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탕평채.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객원기자]
예로부터 춘만가식(春滿可食)이라하며 봄에 먹던 음식인 탕평채(蕩平菜)는 녹두묵과 계란, 미나리, 고기 등이 어우러져 영양도 풍부하고 담백한 맛이 일품입니다.

모든 우리 음식이 그렇지만 녹두묵을 가늘게 채쳐야하고 일일이 계란 지단을 부쳐 내고 고기를 볶아내는 등 손이 많이 가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일품요리와는 달리 찬인 탕평채는 그다지 주목을 받는 음식은 아닙니다.

때문에 한정식집에서 탕평채를 보면 맛있는 집인지를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주요리가 아니라도 반찬 하나하나까지 일일이 정성스럽게 하는 집이라면 맛이 없을래야 없을 수 없다는 의미죠.

묵청포라고도 하는 탕평채는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의하면 조선왕조 중엽에 탕평책의 경륜을 펴는 자리에서 청포에 채소를 섞어 무친 음식이 나와 탕평채라고 했다하고 ‘경도잡지’에서는 녹두묵 무침을 ‘묵과 돼지고기, 미나리를 섞어 초장으로 무친 것으로 매우 시원하며 춘만가식이다’라고 전합니다.

탕평채의 유래는 조선은 선조부터 정조까지 거의 250년간 동인과 서인, 남인과 북인, 대북과 소북, 노론과 소론, 청남과 탁남, 시파와 벽파 등 사색당쟁으로 골치를 앓았던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21대 왕 영조는 무수리 최씨의 아들로 태어나 소론측이 장희빈의 아들 경종을 밀자 노론측의 도움을 많이 받아 즉위할 수 있었습니다.

1724년 경종이 게장과 생감을 먹고 집권 4년 만에 승하하자 소론은 이를 영조와 노론 측의 독살이라 주장하며 1728년 이인좌의 난, 1755년 나주 벽서사건 등으로 영조의 정통성에 내내 시비를 걸었죠.

급기야 영조는 1762년 소론과 가까이하려는 사도세자를 뒤주에 직접 가두어 죽이기까지 했고 영조는 드디어 아들까지 죽인 당쟁을 바로 잡으려고 당파를 고루 등용하는 탕평책을 실시했습니다.

탕평이란 말은 서경(書經) 홍범조(洪範條)의 ‘왕도탕탕 왕도평평(王道蕩蕩 王道平平)’에서 나온 말로 왕은 자기와 가깝다고 쓰고 멀다고 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인재등용원칙입니다.

영조는 탕평책을 논하는 자리에서 검은색과 흰색 푸른색, 붉은색 등이 골고루 섞인 탕평채를 선보이며 각각 다른 음식이 조화를 이뤄 훌륭한 맛을 내듯, 당쟁을 벌이지 말고 함께 힘을 합치라 주문을 한 것입니다.

북인은 검은색인 석이나 김 가루를 고명으로, 동인은 푸른색인 미나리를, 남인은 붉은색인 쇠고기를 볶아서 넣었으며 서인은 흰색인 청포로 상징한 것이라고 합니다.

북녘의 조선출판물수입사가 2005년 출간한 ‘민속명절료리’에서는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일명 탕평채라고 할 수 있는 녹두묵채는 예로부터 우리 인민들이 봄철에 많이 만들어 온 음식이다. 녹두묵채가 탕평채로 불리워지게 된데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오고 있다. 리조시기 부패무능한 량반 통치배들이 권력 다툼을 위한 파벌 싸움을 중지시키기 위해 일부 선진적인 량반들이 탕평책을 토의하던 장소에 차린 음식상에 녹두묵채가 올랐는데 그 맛이 하도 좋아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그 후 이 음식이 탕평책을 론의하던 장소에 올랐던 음식이라는데로부터 탕평채로 불리워졌다고 한다.”

탕평채는 흰 청포묵으로 만드는 것이 정석인데, 전라북도 군산의 한정식집에 취재를 갔더니 그쪽에서는 흰 청포묵에 ‘조’ 물을 들여 노란빛이 나는 청포묵을 선보이더라고요.

군산지역에서는 일반 흰 청포묵도 사용하지만 일부 노란 청포묵으로 만든 탕평채를 만들기도 한답니다.

올해 초 황석영 작가는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많은 사람들이 요즘처럼 심각한 국론분열이 계속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며 “개념상 불분명한 좌익·우익, 보수·진보의 구분 대신 기능적으로 나눠진 여러 정치세력이 조화를 이룬 탕평채의 정치가 돼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좌우 각자의 역할과 기능이 있는 것입니다. 서로 견제하고 밀어주면 되지요. 청포묵 무침에 검은 김, 빨간 고추, 노란 알지단 등 5색 탕평채가 그것입니다. 탕평채를 만들듯이 이 사회의 여러 극단을 화합시키고 상생시켜 역할의 기능화, 전문화를 꾀해야 합니다”고 탕평책의 정치를 강조했다고 하는데요, 저 역시 살아온 날이 많지는 않지만 세상사에 관심을 갖고 난 이후 우리 사회가 단 한번이라도 탕평채처럼 조화로운 날이 있었나, 떠올려 보면 대답을 쉽게 하지 못합니다.

굳이 하나라도 꼽자면 2002년 월드컵 응원 때 정도?

남과 북보다 남남갈등이 더욱 문제라고 할 정도인 요즘, 국민들을 바보로 아는 것인지 정치권에서 정책대결이 아닌 정말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할 때에는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우리 사회는 언제쯤이면 다시 탕평채와 같은 조화가 이루어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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