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KAL858기 폭파사건 범인으로 사형을 선고받고 사면된 바 있는 김현희 씨가 미국으로 망명했다고 일본 주간지 '슈칸분슌(週刊文春)'이 보도했다.

또한 일본 일간지 '니깐 겐다이(日刊現代)'는 김현희 씨가 미국으로 망명을 신청 중이라며,  아이들이 7살, 5살인데 테러분자의 자식으로서 성장하는데 많은 불편함이 있다고 보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의 일부 방송사에서도 유사한 내용을 내보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짐에 따라 귀추가 주목된다.

▲ 일본 주간지 주간문춘 4월 12일호가 김현희 씨의 미국 망명을 보도했다. 사진은 주간문춘 인터넷 사이트. 좌측 하단에 해당 기사가 실려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슈칸분슌 4월 12일호 인터넷판에는 '김현희가 아메리카에 망명하였다!'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내보냈다.

YTN은 슈칸분슌을 인용해 김현희 씨가 지난 2월 말부터 3월 초 사이에 남편과 두 자녀와 함께 극비리에 미국으로 망명했고, KAL858기 사건 재조사에 대해 증언하도록 집요한 압력을 받아 망명을 결심하게 됐음을 미국 정보기관에 밝혔다고 보도했다.

또한 김현희 씨와 가족은 현재 신변 안전을 위해 미국 CIA(중앙정보국)의 보호를 받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나 국가정보원 관계자는 김현희 씨의 망명설에 대해 "김현희는 여기(국정원)서 보호하는 인물이 아니기 때문에 확인해줄 입장에 있지 않다"는 입장만 밝혔으나 '망명 신청중'이라는 보도에 대해서는 "모르겠다"고 답했다. 

국정원 안강복 기조실장은 지난해 8월 1일 국정원 발전위 'KAL858기 폭파사건 조사결과 중간 발표'시 "김현희 연락처나 주소가 외부로 공개되면 과거 이한영 사건처럼 김현희의 신변안전이 위협받을 수 있고 법률적 문제 때문에 주소 공개 어려운 점이 있다"며 "김현희 스스로 면담을 거부하고 있지만 김현희 진술이 진실규명에 중요한 의미 갖고 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설득해서 면담이 성사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한 바 있다.

기자와의 통화를 가진 전문가들이나 관계자들은 대체로 '슈칸분슌'의 기사에 대해 신빙성을 낮게 부여하고 있지만 만의 하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견해도 있다.

KAL858기 사건을 소재로 소설 『배후』(도서출판 창해, 2003)를 출간했던 서현우 작가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며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미국 CIA가 이 사건에 깊숙이 개입됐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현희 씨는 115명의 인명을 앗아간 비행기 폭파범으로 유죄를 선고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면받아 일부 유족들의 거센 항의를 받기도 했다.

국정원 발전위는 지난해 8월 중간 발표문을 통해 [안기부는 김현희를 1989.2.3 검찰에 기소하기 전인 1988.11 외무부, 문공부, 검찰 등 관계기관과 사법처리 방안을 협의, 김현희를 "KAL기 폭파 만행의 산증인으로서의 활용가치 등을 고려, 살려서 활용한다는 원칙 하에 <불구속 송치 - 불구속 기소 - 재판 회부>의 순서로 처리하되 엄격한 공개 심리 재판을 거쳐, 실형 확정과 동시에 구제, 활용한다는 방침을 결정"하였음을 확인하였음](24쪽)이라고 밝힌 바 있다.

또한 [진실위의 조사 활동에도 불구하고 김현희가 특별한 이유 없이 면담을 거부하고 있어 김현희의 진술을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는 의혹과 비행기 폭파에 사용된 폭발물 등 일부 의혹들에 대한 조사가 마무리되지 못하고 있는 상태임](국정원발전위 중간 보고서, 93쪽)이라고 전해 김 씨를 산증인으로 살려두고도 재조사를 위한 협조를 얻어내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내야만 했다.

당시 김현희 씨는 국정원발전위 측의 조사요청에 대해 '배신감'을 토로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창호 국정원 발전위 위원은 "과거 국정원이 호의적이었던 시절에 대해서 지금 달라진 모습에 대한 배신감, 국정원에서 이런 위원회를 만들어서 재조사하겠다는 것에 대해서 배신감, 두 가지 배신감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지 않았나 본다"며 "저희의 힘으로는 더 이상 쉽게 풀 수 없는 문제라고 판단, 여러 경로를 통해 면담에 응하지 않을 수 없도록 압박을 가할 계획"이라고 '통일뉴스'에 밝힌 바 있다.

