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의 글은 지난 5월 14일에서 16일까지 강원대에서 주최한 역사 아카데미 국제학술 대회, "미국, 신자유주의 세계화, 그리고 남북통일"에 제출된 논문이다. 딱딱한 학술논문의 형식을 피해 미국 문제에 대한 대중적 논의를 확산하기 위한 목적으로 각주나 참고문헌 없이 작성된 글이다. 5월 광주 항쟁 21주년을 맞이하면서 우리와 미국의 기본관계를 새롭게 점검할 수 있는 의미를 지닌 글이라고 할 수 있다.  글의 필자 김민웅 박사는 최근 삼인에서 <보이지 않는 식민지>와, 뉴스앤조이사에서 <사랑이여, 바람을 가르고>를 출간했다.

 


미국의 손아귀에서 놓여나는 것이
민족이 사는 첫 걸음이다
- 식민지 체제의 극복



김민웅(뉴저지 길벗교회 목사/ 재미 언론인)



1. 우리에 대한 미국의 압박 : 전쟁 시스템의 강화

2. 미국은 우리의 우방이 아니다 : 우방이라는 이름의 상전

3. 미국, 그 제국의 성립사

4. 식민지 지배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5. 새로운 민족주체세력의 육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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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미국의 손아귀에서 놓여나는 것이 민족이 사는 첫 걸음이다
: 식민지 체제의 극복 - 김민웅


김민웅(뉴저지 길벗교회 목사/ 재미 언론인)

 

1. 우리에 대한 미국의 압박 : 전쟁 시스템의 강화

지난 2001년 4월 말 미국 부시정권의 미사일 방어망 계획 추진 공식 발표로 이 문제에 대한 국제적 논의와 반응이 주목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와중에, 5월 9일 미국 국무부 아미티지 부장관이 이와 관련하여 우리 정부의 협조를 설득하기 위해 방한했다.  그의 방한은 이른바 한-미간의 대북 인식 조율과 함께, 미사일 방어망 문제에 대한 우리정부의 참여를 유도하는 설득작업이 가장 큰 관건이었다.  김대중 정권으로서는 중대한 압박에 직면한 셈이었다.

이미 지난 3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한-러 회담의 성과조차 부인하면서 미국의 미사일 방어망 계획에 대하여 반대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힌 만큼, 이 문제와 관련한 미국의 압박에 저항할만한 의지는 약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자세는 결국, 우리가 미국의 입장에 일방적으로 끌려가는 사태를 속수무책으로 방치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살림살이에 미국의 군사전략을 지원하기 위해 우리가 경비를 지출해야 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일 뿐만이 아니라,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도 이러한 미국의 정책과 전략은 명확한 언어를 동원하여 거부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김대중 정권은 이와 같은 기조를 확고히 추진해내는데 한계를 보였다.

실로, 지난번 한-미 정상회담 때 김대중 정권이 보였던 대미 종속적 굴신(屈身)이 계속 심화되면 우리 민족의 이해는 유실(流失)되고 말 것이다.  한-미 정상회담 이후 남북 관계는 거의 동작중지 상태에 빠졌고, 미국의 말 한마디에 민족사적 대업을 해결할 의지와 열망이 좌초하고 있다시피 한 것이다.  이것은 식민지 국가의 면모에 다름이 아니다. 

평화를 위해 노력하는 나라가 되려는 강력한 의지가 있을 때, 이러한 문제도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중국, 러시아, 그리고 유럽이 한반도 평화를 측면지원하고 있다는 현실도 우리에게는 매우 귀중한 지렛대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유의하여 미리부터 패배주의에 사로잡힐 필요는 없다.  이 문제에 대한 이해의 뼈대를 바로 세우면, 우리는 미국의 압박을 극복할 수 있는 내부적 역량을 집결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히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부시정권의 미사일 방어망 계획은 전지구적 전쟁 시스템의 추진에 그 본질적 목표가 있다.  이 점을 가장 명확하게 주목하고 부각시킬 필요가 있다.  우리의 민족적, 국제적 과제의 핵심은 냉전시기로부터 강화되어 왔던 전쟁시스템을 해체하고 평화를 보장하는 국제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즉 전쟁 시스템을 강화하는 일과 평화를 보장하는 일은 결코 양립하거나 병존할 수 없는 모순관계이다.  전쟁시스템을 만들면서 평화를 지향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일단 전쟁 시스템 준비가 가동되면, 평화적 외교행위는 부차적이 되거나, 또는 전쟁 시스템 추진세력은 평화적 외교행위를 적대시하게 된다. 미국이 우리의 남북관계 진전을 달갑지 않게 여기고 있는 것이 그 한 생생한 보기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미국이 추진하는 전쟁 시스템 구상에 우리가 하수인처럼 끌려 들어갈 수 없다는 점이다. 우리의 영토와 우리 민족의 생명을 미국이 원하는 전쟁 시스템 설치에 동원되도록 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그런 식으로 끌려 들어가게 되면, 우리는 미국의 군사적 경제적 식민지의 위상에서 탈피하기가 점점 어려워질 것이다. 

