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4일 광화문 촛불문화제에서 만난 남궁현 위원장.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객원기자]
‘당할 만큼 당하고 참을 만큼 참았다’ 전국건설산업노동조합연맹 사무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포스터의 문구가 눈에 확 들어온다.

민주노총 전국건설산업노동조합연맹 산하 포항건설노조원 3000여명이 임금인상, 외국인 노동자 고용금지 등을 요구하며 지난해 6월30일부터 82일간 벌인 파업은 건설노동자들의 현실을 세상에 알려줬다.

지난 2005년 6조의 이익을 내 2002년보다 3배나 더 많이 번 포스코는 한국 자본가경제의 상징, 이 기업에서 비정규 건설노동자들은 공휴일도 없이 주 70시간을 일하고 3000명이 일하는 현장에 화장실은 고작 6~7개의 이동식 화장실이었다.

샤워실, 휴게실도 없었으며 식당도 하나밖에 없어 2500명은 현장 바닥에 앉아 맑은 날엔 쇳가루, 모래먼지와 함께, 비오는 날엔 빗물과 함께 밥을 먹어야 했다.

한 달에만 20건의 산재가 일어났지만 95% 이상 은폐됐다. 주5일제 실시는 건설노동자들의 삶을 나아지게 하는 대신 무급휴일을 확대시켜 형편없는 저임금에 시달리던 건설노동자들을 생존의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노동조합을 통한 교섭을 시도했으나 노조의 ‘노’자만 들어도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경영진들은 300명을 집단해고 시켜버렸고 그들은 벼랑 끝에서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목소리를 내며 파업 투쟁을 벌였다.

국민들의 대대적인 관심을 끌긴 했지만 노조원 하중근씨가 집회 중 경찰의 폭력으로 숨지고 국내 단일 노동 파업사건으로는 가장 많은 70명이 구속되며, 200명이 불구속 입건되는 등 피해는 컸다.

이런 이유로 2004년 11월30일 전국건설산업노동조합연맹 제3대 위원장에 당선돼 건설노조를 이끌고 있는 남궁현 위원장에게 하중근 열사는 한으로 밖에 남을 수 없다. 지난해 하중근 열사 사인 규명 및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며 치열한 싸움을 벌여온 남 위원장을 지난 3일 건설노조 사무실에서 만나봤다.

이름만 들어도 속이 터지는 하중근 열사

하중근 열사 관련 투쟁의 진행상황을 물으니 남위원장은 바로 울컥 한다. 이름만 들어도 속이 터진다는 것이다.

그는 하중근 열사가 사망한 당시의 상황을 또렷이 기억을 하고 있다.

“2000여명이 참여한 그날의 집회는 평화적으로 진행됐고 김밥이랑 약을 전달해주기 위해 가족들이 찾아와 경찰과 노동자들 사이에 앉아 폴리스라인을 만들었습니다. 집회 중 민주노동당 단병호 의원과 이해삼 최고위원 그리고 저 셋이서 ‘포스코 임원을 만나 면담을 하고 오겠다’고 건물 안으로 들어간 그 사이 경찰이 집회 대오로 쳐들어온 것입니다. 아무리 모른다 모른다 해도 어쩜 협상을 하는 중에 무차별 공격을 해 사람을 죽이는 지 생각할수록 분통이 터집니다.”

국회의원까지 와 면담하고 있는데 그 사이에 때려 그 사이에 곤봉, 소화기 등을 마구 휘둘러 20명 넘게 병원에 실려 갈 정도였다. 하중근 열사는 당시 갈비뼈가 부러지고 머리와 팔 등 5군데에 상처를 입으며 뇌사 상태에 빠졌으나 8월 1일에 결국 사망을 했다.

최근 하중근 열사 사망 전부터 치밀한 부검 계획을 세운 문건이 공개돼 논란을 빚고 있는 가운데 남궁현 위원장은 부검 당시의 상황도 비교적 소상히 기억했다.

“가족들은 노동조합도 싫고 열사도 싫다며 3일장을 치루겠다고 했는데 그걸 말리느라 힘이 들었습니다. 진상규명 등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장례를 치룰 순 없죠. 또 부검 장소부터 의사 선임, 가족입회 여부 등 모든 것에서 검찰과 민주노총의 갈등이 있었습니다. 결국 포항병원에서 가족의 입회하에 검찰과 민주노총 양측의 의사가 부검을 하기로 했습니다.”

