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우 (사진가, www.siwoo.pe.kr)

평화활동가이자 사진작가인 이시우 씨가 지난해인 2006년 6월1일부터 '한강하구'에 대해 천착하기 시작해 그간 비정기적으로 다음과 같은 순서로 연재를 해 왔다.

1. 한강하구의 근본문제-관할권
2. 정전협정의 한강하구 규정에 대한 해석
3. 한강하구에서의 민용선박 항행에 관한 규칙 및 관계사항에 대한 해석
    (1953. 10. 3. 군정위 제22차 회의 비준)
4. 한강하구의 비행과 ‘100톤급 바지선’
5. 한강하구 항행의 역사-시선배와 수인선
6. 한강하구 군사사① - 대몽전쟁시기
7. 한강하구 군사사② - 병인,신미양요
8. 한강하구 군사사③-한국전쟁기
9. 한강하구의 갯벌과 간척

그리고 이번에 마지막으로 <10. 한강하구 숲의 역사>를 연재한다. 원래 연재 계획에는 <11. 한강하구와 전쟁의 생활사-양민학살>, <12. 한강하구의 유라시아 지정학> 등 두 꼭지가 남아 있지만 작가는 이를 '차후의 과제'로 남겨두기로 했다. 장기간에 걸쳐 많은 분량의 원고를 쓴 저자께 격려와 함께 감사를 드리면서, 독자 여러분의 성원을 기대한다.

이번 <10. 한강하구 숲의 역사>도 다음과 같은 순서로 10차례에 걸쳐 연재한다./편집자 주

(1)들어가며/고대 한강하구의 숲/신석기시대 한강하구의 숲
(2)
고조선(청동기)시대 한강하구의 숲/점토대토기문화/고조선의 의식주와 숲
(3)
고조선(철기시대) 한강하구의 숲
(4)
백제시대 한강하구의 숲/고구려시대의 숲/신라
(5)
고려시대 한강하구의 숲
(6)
조선시대 한강하구의 숲 /석회/화약/광업
(7)
병선/땔나무/식목/금벌
(8)
일제기 한강하구의 숲
(9)
한국전쟁 이후 한강하구의 숲
(10)
한강하구 숲의 미래/녹색댐/숲의 공적소유화/한강하구 통일의 숲 가꾸기/유엔사와 한강하구 숲


병선

염초와 같이 전쟁 때문에 나무의 소비가 급증한 분야가 있었으니 그것은 병선이다. 고대유럽에서도 숲의 대규모 벌채가 시작된 것은 포에니전쟁(기원전3-2세기 로마와 카르타고의 전쟁)때부터였고 주로 선박을 건조하기 위한 것이었다(삼림의역사, 미셀드베즈, 중앙일보,1978, p25).

선박을 만들기 위한 우량수종의 벌채와 시선배등이 실어 나르던 엄청난 양의 땔나무의 벌채는 숲을 황폐화시켰고 황폐지는 숲에 비해 244배의 토사를 유출했다. 결국 강에는 토사가 쌓여 강바닥을 정기적으로 준설하지 않으면 안되는 수참제도를 불러왔다. 배를 만들기 위해 베어버린 숲이 강에 토사를 뱉어내어 배가 다닐 수 없는 강을 만든다면 이같은 역설이 또 어디 있겠는가?

잠시 기원전후 로마의 이야기를 돌아보자. 테베레 강의 주요지류들 근처의 언덕기슭에서 벌목꾼들이 베어낸 나무로 로마의 목재수요를 상당부분 충족시켰다. 이처럼 물 가까운 곳에서 나무를 베어내면 운송은 편했지만 엄청난 토사가 물길을 따라 하류로 내려갔다. 결국 하구에 토사가 쌓이는 바람에 오스티아항구에는 더 이상 큰 배가 들어올 수 없게 되었다. 큰 배들은 대신 바깥 바다에 정박해야 했는데, 상품을 싣고 로마로 오가는 작은 배들에 짐을 내릴 때는 파도가 큰 위협이었다.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옛 항구에서 북쪽으로 2마일 떨어진 곳에서 새 항구를 건설함으로써 상황을 개선하려 했다. 기술자들은 수심을 깊게 하기 위해 200에이커를 움푹 파낸 다음 바다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커다란 방파제를 두 개 건설했다. 그러나 새 항구를 테베레강 어귀에서 충분하게 떼어놓지 않은 것이 실수였다. 해류에 의해 토사가 밀려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새 항구는 침적물로 메워져 새 항구는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다(숲의서사시, 존펄린, 따님출판사, 2002, p123). 그나마 한강하구가 테베레강이 되지 않았던 것은 그 거대한 크기와 규모 때문이었을 것이다.

비변사등록에 따르면 숙종조에 병선은 총 135척이었다. ‘삼남 전선(戰船)의 원 수자는 1백 24척이고, 각각 병선(兵船),방패선(防牌船)이 있는데 이것도 11척에 달합니다. 합하여 계산하면 병선의 수는 1백 35척입니다.’ 한편, 경강 즉 한강을 운행하던 민간선박은 작은 배를 제외하면 80척이었다. ‘경강의 큰 선박이 지금 현재 도합 80척이다.’(정조37권17년1월11일(을사)원전46집371면)

태종에게 충청도 경차관 한옹이 상언하기를 “근래에 병선을 만드는 일로 인하여 소나무가 거의 다 되었으니 비옵컨대, 각도의 각관으로 하여금 소나무가 성장할 수 있는 산에 불을 금하고, 벌채를 금하며, 매양 정월을 당하면 친히 감독하여 소나무를 심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태종07/04/07(신묘)원전1집389면).

