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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대남 밀사 황태성 묘소를 찾다’탄생 100주년 서거 43주년 기일에...친지와 지인들
이창훈/이계환 기자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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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6.12.15  18: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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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형보다 황태성을 더 잘 따랐던 어린 박정희

▶황태성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자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43년 전의 바로 그날
인 2006년 12월 14일. 경북 상주 소재 황태성 묘에서 조촐한 추모행사가 있었다.
[사진 - 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박정희, 박상희, 김종필, 김민하, 대남 밀사, 통일사업, 반도호텔...

어떤 사건과 관련된 한국현대사의 아이콘들이다.

이들 아이콘을 모자이크 하듯 맞추면 ‘황태성’이란 이름이 나오고 곧이어 ‘황태성 사건’을 떠올린다. 그렇다. 이들 명칭들은 황태성을 둘러싼 아이콘들이다. 그렇다면 황태성은 누구이고 황태성 사건이란 무엇인가?

황태성은 박정희의 친형 박상희와 친구이자 동지였다. 일제때 황태성은 김천에서, 박상희는 구미에서 신문사 지국을 운영하며 독립운동을 했고 해방 후엔 남로당 활동도 함께 했다. 어린 박정희는 황태성을 친형보다 더 잘 따랐다고 한다.

황태성은 1946년 대구 10월사건의 배후로 지목돼 수배되자 월북해 북한 외무성 부상을 지냈으며, 이후 남한에서 5.16 군사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와 김종필을 만나 통일사업을 하겠다며 대남 밀사로 내려와서 당시 중앙대 강사로 있던 김민하(민주평통 수석 부의장 역임)의 집에 있다가 연락을 취하던 중 들이닥친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연행돼 당시 반도호텔(현 롯데호텔 자리)에서 조사를 받다가 결국엔 간첩죄가 아닌 불법 월경죄(越境罪)로 사형을 당했다.

그런 황태성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자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43년 전의 바로 그날인 2006년 12월 14일.

서울에서 아침부터 고인의 친척, 지인 등 관계자들 40명 정도가 모여 묘소를 찾고자 경상북도 상주로 향했다.

“진실화해위원회에 진상규명 요청했다”

상주로 향해 달리는 버스 안에서 황태성의 질녀인 임미정(74) 씨와 그녀의 남편인 권상릉(74)씨가 나서 인사와 함께 고마움을 전했다.

임 씨는 “지난 11월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 외삼촌 사건의 진상을 규명해 달라는 내용을 접수시켰다”면서 이제는 진상이 밝혀져 외삼촌의 명예가 회복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황태성 사형집행을 알린 경향신문 1963년 12월 14일자. [사진-통일뉴스 김주영 기자]
이어 권 씨는 당시 사건이 보도된 경향신문 기사를 보이며 “황 선생의 사형집행소식을 전하는 신문에 공교롭게도 박정희가 제3공화국 대통령으로 취임 맞아 ‘원흉(元兇, 못된 짓을 한 사람들의 우두머리)도 깡패들도 모두 함께 풀린다’는 기사가 같은 면에 실렸는데, 깡패들도 풀어주면서 일제시대 항일운동을 하였고 통일을 위해... ”라고 말하다가 흐느끼며 말을 끝마치지 못하였다.

권상릉, 임미정 부부가 말하는 황태성
▶황태성 묘 앞에 선 권상릉(오른쪽), 임미정 부부. [사진 - 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두 사람은 부부다. 임미정 씨에게 황태성이 외삼촌이니까 권상릉 씨한테는 처외삼촌이 된다. 임 씨는 황태성과 10대때 대구에서 함께 살았고 양가가 200미터 거리였다면서 “황 선생님이 우리 아버지의 선배였다”고 회상했다.

다음은 권상릉, 임미정 부부의 황태성에 대한 회고다. 두 부부는 황태성 사형 후 시신을 직접 확인ㆍ인수했다.

<유골 안치>

43년 전 이날인 1963년 12월14일 서대문형무소에 와서 황 선생 면회를 신청했는데 ‘10일에 다른 데로 이송했다’고 전하기에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어 수소문을 했다. 결국 처형당한 걸 알았다.

총살형을 당했기에 화장해서 유골을 교문동에 있는 절에 안치했는데 경찰이 주지 스님한테 왜 이런 걸 맡느냐고 하길래 주지가 사정해서 안치했다. 그러나 불안해서 다음날 우리집에다 유골을 보관해 뒀다. 그러다 다음해인 1964년 한식날에 우리 부부가 이곳 선산에다 안치했다.

<밀사로 남행한 이유>

황태성 선생이 밀사로 남쪽에 내려온 이유는 두 가지로 파악된다.