정황상 경찰에 의한 사망 맞지만 검찰의 수사 필요

부검 결과 검찰과 민주노총 양측의 의사 모두 사망원인으로 왼쪽 귀 뒤의 둥근 상처를 지적, 외부의 충격을 꼽았다.

검찰 측의 부검의의 진실한 목소리를 듣기 위해 매달리는 남궁현 위원장에게 그는 비공식적이지만 비유를 들어 “어쨌건 경찰의 집단 폭력으로 사망을 했다”고 말했단다.

“당시 그 의사는 가령 몸이 쇠약해 누워있는데 강도가 쳐들어와 그 순간 놀래 죽었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것은 법의학적으로 타살입니다. 또 인도에 서 있다가 대형트럭이 지나가는 소리와 바람 등에 놀라 쓰러져 사고가 나면 그것은 직접 치진 않았어도 교통사고입니다. 어쨌거나 3~5분간 지속된 경찰의 물리력에 의해 사망을 한 것이면 정황상 경찰에 의한 사망이 맞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검찰 측의 국과수 의사는 ‘충격에는 동의하나 넘어져서 다친 것인지, 맞은 것인지는 못 봤기 때문에 알 수 없다. 여러 가지 정황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검찰의 수사가 필요하다’고 소견서를 썼다.

이후 포항건설노조, 민주노총, 민주노동당, 민중연대, 인권단체 등은 ‘포항건설노조 노동권 보장을 위한 공대위’를 꾸려 △하중근 열사의 사망원인을 밝히고 △대통령의 사과와 경찰 등 책임자를 처벌하며 △향후에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정부차원의 재발방지책을 마련할 것을 요구했다. 8월 16일과 17일 사이에는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판단, 청와대 앞 광화문 열린시민공원에 천막을 치고 3개월에 걸친 농성을 진행했다.

전영국 변호사, 민중연대 박석운 소장과 함께 목격자 진술, 사진체증 등을 담은 현장 조사서도 발간, 경찰과 검찰, 총리실, 노동부 등에 제출하며 기자회견을 갖고 인권위에 제소까지 했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밑바닥 인생

인권위에서 3일간 포항에 실사를 나와 △집회신고를 낸 것을 경찰이 임의로 불허한 것은 잘못했다 △경찰의 시위 진압 과정이 강경했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느 사병이 가격을 한 것인지는 추가 경찰 조사가 필요하며 밝히지 못할 시 검찰의 조사가 필요하다고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검찰청은 공식적인 답변 하나 없이 무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는 상황이다.

하중근 열사의 가족들은 지난해 말 민주노총 권영국 변호사를 담당변호사로 해 국가 배상을 요구하며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제소 건으로 검찰은 2월 경 현장에 단한차례의 조사를 나왔고 이후는 또다시 무대응이다.

건설노조 측은 현재 16일 사고일을 기점으로 한달에 한 번씩 ‘하중근 열사 진상규명을 위한 공동행동의 날’을 진행하고 있다.

시도단위의 검찰과 경찰청 앞에서 집회나 1인 시위를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요구안이 수용될 때까지 끝까지 투쟁을 할 예정이다.

“하중근 열사와 관련한 투쟁을 위해 정말 많은 사람을 고생시켰는데도 해결을 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하중근 열사가 건설노동자가 아니고 돈 있는 사람이었어도 지금과 똑같은 상황 이었나 생각이 듭니다. 살아서도 밑바닥 인생을 살았는데 죽어서도 아무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가장 안타깝습니다.”

건설노동자는 비정규직의 ‘비’자도 못돼

살아서도, 죽어서도 밑바닥 생활을 하고 있다는 건설노동자들은 현재 어떤 상황일까? 남궁현 위원장은 건설노동자 중 정규직은 단 한명도 없고, 비정규직의 ‘비’자도 되지 못한다고 말한다.

