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우 (사진가, www.siwoo.pe.kr)

평화활동가이자 사진작가인 이시우 씨가 지난해인 2006년 6월1일부터 '한강하구'에 대해 천착하기 시작해 그간 비정기적으로 다음과 같은 순서로 연재를 해 왔다.

1. 한강하구의 근본문제-관할권
2. 정전협정의 한강하구 규정에 대한 해석
3. 한강하구에서의 민용선박 항행에 관한 규칙 및 관계사항에 대한 해석
    (1953. 10. 3. 군정위 제22차 회의 비준)
4. 한강하구의 비행과 ‘100톤급 바지선’
5. 한강하구 항행의 역사-시선배와 수인선
6. 한강하구 군사사① - 대몽전쟁시기
7. 한강하구 군사사② - 병인,신미양요
8. 한강하구 군사사③-한국전쟁기
9. 한강하구의 갯벌과 간척

그리고 이번에 마지막으로 <10. 한강하구 숲의 역사>를 연재한다. 원래 연재 계획에는 <11. 한강하구와 전쟁의 생활사-양민학살>, <12. 한강하구의 유라시아 지정학> 등 두 꼭지가 남아 있지만 작가는 이를 '차후의 과제'로 남겨두기로 했다. 장기간에 걸쳐 많은 분량의 원고를 쓴 저자께 격려와 함께 감사를 드리면서, 독자 여러분의 성원을 기대한다.

이번 <10. 한강하구 숲의 역사>도 다음과 같은 순서로 10차례에 걸쳐 연재한다./편집자 주

(1)들어가며/고대 한강하구의 숲/신석기시대 한강하구의 숲
(2)
고조선(청동기)시대 한강하구의 숲/점토대토기문화/고조선의 의식주와 숲
(3)
고조선(철기시대) 한강하구의 숲
(4)
백제시대 한강하구의 숲/고구려시대의 숲/신라
(5)
고려시대 한강하구의 숲
(6)
조선시대 한강하구의 숲 /석회/화약/광업
(7)
병선/땔나무/식목/금벌
(8)
일제기 한강하구의 숲
(9)
한국전쟁 이후 한강하구의 숲
(10)
한강하구 숲의 미래/녹색댐/숲의 공적소유화/한강하구 통일의 숲 가꾸기/유엔사와 한강하구 숲

 

고인돌 농경은 천문을 낳고, 천문은 권력을 낳고, 권력은 새로운 고인돌을 낳았다. [사진 - 이시우]
고조선(청동기)시대 한강하구의 숲

청동기시대에서 철기시대에 이르는 기간의 역사적 실체는 고조선이다. 고조선의 영역을 한강까지 보는 경우도 있으나 아직은 논쟁의 소지가 있으므로 고조선과 같은 시대에 한강하구에서 이루어진 숲의 역사정도로 범위를 정해두고 이야기를 시작하자.

환웅이 태백산 신단수에 내려와 신시를 열었다는 단군신화는 숲을 고조선 건국의 배경으로 하고 있다. 삼국유사 발해조에서 후위서를 인용하여 소개한 고아시아족의 명칭중 하나인 물길勿吉(Wu-tsi)이란 말은 “숲에서 생활하던 사람들”을 가리키는 용어이며, 말갈靺鞨이란 말은 “물가에서 생활하던 사람들”을 가리킨다. 만주의 자연환경과 기후구분에 따른다면, 북쪽 한냉대 습윤기후(Dwb)의 삼림지역(Taiga)에서 수렵을 위주로 생활하던 사람들을 물길勿吉(Wu-tsi)이라고 한 데 비하여, 남쪽 한냉대아습윤기후(Dwa)의 강가·평야지역에서 농경생활을 하거나 수렵에서 농경으로 이행하는 과정에 있었던 사람들을 말갈(Moxo)이라고 한 듯하다(古代東北アジア史硏究.三上次男 pp.223~244).

