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우 (사진가, www.siwoo.pe.kr)

평화활동가이자 사진작가인 이시우 씨가 지난해인 2006년 6월1일부터 '한강하구'에 대해 천착하기 시작해 그간 비정기적으로 다음과 같은 순서로 연재를 해 왔다.

1. 한강하구의 근본문제-관할권
2. 정전협정의 한강하구 규정에 대한 해석
3. 한강하구에서의 민용선박 항행에 관한 규칙 및 관계사항에 대한 해석
    (1953. 10. 3. 군정위 제22차 회의 비준)
4. 한강하구의 비행과 ‘100톤급 바지선’
5. 한강하구 항행의 역사-시선배와 수인선
6. 한강하구 군사사① - 대몽전쟁시기
7. 한강하구 군사사② - 병인,신미양요
8. 한강하구 군사사③-한국전쟁기
9. 한강하구의 갯벌과 간척

그리고 이번에 마지막으로 <10. 한강하구 숲의 역사>를 연재한다. 원래 연재 계획에는 <11. 한강하구와 전쟁의 생활사-양민학살>, <12. 한강하구의 유라시아 지정학> 등 두 꼭지가 남아 있지만 작가는 이를 '차후의 과제'로 남겨두기로 했다. 장기간에 걸쳐 많은 분량의 원고를 쓴 저자께 격려와 함께 감사를 드리면서, 독자 여러분의 성원을 기대한다.

이번 <10. 한강하구 숲의 역사>도 다음과 같은 순서로 10차례에 걸쳐 연재한다./편집자 주

(1)들어가며/고대 한강하구의 숲/신석기시대 한강하구의 숲
(2)
고조선(청동기)시대 한강하구의 숲/점토대토기문화/고조선의 의식주와 숲
(3)
고조선(철기시대) 한강하구의 숲
(4)
백제시대 한강하구의 숲/고구려시대의 숲/신라
(5)
고려시대 한강하구의 숲
(6)
조선시대 한강하구의 숲 /석회/화약/광업
(7)
병선/땔나무/식목/금벌
(8)
일제기 한강하구의 숲
(9)
한국전쟁 이후 한강하구의 숲
(10)
한강하구 숲의 미래/녹색댐/숲의 공적소유화/한강하구 통일의 숲 가꾸기/유엔사와 한강하구 숲

백제시대 한강하구의 숲

기원전 3-2세기 무렵 위만에게 쫒긴 고조선 준왕의 남하시기와 연관하여 강화는 마한의 소국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삼국지에 의하면 ‘마한은 서쪽에 위치해 있고, 50여개국이 있으며 큰 나라는 만여가이고 작은 나라는 수천가로서 총 10여만호이다’라고 하였다(三國志, 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傳30, 韓條). 위 책에 적혀있는 마한 50여개국 중 강화로 추정되는 나라는 소석색국이며 교동도로 추정되는 나라는 대석색국이다(천관우, 고조선사.삼한사연구, 일조각, 1989, p246).

마한지역은 진한 변한에 비해 인구도 많고 세형동검문화 단계에서는 정치문화적인 발달정도도 선진적이었다. 금강과 영산강유역에서 발견된 분묘유적에서 부의 상징인 청동제품들이 다량 분포되어 있는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대동지지에 ‘본래 백제의 검포였는데 신라 경덕왕16년에 김포로 바꾸고 장제군의 영현으로 삼았다’고 했다(大東地志 卷4, 金浦沿革).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본래 고구려의 검포현’이라고 적고 있다(新增東與地勝覽 卷10, 金浦縣). 백제는 삼한의 경험 등 선점집단의 전통을 기반으로 일찍부터 해양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비류와 온조는 이전부터 사용되어 온 연안 및 근해항로를 통해 경기만으로 상륙한 다음 현재의 인천 또는 서울에 정착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이설에는 비류가 동생과 따르는 무리를 이끌고 패수와 대수를 건너서 미추홀에 정착하였다고 했다. 이때 패수의 위치는 예성강이었을 가능성이 크다(이병도, 백제의 건국문제와 마한중심세력의 변동,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 p470). 대수는 임진강과 조강을 포함한 한강하구일 가능성이 크다.

