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작품을 감상하는 사람

미술작품을 감상하는 사람들은 감성적이거나 이성적인 태도를 취하는 경우가 많다. 이성적인 태도로 감상하는 사람은 작품 앞에서 심각한 표정을 짓거나 수학문제를 풀기 위해 끙끙거리는 것처럼 보인다. 보통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나름의 논리와 미술에 관한 지식으로 작품을 분석하고 이해하려고 한다. 이미 알고 있거나 만만한 작품 앞에서는 고개를 끄덕이거나 특유의 해박한 달변을 쏟아 내기도 한다. 이런 사람들이 좋아하는 작품은 주로 이성적이며 지적인 요소가 많은 서양의 근대 작품들이나 사실적인 작품이며 인물이 들어가 있는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형식은 내용을 담는 그릇이다`, `밀로의 비너스는 밀로라는 작가가 만든 것이 아니라 지명이다`, `레오나드르 다빈치의 <모나리자>라는 작품에서 다빈치는 성(姓)이 아니고 지명이며, <모나리자> 또한 여자의 이름이 아니다`, `고흐의 자화상 배경에 방사형의 붓질은 시선을 집중시키는 역할을 한다`와 같은 나름의 지식으로 작품을 감상하고 수용한다. 특히 민족, 민중미술 작품들은 거의가 만만하게 이성의 그물에 걸려든다. 좋아하는 형식은 무겁게 그린 유화, 지적이면서 간결한 판화, 동양화, 연필 같은 단색으로 그린 세밀화 따위이다.

하지만 생소하고 난해한 현대미술 즉, 추상, 설치, 비디오, 퍼포먼스 따위의 작품 앞에서는 상황이 달라진다. 그냥 무관심하게 지나치거나 심지어는 `이것도 작품이야?`라는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물론 현대미술에도 이성적인 요소가 많이 숨어있다.

감성적으로 미술을 감상하는 사람들은 미술작품을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이나 패션으로 인식한다. 여기에 장식적인 요소도 가미한다. 예쁘거나 재미있는 작품을 좋아하며 심각하며 주제가 선명한 작품을 싫어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런 사람들이 좋아하는 작품은 주로 화려한 색상의 정물화나 풍경화, 수채화, 비디오 아트, 설치, 퍼포먼스 환경미술 따위이며 풍자한 그림, 추상화도 쉽게 수용한다. 하지만 민족, 민중미술이나 북한미술은 그야말로 재미없어 한다.

물론 이런 식의 이분법적인 구분은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모든 미술작품에는 이성과 감성적인 요소가 들어가 있고, 작가의 사상이나 창작태도에 따라 감성적이거나 이성적인 작품이 공존할 수 있다. 또한 미술작품을 감상하는 취향도 인정되어야 한다. 문제는 편식이다. 아니, 자신의 것을 강조한 나머지 다른 것을 배척하는 태도이다. 이는 다양하고 풍부한 것을 추구하는 예술의 본성에도 맞지 않다. 특히 창작을 하는 사람에게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경험으로 보자면 뛰어난 감성과 재주의 소유자가 미학입문 책 한 권을 다 읽지 못하고 미술대학을 졸업하는 경우는 허다하며, 지식이나 사상을 강조한 나머지 사람 얼굴도 제대로 그리지 못하는 화가도 있다. 어떤 이는 하느님이 공평하게 재능을 주었다고 말하지만 내가 보기엔 게으름의 결과이다. 깡패를 하든 물장사를 하든 게으른 사람은 실패한다. 하물며 게으른 화가가 무엇을 제대로 창조할 수 있겠나.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모든 가치는 이성의 산물이다. 우연하게 만들어지고 향유한다고 해도 결국은 사람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경우에 국한된다. 감성과 상상, 환상도 결국은 이성의 또 다른 모습일 뿐이다. 꽃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학습된 것이며, 맑은 느낌, 색채, 분위기 따위도 주변에 널려있는 가치와 연결되어 있다.

내가 말하는 이성은 위에서 말한 낮은 의미의 지식이 아니라 인간이 끊임없이 추구해온 본질적인 것이다. 이성을 통해 더 풍부한 감성의 세계를 경험하고, 감성을 통해 본질을 꿰뚫을 수 있는 능력은 사람들이 추구해온 영원한 숙제이다. 이것에 예술의 존재근거가 있다.


완벽에 가까운 작품

▶남강마을의 여성들/김의관/조선화/121*264/1966

이번 작품은 우리나라로 치면 `국전`같은 북한의 `국가미술전람회`에서 최고상을 받은 김의관의 <남강마을의 여성들>이란 작품이다. 형식은 조선화이며 창작연도는 지금으로부터 35년 전인 1966년이다.

작품을 간단히 살펴보면, 한국전쟁 중에 인민군을 도와 식량을 조달했다고 하는 경남 남강마을의 여인들을 모습을 그렸다. 실제 있었던 내용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탈곡도 하지 않은 볏더미를 황소에 싣고, 지게에 지고, 머리에 이고 남강을 건너고 있다.

주형상으로 처리된 처녀는 지게와 총을 들고 나아가야 할 방향을 주시하고 있다. 볏더미를 머리에 인 여인들은 주변을 경계하는 눈빛으로 강을 건너고 있다. 탈곡도 하지 않은 볏더미, 손에 든 총, 세찬 강물, 황소의 큰 눈 따위의 화면처리로 작품전반에 긴장감을 만들어내고 있다.

또한 앞쪽의 여백이나 물살, 갈대의 방향처리로 화면의 속도감을 표현하고 있다. 직선적인 느낌도 나고, 각 인물들의 시선처리도 주제와 잘 맞아떨어진다. 정확한 묘사력, 은은한 채색과 농담처리, 표정연출도 좋다. 북한의 입장에서 보자면 거의 완벽에 가까운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사실 워낙 완벽에 가까운 작품이라 별로 할말이 없다. 작품 그 자체로 모든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작품을 볼 수 있다는 것도 행운이다. 내용에 대해 언급하는 것도 유치하다.

내가 조금 관심을 가지는 것은 작품의 주 형상이 여성이라는 것이다. 북한미술에는 여성이 많이 등장한다. 물론 누드나 요염한 자태의 여성은 없다. 대부분 등장하는 남성과 마찬가지로 혁명과 건설에 주역을 담당하는 그런 여성이다. 아직도 북한에는 가부장적인 요소가 많이 남아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사회를 남성의 힘만으로는 발전시킬 수 없다.

북한도 전후복구나 국가재건, 미국의 위협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내기 위해서는 총력전이 필요하고 여성도 남성 못지 않은 역할을 해야만 했을 것이다. 우리나라도 60~70년대 여성 노동자의 희생이 없었다면 지금의 경제성장은 어려웠을 것이고, 경제가 어려운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여성을 좋아한다. 본성적인 의미말고도 여성 특유의 감성이 좋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여성도 남성과 똑같은 꿈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 꿈을 가로막는 사회는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면에서 멍청하다. 그 멍청함을 즐기는 소수의 배부른 남성들은 빼고 말이다. 그래서 나는 여성이 현실을 빌미로 멍청한 남성을 따라 배우지 않았으면 한다.

나는 남성과는 달리 여성은 화합과 창조와 다양함과 평화를 선호한다고 믿는다. 어떻게 아냐고? 어머니와 아내를 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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