청동기시대는 이미 숲을 배경으로 성장한 부족들이 정착하며 지역세력을 만들어 가던 정황을 추측케 한다. 강화 삼거리의 팽이형토기는 새로운 단계에 들어선 문명의 존재를 암시케한다.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무문토기가 한강유역에 전래된 것은 강화도 삼거리에서 무문토기전기형인 팽이형토기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서북한지역으로부터 일찍이 한강유역까지 확산 전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팽이형토기가 전래됨으로써 이 지역 즐문토기문화인들은 새로운 토기문화에 접하게 되어 그들 토기의 제작 수법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한강하구와 인접한 파주시 교하리와 양주군 진중리 등에서 무문토기 태토에 즐문이 새겨진 토기편이 발견되었고 춘천 교동 동굴주거지에서도 무문토기와 태토가 비슷한 토기가 나왔다. 그 중에는 무문소호도 있어 역시 무문토기와의 접촉에서 즐문토기가 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무문토기 중기형의 대표적인 것은 공열문토기라 할 수 있는데 공열문은 원래 함경북도 두만강 유역에서 나타난 문양형식인데 함흥평야를 거쳐 동해안을 따라 남하하여 한강상류지방으로 들어와 점차 전 지역에 확산되었다. 한강유역 평야지대 구릉상에서는 거의 발견되고 있어 공열문토기인들이 한강유역에 들어올 때 급격한 인구증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의 잠실, 영동지구의 야산일대에는 수 십호씩의 수혈주거취락들이 몰려있었다. 후기 무문토기는 한마디로 흑도라고 할 수 있다. 흑색마연수법은 전기, 중기의 무문토기 제작수법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우선 태토가 다르고 다음으로 연기를 씌운 수법이 다른데 이것은 굽는 방법에서 어느 정도 발달된 시설물을 이용한 것임을 알 수 있다(한국청동기문화연구 p338-344 임병태 학연문화사 19981.15).

강화도 삼거리에서 출토된 토기가 중요한 것은 이것이 800℃ 이상의 고온을 필요로 하는 로爐기술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술은 청동기와 철기문명을 일으키는 결정적인 조건이 되었다. 북에서 행한 다음의 질그릇소성실험은 1,200℃의 고온을 내는 가마시설과 숯이 청동기제작기술의 전제였음을 추론케 한다.

질그릇은 보통 800℃ 정도에서 구워낸다. 우리나라 신석기 및 청동기 시대의 질그릇 가운데 불그스레한 밤색빛이 도는 것들은 대개 800℃ 정도에서 노천에서 구워낸 것들이다. 신석기 질그릇 가운데는 잿빛이 도는 굳은 도질그릇이 적지 않다. 서포항 유적 신석기시대 말기의 새김무늬 그릇을 실험 분석한데 의하면 그 소성온도는 1,200℃이며 내화도는 1,400℃ 정도에 이른다고 한다. 이것은 아주 높은 온도에서 구워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러한 질그릇은 노천이 아니라 비교적 잘 정비된 가마시설에서 구워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나라에서 청동기시대는 기원전 2000년 초에 시작되었다. 청동기는 선행한 석기제작기술과 질그릇 제작기술이 일정한 수준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 구리의 녹음점은 1,083℃이지만 청동은 700-800℃에서 녹일 수 있다. 1200℃에 이르는 높은 열도에서 구워지는 질그릇은 해당한 발전된 가마시설과 기능로력을 요구하며 또 질 좋고 다양한 청동기의 제조는 높은 전문기술과 협동로동을 필연적으로 요구하게 되었다(조선수공업사 p12-13 손영종, 조희승저 1990 사회과학원력사연구소).

청동기를 생산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로안에서 야금을 시작할 때에는 먼저 나무와 숯을 넣고 다음에 동광석을 넣었으며 용재로는 석회석을 넣었다고 생각된다. 그 웇층에 다시 나무와 숯, 광석과 용재들을 번갈아 쌓아올린 다음 불을 지폈다. 불이 달려붙기 시작하면 풍구를 이용하여 로안에 바람을 불어넣어 로안의 온도를 높였다고 인정된다. 연기가 나오는 정도에 따라 로위의 연기구멍을 조절하였다. 이러한 청동야금로의 형태와 청동야금법은 신석기시대말기 질그릇로의 형태와 질그릇 굽는 방법을 본따서 더욱 발전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선조들은 보다 합리적인 청동야금로와 풍구를 창안리용함으로써 로안에서 1천 수백도 이상의 높은 온도를 얻을 수 있었다. 다음으로 우리선조들이 창안한 청동야금기술에서 중요한 문제의 다른 하나는 야금로에 숯과 동광석, 연, 아연광석들을 합리적으로 쌓아놓고 녹이는 방법문제였다. 우리선조들은 숯으로는 열량이 높은 참나무숯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나무들의 숯을 이용하였다. 그리고 오랜 경험에 기초하여 숯의 량과 여러 가지 광석들의 비율과 그 량을 조절하였다(조선광업사1 리태영외 공업종합출판사 1991 p26.27). 밀폐된 질그릇 로의 흔적은 함경북도 온성군 삼봉구의 청동기시대 유적지에서 발견되었다(위책 p30).

