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우 (사진가, www.siwoo.pe.kr)
 

공안당국으로부터 내사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사진작가 이시우씨가 ‘푸에블로호사건과 유엔사’ 두 번째 글을 보내왔다. 첫 번째 글은 이미 푸에블로호사건 39주년인 지난 1월23일 ‘푸에블로호사건과 유엔사①-영해문제’라는 제목으로 게재된 바 있다. 이번에는 ‘푸에블로호사건과 유엔사②-위기절차’인데 두 개의 자료까지 포함해 원고량이 방대해 다섯 차례에 걸쳐 연재할 예정이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격려를 부탁드린다. / 편집자 주 

                    <차 례>

들어가는 말
1. 미국의 위기조치절차
2. 푸에블로위기절차 1단계 - 상황의 발전
1) 유엔군사령관
2) 군사정전위원회
3) 작전통제권
4) 일본기지 사용권
3. 푸에블로위기절차 2단계-상황평가
4. 푸에블로위기절차 3단계 - 조치개발
5. 푸에블로위기절차 4단계 - 조치선택
6. 푸에블로위기절차 5단계-실행계획
7. 푸에블로위기절차 6단계-실행
맺는 말
<자료1>
<자료2>

이 글의 1편은 푸에블로호사건의 영해문제를 다룬 글이었다. 원래의 계획은 멀지 않은 시간에 이 글이 발표될 예정이었으나 개인 신상에 생긴 일로 이 글을 쓰기 위한 자료를 복원하고 조건을 마련하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러나 집의 서가에 있는 자료에 접근할 수 없는 한계 때문에 어떤 부분은 기억에만 의존해야 하는 미흡함이 있었음을 인정한다. 차후에 보충되길 기대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고자 한다. 너른 양해를 바란다. / 필자 주

들어가는 말

벨 사령관이 유엔사강화론을 이야기하며 가장 강조하여 언급한 것이 ‘위기관리’라는 단어이다. 정전상태의 한반도에서 정전시 위기가 전쟁으로 발전하는데 시간차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이다. 위기관리는 미군용어로는 위기조치절차이다. 유엔사와 미국, 남측정부를 일방으로 하고 인민군과 북측정부를 다른 일방으로 하여 발생한 수많은 위기 중 가장 극적인 작통권 행사가 이루어진 사건들은 모두 북.미 사이에서 일어났다.

푸에블로호 나포사건, EC-121기 격추사건, 판문점 미루나무벌채사건 등은 유엔사를 앞세운 미국의 위기조치절차가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공부할 수 있는 가장 유용한 사례이다. 그러나 이들 사례에 대한 분석과 연구는 웬일인지 거의 전무하다. 푸에블로사건에 대해서는 미국 정부문서가 공개되어 있고 그나마 몇 가지 자료가 더 존재하므로 푸에블로사건을 통해 미국이 한반도에서의 위기절차를 어떻게 진행해나가는지를 공부하고자 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쿠바위기나 통킹만위기와 마찬가지로 푸에블로위기 역시 미국은 사건의 유엔 회부, 군사조치의 병행, 국내법 절차를 위한 국회와의 조율 등 보편적인 과정을 거쳤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푸에블로위기를 비롯한 한반도위기에서 다른 나라의 위기조치절차와 차이가 나는 특수성이 있다면 유엔사와, 이로부터 연유하는 한국과 일본과의 관계이다. 일본기지 사용문제에 대해서는 일본총리에게 협의가 아닌 통지의무만 있으며, 한국에는 협의는커녕 통보도 없이 위기절차가 진행되었음이 기밀해제문서를 통해 명확히 드러난다. 이러한 관계는 한국의 경우엔 유엔사가 작전통제권을 이양받은 1950년 이승만-맥아더 공문에 의해, 일본의 경우엔 유엔군활동을 지원한다는 1951년 요시다-애치슨 교환공문을 통해 밑받침되고 있다.

비엩남전쟁에 병력을 파병해준 한국은 미국에게 무리한 요구를 해도 들어줬기 때문에 군사부분에서도 한미동맹은 굳건히 과시될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의 청와대습격사건에 대한 무관심과 푸에블로사건에 대한 과도한 대응은 한미동맹에 의혹을 던지게 했으며 실미도부대를 만드는 것을 시작으로 핵개발 시도에 이르기까지 한미관계의 불협화음은 위험수위로 치달았다. 지금의 한미관계와는 비교가 안 되는 위험수위였다.

