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우 (사진가, www.siwoo.pe.kr)

평화활동가이자 사진작가인 이시우 씨가 지난해인 2006년 6월1일부터 '한강하구'에 대해 천착하기 시작해 그간 비정기적으로 다음과 같은 순서로 연재를 해 왔다.

1. 한강하구의 근본문제-관할권
2. 정전협정의 한강하구 규정에 대한 해석
3. 한강하구에서의 민용선박 항행에 관한 규칙 및 관계사항에 대한 해석
    (1953. 10. 3. 군정위 제22차 회의 비준)
4. 한강하구의 비행과 ‘100톤급 바지선’
5. 한강하구 항행의 역사-시선배와 수인선
6. 한강하구 군사사① - 대몽전쟁시기
7. 한강하구 군사사② - 병인,신미양요
8. 한강하구 군사사③-한국전쟁기
9. 한강하구의 갯벌과 간척

그리고 이번에 마지막으로 <10. 한강하구 숲의 역사>를 연재한다. 원래 연재 계획에는 <11. 한강하구와 전쟁의 생활사-양민학살>, <12. 한강하구의 유라시아 지정학> 등 두 꼭지가 남아 있지만 작가는 이를 '차후의 과제'로 남겨두기로 했다. 장기간에 걸쳐 많은 분량의 원고를 쓴 저자께 격려와 함께 감사를 드리면서, 독자 여러분의 성원을 기대한다.

이번 <10. 한강하구 숲의 역사>도 다음과 같은 순서로 10차례에 걸쳐 연재한다./편집자 주

(1)들어가며/고대 한강하구의 숲/신석기시대 한강하구의 숲
(2)
고조선(청동기)시대 한강하구의 숲/점토대토기문화/고조선의 의식주와 숲
(3)
고조선(철기시대) 한강하구의 숲
(4)
백제시대 한강하구의 숲/고구려시대의 숲/신라
(5)
고려시대 한강하구의 숲
(6)
조선시대 한강하구의 숲 /석회/화약/광업
(7)
병선/땔나무/식목/금벌
(8)
일제기 한강하구의 숲
(9)
한국전쟁 이후 한강하구의 숲
(10)
한강하구 숲의 미래/녹색댐/숲의 공적소유화/한강하구 통일의 숲 가꾸기/유엔사와 한강하구 숲

고려시대 한강하구의 숲

대몽(對蒙) 항쟁기는 강화도 역사상 가장 많은 인구와 가장 많은 건물의 집중적인 증가를 보인 시기였다. 그 이전에나 그 이후로도, 심지어 현재까지도 그렇게 많은 인구가 강화에 집중된 적은 없었다. 고려사절요에 의하면 1232년 ‘경도의 호는 십만에 이른다’고 하였다. 개성의 가구수가 십만호였으니 5인 1가구로 계산해도 50만 인구가 된다. 그러나 이들이 모두 강화로 이사 온 것은 아니었으므로, 개경인구의 1/3이 강화에 들어왔다면 그 수는 대략 15만명 정도 될 것이다. 장단과 해주 등 개성 인근에서 이주한 피난민들은 제외하고도 말이다.

1232년 6월 천도에 즈음하여 2령의 군대를 동원하여 궁궐공사를 하였다고 하였으니, 공사에 참여한 군인만도 2000명에 이른다. 1234년 1월, 천도 1년이 지나고서야 궁궐과 관청, 성곽, 사원, 주택 등 도시의 기본 시설이 갖추어졌다. 궁궐과 관청을 둘러싼 성곽의 길이는 3874척(1240m)이었으며, 중성은 2960칸(9472m), 외성은 37,076척(11,864m), 집은 수천호에 이르렀으며 절은 봉은사를 비롯 12개가 넘었다.

1238년 이규보는 ‘고깃비늘처럼 이어진 만가를 멀리서도 끌어당겨 볼 수 있으니 옥루 높은 곳에 비단 장막이 걷어 올려졌네’라고 했으며 1240년에 ‘멀고 가까이 일천개의 푸른 기와집이 들쭉날쭉 이어지고 아침과 저녁으로 만개의 부엌에 푸른 연기가 피어나며 이웃한 먼 나라 만조백관들은 별이 북신에 조아리듯 하고 달려온 나라 백성들은 물이 바다에 조회하듯 하니 봉루에 베푼 잔치는 옛날에 비해 손색이 없다’고 하였다(李奎報, 東國李相國集, 卷7, 次韻李侍郞見和二首).