하나는 5.16후 박정희가 권력을 잡자 북에서 박정희와 가까운 사람을 찾자 황 선생이 나섰다. 알다시피 황 선생은 박정희 형이자 김종필의 장인인 박상희와 친구였다. 황 선생은 건강이 안 좋은데도 항일운동 동지들에게 “내가 직접 이 문제를 풀겠다. 박정희가 나를 존경했다. 그쪽 집안과 우리 집안이 가깝다”고 말했다. 아무튼 이게 받아들여져서 황 선생은 박정희, 김종필과 만나 통일협상을 하고자 남하했다.

다른 하나는 당시 1961년부터 1962년 7월까지 서부전선에서 비밀리에 남북협상이 있었다. 북한으로서는 이것이 진실인지 아닌지 검증할 필요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황 선생은 박정희도 못 만났지만 김종필도 못 만났다. 아마 남측이 두려워서 안 만난 것 같다.

<황태성과 박정희>

황태성과 박정희는 관계가 있다. 박정희는 대구사범과 만주사관학교 갈 때 황 선생에게 진로와 관련 조언을 구했다. 또한 박정희가 남로당에 입당할 때 황 선생이 보증을 서줬다.

또한 황 선생이 사형당했을 때 부하가 이 사실을 박정희에게 보고하며 황 선생 사진을 주니까 사진을 보면서 박정희가 “황태성 선생도 세월은 못 이기시는구나. 많이 늙으셨구나” 했다고 한다.

그리고 덧붙일 것은 통상 황태성 선생이 북한에서 무역성 부상을 했다고 하는데 내가 알기로는 성 서리를 했다. 그러니까 차관급이 아니라 장관급이었다.

황태성의 묘가 있는 곳은 경상북도 상주시 청리면 청상리의 어느 야산 중턱이다. 야산 앞에는 저수지가 있다.

고인의 묘로 가는 길은, 산에 길이 없어 다 떨어진 초겨울의 낙엽에 미끄러지고 보이지 않는 웅덩이에 빠져야만 했다. 그 길은 한국현대사나 그의 삶처럼 그리 길지는 않았지만 험난했다. 그의 묘는 그러니까 그가 태어난 생가가 있는 상주시 청리면 원장리로부터는 10분 거리다.

야산 중턱에 묘가 있었고 묘비명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황태성의 묘비명. [사진 - 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학생장수황공위태성지묘(學生張水黃公위<言+韋>泰成之墓)

그리고 그 글씨 옆에 쌍분(雙墳)이라고 표시되어 있어 황태성의 부부 묘가 아닌가 추측된다.

사실상 첫 참배

▶황태성 묘에서 인척인 권상릉, 임미정 부부가 절을 하고 있다. 이날 사실상 첫 참배가
이뤄졌다.  [사진 - 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길도 없는 산중이라 인적은 있을 수 없고 묘 앞에서 아침부터 서둘러 서울과 대구 등지에서 내려온 고인의 친척과 지인들이 사실상 첫 참배를 했다.

추모연대 박중기 의장은 추도사를 통해 “선생의 뜻을 아는 전국의 지사들이 이 자리에 모여 탄신 백년과 서거 43년을 추모해야 할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산비탈 길에서 조촐한 자리로 마련된 것이 부끄럽다”면서 “그러나 이렇게 이곳은 찾는 사람들이 있고 과거와 달리 전국에서 통일의 기운을 느낄 수 있으니 기뻐하여 주십시오”라고 추모했다.

▶추도사를 낭독하는 박중기 추모연대 의장.  [사진 - 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이종린 범민련 남측본부 명예의장은 “1945월 8월 15일 이후 이 땅에 진출한 미군정과 이승만 남한 단독정부는 민족자주통일세력을 탄압하였고, 박정희와 전두환 노태우 등 군사독재정권도 같은 모습을 보여왔다”면서 “그러나 6.15공동선언 이후 남과 북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통일의 기운이 높아지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선생의 뜻이 곧 이뤄질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권오헌 양심수후원회 회장은 “우리 민족이 외세에 의해 분열되다 보니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선생이 목숨을 바쳐 통일을 이루고자 남한에 내려와야 했다. 선생은 양심을 지키기 위해 남쪽행을 택한 것이었으며, 당시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해야 될 일이었다”고 당시의 남행을 평가하고는 “이제 통일의 기운이 높아지고 있다. 선생이 못다한 일은 남은 사람들이 꼭 나서 이뤄드려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추도사가 끝나자 황태성의 서거 43년 탄신 백년을 애도하는 이기형 시인의 추모시가 낭송되었고 추모 노래가 불려졌다.

