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는 크게 나누어서 태종 무열왕 이전의 시기를 상대, 무열왕부터 혜공왕에 이르는 120여 년 동안을 중대, 그 뒤부터 마지막 경순왕까지를 하대라고 합니다. 이러한 시기 구분은 {삼국사기}에 따른 것인데 지금도 대체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신라는 삼국 전쟁에서 승리한 뒤 두 가지 어려운 과제에 부닥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는, 영토와 주민이 한꺼번에 늘어나 경제적 잉여가 생겼는데 그것을 어떻게 분배하느냐 하는 문제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고구려와 백제 출신의 주민들을 어떻게 신라 왕에게 충성하도록 하느냐 하는 문제였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은 신라가 예전과는 질적으로 다른 국가 체제로 재편되지 않고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것들이었습니다. 이전의 경제 체제, 중앙과 지방의 관계를 재편하지 않고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이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신라는 왕권의 전제화를 꾀했습니다. 이전에 신라는 중앙 집권 국가라고 해도 골품제로 귀족들의 권력 참여를 많이 허용해 왕권이 상대적으로 약한 편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도 신라는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왕과 귀족이 엄격히 구분되지 않는 편이었습니다. 건국 초기에는 3개 성이 왕위를 갖고 있다가 내물왕 때에 이르러서야 부자 세습이 어느 정도 자리잡았으나 그나마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최초의 진골 출신 왕인 무열왕 때부터 부자 세습을 비교적 튼튼히 유지할 수 있었는데, 삼국 전쟁 승리의 여세를 몰아 왕권의 전제화를 꾀했던 것입니다. 왕권을 전제화하여 왕실이 정치 경제적 권력을 독차지함으로써 변화에 따른 분란의 소지를 없애려고 하는 것이 신라 왕권의 의도였습니다. 또 고구려나 백제의 귀족들을 대우하려면 신라 귀족들의 지위를 상대적으로 낮추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것은 왕권이 강해야지만 가능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신라 왕권은 정치 사상으로서 유교를 끌어들이고, 지방 조직과 군사 제도 같은 것도 왕권의 전제화에 걸맞게 가다듬었습니다. 이렇게 제도를 가다듬자 진골 세력은 더욱 약해질 수밖에 없었고, 6두품 출신의 관료들은 상대적으로 세력이 강해졌습니다. 그러나 신라 왕권의 이러한 의도는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우선 삼국 전쟁 기간까지 특권을 누렸고, 전쟁 승리에도 많이 이바지한 진골 귀족들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약해지자 그들의 불만이 커진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이전에는 왕위를 넘볼 가능성이 있는 지위였는데, 삼국 전쟁에서 승리한 뒤 오히려 그 기회마저 봉쇄 당하니 불만이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신라가 한반도의 유일한 왕조가 됨으로써 이전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안팎으로 교역이 활발해져서 귀족들의 토지와 재화에 대한 욕구가 엄청나게 늘어났던 것도 그들의 불만을 더욱 부채질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불만을 달래기 위한 신라 왕실의 대책은 오락가락하였습니다. 삼국 전쟁에서 승리한 직후인 687년에는 녹읍제를 실시하여 귀족들에게 토지를 등급에 따라 나눠주다가 2년 뒤에 다시 폐지했고, 그 뒤로는 현물로 바로 나눠주는 방식을 고집하다가 귀족들의 저항에 못 이겨 마침내 다시 녹읍제로 돌아갔습니다. 이렇게 정책이 갈팡질팡했던 것은, 왕권이 진골 귀족들을 완전히 눌러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전제 왕권이 성립되기는 했으나, 귀족들은 여전히 왕권에 대해 압력을 행사할 수 있는 세력으로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골품제를 근본적으로 개혁하지 않는 한 피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문무왕을 비롯한 무열왕 직계의 왕들은 삼국 전쟁 승리의 덤으로 귀족들의 불만을 누르고 왕권의 전제화를 얼마간 이룰 수는 있었으나, 골품제를 근본적으로 개혁하고 전제 왕권을 반석 위에 올려놓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100년 정도 지탱한 전제 왕권은 마침내 혜공왕 때에 이르러 내물왕 계열의 진골 귀족들에게 공격을 받아 끝내 왕권을 빼앗기고 맙니다. 그러면서 시작된 신라 하대는 진골 귀족들 사이에 왕위를 뺏고 빼앗기는 쟁탈전으로 왕권이 동요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신라 하대로 접어들면서 진골 귀족 사이에 왕위 쟁탈전이 심각해지자 당연히 국가의 기강은 느슨해지고 경제 상황은 대단히 나빠졌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농민들의 고통을 더욱 무겁게 했습니다. 귀족들이 자신들의 부패와 권력 투쟁으로 빚어진 위기를 몽땅 농민들에게 떠넘겼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농민들은 사원이나 귀족의 노비로 굴러 떨어지거나 토지를 버리고 도망쳐 초적이 되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초적이 도둑질을 했다고 보는 것은 역사의 사실을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그 시대의 초적은 도둑질을 했다기보다는 그 무렵 성장하기 시작한 지방 호족들과 손을 잡고 신라의 지방 관청들을 위협하는 농민군의 구실을 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지방 세력인 호족들은 주로 왕권이나 골품제도에서 소외된 귀족들이거나 백제와 고구려의 귀족 출신들로서 신라에 협조하여 지방에서 세력을 갖고 살아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신라 중앙 정부의 부패와 무능을 틈타 세력 확대를 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들은 수탈에 못 견뎌 반란을 일으키는 농민들과 결합하여 신라 정권에 대항하였는데, 때로는 고구려와 백제의 부흥운동을 일으키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게 한 것은 그 지방 주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고구려, 백제가 있었던 지역의 주민들이 부흥운동에 호응을 보냈다는 사실은 신라가 삼국 전쟁 뒤에도 두 지역 주민들을 통합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것은 낡은 골품제도를 개혁하지 못한 신라 지배층의 한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고구려 백제 부흥운동은 단지 농민들이 신라 정권에 대해 갖고 있는 불만을 하나로 결집하기 위해 이용한 정치적 상징이었을 뿐 삼국 전쟁 직후의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실질적으로 고구려와 백제를 부흥하자는 것은 아니었고, 또 그럴 수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지방 호족들과 농민들의 반란은 몇 가지 유형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왕족 출신들의 왕권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웅천주 도독 김헌창과 그의 아들 범문의 반란이었습니다. 김헌창은 원성왕과 왕의 자리를 놓고 다투다 밀려난 김주원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822년 웅천주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장안국`을 세웠습니다. 그가 신라 정부군에 패배하자 그의 아들 범문은 825년에 고달산에 들어가 농민 반란군의 지도자인 수신과 연합하여 다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들의 반란은 결국 실패로 끝났지만, 그것은 잇따르는 지방 호족들의 반란의 신호탄이었습니다.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도 왕족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왕족의 서자 출신으로서 정권 쟁탈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중앙에서 쫓겨나 숨어살면서 오로지 왕과 중앙 귀족에게 복수하고자 하는 일념으로 살았습니다. 마침내 그는 901년에 철원 지방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켜 후고구려를 세우고, 뒤에 나라 이름을 태봉으로 고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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