병선제조를 위해 쓸 만한 소나무가 나라에 거의 바닥났다는 위의 기사는 조선시대 소나무 소비의 제일순위는 병선제조였으며, 이것이 소나무보호정책의 최고전제였다.

세종의 왕세자가 서연에서 강하는데 윤참관 이조판서 박안신이 아뢰었다.

“왜를 막는 방책은 전함이 제일이온데, 배를 만드는 재목은 반드시 백년을 기른 연후라야 쓸 수 있는 것입니다. 소나무를 베는 것을 금하는 법이 육전에 실려 있사오나 받들어 시행하는 관리가 문구로만 여기니 바라옵건대 각 도로 하여금 심어 가꾸게 하고 엄하게 고찰을 더하여 후일에 쓸 수 있도록 하게 하옵소서. 왜를 제어하는 방책이 이보다 나은 것이 없사오니 원컨대 유의 하시옵소서“ 세자가 말하기를 “이미 알았노라” 하였다(세종26/01/26(병자)원전4집538면/수군자료1집p481재인용).

세종 당시 경기인근에서 소나무의 제일산지는 강화도였다. 의정부에서 병조의 첩정에 의거하여 여러 섬과 각 곶의 소나무가 잘되는 땅을 방문하여 작성한 기록에 의하면, 경기도의 송림은 다음과 같다.

강화부의 금음북今音北, 미법도彌法島, 말도末島, 정포井浦, 이북의 망산網山, 남건동을산南巾冬乙山, 사도蛇島
교동현의 서빙장곶西憑將串
통진현의 고리곶古里串, 대명곶大明串, 어모로於毛老
인천군의 자연도紫燕島와 용류도龍流島
부평부의 문지도文知島와 보지곶甫知串
안산군의 오질이도吾叱耳島
남양부의 선감미仙甘彌, 대부大部, 연흥鷰興 세 섬과 거재곶巨才串
수원부의 둑삼곶纛三串, 형두산荊頭山, 홍원곶弘原串, 광덕성산廣德城山
(세종30/08/27(경진)원전5집96면/수군사료1집 p528)

현재의 한강하구에 인접한 지역인 강화, 교동, 통진, 인천에 소나무산지가 집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세종은 위 장소중 소나무가 있는 곳에는 벌목을 엄금하고, 나무가 없는 곳에는 그 도감사로 하여금 관원을 보내어 심게 하였다. 병선제조용 소나무는 이미 세종조에 이르러 고갈되는 지경에 이르고 조정은 이에 대한 대책을 세우는데 절치부심한다.

‘병조에서 전지하기를 “선재는 꼭 송목을 사용하는데 경인년이후부터 해마다 배를 건조해서 물과 가까운 지방은 송목이 거의 다했고 또 사냥하는 무리가 불을 놓아 태우므로 자라나지 못하니 장래가 염려스럽다. 각 포의 병선을 주장해서 지키는 사람은 수호하는 데에 조심하지 않아서 몇 해가 되지도 않았는데 썩고 깨어지므로 또다시 개조하게 되니 비단 재목을 잇대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수군도 더욱 곤란하게 되니 나는 매우 염려한다. 송목을 양성하는 기술과 병선을 수호하는 방법을 상세하게 갖추어서 알리라” 하였다(세종06/04/17(임술)원전2집 593면/수군사료1집p295재인용).

송림보호를 위해 우선 취해진 정책은 관리들을 엄중문책하고 법대로 다스리는 것이었다. 송림은 마치 무기와 같아서 국가만이 관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송목은 사람이 없는 섬이면 만호, 천호, 진무가 선재 베어오는 것을 전적으로 관장하고 육지에서는 필요한 선재수량을 보고하면 감사가 병선이 있는 고을 관원에게 대중소선을 분간하고 재목이 소용되는 조건을 헤아려 제급한다. 전과 같이 너무 많이 베었으면 그 만호, 천호와 진무 및 그 고을 수령을 율대로 논죄한다.”(세종06/04/28(계유)원전2집595면/수군사료1집 p295재인용)

나무의 부족은 병선조차 만들기 힘든 상황으로 압박해갔고 병선제조에 밀려 민간선박은 제조자체가 불법이 된다. 불법 제조된 선박은 몰수당할 뿐 아니라 그것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관리들까지 죄를 묻게 하므로 민간선박의 제조가 얼마나 까다롭고 어려웠을지를 상상할 수 있다.