건설노동자들은 새벽인력 시장에서 소개업자를 통해 일거리를 찾거나 ‘반장’ ‘오야지’ ‘십장’ 등으로 불리는 팀장을 중심으로 5~10년 씩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때문에 날품팔이로 불리는 일용직으로 의료보험을 비롯한 4대 보험은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는 불법 다단계의 악구조 때문이다. 건설산업기본법에는 원청이 공사를 수주해 전문 건설업체에 하청을 줘 시공을 하도록 되어 있어 다단계 하청구조는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현실은 서류를 조작해 재하청에 재재하청까지 6~7단계의 다단계 하청을 주기 때문에 가장 밑바닥에 있는 건설 노동자들은 고혈을 빨릴 수밖에 없단다.

“단속을 하더라도 ‘그냥 우리 직원이다’고 얼버무리면 그만입니다. 불법 다단계 하청을 받아 단가를 맞추려면 노동자를 짜내는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작년, 제 작년에는 건설부를 다니며 ‘제발 법대로 하자’고 요구했으나 건설부는 워낙 다단계 구조에 붙어먹고 사는 업체도 많고 관행이라 어쩔 수가 없다고 하더군요.”

오늘도 어느 곳에서 2명의 노동자가...

불법 다단계 하청구조는 또한 노동자들의 안전문제에도 빨간 불을 켜고 있다. 공사 단가를 맞추기 위해 노동자들의 안전을 위한 투자를 거의 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느 공사 현장이나 ‘안전제일’ ‘무사고 ×일’ 등 말로는 안전을 강조하지만 기업들이 노동자들의 안전에 돈을 쓰는 것에는 인색합니다. 안정장치 시설 설비를 추가하는 것은커녕 가장 기본적인 안전모와 안전화 등도 서류상에는 A급을 사용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가짜 영수증을 제출하고 저가의 B나 C급 제품을 쓰고 있습니다. 이런 안전 불감증으로 건설 노동자들은 1년에 700~800명이 사망을 하고 3만명이 다치고 있는 실정입니다. 오늘도 어느 현장에선가 2명의 노동자가 죽었을 겁니다.”

임금체불도 건설노동자들이 겪어야하는 전형적인 문제다. 3월에 주 5일 근무제로 20일을 일했다고 하면 일당제이기 때문에 20일 분의 월급이 나오는데 1/2은 4월 말에야 나오고 나머지 1/2은 4월에 일한 몫의 1/2와 함께 5월에 준다고 한다.

또한 하청회사의 재정 상황이 불안정한 경우가 많아 그나마도 받을 수 없는 상황이 많다는 것.

이 외에도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 붕괴 후 부실시공을 없애기 위해 ‘시공참여자’라는 이름으로 현장 노동자의 이름을 기록, 보관하는 제도도 건설노동자의 발목을 잡고 있다.

부실시공을 없애자는 처음의 취지대로라면 너무 좋은 것이지만 시행 후 몇 년이 지난 지금은 사용자의 로비에 의해 조금씩 바뀌어 2~3년 전부터는 하도급 업체가 시공 참여자라며 안전관리, 임금, 보험 등을 사용자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그동안 팀을 만들어 일을 하는 노동자들의 대표 격인 십장들에게 건설업 면허를 따도록 하고 하도급 계약서를 쓰지 않으면 일을 주지 않는 사례도 있습니다. 건설부 담당자들도 ‘그런 피해 사례가 있을지 몰랐다’고 할 정도입니다. 시공참여자제도를 없애는 건설산업기본법 개정안이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데 아직 논의조차 되지 못했습니다. 유럽은 원청이나 전문 업체가 건설노동자들을 직접 고용합니다. 우리도 그렇게 되는 것을 목표로 싸우고 있습니다.”

모래알 모으기

이런 열악한 상황의 건설노동자들을 결집시키는 일을 남궁현 위원장은 ‘모래알 모으기’라고 표현한다. 일반 노동조합 등은 사업장을 기반으로 조합원들을 조직해내지만 일용직이 대부분인 이들은 공사가 끝나면 또 다른 공사 현장으로 옮겨 다니면서 일을 하기 때문에 일일이 공사 현장을 찾아다니면서 조합원을 만들어야 한다. 또 조합비도 일반 노동조합은 원천징수를 할 수도 있지만 이들은 그조차도 어렵단다.