숯이 아니고서는 천수백도의 온도를 얻을 수 없다. 청동기 생산을 위해 사용된 숯은 그자체가 막대한 양의 나무연료를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60파운드(2.880kg)짜리 구리 주괴 하나를 만드는데 필요한 6톤의 숯을 구우려면 120그루의 소나무, 즉 500평방미터에 가까운 소나무 숲을 베어야 했다. 고고학자들은 키프로스에서 채굴되고 정련된 구리주괴 200개가 청동기시대의 한 난파선에 실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정도의 양을 생산하려면 거의 2만4000그루의 소나무를 희생시켜야 했을 것이다. 기원전 14세기와 13세기 유럽에서의 활발한 주괴 교역은 해상운송을 통해서 또한 광활한 삼림의 벌채를 동반하면서 이루어졌다. 구리산업으로 매년 평균적으로 4-5평방마일의 숲이 벌채되었다(숲의서사시. 존펄린. 따님출판사. 2002. p69).

청동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숯막이 따로 존재해야만 했다. 숯을 만드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땅을 파고 흙으로 둥그런 벽을 세워 지름 5m 높이 2m정도의 가마를 만든다. 아궁이는 위에 내고 그 옆에 나무를 넣는 문을 낸 후 반대편에 굴뚝을 뚫는다. 가마의 벽은 3m-4m가 넘어 몇 년을 쓸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하게 짓는데 덮개의 흙은 나무를 다 들어 보낸 후 초벌, 애벌, 세벌에 거쳐 두들겨 다져서 만든다. 이 작업을 등치기라고 하는데 숯막의 일 중 가장 힘든 일로 숯막의 일꾼들은 힘겨움을 잊기 위해 “에헤야 탄이야 에헤야 탄이야”하는 노래를 부르며 등치기 작업을 반복한다. 가마가 완성되고 참나무나 소나무 숯감이 다 넣어지면 불을 지피는데 불을 놓은 지 나흘쯤 되면 굴뚝에서 나오던 하얀 연기가 파랗게 변한다. 이것은 나무가 거의 다 탔다는 징후이며 그러다가 연기가 끊기면 막았던 가마 문을 조금 뚫고 불 빛깔을 보아 잘 익은 감색이 보일 때부터 다음 작업에 들어가는데 이때 불의 빛깔을 보는 것이 기술이다.

불에 탄 나무를 그대로 가마에 두고 식혀도 열이 천천히 식으면서 숯이 되는데 이러한 숯을 흑탄 또는 검탄이라고 하며 흑탄은 질이 좀 떨어지므로 더 좋은 숯을 얻기 위해 벌건 불기운이 있는 나무를 꺼내어 흙을 덮어서 열을 식혀야만 겉면에 흰빛을 띠는 단단한 숯을 얻을 수 있는데 이를 백탄이라고 부른다(http://www.charmsoot.com/charchol05.htm). 흔히 볼 수 있는 숯은 대부분 검탄이다. 400∼700℃의 온도에서 3∼4일 정도 구워낸 숯으로 가마의 불을 끄고 공기가 들어가지 않도록 가마 내부를 막은 다음 만들기 때문에 재가 묻지 않아 색깔이 검다. 백탄은 1000∼1200℃의 온도에서 7일 정도 구워낸 숯이 백탄이다. 숯이 거의 구워지면 가마 위에 공기구멍을 내어 공기를 불어넣은 다음 숯을 꺼낸 뒤 석회와 모래, 흙을 혼합하여 만든다. 이처럼 토기를 굽기 위한 재료인 숯을 만드는 과정에서 이미 천문학적인 양의 나무와 숲의 파괴를 동반한다.