병조에서 계하기를 “근해 지역에 병선을 만들기 위해 심은 소나무에 대한 방화와 도벌을 금지하는 법은 일찍이 수교한바 있으나 다만 사선의 조작에 대해서는 금령을 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연해 각처에 있는 소나무를 몰래 도벌해 배를 조작하는 자가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해변의 소나무를 조재지의 수령 및 각 포의 만호, 천호로 하여금 엄금하게 하고 만약 사사로 선척을 조작하는 자가 있으면 적발 즉시로 논죄하여, 선척은 관에 몰수하고 수령 만호, 천호로서 이를 능히 고찰하지 못한 자도 형률에 따라 논죄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세종08/08/26(정해)원전3집41면/수군자료1집p321재인용).

배뿐 아니라 집조차도 송금 정책의 대상이 되었다. 잡목은 괜찮지만 소나무로 집을 지은 자는 집을 헐리우고 벌까지 받아야 했다. 그것은 오로지 군선제조를 위해서였다.

충청도 도관찰사가 아뢰기를 “소나무를 금벌하는 법이 육전에 실려 있고 또 여러 차례의 수교로 지극히 자세하게 되었으나 각 고을의 간사, 누정에 정한 제도가 없으므로 모두 장려함을 숭상하여 옛집이 낮고 좁으면 기울고 썩었다는 핑계로 반드시 새로 지어서 높고 크게 하니 공재를 쓰고 민력을 다하여 세상에서 이름을 사고 소나무가 거의 다 없어지는 것이 오로지 이 때문입니다. 새로 설치하는 고을및 세월이 오래되어 어쩔 수 없이 새로 짓는 것이라면 간각의 다소와 동량의 장광을 해당하는 조로 하여금 법을 세워서 주, 부, 군, 현의 차등을 두어 정수하여 정한을 넘기지 못하게 하되 어긴 자는 파출하소서. 민가 및 사사에서는 잡목을 쓰는 것은 허가하되 만약에 소나무를 쓰는 자는 헐게 하고 과죄 하소서. 이와 같이 엄하게 금법을 세워 절약하고 공가의 흉작하는 폐단을 없애고 국가의 주즙舟楫 만드는 쓰임에 대비하소서.”(문종01/07/169(임자) 원전 6집 411면/수군사료2집 p65-66재인용)

정조때에는 소나무 숲이 민둥산이 된 이유가 병선제조에 있음이 지적되고 수리하기에는 아직 이른 병선을 보고한 죄로 통제사가 추고를 당하는 사태까지 벌어진다.

서명선이 또 아뢰기를 “지금 여러 도의 폐단 가운데 가장 근심스러운 것은 송정松政입니다. 각처의 송산松山이 민둥산이 되어버린 것은 오로지 전선戰船을 개조한 데서 초래된 것입니다. 그런 때문에 앞서 기한이 찬 배는 병영과 수영에서 직접 살펴 다시 보고하라는 내용으로 잇달아 신칙을 가하였는데, 근일 통제사의 장본狀本을 살펴보건대, 처음에 아뢴 다섯 척의 전선 가운데 기한이 차지 않은 것이 2척이나 들어 있으니, 청컨대 전 통제사 서유대徐有大를 종중 추고하게 하고, 이런 내용으로 여러 도의 수신帥臣들에게 신칙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정조.권11.5년4월5일(무신).원전45집231면).

이처럼 강력한 송금 정책이 있었기에 송림은 그나마 보존될 수 있었다. 여기서 잠시 조선중기와 비슷한 시기 유럽의 삼림정책을 비교해보면 조선의 삼림정책을 판단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당시 유럽삼림정책의 모범으로 손꼽히는 프랑스 루이14세의 재무총감 콜베르(1619-83)의 1669년 대칙령이 있었다. 삼림에 있어서 어려운 문제가 야기되면 아무런 정견을 갖지 못하고 무능력했던 전임자들에 비해 콜베르는 삼림정책을 입안하고 그것을 지도해서 착착 실행으로 옮겨 삼림의 전반적인 개혁과 긴급하고 중대한 임무를 타개한 인물이었다. 콜베르가 루이14세에게 자신의 임업정책을 설득할 수 있었던 근거중의 하나는 바로 전함건조용 나무의 보호였다. 이점에서 그는 조선의 관리들과 다르지 않았던 셈이다.

프랑스혁명의 대격변기에도 그의 칙령만은 살아남았을 정도로 그의 임업정책은 유럽의 모범이 되었다. 개인의 자유를 위해서는 혁명법이 훨씬 이로운 것이었지만 말이다. 제후와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삼림이라도 일반민중의 공익을 위해서 일정한 규칙에 따라 벌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벌채하더라도 1ha당 30그루의 큰 나무를 남겨야 한다는 규정은 현재 모수母樹작업에 의한 갱신기술로 불리워지고 있다. 콜베르와 그의 동지개혁자들이 보여준 정열은 그 뒤 후계자들에 의해 그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더욱이 많은 전쟁이 있었기에 칙령의 조문을 왕 자신이 무효로 만들지 않으면 안 되었다(삼림의역사.미셀드베즈.중앙일보.1978.p81).

콜베르의 사례는 부르조아 혁명이 몰고 온 사적소유보다도 국가적소유와 관리가 숲 정책에는 더욱 이롭다는 사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가 잦은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자원을 동원할 때 오랫동안 보존된 숲은 하루아침에 파괴된다는 사실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콜베르의 칙령은 조선조 숲 정책의 모본인 경국대전보다 훨씬 늦은 것이다. 조선의 관리들은 숲의 중요성을 잘 알고 고급관료라도 그 처벌에 관용을 베풀지 않을 만큼 엄정했던 것이다.

