘의 기준대로라면 남녘에는 병신들이 난무하는 것이다.

중매결혼 대신 연애결혼들을 많이 하게 됐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연애결혼과 중매결혼은 반반정도인 북녘에서 도통 결혼을 하지 않는 남녘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로승일 안내원은 “남녘 사람들은 30살이 넘도록 결혼을 안 한다는데 대체 왜 그런 것입니까?” 물었다.

그의 질문에 나는 “남녘에서는 여자들이 돈두 벌어야 하고 또 집에 와서 살림도 해야 하고 창광유치원 같은 탁아소가 없고, 있어도 돈을 아주 많이 내야해서 애들도 직접 돌봐야하고 아주 바쁘고 힘들어 엄두가 나지 않아서 못해요. 또 남녘에서는 공해가 심해 옷도 금방 더러워져서 빨래도 맨날 해야 하고 밥도 여자가 다 지어야하고 또 청소도 맨날 해야 하고 암튼 장난이 아니거든요” 했다.

한참 끄덕끄덕 듣더니만, “근데 밥하는 거랑 빨래하는 것은 몸에 배어있어야지, 그것을 뭘 일이라고 생각하나?” 한다.

헐~밥하고 청소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데, 로승일 안내원은 집에서 밥이랑 청소 안 도와주시죠? 저는 나중에 로승일 안내원 같지 않은 분 안 만나고 싶어요~ㅋㅋ(혹시 지금 이 기사를 로승일 안내원이 본다면 분명 내가 내 동생 하면 안 되냐고 졸랐을 때와 똑같은 표정을 지을 것 같다. 삼강오륜이 어쩌고~ 인류 도덕이 저쩌구 하며 엄청 황당해 하던 그 모습 그대로...)

월향전시관

▲ 월향전시관옆 평양 제1인민병원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객원기자]
일행은 계월향을 기념해 만들었다는 월향전시관에 도착했다.

월향전시관은 계월향이 살던 집에 위치한 기념품 상점으로 바로 옆에는 평양인민병원이 상가를 등지고 있고, 11시 방향쯤에는 개선문이 위치하고 있다.

계월향은 조선 중기의 평양 명기로 당시 평안도병마절도사 김응서(金應瑞)의 애첩인데 임진왜란 때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부장(副將)에게 몸을 더럽히게 되자 적장(敵將)을 속여 김응서로 하여금 적장의 머리를 베게 한 뒤 자신은 자결했다고 한다.

이곳은 한쪽은 건강식품이나 술 등 먹거리, 다른 한쪽 방은 그림, 인형, 수예 등 각종 기념품류가 전시되어 필요한 것을 한눈에 보고 구매를 할 수 있게 되어있다.

나는 이곳에서 작고 예쁜 도자기를 2개 샀다. 지난 2004년 북녘 최고의 작가들이 모여 창작 활동을 한다는 만수대창작사에서 도자기를 샀었는데 도자기가 너무 예쁘다는 고모에게 선물을 했기 때문이다. 이 도자기는 앞으로 우리집 거실 TV 옆에 놓아 누워서 TV를 볼 때, 또 가족과 둘러 앉아 간식을 먹을 때 등등 앞으로도 내게 끊임없이 평양이 생각나도록 해줄 것이다.

“여러분은 6.15 통일시대의 선구자다”

▲ 퇴직 전교조 모임 이윤선생에게 술따르는 북 민화협 리충복 부회장.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객원기자]
호텔에 돌아와서는 벌써 환송 만찬이 기다리고 있다. 3일이란 시간이 홀랑 흘러버리고 내일이면 다시 남녘으로 가야한다.

일행은 첫날 환송만찬 때처럼 깔끔한 옷을 차려 입고 만찬장에 앉았다.

행사는 바로 시작돼, 한상렬 대표는 “보고 싶고 또 보고 싶은 심장에 남는 사람처럼 1998년 10월 3일 첫 방북 후 20번 넘게 방북을 했지만 만나면 만날수록 반갑다. 그동안 북녘을 오가며 느낀 점을 세 가지로 정리하자면 이 사람들은 평화열망의 정신, 자력갱생의 정신, 일심단결의 정신이 강한 사람들이다. 북녘 사람들은 진정으로 평화와 타협을 원하는 평화열망 정신이 강하고 무슨 일이든 스스로 개척해나가는 자력갱생의 정신이 강력하며 핵보다도 더 강력한 무기인 일심단결의 정신을 갖고 있다. 이번에 4번째 감동으로 아리랑의 감동을 꼽겠다. 특히 비가 오는데도 불구하고 조금도 억지스러움이 없었으며 온갖 마음을 다해 공연하는 것을 보며 일심단결이라는 북의 저력을 다시 한 번 느꼈다. 북의 저력은 남의 저력이요 남녘의 힘은 북녘의 힘으로 이는 우리가 한 몸이기 때문이다. 6.15시대 이후 우리는 서로 친남(親南), 친북해야 할 것으로 이번 평양 방문이 단순한 추억이 아닌 생활 속의 통일운동의 시작이 될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송사를 하고 있는 북 민화협 리충복 부회장.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객원기자]
이에 리충복 민화협 부회장은 “통일운동이 전민족적 자주통일 운동으로 전환돼야하는 이 시기에 여러분은 6.15 통일시대의 선구자다. 통일을 지향하는 모든 이들을 민족대통합이라는 원칙 하에 모두 모아내야 할 것이다. 6.15에 이미 잡은 손 놓지 않고 통일의 길에 나아가야 할 것이다”고 화답했다.