도시가 새로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엄청난 양의 목재와 석회 등이 사용되었을 것은 당연하다. 최우가 자신의 집을 짓는데 도방과 사령군을 부역시켜 개경의 재목을 실어오게 하고 집동산에 심을 소나무와 잣나무를 실어오게 한 것은 집권자의 호사를 나타냄과 동시에 이미 강화에 대주택과 원림을 조성할만한 재목과 나무가 존재하지 않았음을 반영한다. 더구나 이렇게 무분별하고 무질서하게 지어진 건물들은 수없이 많은 화재로 소실되어 갔다. 제대로 계획되지 않은 채 형성된 도시는 무질서하고 좁게 밀집되었고, 이는 항상 대형 화재의 원인이 되었다.

고려사 권53 지오행조의 기록을 종합하면 1234부터 1257년까지 약20년 동안의 고종 집권기에만 16번의 대형화재가 있었고, 그 피해수는 4~5천호에 이르니, 1000호에 이른다던 집들은 4~5번씩은 불타고 새로 짖고를 거듭한 꼴이다. 이 과정에서 마을과 산중턱까지 맞닿아 있었을 인근의 견자산, 송악산, 남산 등의 숲 역시 불에 탔을 것은 자명하다. 배를 이용하지 않고도 나무를 운송할 수 있는 산림은 혈구산과 고려산 뿐이었으므로 이들 숲 역시 빠른 시간내에 황폐지가 되었을 것이다.

이같은 사정은 이규보의 시를 통해 잘 나타난다. 일국의 재상인 그가 며칠 동안 아궁이에 불을 때지 못하여 솥에는 먼지가 쌓이고 일꾼들이 배가 고파 집을 짓지 못하고 말이 굶주려 쓰러지니 땔나무를 해오지 못하였다고 했다. 이것은 강화의 숲이 천도이후 얼마나 급속한 속도로 고갈되었는지를 나타내준다. 인구의 집중은 주택난 못지않게 식량난을 초래했다. 이규보조차 녹봉이 충분치 못하여 여러 차례 양식이 떨어져 물을 마시며 가난을 참아야 했다(李奎報, 東國李相國集, 卷1, 寓河陰客舍西廊有作).

그의 시 가운데는 동년 노생이 쌀을 빌려달라는 부탁을 받은 사실과 선비의 딸이 밥을 빌러 왔던 일도 기록하고 있다. 재상의 생활이 이 정도였으니 일반 민중들의 사정은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을 것이다. 땔감이 없어진 것은 과도한 남벌과 함께 화전경작이 가장 큰 이유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규보는 강화에 들어와서 사람들이 다투어 새로이 밭을 마련하여 경작하였다고 하였다. 당시엔 갯벌에 대한 간척사업이 진행되기 전이라 밭을 만들 곳은 산비탈뿐이었다. 식량난은 숲을 사라지게 하고 그 대신 밭을 늘어나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땅이나마 전쟁기간 동안에는 농사조차 제대로 지어지지 않았다. 1255년에 큰 기근이 있었고, 그 이듬해에는 기아와 질병이 겹쳐 시체가 길을 덮었다 하였다(고려사절요, 권17, 고종43년 12월).

이 같은 극심한 곤궁은 결국 갯벌간척에 눈을 돌리게 하였다. 나무수종에도 변화가 왔다. 느티나무는 옛부터 널리 사용되었던 나무로서 원삼국시대의 고분인 임당고분, 천마총 관재를 비롯하여 우리나라의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인 무량수전의 기둥에도 느티나무가 쓰이고 있다. 또 기록에서도 삼국사기의 거기(車騎)조에 보면 목재사용을 규제한 내용 중에 수입 귀중목재인 자단, 침향과 같은 서열에 있을 만큼 흔하면서 귀중한 우량재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몽고침입 등 전쟁과 사회적 혼란을 겪으면서 선박 건조사업 및 지배계층에 의한 각종 건축사업은 필연적으로 산림파괴를 가져왔으며 이는 숲 속에서 흔히 분포하던 느티나무가 급격히 줄어들고 소나무, 참나무 등이 상대적으로 많아지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 예로서 고려초 건물인 무량수전 등은 기둥의 전부가 느티나무로 이루어진 반면 조선조 초기 건물인 화암사, 범어사, 무량사 등의 기둥재는 느티나무 외에 소나무와 전나무, 참나무류가 사용된 것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다(박상진, 고려대장경판의재질로본판각지에대한고찰, 인문과학12집, 경북대).