땔나무

강화시선배는 본래 땔감을 실어나르던 것이 주 임무라서 땔나무‘시柴’자를 써서 시선배라 불리우게 되었다. 그러나 현존하는 강화시선 뱃노래에는 땔나무 대신 조기 등 어물이 등장한다. 이는 강화도의 땔나무가 고갈된 정황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땔나무집산지는 한강하류 시선배들이 들르는 마포나루가 아닌 한강상류의 뗏목들이 들르는 뚝섬으로 바뀌었다. 숯구이용 땔감을 배에 실어 운반하다 풍랑을 만나 사망한 사례는 조선초까지 서해도서와 한강하구지역이 땔나무의 공급로였음을 알게 한다.

경기수군첨절제사 김문발이 아뢰기를 “도내의 선척이 덕적도에 들어가서 각해의 미납한 숯을 구을 나무를 싣고 오다가 큰 바람을 만나 두척이 깨어져서 선군이 물에 빠져 죽은 자가 69인이고 살아남은 자가 3인입니다(태종08/10/169(경인)원전1집458면).

이미 먼 바다 섬까지 들어가 목숨을 걸고 땔나무를 실어 와야 할 만큼 땔나무의 부족은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땔나무의 부족은 일반 백성들에게만 문제가 아니었다. 정조대에 이르면 궁궐에서조차 땔나무 때문에 임금이 왈가왈부해야 하는 지경에 이른다. 땔나무삼판(시장柴場)에서 벼슬아치들이 봉록대신 결세結稅를 떼어 받는 일에 심각한 폐단이 생겨 이의 폐지를 둘러싸고 조정에서 격론이 벌어지는 장면마저 목격되고 있는 것이다.

공주가公主家에서 시장柴場을 절수받은 데서 생기는 폐단이 이루 말할 수 없었으므로 전후 진달한 신료들이 매우 많았는데, 상이 간혹 윤허하여 따를 때도 있었으나 끝내 견제당하는 데가 있어 쾌히 결단을 내려 혁파시키지 못했으니, 애석하다(현개3권1년6월3일(병술)원전37집174면).

임금은 신하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땔나무시장을 폐지하기도 했지만 때론 권세가들의 이권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해 신하들의 문제제기에도 결단을 내리지 못하였다. 이는 숲의 사적점유를 둘러싼 치열한 갈등을 드러내는 사례이다. 한편 관청에서도 땔나무삼판에서 세를 받아들였다. 병기 등의 제조를 맡아보던 관아인 군기시 산하 가평(양근)의 땔나무 숲은 임진난 이후 정리가 안 된 채 백성들이 암묵적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곳에 무덤 하나당 숯을 수 십섬씩 세금으로 내게 하니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양근楊根에 군기시軍器寺의 시장柴場이 있는데, 허적許積이 도제조都提調가 되고부터 시장 안의 무덤을 세어서 숯을 거두되 한 무덤에서 수십 섬의 숯을 받고, 시장을 설치하기 전에 들어가 묻은 것도 다 억지로 받으므로, 백성이 다 한탄하고 원망하였다. 양근의 유학幼學 신의존辛義存 등이 상소하여 그 폐단을 아뢰니, 비국備局에 내렸는데, 비국에서 말하기를, “신의존 등은 조상의 무덤이 시장 안에 있으므로, 탄역炭役을 면하려고 호소하였으니 참으로 외람된 데에 관계되고, 정원政院이 받아들인 출납出納의 도리를 잃은 것입니다.”하였으므로, 도승지都承旨 심재沈梓 등이 대죄待罪하였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예전에도 가혹한 정사가 많았으나, 무덤에서 세를 거두는 것은 없었다’고 하였다(숙종3권1년3월28일(병술)원전38집257면).

허적은 남인의 영수로 예송논쟁을 승리로 이끈 인물이었으나 다시 서인정권이 집권하게 되자 실각하게 된다. 위 기사는 허적을 공격하는 서인정권의 공세중의 하나로 나는 새도 떨어뜨렸다는 허적의 권세를 추락시킨 것중의 하나가 다름 아닌 숯이었던 셈이다. 다음의 기사는 왕이 이런 것 까지 고민했나 싶을 만한데 역시 땔감의 부족이 원인이다.