백제의 해양진출은 221년에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구수왕은 ‘한수의 서쪽에서’ 열병을 했다(三國史記 卷24, 百濟本紀2, 古爾王3年條). 이곳은 현재의 인천이나 김포방면으로 추정되는 곳으로 한성에서 강화로 가는 길목으로서 왕의 열병은 강화로의 진출 가능성을 알려준다. 236년(고이왕3)에 ‘시월에 왕은 서해의 대도에서 사냥을 하였는데, 손수 사슴 40마리를 쏘아 잡았다’는 기사가 있다. 서해의 대도는 강화도일 가능성이 많다. 왕이 사냥을 했다는 것은 사냥을 할 만한 숲이 있었다는 것이고, 그 숲은 완전한 원시림이 아닌 일정정도 관리가 된 숲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정치,군사적 행위인 왕의 전렵행위는 당시 서해안을 둘러싼 정세와 관련된 것이었을 것이고, 백제는 마한을 병합하면서 해양활동거점을 탈취하고 그 능력도 흡수하였을 것이다(윤명철, 신편강화사 상, p86). 백제는 3세기 전에 이미 강화지역을 자국의 중요한 영토로 하였다. 백제가 강화를 복속한 이유는 해양으로의 진출 때문이었다. 따라서 국가사업으로 선박을 만드는 일이 중요해졌고 이제 조선업은 가장 좋은 나무를 가장 많이 사용하는 소비처가 된 것은 자명하다.

백제전기의 구의동 유적에서는 쇠괭이 7개와 함께 쇠스랑형 괭이 1개가 나왔는데 백제시기의 쇠스랑은 자루를 꽂는 윗부분은 좁고 끝으로 내려가면서 퍼졌고, 가운데 가지(길이13.5cm)는 아래로 곧추 뻗었으나 양쪽 두 가지는 ㄱ자형으로 생겼으며 아래로 내려가면서 밖으로 퍼졌다. 이것은 풀뿌리를 들추어내는데 알맞게 만든 쇠스랑이다.”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조선기술발전사2, p223)

구의동 유적에서 나온 쇠스랑은 숲을 태우고 난 뒤 흙에 박혀 있는 뿌리를 캐내기 위한 용도의 유물이다. 즉 화전이 시작된 증거가 된다. 인구의 증가는 농경지의 확대를 요구했고 가장 원시적인 방법으로 숲을 태우는 화전이 채택된 것이다. 이미 숲은 농업혁명에 의해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에서의 화전은 일제시대 많은 학자들로부터 산림 황폐화의 제1원인으로 주목되었다. 화전은 몇 년 지나면 지력이 감퇴하여 폐경하게 되고 다시 다른 숲을 찾아 화경을 하게 되므로 화전 및 화전지는 내리는 비에 의해 표토가 침식되고 영양분이 유실되므로 산림황폐의 원인이 된다. 예로부터 잦은 전란, 전쟁, 중과세, 과중한 부역, 유형, 학정 등으로 인한 도피는 거의 유일한 생활수단으로 화전경작을 선택케 했으며 이같은 현상은 후대까지도 끊이지 않았다. 이같은 과정에서 한강하구의 산림은 급속도로 훼손되기 시작했을 것이다. 화전은 산림훼손 뿐 아니라 국토의 훼손이라는 커다란 문제를 안고 있었고, 이것은 사회적 측면에서의 화전민에 대한 생활대책과 국토보호 측면에서의 화전정리라는 과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하게 된다. 이제 숲은 사회모순이 직접 투영되는 장소로 변해가기 시작한 것이다.