고려조의 나무에 대한 고도의 지식과 벌채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팔만대장경이 있다. 대장경판을 판각하기 위하여 사용할 수 있는 나무의 특징은 우선은 재질이 균일하고 미세하여 글자 한 획 한 획이 깨끗하게 파져야 하며 너무 단단하여 글자를 새기기가 어려워서도 안 된다. 그렇다고 너무 연한 나무는 인쇄를 할 때 빗침부분이 떨어져 나가버리므로 적당치 않다.

이런 조건에 맞는 나무는 그렇게 많지 않으며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소나무, 잣나무, 젓나무 등의 침엽수는 세포크기가 크고(머리카락의 1/2정도) 춘추재의 세포차이가 너무 뚜렷하여 부적합하다. 또 밤나무, 참나무, 느티나무, 물푸레나무 등은 물관의 직경이 무려 0.3mm나 되므로 쓸 수 없다. 그렇다면 적당히 단단하고 세포의 크기가 고르며 조각하기가 쉬운 나무는 대단히 한정되며 그나마 경판을 만들 수 있을 만큼 직경이 크게 자랄 수 있는 나무라야 하는데 이런 나무는 10여종에 불과하다.

경북대학교 임산공학과 박상진 교수가 250여점의 대장경중 표본을 선정하여 분석한 결과에 의하면 대장경경판의 수종은 그동안 알려진 자작나무가 아니라 산벚나무와 돌배나무가 압도적인 비율을 차지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산벚나무는 심변재의 구분이 확실하고 심재는 짙은 적갈색이며 조직이 치밀하고 곱다. 비중이 0.62정도고 잘 썩지 않으며 가공이 쉽다. 조각재, 칠기심재 등으로 쓰이며, 목판인쇄의 재료로서는 최우량재이다. 이른 봄 다른 나무들은 아직 새잎의 푸르름이 시작도 하기 전에 화사한 분홍빛 꽃을 지천으로 달고 있는 나무이다.

이 꽃이 필 무렵이면 멀리서도 쉽게 산벚나무를 구별할 수 있어서 몽골군에 유린당한 육지에서 몰래 몰래 한 나무씩 베어오기에 안성맞춤이었을 것이다. 전국의 어디에서나 자랄 수 있으나 특히 남부지방에 흔히 볼 수 있고 섬지방에도 잘 자라고 있다. 높이 20m, 직경이 거의 1m까지도 자라는 나무이다. 산벚나무는 강화에서는 잘 자라지 않는 수종이어서, 결국 팔만대장경은 강화 선원사와 합천 해인사에 두벌이 제작되고, 선원사 팔만대장경은 해인사로 옮겨진 것이 아니라 몽골군에 의해 불타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돌배나무는 주목된다. 배의 식용역사는 굉장히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데 약 4천년 전의 일산신도시 선사시대 유적에서 발견되어서 무척 오래 전부터 애용해온 것으로 생각된다. 분포지역은 산벚나무류보다는 약간 추운 지방이다. 직경 60cm, 높이 10m까지 자랄 수 있으며 조직이 매우 치밀하고 균일하다. 강도가 강하고 단단한 반면 가공은 비교적 용이하다. 가구재, 기구재, 조각재 등으로 사용되었으며 1915년 일본으로 가져가기 위하여 인쇄를 하면서 누락된 경판 18매를 발견하고 다시 새겨 넣을 때 서울근교의 배나무를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의하면 강화에서 생산된 배를 먹어보고 지은 시에서 ‘본래 강화는 농사가 잘되던 곳이 아닌데 언제부터 가꾸어서 이 같은 배가 생산되었는지 놀랍다’고 하였다(東國李相國集, 卷5, 食俗所號天子梨). 이는 배나무가 대장경판각 당시 강화에 많이 존재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따라서 강화 선원사 대장경의 수종은 배나무가 중심이 되었을 가능성을 염두에 볼 수 있다. 팔만대장경의 경판수는 총81,258장이다. 대장경제작에 들어간 목재의 양은 박상진 교수의 연구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경판에 사용한 목재의 양은 크기별 전체 경판수에 대한 점유비율을 개략적으로 환산한 총재적(總材積)과 마구리에 사용한 목재의 양을 합하면 구할 수 있다. 추정한 경판의 재적은 약 370세제곱미터, 양마구리 재적이 약 80세제곱미터로서 경판과 마구리에 사용한 목재의 총량은 약 450세제곱미터에 달한다. 이를 무게로 환산하면 비중을 0.6-0.7로 보아 약 300톤 정도인데 4톤 트럭에 싣는다면 7-80여대에 해당하는 방대한 양이다.