결국 무문토기와 청동기가 제작되기 위해서 필요했던 높은 온도의 재료는 다름 아닌 나무였다. 수많은 나무와 숲이 토기와 청동의 제작을 위해 로안에서 사라졌다. 청동기시대에는 북으로부터의 집단이주로 서울은 말할 것도 없고 북한강에서부터 한강하구까지 광범위한 청동기유적이 발견, 조사되었다. 춘천지역에서 양평지역에 이르기까지 많은 청동기유적이 발견되었으며, 포천에서 가평을 이어주는 교통로 역할을 했던 조종천변에서도 무문토기가 발견되었다. 가평 달전리에서는 공렬토기계 무문토기와 불기운을 받은 붉은색 소토의 노지, 아궁이등이 발견되었다. 이는 춘천지역 거주지 유적에서 발견된 것과 동일하다. 청동기시대부터 이미 한강은 인구급증과 그에 비례한 문명과, 그에 비례한 숲의 파괴가 본격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청동기시대에 이르러 고조선이 성립되면서 청동기는 국가와 거수국들에서 활발하게 제작되기 시작했고 광범위한 청동기의 확산은 머지않아 숲의 고갈을 불러왔으며 연료난은 새로운 기술, 즉 철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것은 문명사에서 청동기와 비교할 수 없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철기문명을 발생시킨 원인이 연료인 나무의 부족이었다는 해석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소아시아 지방에서 이루어진 다음의 과정은 우리에게도 참고할 만하다.

구리 생산을 위축시켰던 연료위기는 야금가들로 하여금 철을 다루게 해준 계기가 되었다. 청동기 시대의 키프로스 사람들은 구리 함량은 4퍼센트를 넘지 않지만 철 함량은 40퍼센트나 되는 광석을 제련했기 때문에 똑같은 양의 연료를 쓰더라도 구리보다 훨씬 많은 철을 얻어낼 수 있었다. 요컨대 철제련은 연료가 귀해졌을 때 시작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키프로스의 구리선광찌꺼기에는 많은 양의 철이 함유되어 있었다. 연료가 충분했던 시절에 야금가들은 원광만 제련했지 큰 무더기로 쌓인 슬래그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연료 구하기가 어려워지면서 생산을 줄일 수밖에 없게 되자 야금가들은 슬래그 더미에서 '황금'을 찾아냈다. 슬래그에 엄청난 양의 철이 함유되어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망치로 두드리면 간단하게 철을 떼어낼 수 있었다. 다시 말해 가열과정을 거치지 않고도 슬래그로부터 철을 분리해 냄으로써 연료부족이라는 제약을 극복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들이 철을 얻는데 성공함으로써 지중해와 유럽에 철기시대로 진입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었다(숲의서사시, 존펄린. 따님출판사 2002. p71-73).

존 펄린은 사회를 바꾼 기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한편 좌전左傳에 ‘진국晉國이 기원전 513년에 솥(鼎)을 철로 주조하고 그 표면에 선자宣子의 ‘형서刑書를 주록鑄錄하였다’고 했는데 이는 중국에서 철의 주조에 관한 가장 오랜 기록이다. 궈모뤄(郭抹若,1892-1978)는 철제농기구에 의한 심경법深耕法의 도입이 노예제도에서 봉건제도에로의 이행에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다고 하였다. 이처럼 기술에 의한 사회의 발전은 우리의 상식 속에 자리잡은 유력한 가설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사실은 기술에 의해서 사회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요구에 의해 기술이 발명되고 선택된다. 설령 새롭고 혁신적인 기술이 발명되었다 해도 그것을 수용할 사회의 요구와 가치가 형성되어 있지 않을 때 그 기술은 사장된다.

유럽에서 증기기관이 발명된 것은 고대희랍시대였지만 발명자였던 헤론의 아이디어는 기껏 장난감을 만드는 것으로 끝났다. 당시의 노예제사회에서 증기기관이 도입된다는 것은 10명의 노예대신 한명의 노예만이 일하면 되는 것을 의미했고, 그것은 노예제사회의 붕괴를 가져올 불경이었다. 그러나 산업혁명기 부르조아사회의 요구는 중세장인들의 특권을 해체하고 대량생산체제를 완수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당시의 시대정신과 사회적 요구에 증기기관은 정확히 부합한 기술이었다. 결국 유럽은 1800년이 지나서 사회의 발전이 이루어지고서야 증기기관을 받아들인 것이다.

한강하구에서의 철기시대의 도래 또한 기술요인이 아닌 사회요인에서 찾을 필요가 있다. 아마도 그 변화는 산정상부에 위치한 강화 고천리와 교산리 고인돌군에서 찾아지게 될 가능성이 높다. 과연 철기를 선택하고 수용할 내재적 조건을 마련한 새로운 세력은 있었는가? 있었다. 점토대토기(덧띠토기)를 만든 집단이 그들이다.