백제에서 만든 철판과 쇠칼 등은 일본에까지 널리 전해졌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백제에서는 왜에서 온 사신이 돌아갈 때 철정(철판) 40장을 주었으며 그 후에도 칼과 거울을 왜에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일본서기 권9, 신공기 46년). 일본서기 편년에 의하면 257년에 백제에서 구저라는 사람을 일본에 파견하여 칠지도 1개와 칠자경 1개, 그밖의 여러 가지 보물을 선물로 보낸 일이 있다(일본서기, 신공황후기 52년조). 이는 백제의 철기문명이 높은 수준에 이르렀음을 알리는 기사이다. 백제성립 초기 철광업의 중심지역은 한강하류지방이었다. 철기유물이 많이 드러난 곳은 경기도 양평, 가평지방이다. 철광석을 캐는 광부들 중에는 전업으로 일하던 광부들도 있었지만 부역노동의 형태로 동원된 양인 출신의 농민들이 많았다고 생각된다. 백제의 중앙관청에는 도(刀)부가 있었는데 이것은 그 이름으로 보아 칼 생산을 맡았던 부서로 생각된다.

5세기 후반기 규슈섬에 있던 백제계통 후국의 우두머리의 하나는 구마모도지방에 있던 후나야마 고분의 주인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무덤 안에 있는 무기와 질그릇장신구 등은 모두 백제의 것이었다. 이 무덤에서 나온 칼에는 은 상감으로 된 글자가 있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천하를 다스리는... 대왕의 시대에 대왕의 명령을 받은 관청 사람, 이름은 무리가(지휘하여)만든 것이다. 8월중에 큰 용해가마를 썼다. 4척이나 되는 ☐도를 80번이나 단련해서 60진 3재를 만들었다. 이 좋은 칼을 차는 자는 오래 살고 자손도 많아 세 가지 은혜를 다 받을 것이요 그 통솔하는 바(나라)도 잃지 않을 것이다. 이 칼을 손수 만든 자의 이름은 이태어요 글씨를 쓴 것은 장안이다.’(세계고고학대계3, 일본3, 고분시대, 헤이본샤, p76,1964년/조선광업사1, 재인용)

이 칼이 백제대왕의 명령으로 백제의 기술자들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점, 칼의 글자내용이 백제의 이두로 쓰여졌다는 점에 비추어 이 칼은 5세기 후반기의 백제국왕 개로왕이 북큐슈왕에게 준 것이었다(초기조일관계연구, 사회과학출판사, 1966, p196-220 ).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우선 ‘큰 용해가마를 썼다’는 것이다. 이것은 선철(주철)로부터 강철을 뽑기 위한 용해로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80번이나 단련했다는 것은 백제에서의 열처리 단조법을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60진 3재’는 강철의 질을 규정한 척도단위를 표현한 것인데 매우 좋은 강철을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미 백제가 80련철이라는 선진적인 열처리 단조법을 써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백제의 높은 제철제강기술을 보여주는 유물로는 나라현 이소노가미신궁에 보관되어 전해지는 백제칠지도가 있다. 칠지도는 백련철이라고 했는데 이는 백번 담금질하여 단조한 쇠를 말한다. 이제 철 생산은 철광석에서 철을 용해내는 과정 뿐 아니라 담금질을 위해서도 높은 온도를 필요로 했다. 용해로의 질적 발전에는 엄청난 양의 나무소비가 요구되었고 이는 숲을 더욱 위협했다.

백제에 의해 만들어진 제품가운데는 나라현 동대사에 있는 노사나불상이 있다. 이 부처는 662년에 백제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덕수 국골부라는 사람의 손자 공마려가 757년에 완성한 것이었다. 이 부처는 높이가 16m이고 질량이 380t 이나 되는 굉장한 크기를 가진 부처이다. 이 부처를 제작하는데 구리가 73만 9000근 석이 1만2000근이 들었으며 이것을 녹이는데 숯이 1만8000섬이나 소비되었고 연 217만 공수의 노력이 들었다고 한다(우리나라(일본)고대제철법의 추상, 다다라연구 2호, 1965/조선광업사1, p140, 재인용).

위 기록은 동대사청동불상제조에 들어간 숯의 양을 약 18,000섬이라고 구체적으로 적고 있는 귀한 자료이다. 1섬은 180리터이므로 이는 곧 3,240,000리터이며 숯의 비중이 1.9이므로 질량으로 환산하면 61,560톤이 된다. 숯을 생산하는 데는 4배 질량의 나무가 필요하므로 246,240톤의 나무가 소비되었을 것이다. 직경 1m, 높이 10m의 다자란 참나무(비중0.98) 2천400만 그루가 결국 이 노사나불상을 위해 희생된 것이다. 백제를 비롯 삼국은 모두 불교를 국교로 삼으면서 수많은 청동불상과 범종 등을 제작했으며 이들 유물에는 엄청난 양의 숯과 그 숯을 만들기 위한 더 많은 양의 나무가 소용되었을 것이 자명하다.