‘궁궐에 바치는 땔나무의 근수를 줄인 곡절에 대해서는 공조 판서가 직접 사핵査覈하라고 명하였다. “기인其人들이 바치는 것에 온돌에 쓰는 땔나무라는 명색이 있는데, 정해진 예는 매 단의 무게가 57근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작년 이전에는 독촉하여 징수함으로 말미암아 매 단의 무게가 100여 근에 이르렀으니, 그것을 바치는 공인貢人들의 어려웠던 사정은 불을 보듯이 명백하였다. 그래서 내가 지난봄에 과감하게 법에 정해진 것 이상으로 지나치게 받던 근수를 일체 탕감하고, 그들로 하여금 정해진 근수에 따라서 바치도록 하였다. 그래서 내 생각에 이제부터는 공인들의 부담이 가벼워지리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얼마 뒤에 땔나무의 무게를 달아보라는 명을 내렸더니, 각 단의 무게가 겨우 30여 근에 지나지 않았다. 이에 혹 공인들이 근수를 줄여서 바친 것이 아닌가 했는데, 그들이 말하기를, ‘등촉방燈燭房의 하인들이 세 단은 나누어 다섯 단으로 만들고, 두 단은 나누어 먹기 때문에 자연 근수가 주는 것을 면할 수 없습니다.’ 하였으니, 이는 공인들의 죄가 아니다. 지난해 거듭 신칙한 바가 과연 어떠했는데, 하인들이 어찌 감히 또다시 이처럼 부당하게 징수하여 빼돌리는 짓들을 한단 말인가 (정조1년정유(1777,건륭42)11월5일(정묘)).

정조는 땔나무를 궁궐에 바치는 공인들의 노역을 감해주려 했으나 엉뚱하게도 하인들이 땔나무를 빼돌리는 비리를 포착하고 이를 추고한 것이다. 이는 나무땔감이 귀해지면서 궁궐에서 조차 분쟁에 휘말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미 선대인 영조대에서는 제사 등의 일을 맡아보던 관청인 봉상시의 파주, 금천 땔나무 숲의 땔감사정이 안 좋아지자 서로 번갈아 바치게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파주坡州에서 베어다 바치는 봉상시奉常寺의 땔나무를 금천金川과 함께 윤번으로 베어 바치도록 명하소서”하니, 윤허하였다(영조23권5년7년3일(병오)원전42집138면).

한강하구유역에 속하는 파주와 서울 금천의 봉산에서조차 땔나무구하기가 어려워졌을 만큼 한강과 임진강등 한강하구로 모여드는 강 주변 숲의 사정은 안 좋아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땔나무 채취는 농한기 중에 즉 겨울이나 여름에 하게 되는데 특히 추수기에 연료 확보를 위하여 음력 7월 만추에 벌채하게 된다. 7월 벌채는 풋나무 벌채를 의미하며 이것이 매번 계속되므로 인구가 많은 주변의 산림에서부터 황폐지가 발생되기 시작하였다. 석주 권필은 강화에 내려와 시와 술을 가까이 하며 후학을 길렀는데 그의 눈에 비친 나뭇꾼의 애환을 들어보자.

삼사십이 되어도 아직도 총각이라오
농막살이도 못하는 신세라
해마다 해마다 산에서 산다오
나무를 찍으며 산에서 산다오
찍은 나무는 어디에 쓰이는가
서울거리에 높이 솟은
양반님네 누각감이 된다오
하늘에 잇닿은 울창한 나무
몽땅 찍어내라, 어서 나르라
관가의 독촉이 성화같다오
어젯밤 내린 비에 길은 미끄럽고
봄철이라 땅은 진창
길은 무릎까지 빠져드는데
온종일 짐 날라도 열댓걸음...
소는 풀이 없어 굶주리고
사람 또한 먹지 못했구나
사람은 오히려 견디어낸대도
어쩌랴 굶주린 소가 꺼꾸러진다면
달구지군 쏟아놓은 하소연
듣는 나그네도 측은하여 가슴아파하네
사람은 소를 몰고
소는 달구지를 끌어
소발굽은 터벅터벅
수레바퀴 삐걱삐걱
이렇듯 십여년에
달구지군은 자식없고
소마저 새끼없으니
일조에 소죽고 사람마저 죽으면
관가에선 어딜대고
사나운 채찍 휘두르려나
진정코 조정에 호소하거니
하루바삐 이런 고역 없애치우라
사람과 소 함께 고달피 잠들었네
기나긴 봄날 고요한 들판에는
뽕나무와 삼대만 우거져 푸르더라
(림제, 권필 작품집 p187-188 리철화 역 문예출판사 1990)

땔나무의 위기가 가져온 사회상황은 하층민에게 더욱 가혹하게 전가되고 있음을 권필은 보여주고 있다. 한편 수원 화성을 건설할 때 땔나무는 10만8천432단이 소용됐고, 숯은 모두 6만9천56섬(12,430,080리터)이 소용됐다. 숯의 비중이 1.9이므로 그 질량은 23,717,152kg 즉 약24,000톤이다. 숯 생산에는 4배의 나무가 필요하므로 이 정도의 숯을 만들기 위해서는 약96,000톤의 나무가 필요했다. 6톤의 숯을 생산하는데 약 120그루의 나무가 필요하므로 4000배인 480,000그루의 나무가 태워 없어진 셈이다. 직경10cm의 나무로 약1m의 폭을 가진 숲이 있다면 480,000평방미터(약14만평)의 숲이 없어진 것이다. 이들 숲은 식목을 하고 10년정도 정성껏 육림을 해야 회복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숯이 생산된 지역에서 식목이 있었다는 기사는 발견되지 않는다. 이들 숯은 한강하구의 상류지역인 지평, 광주, 용인에서 생산된 것이었다. 경기대 조병로 교수(사학과)의 계산에 따르면 화성건설에 소용된 목재는 종류에 따라 모두 2만6천206주였다. 그러나 숯과 땔나무와 쇠와 동 석회등을 만드는데 불태워진 나무는 빠진 숫자이다. 목재는 한강을 끼고 있는 경기도의 광주와 남양, 광평, 강원도의 한강 인근 지방, 황해도의 장산곶, 충청도의 안면도, 전라도 좌수영과 전라우수영의 각처에서 베어 들였다.