이라크파병 후에 촉발된 작전통제권 환수는 비엩남파병 당시 주월한국군사령부에 대한 작통권 환수와 비교할만한 공부사례가 될 만하다. 작통권 환수문제가 가장 많이 고민되고, 논의되고, 일정 부분 설득되기까지 한 계기엔 청와대습격사건과 이틀간격으로 발생한 푸에블로호위기의 처리과정에서 확인된 미국의 태도 때문이었다. 대통령의 목숨을 노린 북의 기습에 보복하기 위한 절박한 필요에서 촉발된 작통권 논의였지만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지원을 받고 있던 박정희 정권은 이를 쉽게 포기한다. 이틀을 두고 발생한 두개의 위기는 미국의 본질을 여과없이 드러나게 했다.

그리고 그러한 입장의 차이는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작통권문제를 공부하는데 있어 푸에블로위기만한 사례가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미군의 위기조치절차는 미합참의 합동문서에 정리되어 있다. 6단계를 거쳐 진행되는 위기절차에서 우리가 주목하게 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이 절차대로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미 위기조치가 개발, 선택되고 군사력을 움직이게 되어 있는 이 절차는 현실에서는 군사력을 이미 배치시켜놓고 위기절차를 다시 논의하기 시작하고, 여의치 않자 모든 조치 계획을 포기하는 것으로 결론난다. 처음부터 위기에 대해 군사조치절차를 시작하는 것이 무리였지만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한 백악관의 위기해결팀은 다른 어떤 해결보다 군사조치를 당연한 전제로 시작했다. 그러나 군사력은 위기해결에 유연성을 준 것이 아니라 경직성을 제공했다. 평화가 목적뿐 아니라 수단에서도 관철되어야 하는 중요성을 확인하는 대목이다.

한편 미국의 위기조치과정에서 한국군의 작통권에 대한 부분은 지극히 작은 것이었다. 백악관에서 한국군은 통제와 억제의 대상으로서만 등장한다. 이것은 한국군이 작통권을 환수한다 해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부분으로 판단된다. 위기의 발생 순간부터 양국간에 긴밀한 토의가 필요했으나 한국은 이미 미군의 군사력이 배치된 뒤에야 사건을 공식통보 받았다. 작통권 환수는 그러한 의무조차 벗게 해준다는 점에서 작통권 환수 이후의 체계는 1978년 이후 연합사체계보다는 1978년 이전 유엔사체계와 유사한 점이 있다. 푸에블로위기는 그런 점에서 연합사해체 이후에 미군이 어떤 식으로든 강화하려는 유엔사체계를 상상해볼 수 있는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1. 미국의 위기조치절차

푸에블로호사건에 대한 미국의 대응은 전쟁절차가 아닌 위기조치절차로서 시작되었다. 1968년 당시 미국의 위기조치절차는 정교하게 수립되어 있지 않았다. 우선 미국의 위기관리와 관련된 역사를 개괄해 보자.

1947년 미의회가 국가안보회의(NSC)를 창설한다. 그러나 이것은 백악관참모조직의 일부로 간주되진 않았다. 1950년대 아이젠하워의 국가안보보좌관들은 NSC참모와 백악관참모조직의 가교 역할을 했다. 1950년대 긴급메세지가 백악관에 도착하는 속도에 불만을 가진 아이젠하워 대통령 때문에 국가안전국(NSA)은 크리티콤(CRITICOM) 통신시스템을 만들었다. 국가안전국이 이 시스템을 도입한 것은 누군가 최초로 정보를 입수했다면 10분 이내에 주의를 요하는 경고메세지가 백악관에 도착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 경고 메시지는 ‘크리틱CRITIC’으로 불렀고, 존슨 대통령은 크리틱메세지에 대해서만큼은 자기에게 꼭 전화를 해야 한다고 지시를 내렸다. 케네디취임 후 NSC지원조직을 상당수 폐지, 4~5명이 책임지던 일을 국가안보보좌관 번디 수하로 통합시켰다. 문민대통령인 케네디를 불신하던 주한유엔군사령관 출신의 렘니처 합참의장과 CIA에 의해 이루어진 쿠바붕괴작전 중 일어난 피그스만의 재앙으로부터 백악관의 상황실이 생겨났다.

번디는 “백악관에 위기대책반만 있었어도 대실패는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했고, 케네디에게는 군인들에게만 군사문제를 맡길 수 없다는 강한 신념이 형성되었다. 케네디는 군정보조직의 계통적인 보고보다, 군비서관인 클리프튼 소장에 의한 개인적인 첩보수집 보고를 선호했다. 이는 전쟁대통령이었던 링컨의 전쟁지휘경험으로부터 전쟁에 대한 문민통제를 확립하기 위해 적용했던 ‘방향성 있는 망원경’으로서의 정보참모를 선호하던 전통과 이어져 있었다.