주간문춘(週刊文春) 4월 12일호 기사(전문 번역)

<김현희가 미국에 망명했다! '국제특종' >

박승민(주간문춘 서울 특파원)

“올해 2월말부터 3월초 사이에, 그녀는 남편 그리고 두 아이들과 함께 극비리에 미국에 망명했다”

'그녀'는, 1987년에 일어났던 대한항공기폭파사건의 실행범으로, 전 북한공작원 김현희(45세). 망명 정보(소스)는 미국의 소식통으로부터 입수했다.

김현희는 사건의 재조사에 대한 '증언의 압력'을 집요하게 받았던 것을, 망명의 동기로서 미 정보기관에서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 김현희와 그 가족은 신변안전을 위해 미 CIA의 보호아래 있다고 한다.

최근 몇 년간, 한국에서는 대한항공기폭파사건의 피해자가족회 등을 중심으로, '사건은 국가안전기획부(현.국가정보원)의 모략(날조)이었다' 라는 의혹이 무성하게 제기되고 있었다.

이 같은 소리(제기)를 받아들여, 2005년 2월부터 국가정보원직원과 민간인으로 구성된,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이하 진실위원회)가 만들어져 사건의 재조사를 하고 있다.

김현희는, 그 재조사의 과정에서 증언 요청을 받았지만, 위원회의 요청을 거부하고, 일체 외부에 나오려고 하지 않았다.

진실위원회의 오충일(吳忠一)위원장은 "김현희에게 증언요청을 몇 번이나 했지만, 강경하게 계속 거부하고 있다. 올해 10월까지 조사기간이 아직 남아 있어서 여러 방법으로 설득하려고 한다. 우리는 그녀의 증언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오위원장은, 김현희의 미국 망명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고 일소에 붙였지만, 김현희가 진실위원회로부터의 거듭되는 증언요청에 고통스러워했던 것은 사실이다.

진실위원회는, 김현희로부터 증언을 얻기 위해 여러 루트를 통해, 약 10여 차례의 면담신청을 했다. 김현희가 기독교신자인 것을 감안해, 신부 앞에서 비밀리에 가지는 '신앙고백'의 형태로 증언을 청취하려고 시도해 보았지만, 김현희는 그 제안조차 거부했다고 한다.

경위는, 진실위원회가 만들어지기 약 2년 전의 2003년 11월, 한국의 민영 TV방송국이 사건의 진상을 추적하는 다큐멘터리에서, 김현희와 가족이 살고 있는 아파트를 방문해, 접촉을 시도하려고 했다.

이 보도를 계기로, 그녀는 "국가정보원이 자신의 신변보호를 약속했음에도 배신했다"고 반발하며, 언론을 포함한 외부에 완전히 모습을 감추고 말았던 것이다.

실제 2004년 2월, 북한에서 김현희에게 일본어 교육을 담당했던 납치피해자의 다구치 야에코(田口八重子.북한명 이은혜)의 아들인 이이츠카(飯塚耕一郞)씨가, 외교루트를 통해서 면회를 희망하는 편지를 그녀에게 보냈다. 그렇지만 정보기관이 편지를 전해주려고 접촉했을 때, 편지 받는 것조차 거부했다고 한다.

김현희의 증언을 청취하지 못한 상태에서 진실위원회는 작년 8월1일, 재조사의 중간보고를 발표하고, 사건은 '북한의 공작원에 의한 테러임이 틀림없다'라고 함으로써 안기부에 의한 모략(날조)설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당시의 전두환 정권이 사건을 대통령선거에 이용했다'라고 지적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김현희에 대한 대면조사를 가질 것'이라고 했다.

사건은 87년 11월29일에 일어났다. 승객- 승무원 115명을 태운 대한항공 858편은, 이라크의 바그다드공항을 출발, 아랍에미리트연방(UAE)의 아브다비를 경유해서 서울로 향하는 도중, 미얀마 영해의 안다만 해상 공에서 폭발, 전원 사망했다.

실행범은 아브다비에서 비행기를 내린 남녀 2인조로, 남자는 공항에서 독약을 복용하고 자살했지만, 여자는 체포되었다. 그 여자가 김현희였다.