전라남도 나주군 반남면 신촌리의 9호무덤과 11호 무덤에서는 5세기 전반기의 세잎사귀고리자루 긴 칼 등이 나왔는데 잎사귀 장식은 나무와 숲과 관련된 상징으로 나무가 무한한 소비의 대상에서 문화적 상징으로 주목받게 된 현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나무의 존재가 문화적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은 나무부족이 가져온 현상으로 나무가 더 이상 무한하지 않으며 귀중한 자원이란 인식이 생긴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고구려시대의 숲

동아시아는 5호 16국 시대였고 고구려와 후조는 중간에 있는 연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해양포위 공격을 기도하고 군수물자를 수송했다. 백제는 낙랑, 대방 등 중국주변세력과 직접적으로 대항하면서 성장했다. 백제의 의욕적인 정복사업은 4세기에 이르러 남방정책을 쓰던 고구려와 충돌하게 되고 낙랑과 대방의 멸망으로 고구려의 해상작전권이 확대되자 양국은 경기만 확보와 탈취를 둘러싼 전쟁에 들어간다. 광개토대왕은 407년 정벌 때까지 예성강 및 한강유역의 백제 활동영역을 완전히 점령하였다. 강화는 백제시대에는 갑비고차였으나 고구려대에서는 혈구군이 되었다. 강화군 불은면 삼성리에는 혈구산이 있고 그 아래에 안양대학교 운동장터는 군사들이 훈련을 했다는 습진벌성이 있었다. 삼성리에는 서문 등의 이름이 남아있어 성의 경계를 추측케 한다. 이것은 고구려대에 삼성리를 중심으로 큰 성곽도시가 형성되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 해양쟁탈전이 시작되었고 고구려는 해상강국으로서 급성장하였다. 위서 백제전에는 472년(개로왕18) 백제가 북위의 효문제에게 사신을 보낸 기록이 있다. 백제가 사신을 보내고자 하나 ‘승냥이와 이리 같은 것들이 길을 막고 있어서...’라고 하여 고구려에 의해 해양교통로가 차단되었음을 알리고 있다. 해양통제력을 장악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함선이다. 함선제조용 목재는 가장 좋은 목재여야 한다. 특히 돛대는 힘을 가장 많이 받는 부분으로 나무를 이어붙일 수 없으므로 수백년 된 거목을 필요로 한다. 한강하구지역 역시 선박제조용 나무를 공급하기 위해 숲에서의 나무벌채가 성행했을 것은 자명하다. 그러나 3국 모두 영토를 장악하고 있었던 기간이 길지 않았으므로 조림이나 효과적인 숲 보호정책을 폈을 것으로 판단되진 않는다. 벌채의 속도가 조림의 속도를 훨씬 앞서가면서 일어났을 숲의 파괴와 축소는 예견가능한 일이다.

한편 구당서 고구려조에 의하면 겨울철에는 모두 구덩이를 길게 파서 밑에다 숯불을 지펴 방을 덥힌다고 하였으니 난방으로 숯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그을음이 생기지 않는 숯은 신라의 서라벌을 비롯 삼국시대 귀족들의 집에선 보편화된 난방재료였다. 난방의 고급화는 나무의 더 많은 소비를 촉진했다. 한편 고대국가의 형성은 전쟁을 통해서 가능했고 전쟁을 통해 유지됐으며 전쟁을 통해 망해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군사와 전쟁이 중요해지기 시작했다. 철기의 위력은 사회의 가장 중요한 부분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으니, 먹고사는 문제인 농업과 죽고 사는 문제인 전쟁이 그것이다. 그중에서도 최대의 소비처는 전쟁과 군사분야였다. 246년 위나라침략군을 격멸한 동천왕의 철기군들은 패쪽갑옷을 입었고 말에는 말갑옷을 입혔다고 했다. 이것은 그만큼 철 생산량이 많아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즙안에서 나온 패쪽갑옷(찰갑)은 길이 3cm, 너비 2cm, 두께2mm정도의 작은 패쪽을 여러 개 꿰어 붙여서 만든 갑옷이다. 이런 종류의 갑옷을 한벌 만들자고 해도 100여개 이상의 쇠패쪽이 필요하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수만 수십만의 고구려군사들이 많은 철을 소비하여 무장을 갖추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조선광업사1, 리태영외, 공업종합출판사, 1991, p103).