교산리고인돌 조강 건너 북녘땅이 지척/조선의 고인돌로 오천년/남한의 고인돌로 오십년. [사진 - 이시우]
점토대토기문화


점토대토기는 표면이 갈색·적갈색·흑갈색이고 바탕흙은 점토에 가는 모래를 약간 섞었으며, 아래로부터 위까지 손으로 빚어 만든 다음 아가리에 덧띠를 덧붙인 토기이다.

점토대토기유적의 첫 번째 특색은 강이나 바다를 내려다 볼 수 있는 고지에 위치해 있다는 점이다. 전형적인 정착농경취락의 특색을 보이는 공렬토기, 각형토기, 송국리형토기문화 등이 강변평야지대나 저구릉지대에 위치한 것과 현저히 구별된다. 구리시 수석동 유적은 한강의 가파른 절벽 위 구릉상에 위치해 겨울삭풍과 기후조건을 고려하면 농경민의 취락입지로 보기 어렵다. 춘천시 칠전동은 공열토기문화의 취락인 춘천시 서면 신매리나 동면 거두리 같은 강변평야지대나 저구릉지대와 달리 가파른 산록경사면에 위치하고 있다. 여주 멱곡리, 파주 심학산등도 마찬가지 입지이다. 한반도 남쪽 어느 지점에선가 처음 출현한 점토대토기문화는 불과 2세기 남짓한 동안에 백령도로부터 한강을 따라 서울권, 춘천 칠전동, 강원도 양구 해안면 강원 영동의 양양 군지리와 강릉 송림리 등 태백산맥의 심심산중뿐 아니라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한반도 전역에 확산되었다. 공열토기문화와 비교하면 점토대토기문화의 유별난 확산속도는 두드러진 것이고 이를 가능케 한 사회적 성격은 무문토기문화의 그것과는 분명 다르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송국리형문화나 공열토기문화가 적당한 지형에 정착하는 것을 목적으로 확산된 것과는 달리, 점토대토기문화의 경우는 사방으로의 확산자체가 우선하는 목적이었기 때문에 지형지리적 조건이나 상황은 부차적인 고려사항에 불과했던 것으로 보인다. 점토대토기인들은 산간에서도 가능한 잡곡농사를 포함하는 식물경작, 어로와 사냥 등이 혼합된 생계경제를 영위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순발력과 이동성이 강하고 기존의 정착농경민집단의 영역을 활발하게 진입해 들어가 힘을 발휘한 것으로 보인다. 송국리형토기나 공열토기문화의 기본적인 사회성격과 생계경제방식이 한반도 남쪽의 삼한사회의 전형적인 정착농경문화에 가깝다고 할 때, 점토대토기문화는 압록강유역 초기고구려의 공격적이고 진취적이며 정복적인 사회성격과 그에 따른 경제방식과 유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에 따라 석기, 청동기, 철기의 삼시구분기법은 바뀔 필요가 있다. 첫째 수렵어로채집문화를 기본으로 하는 단계에서 무문토기문화의 도래에 따른 본격적인 농경정착문화로의 전환이고, 둘째는 평등한 농경정착사회의 수준에서 점토대토기문화의 등장을 계기로 본격적인 계급복합사회의 수준으로 발전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반면 철기의 수용과 도래는 그러한 계급복합사회의 질적 수준과 복합의 양상을 더욱 심화시켜 국가수준의 사회로 증폭, 발전시킨 촉진제가 되는 것이지 철기수용을 기점으로 새로운 사회구조의 전환이 이루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점토대토기문화의 등장과 확립은 선사시대 최대의 사회적 전환이라고 본다(노혁진 한림대사학과 한국고고학보45 2001 p106-119).