김현희는 89년에 사형판결이 내려졌지만, 다음해에 특별사면을 받았다. 그 무렵부터, 사건의 피해자가족회 등을 중심으로, 처음부터 특별사면이 결정되어 있었지 않는가? 하는, 안기부와 김현희의 '밀약설'과, 사건은 안기부의 모략이라는 설이 나오기 시작했다.

김현희의 수사를 담당하고, 특별사면 후에도 그녀의 경호(관리)책임자를 역임했던 안기부 OB인 K씨는 이전에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김현희는 '범인인 자신이 대한항공기를 폭파시켰다고 증언하고 있는데도, 왜 모략이라고 말하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 후, 김현희는 97년에 자신의 보디가드였던 전 안기부의 정명우씨와 결혼해, 2000년에 장남, 그 2년 후에 차녀를 낳았다.

정씨는, 결혼 후 98년부터 99년에 걸쳐, 친가가 있는 경주시에서 일본음식점(일식)을 경영했지만, 그다지 잘 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이 원인이었는지, '김현희는 책 인세와 강연료 등으로 받았던 돈(약 1억엔)이 거의 없어져, 일시 부부사이가 좋지 않다'고 하는 소문도 흘렀다.

김현희는 결혼 후, 개명도 했다. 성씨인 김(金)은 그대로였지만, 이름을 바꾼 것이다. 동시에, 남편 정씨도 개명을 해서 성씨를 김으로 바꿨다고 한다.

이 김현희의 새로운 이름은, 전술의 K씨가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K씨는 김현희가 한국생활에서 처음으로 사랑을 느꼈던 상대라고 전해지고 있다.

다음은 2001년 초에 남편 정씨와 전화 통화했을 때 주고받은 것이다.

- 작년, 아들이 태어난 것 같은데 김현희씨의 소감을 듣고 싶다.

"아직 그 같은 시기가 아니다. 앞으로(김현희가) 그런 것(아이를 낳은 소감)을 말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우리들 가족은) 지금 행복한 생활을 보내고 있다.”

- 김현희씨가 개명한 것은 사실인가. 새로운 이름을 알려 줄 수 없겠는가.

"(그것은) 민감한 문제다. 우리들의 신변문제(신변위험)와 직결되기 때문에 말할 수 없다. 언론 등이 불법으로 호적을 조사하기도 해 정보기관측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정씨는, 그 때는 무역관계의 일을 하고 있다고 대답했었다. 그렇지만, 그 후의 동정은 거의 전해지지 않고 있다.

최근 들어 김현희는 아이들이 성장함에 따라, 어머니가 대한항공기 폭파사건의 테러리스트였다고 하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극도로 민감해하고 있다고 한다. 두 아이들은 올해로 일곱 살과 다섯 살이 된다.

김현희는, 아이들이 초등학교와 유치원에 다니는 모습을 보면서, 한국을 떠날 결심을 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 김현희가 '망명지'로써 선택한 것은, 이전에 자신이 일으켰던 사건을 계기로 북한을 '테러지원국가'라고 지정한 미국이었다.

올해 들어와서, 미국은 북한에 대한 금융제재를 완화하고, 6자회담에서도 북한측의 주장을 수용하는 등, 급속하게 대북한 강경노선을 전환시키고 있다.

북한의 전 테러리스트를 받아들이는 것도, 그 같은 국제관계의 변화가 영향을 미친 것인가.

한국의 중앙일보에 의하면, 금년 3월 8일, 북미실무그룹을 위해서 약 6년 반 만에 방미한 북한의 김계관 외무차관은, 귀국 도중 경유지인 나리타공항에서 "테러지원국 문제는 이미 미국과 합의한 문제다"라고 발언했다고 한다.

기자가 입수한 정보가 맞는다면, 김현희의 '망명'은 그 바로 직전이다.

그 때, 미국과 한국정부와의 사이에서 어떻게 말이 오갔는지는 확실치 않다.

현재도 김현희의 소재를 파악하고 있는 입장의 국가정보원에, 망명의 진의를 질문했다.

"김현희씨는 일반시민이기 때문에, 국가정보원이 확인할 입장이 아니다. 이것이 국정원의 공식적인 입장이다."

기구한 운명을 걸어온 김현희가, 향후 공적인 장소에 모습을 나타내는 일은 없을 것인가.

<번역 - 유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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