철기군 한 명에게 들어가는 갑옷과 이러한 갑옷을 능히 뚫을 수 있는 화살촉과 창과 칼이 경쟁적으로 개발되면서 소비적인 부분인 군대는 가장 많은 철의 소비처가 되었다. 또한 전쟁의 승패를 좌우할 더욱 강한 철에 대한 요구와 집착은 그리스신화의 헤파이스토스처럼 대장장이를 신성화하는 단계에 이르렀을 것으로 보인다. 6세기이후 고구려의 무덤으로 알려진 즙안의 다섯 무덤 중 4호 무덤과 5호 무덤에서는 쇠를 벼리는 사람의 그림이 있다. 이것은 고구려에서 쇠를 벼리는 일이 매우 중요시되고 신성화되었기 때문에 큰 귀족들의 무덤에까지 이런 그림이 나타난다고 인정된다(조선광업사1, 리태영외, 공업종합출판사, 1991, p104).

철기문명의 이른 발달을 가져온 고구려에서는 삼림파괴로 인한 환경재앙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656년(보장왕 15년) 5월 수도에 쇠가 비처럼 떨어졌다는 기록이 있다(삼국사기 권22, 고구려본기, 10, 보장왕15년 5월도). 물론 이 자료를 놓고 하늘에서 운철이 비처럼 떨어졌다고도 생각할 수 있지만 부근의 철산지들에서 쇠가루가 바람에 휘날리어 올라온 것이 수도 상공에 가서 떨어진 것으로 이해 할 수 있다(조선광업사1, 리태영외, 공업종합출판사, 1991, p106). 수도 주변 숲의 집중적인 과벌목은 철광산에서 날아오는 쇠가루 먼지를 걸러낼 수조차 없을 만큼 숲의 황폐화를 불러온 것이다. 벌채를 하더라도 나무는 다시 자라나지만 문제는 나무가 자라나는 속도보다 벌채속도가 훨씬 빠른 인구밀집 지역과 광산지역등에서는 집중적인 숲의 황폐화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한편 금과 은의 사용이 확대되면서 이들 금광석과 은광석을 녹이기 위한 나무의 소비 또한 증가되었다.

금은은 사치품으로, 또한 이웃나라들과의 무역에서도 특수한 화폐상품으로 이용되었다. 430년대의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는 중국의 후위와 매해 사신을 교환하였는데 그때마다 황금 200근과 백은 400근을 보내어 무역을 진행하였다(위서, 100권, 고구려전). 고구려는 605년에 일본에 장륙불상주조용으로 황금 300량을 보내주었다(일본서기, 추고기, 13년조).

이중 400근의 은 생산에 들어간 나무만을 계산해보자. 은 400근은 64000돈이며, 은 5돈 생산에 숯 1.7톤이 소용되므로, 숯은 총 10,944톤이 소비되었고, 이를 위해서는 나무 43,776톤이 필요하므로 결국 참나무 약 4백만 그루가 희생되었다.