한 지역에 살면서 나무연료의 압박을 받아야하는 정착민들에 비해, 쉽게 이동할 수 있는 점토대토기인들은 나무연료의 압박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웠을 것이다. 이는 정착민들이 정착지 주변의 고갈되는 나무연료를 절약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고안했을 가능성에 비해 점토대토기인들에겐 나무연료의 과소비를 추구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아직 발굴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산정상부에 위치해 있는 강화 교산리 고인돌이나 고천리 고인돌들 역시 점토대토기문화권과 유사한 입지조건을 보인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고조선의 의식주와 숲

볍씨는 근래에 경기도 일산과 김포에서 기원전 3000-2000년경의 이른 시기 것이 출토되었다(한국선사문화연구소. 일산새도시개발지역학술조사보고1. 1992. p29). 따라서 당시 한강하구 사람들의 주식은 곡물이었을 것이다. 음식과 위생은 문화의 중요한 척도인데 고조선에서는 청동이나 뼈보다는 대나무나 나무를 이용한 숟가락과 그릇이 더 많이 보급되어 있었다. 한서 지리지에 ‘(조선)의 전민田民은 변籩과 두豆를 사용해 음식을 먹는다’(漢書 卷28下 地理志下)고 하였다. 변과 두는 잔처럼 굽이 높은 그릇인데 이에 대해 안사고顔師古는 주석달기를 ‘변은 대나무로 만든 것이고 두는 나무로 만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가장 일상적인 생활용품도 주재료는 나무였으며, 나무는 대량으로 소비되었다. 또한 고조선 사람들은 소금을 조미료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후한서 동이열전중 동옥저전에는 고구려가 동옥저를 병합한 후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고구려는 다시 그 가운데 대안을 사자로 삼아 그로써 함께 그 지역을 다스리게 하였으며 조세로서 담비가죽, 물고기, 소금및 해산물을 징수하고 미녀를 징발하여 그 종이나 첩으로 삼았다.’(後漢書 卷85 東夷列傳 東沃沮傳)

위 기록에 따르면 동옥저에서는 소금이 생산되었다. 옥저는 지금의 요서지역에 있었던 고조선의 거수국이었는데 고조선이 붕괴되자 동쪽으로 이동하여 동옥저가 되었다. 한편 관자 지수편에는 ‘연나라에 요동의 자煮가 있다’고 했다(管子 卷23 地數). 자는 바닷물을 끓여서 만든 소금을 말한다. 연지역의 제염기술은 경제문화교류가 빈번했던 고조선도 당연히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한강하구의 석모도염전이나 해주염전의 역사에 대해 밝혀진 바 없지만 그 입지조건만은 천혜의 제염지란 점에 비추어 한강하구 지역 역시 소금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소금을 얻자면 역시 불을 지펴 바닷물을 끓여야 했기에 엄청난 나무가 소요되어야 했다. 소금은 나무연료의 소비 없이는 생산 자체가 어려운 조미료였다.

고조선은 의복에서도 수준 높은 생활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길림성 후석산 유적에서 출토된 고조선 후기 기원전 4세기경의 마포는 방직기계를 사용하여 짠 것으로 확인되었다(吉林地區考古短訓班 吉林猴石山遺址發掘簡報 考古 1980年 第2期 p141). 한서 지리지에는 ‘은의 도가 쇠퇴하자 기자는 조선으로 가서 그 지역 주민들을 예의로써 가르치고 농사짓고 누에치며 길쌈하였다’고 전한다. 이를 통해 고조선에서는 양잠과 길쌈이 생활화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옷을 짓기 위해서는 천을 짜야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실을 뽑아야 한다. 범의구석 유적지의 청동기문화층에서 발견된 가락바퀴의 수가 크게 증가한 것은 고조선시대에 이르러 실을 뽑는 일이 그만큼 많아졌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곳의 철기문화층에서는 가락바퀴가 오히려 줄어들었다. 철기시대에 이르면 인구도 늘어나고 생산도 증대되어 더 많은 실이 필요했을 텐데 가락바퀴가 준 것은 역으로 한층 능률적으로 실을 뽑을 수 있는 나무로 만든 자새나 물레와 같은 것이 발명되었기 때문이다. 고조선에서는 직물생산을 위해 베틀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함북 회령 오동유적 8호집자리에서 발견된 빗모양의 뼈는 바디인 것으로 추정되며, 자강도 강계시 공귀리에서는 흙으로 만든 그물추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베틀의 날실 끝에 달아매는 추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베틀 또한 나무로 만들어졌음은 자명하다.

