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더 버시바우 주한 미 대사가 4일 조찬강연에서 6자회담과 남북관계로 대표되는 대북 양대 트랙의 진전에 대해 '속도조율론'에 가까운 입장을 보이면서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버시바우 대사는 이날 "남북관계 진전은 2.13합의, 9.19공동성명과 조율돼야 한다"며 "병행추진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게 아니고 서로 속력을 내는데 페이스가 맞아야, 조율돼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런 발언은 외견상 그동안 우리 정부가 공개적으로 견지해왔던 '6자회담-남북관계 병행론'과 다를 바 없는 만큼 우리 측의 대북정책을 지지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하지만 이를 최근 북핵 문제를 둘러싼 정세나 남북관계의 흐름 등과 연결시켜 보면 남북관계 진전을 모색하는 우리측 내부의 움직임을 겨냥한 미국측의 '불편한' 시각이 담긴 발언으로 풀이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우리 정부를 향해 일종의 '견제구'를 던진 게 아니냐는 해석인 셈이다.

실제 정세를 보면 북핵 문제는 2.13합의에도 불구하고 방코델타아시아(BDA)의 북한 계좌 송금 문제에 봉착해 이행시한(60일)인 4월 14일을 20일 넘긴 지금도 영변 핵시설에 대한 폐쇄.봉인 조치가 이뤄지지 않은 상황이다.

반면 남북관계는 2.13합의 직후 7개월만에 대화가 복원된 이후 지난달 18~22일 경제협력추진위원회(경협위)에서는 5월말부터 쌀 차관을 제공하고 6월에는 8천만달러 규모의 대북 경공업 원자재 지원에 착수하기로 합의했다.

버시바우 대사의 이날 발언이 겉으로 드러난 이같은 양대 트랙의 속도 차이에 대한 우려 뿐 아니라 우리 정부 내의 기류 변화를 지켜보면서 나온 것일 수 있다는 시각도 제기되고 있다.

실제 2.13합의 초기조치 이행시한과 경협위 개최가 임박한 시기가 겹친 4월 초중순부터 정부 내에서 기류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했다는 전문가들의 분석도 없지 않은 상황이다.

이런 분석의 배경에는 지난 2~3월에는 정부내에 북핵 문제에 '올인'한다는 기류가 강했지만 초기조치가 시한을 넘기고 경협위 개최에 앞서 범정부 차원의 광범위한 토론이 벌어진 결과 남북관계에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는 관측이 깔려 있다.

1.4분기에는 겉으론 '병행론'이 유지되면서도 실제로는 6자회담에 남북관계가 반 보 뒤처져 따라가야한다는 논리가 지배했지만 4월 들어서는 남북 관계가 반 보 뒤처질 수도, 앞설 수도 있다는 입장이 새나왔기 때문이다.

실제 신언상 통일부 차관은 4월 5일 쌀 차관 제공 문제 등과 관련, "6자회담과 남북관계 중에 전자나 후자가 반 발 앞설 수 있지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한반도 상황의 안정관리와 남북관계 동력이 유지돼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발언 이후에 경협위 개최 여부와 쌀 차관 합의 여부를 놓고 정부 내에서 시각차가 감지되기도 했다.

특히 지난달 경협위 결과를 놓고 대북 정책 기조의 미세 조정 가능성에 무게를 싣는 분석이 많았다.

쌀 차관 40만t 제공은 정부가 북한의 2.13합의 이행 여부를 감안하겠다고 강조했다는 점에서 기존 입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지만 경공업 원자재 제공합의는 열차시험운행만 이뤄지면 북송 절차에 들어간다는 점에서 남북관계가 6자회담보다 오히려 반 보 앞서가는 사례로 꼽히기 때문이다.

이런 흐름에서 버시바우 대사의 언급이 눈에 띄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그는 특히 "한국 정부측에서도 분명히 이(페이스 조율)와 관련한 원칙을 말했고 워싱턴에서 좋게 받아들였다"며 "남북관계 진전 상황은 6자회담보다 반 보 뒤처져 가야 한다고 말했는데 이런 부분이 2.13합의를 이끌어낸 긴밀한 한미관계 구축에 중요했다"고 설명했다.

이는 지난 3월까지 뚜렷했던 우리 정부의 입장을 다시 상기시켜주려는 듯한 의도가 깔려 있는 게 아니냐는 관측을 낳고 있다.

더욱이 이날 오전 이재정 통일부 장관의 정례 브리핑 내용과 버시바우 대사간 시각 차이가 느껴졌다는 점도 눈에 띈다.

이 장관은 "남북대화의 틀은 6자회담의 틀과 병행 추진했으며 이 원칙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라며 "어느 쪽이 선(先)이냐, 후(後)냐의 문제는 그 때 그 때 상황에 따라 결정될 문제"라고 말했다.

이런 시각차는 BDA 문제가 조기에 돌파구를 찾고 2.13합의의 초기조치 이행이 가시화될 경우 해소될 전망이지만 6자회담이 추가 변수에 따라 또 정체된다면 다시 수면 위로 부상할 가능성이 적지 않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서울=연합뉴스) 정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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