얼핏 보면 고구려시기에 와서 동의 가치가 매우 떨어진 것처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실지에 있어서 이 시기 동의 가치는 더욱 높아졌다. 왜냐하면 삼국시기 이후부터 동은 이전처럼 농사도구나 무기를 만드는 청동합금의 원료로 이용되었을 뿐 아니라 값진 장식품이나 귀중품들을 만드는데도 많이 이용되었기 때문이다. 4세기 중엽부터 불교가 보급되면서 동은 불교계에서 널리 이용되었다(조선광업사1, 리태영외, 공업종합출판사, 1991, p116-117). 남포시 용강 일대와 황해남도 장연 일대에도 오랜 역사를 가진 동광산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또한 생활인구의 증가와 함께 기초 생활용품인 그릇 역시 많이 구워졌다. 박은식의 한국통사에 의하면 일본사람들이 무순탄광을 개발하다가 고구려사람들이 만든 자기그릇과 그 파편들을 발견하였는데 그 제법이 매우 교묘하다고 하였다(조선광업사1, 리태영외, 공업종합출판사, 1991, p120).

고구려시기 나무와 숲의 남벌을 막을 수 있는 기술발전의 계기가 있었다. 그것은 석탄의 발견이었다. 요양, 안산을 중심으로 하는 요동지방에서 석탄을 처음으로 개발, 이용하였다고 볼 수 있는 자료들이 있다(조선기술발전사자료집 4집(광업편), 고등교육도서출판사, p105, 1963). 삼국시기에 이미 석탄자원 발견에 대한 자료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제4진평왕 31년 1월조/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 제5태종4년 7월조). 지금의 무순탄광을 중심으로 한 요동지방에는 열량이 높은 석탄이 많이 매장되어 있다. 그러므로 고구려 사람들은 이곳의 석탄을 채굴하여 도자기를 굽거나 철을 생산하는 연료로 이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석탄을 이용하면 도자기를 굽거나 철광석을 녹이는데 목탄을 이용하는 것보다 노력이 적게 들고 그 생산량이 많기 때문에 도자기생산과 철 생산량을 높일 수 있었던 것이다. 또 석탄에는 나무에 비해 열을 내는 기본원소이며 환원제가 되는 탄소가 많이 들어 있기 때문에 도자기로와 제철로들에서 높은 열량을 내는 좋은 연료로 널리 사용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조선광업사1, 리태영외, 공업종합출판사, 1991, p123).

그러나 이 석탄이 나무연료난을 해결할 만큼 보편화되었을지는 의문이다. 영국이 산업혁명기 석탄을 실용화할 수 있었던 것은 석탄 그 자체가 아니라 코크스를 발명함으로서 가능했기 때문이다.

16세기 중엽 이후 유럽을 덮친 삼림자원의 고갈, 결핍은 땔나무와 숯의 부족에 따른 심각한 에너지위기를 불러왔다. 그 가운데서도 에너지위기가 가장 심각한 양상을 보인 것은 영국이었다. 이에 대하여 영국이 취한 위기극복 대책은 대체에너지로서의 석탄을 가정용, 공업용 연료로서 조직적으로 이용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석탄은 용광로 내에서 연화용융하거나 분화하므로 통기성이 악화되어 안정된 작업이 곤란하였다. 따라서 영국 A.데이비 부자(父子)는 이러한 문제를 개선하기 위하여 미리 코크스화하여 용광로에 넣는 방식을 개발하여 1735년 처음으로 코크스만으로 제철하는 데 성공하였다. 따라서 코크스 발명이 없는 석탄사용은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1952년 장항제련소의 기록에 의하면 일제시대 용해로연료로서 코크스만을 사용하던 것을 그 후 코크스 구입난으로 무연괴탄을 시용, 성공한 결과 그 이후로는 무연괴탄만 사용하였다고 한다(한국광업지, 1952, 윤성순, 대한중석광업회사, p37).