위기관리에 대한 총책임자로서의 미 대통령의 통치차원의 위기관리는 레이건 저격미수사건이 계기가 되어 레이건시대에 만들어 졌다. 레이건 1기에 활약한 리치빌 같은 위기관리 전문가는 과거의 위기를 역사적으로 분석해서 위기관리 도구를 개발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행정부 이양 때문에 그 의도는 매번 좌절되고 말았다. 위기관리 시스템 정립과 기획을 떠맡은 포인덱스터와 리치빌은 백악관 길 건너편에 자리한 구 정부청사 208호실을 개조하여 1983년 상황실 산하의 위기관리본부(Crisis Management Center : CMC)를 열었다.

그 뒤 레이건 대통령의 위기관리 특보였으며 그 후에는 NSC 사무국장을 역임한 로드 맥대니얼이 백악관 상황실에 위기관리 모델을 정착시켰다. 대통령들마다 받아들이는 뉘앙스는 달라지지만, 그 모델은 위기가 발생한 기간에 상황실에서 벌어지는 일반적인 매뉴얼이 되었다. 위기조치의 한 부분으로서 군사적 위기조치에 관한 절차는 1997년 발표된 합동문서에서 최근의 완결판을 보게 된다.

이것은 1983년 골드워터 니콜스 의원에 의해 제정된 국방재조직법에 따라 대통령에 대한 군사적 조치의 조언자로서 합참의장의 지위를 다시 회복한 민군정상화 이론을 배경으로 한 교범이다. 이는 케네디와 존슨 등으로 이어지는 문민대통령들의 개별적인 정보보고와 조언을 방지하고 민군간의 관계를 재정립한 것으로 평가된다. 푸에블로위기는 위기절차가 정리되기 이전의 사례를 보여준다.

여기서는 6단계로 이루어진 현재 미군의 위기조치절차를 기준으로 푸에블로사건 당시를 재구성해 봄으로서 미국이 스스로 정립한 기준과 어떤 차이가 있었는지를 드러내게 하고자 한다. 우선 위기절차 6단계를 요약한 표를 살펴보는 것으로 공부를 준비해보자.

<표1> 위기절차 6단계 요약

시차별 단계의 개요

1단계

2단계

3단계

4단계

5단계

6단계

상황발전

위기평가

조치개발과정

조치선택과정

실행계획

실행

사건

 

 

 

 

 

◦국가안보와 연관될 가능성이 있는 사건의 발생

 

◦대통령,합참의장 총사령관의보고, 평가를 수령

◦합참의장의 경고명령발송

◦합참의장은 대통령에게 정제되고 우선순위가 메겨진 위기조치를 보여준다.

◦총사령관은 경계명령과 계획명령을 받는다.

◦대통령은 작전명령을 실행하기 위한 결정을 내린다.

 

조치

 

 

 

 

 

◦세계적 상황에서 인정된 문제의 모니터

◦총사령관의 평가제출

 

◦자각의 증가

◦보고의 증가

◦합동참모의 상황평가

◦합동참모의 가능한 군사조치조언

◦대통령, 합참의장의 평가

◦발전된 방책들을 총사령관이 평가요청메세지에 의해 하부에 임무할당

◦총사령관 평가승인메세지 보고

◦창조되거나 변형된 시차별부대전개목록

◦수송사령부의 전개평가준비

◦위기조치평가

◦합참의장은 대통령에게 조언

◦합참의장은 대통령에 의해 위기조치가 정식으로 선택되기 전 실행계획을 시작하기 위한 계획명령을 보낸다

◦총사령관은 작전명령을 발전시키고 시차별부대전개목록 정교화 한다.

◦병력준비

◦국방장관의 권한에 의해 합참의장은 실행명령을 보낸다.

◦총사령관 작전명령을 실행한다.

◦합동작전계획실행체계의 데이터베이스를 유지한다

◦합동계획실행위원회는 실행상태를 보고한다

◦재배치계획을 입안한다.

결과

 

 

 

 

 

◦국가와 연관된 사건의 평가. 대통령과 합참의장에게 사건을 보고

 

◦대통령과 합참의장 군사적 위기조치개발을 결정

◦총사령관은 위기조치 건의와 함께 예하사령관들의 평가를 보고.

◦대통령은 위기조치를 선택.

◦경계명령에 대통령에 의한 위기조치 선택을 담아 합참의장이 발표

◦총사령관은 예하부대로 작전명령을 보낸다.

◦위기해결

◦병력의 재배치

 

Joint Pub 5-0, Doctrine for Planning Joint Operations,  and Joint Pub 5-03.1 (to be published as CJCSM 3122.01), JOPES Volume I, 합동문서 5-0 합동작전 계획을 위한 교리와 합동문서5-03.1(합참의장 매뉴얼로 발표된) 합동작전계획실행체계 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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