집은 어떠한가? 이전시대에는 주로 지하움집이었으나 고조선 중기에는 지상식 건물이 발견되기 시작한다. 평면형태도 원형에서 장방형으로의 변화가 뚜렷하다. 황해북도 송림시 석탄리 유적의 움벽 변두리 기둥의 지름은 5-10cm 이고 가운데 기둥은 20-30cm이다. 조림한 나무가 일년에 5mm에서 1cm가 자라나지만 자연성장한 소나무는 백오십년에서 삼백년 된 소나무도 50cm 정도이다. 따라서 30cm 기둥을 썼다는 것은 송림시 근처의 숲에서 굵은 지름의 나무를 구할 수 있었음을 말한다. 그러나 집을 지을 때 중앙부와 가장자리 나무기둥에 차등이 생긴 것은 굵은 나무를 쉽게 구하기 어려워 진 때문으로 볼 수도 있다. 한강하구로부터 멀지 않은 파주군 월롱면 옥석리의 집자리에서는 130여개의 나무기둥이 움벽 가장자리만을 따라 세워져 있었다. 집 한 채에 130그루의 나무가 소용된 것이다. 석탄리와 다른 것은 중앙을 받치는 굵은 지름의 나무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임진강변의 숲에서 더 이상 굵은 지름의 나무를 구하기 힘들어진 사정과 연관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회령오동 유적과 무산범의 유적에서는 기둥수가 줄어들고 기둥자리에는 주춧돌이 놓여 있었다. 불과 10개 안팎의 기둥자리만 남아 있는 것도 있다. 이 집들은 독립된 기초를 가진 기둥들과 도리, 들보, 대공, 용마루 등의 재목으로 맞물린 견고한 힘받이 구조로 이루어진 건물이었던 것이다. 가평 달전리 유적에서는 이러한 특징이 완전히 정착된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건축구조의 발전은 목재를 절약하기 위한 목적과 부합되는 것이었다. 벽체와 지붕이 분리되지 않은 움집의 경우 비가 많이 오는 한반도의 특성상 나무가 빨리 썩을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벽체가 서고 지붕의 처마가 길어지면서 비로부터 나무를 보호할 수 있으며 주춧돌을 써서 땅에서 올라오는 습기에 의해 나무기둥의 밑둥이 썩는 것을 방지할 수 있게 된다.

황해북도 봉산군 신흥동 유적에서는 간막이 시설을 한 것도 발견되었는데 이는 주택의 혁명적 변화라고 할 수 있다. 고조선인들은 벽장이나 저장움을 만들거나 큰 독을 두고 곡물을 저장하였다. 또는 독립된 창고건물을 가지고 있기도 하였다.

지배귀족은 이보다 더 큰 주택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후한서 동이열전 부여전에 의하면 ‘부여는 둥근 목책으로 성을 만들고 궁실과 창고, 감옥이 있다’(後漢書 卷85 東夷列傳 夫餘傳)고 하였다. 고조선을 이어받은 부여에 이런 건축물이 있었다면 고조선 또한 유사한 건물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건축기술의 발달은 한 건물에 들어가는 나무의 양을 줄이긴 했지만 폭발하는 건축수요에 의해 국가가 사용하는 나무의 총량은 오히려 늘이는 결과를 초래했을 것이다.

나무를 구하기 어려워지는 사정은 난방기술을 발달시켰다. 화덕의 열량을 높이기 위한 여러 가지 시설이 개발되었다. 화덕의 바닥이나 주변에 돌과 자갈을 깔아 그것들이 달구어져 열을 보존하도록 하는 방법이 채택되었으며, 고조선 말기인 기원전 2세기경에 이르면 온돌이 출현하였다. 초기 온돌이 확인된 곳은 자강도 시중군 노남리 유적, 중강군 토성리 유적 영변군 세죽리 유적 등이며 고래가 한 줄인 것과 두 줄인 것 등 온돌구조가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 이것은 고조선인들이 복사열을 높이고 오랫동안 보존하기 위해 온돌을 끊임없이 개량했음을 알게 해 준다.

결국 최종적인 온돌구조는 아궁이에서 음식을 조리하면서 방의 난방까지 동시에 해결하는 고효율의 열관리체계여서 나무연료의 절약에 큰 기여를 했다. 가평 달전리 유적 또한 직선식고래와 꺽임식고래의 온돌구조가 혼합되어 나타나는 것으로 봐서 한강과 한강하구에 비슷한 온돌구조가 사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온돌의 발명은 인구의 증가, 마을규모의 증가, 지속적인 인근 숲의 벌채 등과 함께 점차 심각해지는 나무연료의 부족이 초래한 위기와 연관된 것으로 보이며 결국 이러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마련해준 발명이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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