미사일 방어망 설치와 관련한 미국의 압박에 굴복하게 되는 것은, 냉전체제의 해체나 남북간 평화를 보장하는 문제, 민족경제를 바로 세우기 위한 군비 축소 등의 사안은 물 건너가게 되고 우리는 미국과 일본의 극우적 군사전략에 보조축으로서 역할 하는 것밖에 남는 것이 없게 됨을 의미한다.  우리가 입으로는 일본의 극우화를 경계하면서도 미국의 이러한 정책과 전략을 거부하는데 실패하면, 미국이 신 가이드라인을 통해서 지원하고 있는 일본의 군사전략과 동맹의 관계가 되어 한반도는 미국이 원하는 전쟁시스템의 근거지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렇게 될 경우, 우리는 전쟁 시스템 마련을 위한 군사비 지출로 크게 시달리게 될 것은 자명하다.  그런 차원에서, 우리에게는 새로운 방식과 관점에 입각한 21세기형 반전평화운동이 적극적으로 요구되는 상태이며, 우리 정부는 이 문제와 관련하여 오해의 여지없는 명백한 반대입장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미국의 군사주의 노선이 우리에게 가하는 이러한 일련의 압박을 어떻게 극복하고 나가는가 하는 문제는 우리에게 평화의 기초를 세우는 일과 직결되며, 전쟁의 참화를 피하고 민족의 생존을 지켜내는 전략적 핵심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미국은 우리에게 민족의 통일과 경제적 자주, 그리고 동북아시아 평화체제의 수립을 가로막고 나서는 가장 막대한 장애로 존재하고 있다.  이 점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서 있지 않는 한, 우리는 이른바 한-미 공조라는 허위의식에 지배당하여 민족의 이익을 스스로 손상시키는 어리석음에 빠지고 말 것이다.


2. 미국은 우리의 우방이 아니다 : 우방이라는 이름의 "상전"

지난 반세기의 한-미관계는 이른바 <혈맹>이라는 개념으로 포장되어 왔다.  이 개념은 한때, 거의 신성불가침적 위상에 가까운 권세를 누리기도 했다. 우리와 미국의 관계에 대한 이와 같은 기존의 생각에 의문을 품거나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은 이념적으로도 파문 당했으며, 실정법적으로 자유를 박탈해도 마땅한 존재처럼 취급받았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너무도 선량해서 약한 나라들의 민주주의와 경제성장을 도와주는 고마운 나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에 도전하는 것은 따라서 민주주의와 경제성장을 저해하는 자인 것처럼 규정 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은 우리에게 있어서 혈맹적 우방을 넘어, 우리 자신의 또 다른 자아이기조차 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미국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으로서 안심했고 미래가 보장된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미국 없이는 우리의 생존과 안위가 지켜질 수 없다는 식민지적 발상이 지속적으로 유지되어온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미관계란 때로 우리에게 불리한 주권침해가 있다해도 그것은 실리를 위해서 받아들여야 하는 숙명처럼 인식되었다.  힘의 관계에서도 미국에게 저항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자해적 행위라고 여겨진 것이었다.  1945년이래 이 땅의 정치와 경제, 그리고 군사와 문화 전반에 걸쳐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해온 미국은 이렇게 해서 우리에게 상전 노릇을 해왔다.  <우방이라는 이름의 상전>을 누가 잘 모시는가에 따라 국내의 정치적 역학은 결정되었으며, 그로 인해 민족적 이익을 앞세우는 사람은 이 상전의 눈에 날 수 밖에 없었고 정치적으로는 제거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해방공간과 미군정 시기의 정치는 이러한 판도를 기본적으로 결정했으며, 이후 한국정치지형에서 기득권 세력이 된 정치지도자들은 거의 모두 미국과 주-종의 관계를 잘 유지하는 "식민정권의 총독부적 기능"을 수행했다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니, 우리와 미국간에 현실적으로 분명하게 존재하는 식민지적 관계라든가, 또는 이를 가능하게 하고 있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본질에 대한 논의는 있기 어려웠다.  상전의 진정한 정체를 폭로하는 것은 금기시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분단이후 이 땅에 수립된 역대 정권들에게 민족자주의 정신과 의지를 기대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어려운 일이었다.