조합원이 몇 명이나 되냐는 질문에 남궁현 위원장은 “2만에서 2만5000정도”라고 말한다.
조합비를 한 번이라도 낸 사람은 그보다 훨씬 많지만 워낙에 어려운 살림들을 꾸리다보니 조합비를 제대로 낼 수 없는 사람도 많아 지난해 민주노총의 맹비로는 1만여 명분 밖에 내지 못했다며 웃는다.

이런 상황이니 지난해 대구경북지역의 건설노조의 파업은 더욱 대단한 일이라는 것이 남궁현 위원장의 설명이다.

지난해 6월 1일 시작된 대구 경북 지역의 건설노조 파업은 목수 등 팀반장급 300여명이 모여 소장을 찾아다니며 교섭을 진행한 것으로 파업은 한 달이 넘도록 지속됐다.

“지난해 대구의 건설노조 분들은 파업을 시작하며 현장에서 일하는 기업 모두 와 교섭을 하라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콧방귀도 안 뀌던 기업들이 파업을 지속하며 싸우자 이후 10여 곳이 교섭을 해왔습니다. 우리도 뭉쳐서 싸우면 된다는 인식을 심어준 것으로 지역 노조가 결성되고 전국의 교섭단위를 만드는 하나의 전기를 마련한 것입니다.”

싸울 수밖에 없어 싸운다

대구경북지역 건설노동자들의 투쟁은 건설노조 조합원들은 물론 비조합원들에게도 큰 힘이 됐다. 최근 현장을 직접 찾아다니며 조합원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새벽인력 시장에서 만난 노동자들이 조합원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여긴 안 싸우냐?”고 말할 정도라고.

“노조 간부들끼리 모여 우리가 왜 싸우는 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어요. 그때 내린 결론이 바로 ‘우리가 싸울 수밖에 없는 처지이기 때문에 싸우는 것이다’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싸우다보면 처지가 바뀔 것이라는 기대가 있기 때문에 희망을 가지고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검찰과 경찰, 자본가들은 이런 건설 노동자들을 아직도 폭력 세력일 뿐이라는 시각으로 본다는 것이 남궁현 위원장의 설명.

지난 2월 대구지검 포항지청이 발간한 ‘포항건설노조 파업투쟁 수사결과 보고서 대외비 문건’에서는 ‘반실업 상태인 건설일용노동자의 조직화는 이후 심각한 사회불안 요소가 될 수 있으므로 이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다’고 보고하고 있다.

“우리 건설노동자들을 한낱 폭력세력으로 보는 것이 아닙니까? 아이들이 자라면 앞으로 90% 이상이 노동자로 살 텐데, 노동자가 뭔지조차 모르다니요. 어렸을 적부터 사측과 노조 측 등으로 서로 나눠 모의 교섭도 해보고 학교에서 왜 노조를 해야 하는 지 등 노동관련 기초 교육을 해야 노동자를 보는 시각이 바뀔 것입니다. 그래야 20년 후에는 노동자 탄압은 없어질 것이며 일한만큼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일당 포기하며 참가하는 한미FTA 집회

최근의 한미 FTA 투쟁과 관련한 질문을 하니 남궁현 위원장은 “이미 건설과 설계 쪽은 개방이 다 되어 있는 상황”이라고 입을 연다. 그러나 이번 FTA 체결로 건축기사, 토목기능사 자격증 등 면허를 상호 인정하는 쪽으로 가닥이 잡힌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지금도 그렇긴 하지만 이번 한미FTA 체결로 미국의 건축기사가 우리나라의 건설현장에 들어와서 일하는 것이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더욱 심각한 문제는 수도권의 60~70%, 지방은 20~30% 등 건설현장의 상당수를 외국인 노동자들에 의해 잠식당해 일거리가 줄어드는 것이다.

특히 올해는 방문 취업제로 더 많은 사람들이 들어올 텐데 걱정이 앞선다고.

“지난 10년 간 아파트 분양가는 5~6배가 올랐지만 건설현장 노동자들의 임금은 하나도 오르지 않았거나 오히려 내렸습니다.”