만찬 테이블에는 닭고기 잣즙무침, 돼지갈비 단즙 조림, 소발통장수곰, 강냉이곤국 등이 순서대로 나왔다.

모두들 즐겁게 식사를 하는 중, 리동혁 안내원이 방심(?)한 틈을 타 드디어 사진을 한 장 찍었다. 리동혁 안내원은 무서운 인상 때문에 사진 찍기를 싫어한다고 했는데, 내가 따뜻한 리동혁 안내원의 모습을 사진 찍겠다고 다짐하던 터였다.

밥을 먹고 있는 그의 사진을 보면서 밤낮으로 일행의 일정을 챙기느라 힘든 일정 속에서도 간간히 활짝 웃던 그의 얼굴이 떠오른다. 혹시 이 사진을 보고 그가 검은 피부에 다소 날카로운 눈빛 등을 가져 무섭게 생겼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꼭 평양에 가 그를 만나보시길... 만나고 난 후에는 분명 이 사진 속의 그가 따뜻하게 느껴질 것이라고 믿는다.

리충복 부회장은 한상렬 대표와 함께 일일이 테이블마다 돌면서 건배를 제안하고 인사를 나눈다. 각각의 테이블에서는 ‘조국을 통일하자’ ‘우리민족끼리’라는 구호를 외치며 북녘 식으로 한잔씩들 쭉 낸다.

우리 테이블에서는 두산중공업의 염주민 부회장이 창원에서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그에게 “우리 대표단이 떠날 때 창원의 여성분들은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릴 정도의 애정 어린 환송에 감동을 했다”며 “창원의 실천단들에게 수고 많았고 고마웠다고 전해 달라”고 말했다.

우리 역시 ‘조국을 통일하자’는 구호와 함께 건배를 하고는 리충복 부회장과 기념사진을 찍으며 행사는 마무리되었다.

‘우리조차도 북녘을 이해하려는 마음이 부족했구나’

▲건배사를 하는 한국진보연대(준) 한상렬 공동준비위원장.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객원기자]
허전한 마음에 양각도 호텔 로비로 나왔는데 나와 비슷한 마음인지, 우리 일행 몇이 있다. 모두 아쉽다, 서울에서 또 만나자, 뭐 그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는 이곳에서 놀라운 이야기를 하나 들었다.

한 안내원에게 ‘안내원이 따라다니며 하지 말라는 것이 많아 답답하다’는 이야기를 하니 서울도 수차례 내려와 봤다는 그가 답하길, 남녘에 내려가면 우린 방문 밖도 맘대로 못나가 숨이 턱턱 막힌다고 하더란다.

호텔에서 행사가 있다면 호텔은 물론 호텔 앞 수 백 미터를 경찰이 막아서고 있으며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도 꼭 정해진 곳에서 먹으며 남녘 일반 사람들 얼굴은 구경조차 할 수 없다고. 우리는 자유 대한민국이라고 하지만 그들은 남녘에 올 때마다 숨 막혀 질식할 것 같다고 한단다.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지난 2003년 대구유니버시아드 대회 때 우리의 이목이 집중됐던 ‘미녀 응원단’이 떠올랐다.

당시 여대생들로 구성된 북녘의 응원단은 최고의 인기를 누렸으나 일반인은 물론 나는 취재진인데도 불구하고 가까이서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

네모 반듯하게 앉아 있는 그녀들 주변에는 두 겹씩 우리 경찰들이 않아 있었고 기자 등록을 해 그나마 가깝게 가서 볼 수 있다고는 했지만 우린 운동장 바닥에서, 그녀들은 관람석에서 움직일 수조차 없어 기자들은 대화를 시도하기 위해 스케치북을 이용해야 했고 그녀들은 그 예쁜 얼굴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일반인들이 북녘 사람들을 만나기란 하늘의 별따기보다 더한 일일 것이다.

반면에 우리는 아리랑 공연만 해도 일반 북녘 주민들과 나란히 앉아서 봤고 또 김일성대학에서, 옥류관 거리에서도 수많은 일반인들을 만나고 또 그들과 함께 사진을 찍기도 했다.

우리는 “아무래도 북녘 사람들이 남쪽에 오면 극우세력으로부터 보호를 해야하나 보다”고 하며 웃었다.

자유 대한민국에서 통제 때문에 숨막혀하는 북녘 사람들, 또 북녘은 통제된 사회라고 알고 있는데 공연이 없는 날에도 우리 때문에 공연을 해주고 옥류관에서는 문 닫을 시간인데도 식사를 마련해주는 등 원하는 것을 최대한 해주려고 배려해준 안내원들 덕분에 자유로움을 만끽한 우리, 겉으로는 웃으면서도 이 상반된 상황이 참 슬펐다.

북녘 사람들이 남녘에 오면 우리가 잘해줘 마냥 좋을 줄만 알았는데,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정말 우리조차도 북녘을 알고 이해하려고 하는 마음이 부족했구나 싶다. 이제는 북녘 사람들이 남쪽에 오면 숨이 덜 막힌다고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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