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는, 지방 호족과 관련되지 않은 순수한 농민 반란이었습니다. 890년에 상주지방에서 일어난 원종과 애노의 반란, 897년에 서남해안 지방에서 일어난 농민반란은 순수한 농민반란이었습니다. 특히 897년에 일어난 반란은 동쪽으로 진격하면서 여러 고을을 점령하여 경주에 이웃한 모량리까지 쳐들어갔습니다. 이들은 모두 단결과 투쟁의 표시로 붉은 바지를 입었기 때문에 적고적(붉은 바지 반란군)이라고 불렀습니다. 순수한 농민 반란은 그 시대 농민들의 힘으로 볼 때 지역 차원에서 머무를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평민 출신인 지방 호족이 다른 지방 호족이나 농민반란군을 끌어모아 커다란 세력을 이룬 경우였습니다. 이들 중 두각을 나타낸 사람들이 견훤과 왕건이었습니다. 견훤은 원래 농민 출신으로서 각지에서 농민 반란이 일어나자 무리를 모아 농민반란군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반란은 서남지방 일대에서 큰 호응을 얻어 마침내 892년에는 무진주(지금의 광주)를 쳐서 점령하고 후백제를 세워 스스로 왕이 되었습니다.

왕건은 송악(지금의 개성) 지방의 호족이었습니다. 그는 원래 귀족이 아니었으나 당나라와 무역을 하면서 경제적 기반을 쌓은 뒤 송악을 비롯해 황해도의 연안, 배천 일대에 큰 농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용건(뒤에 `왕륭`으로 이름을 고침)은 궁예가 강원도, 경기도 일대에서 세력을 넓혀 가자 그 휘하로 들어갔습니다. 아버지를 따라 궁예의 부하가 된 왕건은 군사적인 공을 많이 세워 지위가 올라가다가 마침내 궁예를 내쫓고 고려를 건국했습니다. 왕건은 평민 출신이었지만 지방에서 경제력을 튼튼히 쌓았고, 당나라와 무역을 하면서 새로운 문물을 많이 보아 신라 이후의 사회 건설에 대한 식견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나아가 그는 지방 호족들 사이의 연합이 반드시 필요하던 그 때의 상황에서 이들을 이끌 정치력도 갖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보았듯이 신라는 삼국 전쟁 뒤 변화하는 상황에서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다가 끝내는 내용적인 통합을 이루지 못한 채 다시 후삼국으로 분열되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개혁이 부재하였기 때문이고, 하대에 이르러 등장한 6두품들의 개혁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최치원을 비롯한 6두품들의 개혁안은 기본적으로 유학의 관점에 서서 그 시대의 체제를 부분적으로만 개혁하고자 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기도 했지만, 지배층의 부패와 무능력을 폭로하고 민중의 고통에 동질성을 갖는 진보성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최치원의 진보적인 생각은 `강남녀`라는 시를 보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강남땅은 풍속도 음탕해라
       딸을 키워 아리땁고 예쁘기만 하라네
       천성이 요염해 바느질은 싫어하고
       단장 마치고 거문고만 탄다네
       우아한 곡조는 배우지 못했으니
       그 소리 온통 춘정에 이끌리네
       아름답고 꽃다운 그 맵시
       길이길이 청춘일 줄만 안다네
       이웃집 딸을 도리어 비웃나니
       아침부터 저물도록 베틀에 앉아
       진종일 땀흘려 비단을 짠들
       제 몸에야 걸어 볼 수 있을라고

이와 같은 시편은 비록 6두품이지만 귀족의 한 사람인 그가 그 시대 체제의 모순과 직접 생산자인 민중에 대한 수탈을 얼마나 날카롭게 보았는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노동이 천시 당하는 사회 현실이 얼마나 위태로운 것인지를 절감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줍니다.

그러나 6두품 출신 유학자들의 개혁 사상은 현실적인 힘으로는 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당나라를 본뜬 개혁을 생각할 뿐 신라의 구체적인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개혁의 내용을 갖지 못했고, 개혁을 뒷받침할 수 있는 정치적 세력을 만들어낼 능력도 의지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 중에서도 가장 풍부한 개혁 사상을 지니고 있던 최치원마저 개혁을 현실에 옮기지 못하고 가야산 속으로 몸을 숨기는 은둔의 길을 선택했던 것은 그들의 한계를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그들의 개혁 주장이 물거품이 되자 역사는 새로운 개혁 세력을 요구했습니다. 그 결과로 신라는 무너질 수밖에 없었고, 개혁은 새로운 왕조가 떠맡게 되었습니다. 최치원을 비롯한 6두품 출신들의 개혁 사상은 새로운 왕조가 추진한 개혁으로 비로소 실현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통해서 여러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요즈음 `개혁 마무리`라든가 `개혁 피로`라는 말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개혁을 그런 식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앞에서 보았던 역사적 사실을 통해 우리는 개혁에는 반드시 이해 관계의 대립이 함께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득권층이 바라는 개혁과 기득권층에 의해 수탈 당하던 사람들이 바라는 개혁은 같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럴 때 개혁을 담당해야 할 집권 세력이 신라의 왕권처럼 우왕좌왕해서는 안 됩니다. 더욱이 진정한 개혁 세력을 외면한다거나 개혁에 따르는 고통을 민중에게 전담시킨다면 그것은 기득권층에 의한 반격과 민중의 저항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개혁은 그 시대의 변화에 걸림돌이 되었던 수구적인 기득권 세력에 철저하게 타격을 가하는 것으로 진행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한 것이 신라 하대의 혼란을 초래했던 것이고, 마찬가지 이유로 오늘날의 이른바 개혁 피로를 낳게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될 때 역사는 새로운 개혁 세력을 요구하게 됩니다.

신라 하대는 신라 왕조가 멸망하고 새로운 왕조의 탄생을 낳았지만, 지금의 역사는 그 과정에서 민중의 피폐와 민족 공동체의 약화를 초래할 것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오늘날 개혁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왜곡된 현실은 우리를 매우 안타깝게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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