한편 강화성곽을 쌓는 데는 땔감1만동이 필요했으나 강화가 아닌 인근 섬등에서 공급을 받아야했다.(국역비변사등록,숙종16년(1690)11월14일,후록) 마니산을 제외하고 강화도 전역이 민둥산이었기 때문이다.

식목

태종때 충청도경차관 한옹의 제안에 따라 병선제작용 소나무 식수를 실행케 한 기록이 있다.(태종07/04/07(신묘)원전1집389면) 황형(黃衡1459-1520)장군은 강화 연미정에서 식목을 한 일화로 유명하다. 황형은 일찍이 과거 무과에 급제하여 나라가 외적의 침입으로 위급했을 때 큰 공을 세운 장군이었다. 북쪽으로부터 여진족의 침입이 있었을 때는 두만강을 건너 여진족의 마을을 소탕하였고 남쪽에서 대마도의 왜구들이 침입하여 난동을 부린 삼포왜란 때는 중종임금의 특명을 받고 왜구를 물리치기도 했다. 그가 나이 60이 넘어 강화도의 연미정 근처에 집을 짓고 살았을 때였다. 비록 몸은 서울을 떠나 시골에 와 있었지만 항상 나라의 앞날에 대하여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틈만 있으면 연미정에 올라 유유히 흐르는 한강하구를 바라보며 나라의 앞날을 생각하곤 했다. 어느 날부터 황형장군은 날마다 콩을 맛있게 볶아 마을 아이들을 불러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아이들에게 그 콩을 나누어 먹인 후, 대가로 어린 소나무를 바닷가에 옮겨 심게 했다. 그리고 가끔 아이들이 싫증을 낼 때쯤이면 황 장군은 늙은 몸으로 아이들과 편을 갈라 전쟁놀이를 해가며 소나무 심는 일을 계속해 갔다. 백발의 노인이 아이들과 함께 계속 나무를 심는 모습을 본 마을 사람은 이상하게 생각했다.

“황 장군님, 연세도 많으신데 지금 어린 나무를 심어 어디다가 쓰려고 하십니까?”

“내가 이 나이에 나라를 위해 할 일이란 이렇게 아이들과 놀면서 나무 심는 일밖에는 무엇이 있겠소. 두고 보시오. 아마 훗날 나라가 이 소나무로부터 적지 않은 도움을 얻을 것입니다.” 그 후에도 황 장군의 소나무 심는 일은 계속되어 그가 세상을 떠날 때쯤 솔밭이 수십 리에 이르게 되었다. 그로부터 70여 년 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선조 임금이 의주로 피난을 가고, 의병장 김천일이 서울을 다시 찾기 위한 준비로 강화도에 들어왔다. 마침 병력을 이동시키기 위해 배를 새로 만들고 정비하는데 많은 나무가 필요했다. 그러나 난리중이어서 나무를 찾지 못하고 애만 태우고 있었다. 고을의 한 노인이 김장군을 찾아왔다.

“장군님, 지금 장군님이 찾고 계시는 나무가 있는 곳을 알려드리겠습니다.”

하고는 황 장군이 심어 놓은, 이제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된 숲으로 안내했다. 김 장군은 소나무 숲의 유래를 듣고는 크게 기뻐하며, “아! 이는 ‘황공선견黃公先見’이로다.”하며 눈물을 흘렸다.

황형의 예에서 보듯 강화는 국방상 요충지라는 지정학적 이유로 소나무를 심는 행위자체로도 애국이 되는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국가는 강화도 숲의 관리와 식목에 신경을 썼다. 다음은 숙종때 병조 판서 김석주등이 강화도를 살피고 돌아와 강화도의 산둔덕에 식목을 하여 숲을 만들 것을 제안하는 서계이다.

예전에 정장亭障에다 임목林木을 많이 심었던 것은 대개 나무뿌리가 크고 견고하여 지면 저절로 채책砦柵을 이루고, 나뭇가지가 서로 엉클어지면 치돌馳突하는 것을 방비하기에 족하며, 또 나의 몸을 엄폐하고 적敵을 사격하기에 편한 때문이었습니다. 더구나 사려師旅가 둔숙屯宿하는 지역은 더욱 나무를 찍고 풀을 베는 것으로 중함을 삼으니, 나무를 심는 정책에 힘쓰지 않을 수 없는데, 근부斤斧가 찾게 되면 오래 기르기가 실로 어렵습니다. 마니산摩尼山외에는 거개가 모두 민둥민둥하니, 완도와 변산의 소나무를 취하여다 그 산둔덕의 경작 못하는 땅을 가려서 두루 갈아서 심으면, 수십년을 지나지 않아서 반드시 울창하게 숲을 이루는 효험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묘당廟堂에 명하여 차례로 행하게 하였다.(숙종7권4년10월23일(경인)원전38집397면)

금벌

조선시대 산림의 황폐화를 그나마 줄일 수 있는 게 있었다면 금벌정책 때문이다.