코크스가 아닌 석탄만으로도 연료로 이용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러나 석탄은 나무연료에 비해 흉악한 것이었다. 지독한 연기와 냄새 때문이다. 석탄이 나무소비를 줄일 만큼 보편화되는 데는 역시 한계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고구려 역시 화전농법이 시행되었다. 무순의 고이산성에서 발굴된 고구려유물들 가운데는 단조하여 만든 쇠도끼, 쇠괭이, 쇠호미가 있었으며 즙안에서 나온 고구려시기의 유물가운데서도 쇠보습과 함께 쇠도끼, 쇠낫 등이 있었다(즙안현문물지<중문>길림문물지편찬위원회, p209-212, 1984/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조선기술발전사2, 1994, p223 재인용). 이 같은 사실을 통하여 고구려가 일찍부터 철기농구를 이용하여 토지를 대대적으로 개간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벤 나무는 개간하려는 땅에 펴서 말린 다음 바람이 부는 쪽에서 불을 놓아 그루터기와 풀종자들을 모조리 태워버렸다. 그 후 불터에 남은 재를 땅속에 갈아엎고 농사를 지었을 것이다. 이 방법의 장점은 첫째로 불태운 자리에서 2-3년 혹은 4-5년은 김이 무성하지 않으며, 둘째로 많은 양의 재를 갈아엎었으므로 2-3년간은 거름을 주지 않아도 농작물의 소출이 높으며, 셋째로 각종 벌레와 병균이 죽어 병해충의 피해를 덜 입으며, 넷째로 비교적 적은 노력으로 많은 땅을 개간하여 농사지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방법은 일제시대까지도 일부 산간지대 농민들 속에서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 방법은 오랫동안 산림속에서 형성된 유기물질을 모두 무기물질로 변하게 하여 토양영양성분을 파괴하므로 개간된 후 영양관리를 잘하지 않으면 농작물의 소출을 높이지 못한다. 그 당시만 하여도 아직 토양안의 영양물질에 대한 지식이 깊지 못하였던 관계로 이 문제는 땅을 쉬게 하는 방법으로 해결하였다(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조선기술발전사2, p223).

이같은 화전농법은 백제에 이어 고구려시대에도 한강하구지역의 주민들에게 널리 사용되었을 것이다.

신라

고구려와 나제동맹의 대결구조 속에서 한강점유를 둘러싼 각축전이 벌어진다. 신라는 해양력을 바탕으로 성장하여 진흥왕 때는 나제동맹을 결렬시키고 백제를 공격, 한강유역을 차지한 후에는 북한산주를 설치하였다. 북한산주는 경기도 하남시와 강동구 일대로 추정된다. 신라는 한강하구와 경기만을 장악해갔으며 곳곳에 수군기지를 두고 함대를 양성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미 삼국사기에는 467년(자비마립간10) 신라가 전함들을 수리하였다는 기사가 나온다(삼국사기 권3, 신라본기3자비마랍간10년). 583년(진평왕5)에 선부서(船付署)를 설치한 사실은 신라 해양력의 일단을 보게 한다.

수의 중국통일로 수와 고구려의 전쟁이 불가피하게 되자 신라는 경기만을 통해 수와 국교를 맺고 고구려와 적대하게 된다. 당이 건국된 뒤 소정방이 백제를 공격하기 위해 660년 대규모 수로군을 이끌고 황해를 건넜다. 이때 신라의 태자인 김법민은 병선 100척을 동원하여 덕물도(덕적도)에서 대기하였다가 연합하여 금강하류 연안에 상륙한 후 수륙양면 작전으로 사비성을 공격, 벽제의 항복을 받아낸다. 이때 덕적도로 집결한 신라의 군대는 남양, 인천, 김포와 강화에 주둔한 군대였을 것이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고구려, 백제의 해양력을 흡수하였고 당나라와 격돌하는 과정에서 그 능력은 발휘되었다. 671년(문무왕11)신라는 당의 조선70여척을 격파하고 673년에는 당의 침입을 경계하기 위해 대아찬인 철천을 파견하여 병선100척을 거느리고 서해를 지키게 하였다(삼국사기 권7, 신라본기7, 문무왕 13년). 이후 당은 말갈, 거란병과 연합하여 신라의 북변을 내침, 9번에 걸친 싸움을 하게 된다. 이때 신라는 호여(파주임진강)와 왕봉(한강행주) 일대에서 대승을 거둔다. 그해 겨울 당나라군대는 우잠성(황해도 금천군 우봉리)을 치고, 거란, 말갈병은 대양성, 동자성(김포통진)을 점령하였다.