그러면 450세제곱미터에 달하는 경판재와 마구리재를 얻기 위하여 어느 정도의 원목을 벌채하였으며 운반하는 데는 얼마의 인원이 동원되었는지 추정해보자. 우선 450세제곱미터의 목재를 가공하는 데는 당시의 열악한 기술로 볼 때 원목에서 경판재를 만드는 비율은 적게는 원목의 10%, 많게도 40-50%를 넘을 수는 없다. 따라서 원목은 적어도 1000세제곱미터이상이 필요하였다고 본다. 경판길이가 64cm, 74cm인 것이 대부분이므로 이를 기준으로 본다면 통나무의 길이는 적어도 90cm는 되었을 것이다. 또 통나무의 직경은 경판폭이 24cm이므로 적어도 40cm 이상이라야 한다.

한편 산벚나무와 돌배나무의 첫가지까지의 높이는 약 1-2m정도이므로 직경 40cm의 경우 통나무 한 토막에서 경판은 2장이 채취 가능하고 한 나무 벌채에서 약 1.5개의 통나무 토막이 생산 가능하다. 물론 실제로는 40cm이상의 대경목도 다수 사용되었을 것이나 운반 및 취급의 편의성을 고려한다면 사용 통나무 개수는 10,000-15,000본 정도로 추정되고 통나무를 선정 벌채하여 각판 장소까지 운반하는데 만도 동원된 연인원은 10만명 전후가 아닌가 생각된다.

한편 강화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해인사로 옮긴다고 가정할 때 경판의 포장에 들어가는 총 판자의 양은 244세제곱미터이다. 오늘날처럼 기계로 제재하여 판자를 만들어도 이 양은 엄청난 양이며 나무를 벌채 운반하는 인력까지 생각한다면 막대한 재정적 지원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경판의 총무게는 전체 경판수에다 평균무게 3.4kg을 곱하여 약 280톤, 여기에 포장재의 무게를 포함하면 400-500톤으로 추정할 수 있다. 두 사람이 한 조가 되어 50kg의 포장경판을 운반하면 연 인원 약 1만에서 2만여명이 필요하다(박상진, 고려대장경판의재질로본판각지에대한고찰, 인문과학12집, 경북대/http://bh.kyungpook.ac.kr/~sjpark/tri1.htm 재인용).

대장경에 깃든 우수한 민족문화의 얼과 함께 전란의 와중에서 가혹한 노역을 강요당해야 했던 백성의 고혈과 숲의 파괴를 같이 고려해야하는 몫이 우리에게 남아있다.

삼국시대에 이어 산림파괴가 계속되고 더불어 산림의 이용도가 급격히 높아지면서 고려대에는 민둥산이 나타나기 시작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강화천도기를 기점으로 강화의 숲은 민둥산으로 변해갔을 것이다. 한편 국가재정의 고갈로 관료들에게 녹봉을 줄 수 없게 되자 간척한 땅과 함께 임야를 제공하게 되고 이로 인하여 임야의 사점화현상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땔감을 채취하기가 곤란하게 되었으므로 공용임야에 입산하여 집단적 채취를 하게 되었다. 이같은 특정지역에서의 계속적인 벌채는 마침내 화강암을 주로 하는 강화의 지질 등 자연요인과 결합되어 산지를 황폐화 시키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몽골의 침략은 페르시아의 산림황폐를 결정적으로 초래한 점에 비추어 20년간 거의 매년 이루어진 고려침공 역시 삼림의 황폐를 초래했을 것은 어렵지 않게 예상되는 바이다.

고려조 8대왕 현종은 산림황폐를 우려한 나머지 즉위 4년에 삼림남벌을 경고하고 제한하는 조치를 취했다. 또한 현종22년 신미에 벌채에 적절한 시기에 대하여 ‘입춘후금벌목(立春後禁伐木)’이라 하여 입춘이 지나고 나서의 벌목을 금하였다(황폐지복구사, 산림청, 1988, p77).

그러나 고려초 정부의 이러한 금벌정책은 몽골침략과 강화천도 등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는 그저 속수무책일 뿐이었고, 그 뒤 훼손된 숲이 자연복원 된 흔적을 찾기 어렵다. 고려시대 대몽 항쟁기간은 한강하구의 숲이 결정적으로 파괴되고 갯벌이 간척되는 등 생태환경의 극심한 변화가 초래된 시기였을 것이다. 이와 더불어 숲을 가꾸고, 갯벌을 보호할 민중들의 생활이 파괴되었다는 점에서 전쟁은 자연과 인간과 사회의 조화에 도전한 최대의 적이다.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