경주의 고기(古記)인 ‘동경잡기’에 쓰기를 ‘경국대전 호전에 비보에 해당하는 임수 안에서 나무를 베거나 농경을 하는 사람은 곤장80대를 치고 얻은 것은 되돌려 받고 해당수령의 관을 몰한다’라고 하였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18 p727). 특히 나무를 베어 왜인에게 몰래 팔거나 하는 행위는 엄격하게 죄를 물었다.

‘삼포에 사는 백성 등 가운데 몰래 소나무를 베어서 왜인에게 파는 자를 아울러 엄금하게 하소서.’ (성종05/09/09(을묘)원전9집144면/수군사료집2 p232재인용)

그러나 금벌정책은 때로 당리당략에 의한 정치적이고 일시적인 것이어서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정책이 되기 힘든 적도 있었다. 붕당정치가 전면적으로 폭발한 숙종 6년 서인이 남인을 몰아낸 경신대출척 당시 남인의 지도자 중 하나인 윤휴에 대한 공격임이 분명한 다음의 기사가 그렇다.

한성부漢城府에서 아뢰기를, “동도감역관東道監役官이 보고한 바를 곧바로 접수하였는데, 관장하는 바 이외의 산의 도성암道成菴의 옛터는 본래 금표禁標 안쪽이고, 서울 주산(主山)의 내맥來脈인데, 병진년 이후부터 장원서제조掌苑署提調 윤휴尹鑴가, 그 소나무 사이에 잣나무 두 그루가 있는 것으로 임금에게 바친다고 일컫고, 그 산 전부의 땅을 본서本署의 관장으로 돌렸으며, 암자의 중들이 소나무를 몰래 베어낸 것이 3백 80여 그루에 이르러, 형조刑曹로 옮겨 가두었으나 사면을 만나 풀려났고, 장원서掌苑署에서는 또 첩문帖文을 만들어 중에게 주어 산지기 무리로 하여금 발도 들여놓지 못하게 했으며, 이 뒤로부터 소나무를 베어 내는 것이 날로 심해졌다고 합니다. 지금부터 도성암 옛터를 본부本府에 도로 예속시켜 벌목하는 것을 금하는 등의 일을 예전과 같이 거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숙종9권6년7월8일(을미)원전38집463면).

남인을 불교세력과 결탁한 것으로 몰고 경국대전에 나와 있는 금벌정책의 위반으로 몰아 장원서로 편입된 숲을 한성부로 가져옴으로서 남인에게 남은 한줌의 권력까지 거둬들이려는 과정이었으므로 이것이 공평한 금벌정책의 집행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을 것이다.

왕실의 사유재산을 관리하던 곳인 내수사의 강릉, 삼척의 황장금산(궁궐건축용으로 쓰이는 최상질의 소나무인 황장목黃腸木을 금양禁養하는 산)에 대한 벌채문제에 대해 이제 숙종은 신하들의 의견에 밀려 자신의 결정을 철회한다.

호조판서戶曹判書 정재숭鄭載嵩은 말하기를, “요즈음에 내수사內需司에 별판부別判付를 내려 송판松板 4백 장을 강릉과 삼척에서 벌채하게 하고 이어 감세하게 한 적이 있습니다. 이 두 고을은 곧 황장금산黃腸禁山이니, 만약 작벌斫伐하며 취함을 허락하신다면 반드시 남잡濫雜함이 있을 것입니다.”하니, 임금이 곧 시행하지 말게 하였다(숙종15권 10년 7월 12일(병자).원전38집695면).

별판부란 임금이 상주문上奏文에 대하여 특별히 의견을 다는 것으로 임금의 지시로 행해진 송판 400장 벌채를 호조가 문제제기한 것으로 이는 국초부터 왕실재정의 중요원천으로 5할의 높은 이자를 운영하던 내수사 장리의 폐단에 대한 공격이자, 신권의 왕권에 대한 도전의 일환으로도 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결과는 금벌정책의 수호였다. 이러한 봉산,송금의 금벌정책은 정조에 이르러 더욱 강력해진다. 국유림인 봉산의 소나무라도 50그루 이상은 임금의 결정을 거친 다음에만 벌채토록 한 것이다.

봉산封山의 송재松材 50주 이상의 것은 품지를 거친 다음 작벌斫伐을 윤허하는 것을 현저하게 법으로 삼도록 명하였다(정조5권2년4월18일(정미)원전45집20면).

그러나 땔감문제는 식량문제와 더불어 백성에겐 중요한 연료정책의 문제였으므로 백성의 처지가 어려워지면 숲 보호정책은 쉽게 철회되기 마련이었다. 금벌과 남벌의 선택 밖에 없는 임업정책의 근본적 한계가 드러난 것이다. 순조가 금산으로 지정되어 있던 서울 도성 주위의 네 개 산에 대해 꺾여진 나무 등은 땔감으로 쓰도록 지시를 내리자 이것이 기화가 되어 남벌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공조의 박명섭이 상소하여 가난한 선비와 곤궁한 백성의 구휼하려던 원래의 정책취지가 왜곡되어 남벌만 횡행함을 제기한다. 이에 대해 임금은 상소를 일축하고, 금송정책을 강화하라는 공허한 지시만을 내린다. 정책실행에 대한 선택의 폭이 매우 협소함을 드러내는 단면이 아닐 수 없다.