한강하구를 둘러싼 나당간의 싸움이 계속됨으로써 한강하구는 전화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결국 신라가 매초성전투와 기벌포해전으로 당의 침략의지를 분쇄함으로서 735년 대동강 이남에 대한 신라의 지배권을 인정받게 된다. 위의 사료들로 보건대 신라는 상비수군병력으로서 100척의 함선을 거느리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으며 파주-김포-강화에 이르는 조강, 즉 한강하구지역은 나당세력의 주요 전선으로서 대치했음을 알 수 있다. 전란에 휩싸인 전선에서의 삼림의 파괴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으며 선박 건조를 위한 소나무의 급증하는 소비로 숲의 황폐화를 가속화했을 것이다.

한편 신라 또한 1세기 전반기에 쇠를 녹일 때 숯을 썼다는 사실이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삼국유사 권1기이, 탈해왕조). 삼국사기 강수열전에서 학자였던 강수가 일찍이 부곡(가마골)의 야장쟁이의 딸과 사귀여 그와 결혼했다는 이야기가 있다(삼국사기 권제46, 렬전6, 강수). 이것은 철을 다루는 야장쟁이가 부곡민이면서도 독특한 지위를 인정받고 있음을 의미한다. 신라초기 144년(일성니사금 11년)에 민간에서는 구슬과 함께 금,은을 함부로 쓰지 못하게 하는 법령을 채택하였다(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제1, 일성니사금 11년).

이는 나무부족으로 인한 귀금속 광물의 제련에서 오던 연료 압박을 시사하는 기사로 읽혀진다. 자원이 부족해지자 계급적 통제가 강화된 것이다. 661년 5월에 술천성을 지키는 싸움에서 철질려라는 마름쇠를 많이 만들어 성 밖에 깔아놓음으로써 이웃나라 군대와 말들이 다닐 수 없게 한일이 있었는데(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 무렬왕 8년 5월조) 이것은 쇠로 만든 여러 가지 종류의 무기가 대량으로 생산되었던 사실을 보여준다. 철제무기 사용의 급증은 이의 생산에 요구되는 나무와 숲의 벌채를 수반하였으므로 전쟁은 숲을 파괴시킨 제일 원인이 되었다.

분황사에는 전탑이 세워져 있다. 이는 신라인들의 생활에서 벽돌이 중요한 건축재료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서양자료에 따르면 1입방피트의 벽돌을 구우려면 1코드 이상의 땔나무가 필요했다. 1코드는 128입방피트이므로 결국 부피로 치면 벽돌의 128배에 달하는 땔나무가 필요했다(숲의서사시, 존펄린, 따님출판사, 2002, p122). 결국 토기와 더불어 벽돌굽기 또한 나무와 숲의 파괴를 가져온 원인이었다.

참고로 발해의 철생산 기술 또한 높은 수준을 가지고 있었는데 책부원귀에는 836년 당나라 개성원년에 그 치정절도사가 황제에게 상소하여 이후부터 발해국에서 가져오는 숙동(잘 정제된 정동)을 금지하지 말기를 요청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책부원귀 권999, 청구조). 발해의 숙동을 당나라에 수출하였다는 기록은 <신당서> 발해전에도 있다(조선광업사1, 리태영외, 공업종합출판사, 1991, p165 재인용). 중국의 동제련법의 발전사를 보면 조동생산은 이미 오래전에 알려졌지만 발해의 숙동과 같이 잘 정제한 질 좋은 동은 명나라시기에 와서야 널리 생산되었다(중국고대광업개발사(중문), p267-270, 1980).

숙동 생산에서의 기본원리는 제1차동제련로에서 생산된 조동을 정련로에서 다시 한번 잘 정제하는 것이었다. 정련로에서는 이미 생산된 조동을 다시 녹였는데 여기에 녹임감으로 석회석(10% 이하)을 넣는다. 이때 석회석은 조동을 쉽게 녹이면서 동과 버럭(맥석)을 갈라내는 작용을 하였다. 그리고 노안에 석영질 녹임감이 있는 조건에서 온도를 1200-1350℃를 보장하고 바람을 세게 불어넣으면 정제한 숙동이 생산되었다고 한다(조선광업사1, 리태영외, 공업종합출판사, 1991, p168). 결국 숙동의 생산에서 결정적인 전제는 1350℃의 고온이었고 그 숨겨진 공은 나무와 숲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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