하루 일당을 포기하면서도 집회에 참여하는 노조원들에게 큰 고마움을 느낀다는 남궁현 위원장. 건설 쪽에는 이미 개방이 돼 큰 영향은 없다지만 얼마 전 한미FTA 반대 집회의 자유발언 시간에 한 경제학자가 나와서 “FTA 체결을 저지하자고 민주노동당, 노조, 시민 사회단체 등에서 이야기 하고 있지만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다. FTA가 체결되면 농민, 영화인, 제약산업 관련자 등 부문별로 큰 피해를 입는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나머지는 괜찮다는 것이 절대 아니다. 김영삼 전대통령이 OECD를 가입할 당시 가입만 하면 더욱 살기 좋을 것이라고 했는데 체결 이전에 7~8%되던 경제 성장률이 지금은 4~5%대로 떨어졌다. 그러나 한미FTA 체결 후에는 반드시 1~2%대로 떨어질 것이라고 확신한다. 누구는 손해고 누구는 괜찮다하는 차원이 아니라 그 피해가 모든 국민들에게 돌아간다”고 했던 말이 기억에 남는단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건설노조의 생존권 싸움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한미FTA 관련 투쟁도 중요하다는 것. 앞으로 한미FTA 무효화 투쟁 등에도 적극 나설 생각이라고.

돈이 중요하지만 사람 사는 게 그게 다는 아냐

통일과 관련한 생각을 묻자 남궁현 위원장은 금강산에 갔던 경험을 들려준다. 금강산의 산과 물이 좋은 것은 설명을 하지 않아도 잘 알 테니 따로 말을 하지 않겠다며 운을 뗀 그는 당시 철도공사를 진행하고 있었는데 남측에는 각종 장비가, 그러나 북측에는 아무 장비 없이 어린 사병들이 잔뜩 붙어 일을 하고 있었다. 또 남측에는 각종 모텔, 상가 등이 즐비한데 북측에는 벌거숭이 민둥산이 있을 뿐이며 온정리 마을에는 지은 지 20년 쯤 돼 보이는 건물들이 있었던 것이 인상적이었다.

건물을 보더라도 우리는 새로 지은 건물들이 많은 데 비해 북측 건물이 오래된 것은 전쟁 직후 북측의 재건이 훨씬 빨랐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는 것이 남궁현 위원장의 설명이다.

“30살 전후의 북측 안내인과 얘기를 나눠보니 6.15공동선언도 실현됐는데 왜 통일이 안 되는 거냐고 질문을 해 당황하기도 했습니다. 경제문제도 중요하긴 하지만 사람 사는 데 돈이 전부는 아닐지 언데 남쪽은 너무 돈만 생각하고 북쪽은 또 너무 외면을 하는 듯해 잘 조화돼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난 1978년 삼환기업에 입사해 91년부터 17년간 노조 활동을 하면서부터 지금까지 건설노동자와 함께하고 있는 그는 △불법다단계 하청을 하지마라 △건설 노동자 쿼터제 마련 등 외국인 노동자들이 들어오는 것에 대한 대책마련 △법 개정 등을 통해 특수고용노동자의 노동 3권 쟁취 등 노조활동의 보장 등을 건설노동자가 해결해야할 과제로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사람 좋아 보이는 남궁현 위원장과 인터뷰를 하는 동안 내내 그동안 인터뷰를 다닌 어떤 단위보다(거의 이주노조만큼) 어려운 상황이 아닐까 싶었다. 또한 그의 말대로 하중근 열사도 이들 못지않게 외롭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뿐이다. 2007년, 새 세기를 살고 있는 지금 아직도 ‘샤워시설, 화장실을 만들어 달라’고 외치고 인간답게 살기를 바라며 절박하게 싸우는 건설노동자들이 이제는 비정규직의 ‘비’자도 못되는 상황에서 벗어나길 바래본다.


<남궁현 위원장 약력>
1978년 삼환기업 입사
1989년 전국건설노동조합 창립 발기인
1999년 삼환기업노동조합 제5대 위원장 취임
1999년 삼환기업 194명 정리해고에 맞선 100일 파업
2001년 삼환기업 연봉제 저지를 위한 49일 파업
2001년 민주노총 제1기 노동대학 졸업
2007년 (현)전국건설산업노동조합연맹 위원장


이 인터뷰 기사는 추모연대 기관지 <열사회보> 3, 4월호와 함께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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