공조 참의 박명섭朴命燮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도성의 사산四山은 교외의 수택藪澤을 추요芻蕘와 함께 하는 데에 견줄 것이 아닙니다. 은교恩敎를 막 내리자마자 도끼를 들고 사산四山에 들어가서 마구 내달리며 모두 온 산을 짓밟아 문득 초장樵場 이루고 있습니다. 무릇 인정人情은 비상非常일에 대해 쉽사리 놀라고, 민욕民慾은 한정 없이 요구하는 데 대해 잇대기 어려운 법입니다. 더욱이 지금 성념聖念으로 진휼軫恤하는 것은 오로지 가난한 선비와 곤궁한 백성을 구제하는 데 있지만, 가난한 선비는 몸소 땔나무를 해오지 못하고, 곤궁한 백성은 도끼를 빌릴 곳이 없으니, 크게 비호하려는 은혜는 두루 미칠 수가 없고, 금벌禁伐하는 법만 반드시 점차 해이해질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빨리 성명成命을 정침停寢하시고 금방禁防을 엄중히 하여 사면事面을 존중하게 하소서.”하니, 왕이 비답하기를,“경산京山의 바람에 꺾여 죽은 나무를 팔도록 허락하는 것은 옛날에도 있었던 일이라는 것을 그대는 혹 모르는가? 모든 물건은 이미 천해지면 미치는 바가 저절로 넓어지는 것인데, 어떻게 반드시 이와 같이 계교計較하겠는가? 그러나 그대의 말은 직분을 수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니, 지극히 가상하게 여길 만하다. 이를 이어서 금송禁松의 정사政事를 각기 해당 영문營門으로 하여금 전보다 더욱 엄밀하게 하라는 일을 각별히 엄중하게 신칙하라”하였다(순조5권3년2월18일(갑인)원전47집452면).

그렇다 해도 조선에서의 금벌정책은 경국대전에서 수립된 일관된 원칙이었다. 조선이 쇠락해가던 마지막 순간에도 견결히 금벌정책은 지켜지고 있었다.

승지 이존수李存秀가 아뢰기를, “신이 영남의 감사로 있을 때, 경주의 봉산封山을 백성들로 하여금 개간하여 경작하게 하는 일에 대해 사리를 따져 보고하라는 뜻을 묘당에서 통고한 바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비국에 진정서를 올려 봉산을 혁파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이른바 혁파할 것을 청한 것은 수목이 무성하여 호환虎患이 많기 때문이며, 수영水營에서 적간摘奸할 때 하리들이 주구誅求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수백 년 금지하여 기른 80리의 봉산을 괜히 혁파할 수는 없습니다. 호환은 봉산의 수목이 무성한 곳은 어디나 있으며, 수영의 장교가 적간할 때에 하리들이 주구하는 폐단은 다만 마땅히 엄하게 단속하면 됩니다. 만약 백성들이 경작해 먹는 것을 허락하기 위해서라면, 갑술년, 을해년 이후로 백성들이 뿔뿔이 떠나 원결元結의 전답도 묵고 있는 것이 많습니다. 금년 재해를 입은 총 결수로 말하면, 파종하지 않은 논이 2천여 결이고 속전으로 강속降續된 밭이 7백여 결이나 되니, 이러한 원결 전답의 묵은 곳을 경작하라고 권해야지, 봉산을 혁파하고 개간할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더구나 봉산을 혁파하라고 청하는 간사한 백성은 형벌을 주어 귀양 보내는 것은 본디 금석金石과 같은 법이니, 묘당으로 하여금 엄하게 신칙하여 정한 법을 거듭 밝혀서 후일의 폐단을 막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순조19권16년12월29일(계묘)원전48집107면).

1907년 대한제국정부는 황폐지를 복구하기 위한 최초의 근대적 사방砂防사업을 시행한다. 서울 주변의 풍치증진과 수원함양을 위하여 창의문(북문)내 백운동(현재 청운동)국유림에서 조림사업과 적묘공(선떼붙이기)을 시행한 것이다. 황폐지에 대한 식재는 보통의 조림방법으로는 성공하기 어려우므로 기초공사로서 적묘공을 한 후에 소나무, 곰솔, 상수리나무, 산오리나무, 물갬나무 등을 약 5ha 식재하였다. 다행이 이 사업은 성공하여 1908년부터 평양과 대구의 모범림조성에 참고가 되었다.

비록 그 시행과 대안에 많은 문제와 한계를 갖고 있었다 해도 조선의 금벌정책은 국가의 존체가 유지되고 있을 때와 외침과 전쟁으로 전마에 휩싸이고 식민의 나락으로 떨어졌을 때는 그나마 숲은 보호받을 곳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주인을 잘 만나야 비로소 숲이 산다는 평범한 진리를 일제의 가혹한 수탈 속에서 경험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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