황태성에 대한 기억과 분위기
박종린 (비전향장기수, 2차 송환 대상자)

▶버스에서 항상 독서중인 박종린
선생. [사진-통일뉴스 이계환기자]
내가 북쪽에 있을 때인 북 정부 창건 10주년인 1958년 9월9일에 평양운동장에서 10주년 기념 전국체육대회가 열렸다. 이때 대구 출신의 유명 씨름 선수인 라윤출이가 출전했다.

라윤출은 1946년 10월항쟁 후 월북했다. 근데 천하무적 씨름선수 라윤출이가 상대 선수에게 졌다. 격려차 운동장에 온 황태성이가 라윤출이더러 ”나이는 속일 수가 없구료“라고 한 말을 기억한다.

내가 감옥에 있을 때 황태성 사건에 대해 다 알고 있었다. 하루는 황태성이가 처형됐다는 얘기가 나돌았는데, 차마 박정희 형 친구인 황태성이를 박정희가 그랬겠느냐,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그랬겠지 했다.

그리고 인천 부근에서 총살형을 당했다는 소문이 돌기에 그 지역에 안장된 줄 알았는데 이처럼 상주에 묘가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김달수 (1960년대 민자통 사건 관련자)

민자통 사건으로 1961년 서대문형무소에 들어갔다가 운동장에서 뜀박질을 하며 운동을 하는 황태성을 봤다. 이미 그때 형무소 안에도 황태성의 이름과 그가 밀사로 남파된 이유는 널리 알려져 있었다. 운동장에서 달리기를 하고 있는 황태성은 체구는 그리 크지 않았고 머리가 하얬다.

전성도 (전농 사무처장)

상주가 고향이고 상주에서 줄곧 살아왔다. 그런데 나 자신도 진보적 활동을 하지만 황태성 씨가 상주 출신이고 또 상주에 묘가 있는 줄은 전혀 몰랐으며 이 마을 사람들도 잘 모른다.

이미 겨울에 접어든 메마른 산야에 고인을 추모하는 소리가 그렁그렁 울려 퍼지고 있었다.

참배가 끝나고 다시 비탈진 산길을 내려오고 서울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참배객들은 1년이나 남았음에도 벌써 달아오른 대선판에서 박정희 신드롬이 일어나고 있는 현상과 진실화해위원회에서 황태성 사건의 진상이 어떤 식으로 규명될지를 묘하게 대비하면서 이야기꽃을 나눴다.

권상릉, 임미정 부부는 황태성의 인척으로서, 한편으로는 황태성의 묘와 이날 사실상의 첫 참배가 외부로 알려지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황태성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기를 간절히 원했다.

황태성 약력(1906-1963)
1906     경상북도 상주 출생
1921     경성제일고보 입학
1924     동맹휴학 사건으로 퇴학
1925     연희전문학교 상과 입학, 퇴학처분 받음
1927     김천지역에서 신간회 활동
1929     광주학생운동 경성지역 총지휘자로 활동하던 중 일본경찰에
           검거되어 2년 복역. 출옥후 김천에서 재활동
1935     일본경찰에 검거. 3년6개월 복역
1944     건국동맹 전라남북도 책임자로 활동
1945     조공 활동
1948     해주 남조선 인민대표자 대회에서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
            북한 무역성 부상 역임
1961.8.30      5.16후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과 남북통일 협상 위해
                   밀사로 남하
1961.12.20    중앙정보부가 간첩죄를 적용해서 체포
1963.12.14    사형집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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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보기(4)
박종린 () 2006-12-15 21:19:00

내용중에: "권상릉,임미정가 말하는 황태성" <유골안치>의 첫줄
34년전 이날인을 43년 으로

"황태성에 대한 기억과 분위기" 에서 유명 씨름선수
나원출 이 아니라 라윤출 로 수정 바랍니다.
0 0
통일뉴스 () 2006-12-15 22:45:00
34년 -> 43년
나원출 -> 라윤출.

지적에 감사드립니다.
0 0
황 유 경 () 2009-03-06 07:13:26
황 태 성 씨의 친손녀 입니다.정말 감사드립니다 위의글중 할아버지의 산소가 야산중턱 이라하셨는데 그곳은 저희대대로 내려오는 선산 임을알려드립니다 제가 늘 다니면서 길도다듬고 벌초도 하였는데 지금은 사정상 제가 미국에서 살고 있습니다
0 0
김기현 () 2008-12-24 06:03:03
이제사 보게 되었네요..
저의 어머니 황유경 께 보여 드리면 무지 기뼈 하시겠네요..
하나뿐인 손녀니까요.
미국에 있어 찾아 뵙지 못한것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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