이렇게 되니, 우리의 식민지적 처지를 극복할 수 있는 인식과 역량의 결집은 힘겨울 수밖에 없었으며, 미국의 요구와 압박은 우리 사회에서 일방통행의 권한을 발휘했던 것이다.  한-미관계가 워낙 굴종적이다 보니 우리 민족의 이해를 제대로 실현하는 길은 막힐 수밖에 없었고, 이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거나 미국의 정책과 전략을 비판하는 것은 한국사회에서 고립 당하는 이단자의 신세가 되는 것을 자초하는 일이 되었다.  미국은 제국주의 국가라는 것, 그런 국가의 대외정책과 전략이라는 것이 자신의 영향권 내에 있는 약소국을 계속해서 영원히 식민지로 묶어 두는 것임을 직시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소위 혈맹이라는 굴레에 묶여서 식민지 백성의 비운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우리와 미국간의 굴종적 현실은 역대 정권의 기득권을 보장해주는 기능을 해왔고, 그런 연유로 해서 미국에 대한 비판적 인식은 권력안보에 중대한 타격이 될 수 있는 사안이었다.  미국 또는 미국의 정책에 대한 비판적 이해와 발언이 국가보안법의 처벌대상이 된 것은, 이러한 역학관계에서 권력안보와 직결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이 지켜주고 보호해주는 권력, 그로써 유지되는 체제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우선적으로 내부의 권력기반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일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최근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우선 80년 광주학살 사태의 현실을 규명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미국이 우리에게 어떤 존재인가를 새롭게 인식할 수 있게 되었었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민주주의에 대한 지원세력이라기보다는, 냉전 파시즘체제의 지원세력이라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직접적인 폭력을 휘두른 세력은 당시의 신군부였다는 점에서 미국의 역할은 뚜렷하게 대중적으로 각인되지 못했으며 미국의 본질에 대한 이해는 소수의 지식인과 운동권에 한정되었다.  냉전 파시즘의 진정한 배후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기 위해서는 우리의 현대사를 관통하는 일련의 한-미 관계를 적나라하게 파악하는 과정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미군정이 지배한 해방정국에 대한 역사적 인식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매우 중요한 역사인식의 진전이었다고 하겠다.

이후 미국의 패권적 본질에 대한 이해가 보다 전면적으로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IMF 관리체제를 겪으면서였다고 할 수 있다.  외환위기의 와중에서 우리는 미국이 신자유주의적 지배체제를 어떻게 우리에게 강요하는가를 직접 체험하고 목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로써 우리의 민족경제는 대대적으로 와해되었으며, 노동자들의 삶은 피폐해졌고 미국의 지배는 한국의 정치경제분야에서 보다 철저하게 관철되어 가는 것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미국의 압박에 굴복하는 김대중 정권의 현실 앞에서, 미국이 자신의 지배를 유지하기 위해 어떤 대리세력을 내세우는가에 대한 이해도 깊어지게 되었다.  이로써 우리는 우리와 미국과의 관계가 엄연한 식민지적 주종관계라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게 되었으며, 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자주적 민족국가의 완성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후 남북관계의 진전도 미국의 패권적 개입으로 인해 얼마나 심각하게 좌절당할 수 있는지를 경험하면서, 우리의 통일을 가로막고 민족적 자주를 훼손하는 실체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직시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 진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과 함께, 6.25 전쟁시기에 미군에 의한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 미군의 매향리 폭격 훈련장으로 인한 주민생활의 위협, 강간 살인 강도 등 무수한 미군범죄와 이에 대한 우리의 사법권 부재, SOFA 협정 개정에 임하는 미국의 오만한 태도, 독극물 무단 방류등 우리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 폭력의 현실을 알게 되면서 미국은 대중들에게 이전의 우방이라는 개념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쉽지 않게 되었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더 이상 선량하고 고마운 강대국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약소국을 언제라도 희생시킬 수 있는 나라이며 그에 저항하면 보복조처를 취하는 무서운 강대국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게 된 것이다.  이것은 미국이라는 나라의 제국주의적 실체를 파악하는 일에는 일정한 진전이 있게 되었으나, 역량 상 미국과 맞선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는 식의 패배주의를 심화시키는 과정이 되기도 함으로써 우리의 자주의식을 강화하는 일에 어려움을 주기도 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제국이 아무리 거대할 지라도 그것이 약소국과 약소민족을 짓밟고 있는 상황을 그대로 묵인하며 굴종하는 것은 바로 이 제국의 힘을 우리가 더욱 키워주는 결과가 되며 그로써 우리의 처지는 더욱 비참해지는 것이 되고 만다.  실로, 우방이라는 이름의 상전을 모시는 나라의 백성의 삶이 고단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이러한 식민지적 상황은 종식되어야 한다.  제국의 힘에 압도당하는 패배주의를 우리 안에서 몰아내야 한다.  우리의 민족적 주체를 바로 세워, 민족의 형편과 미래를 풍요하게 만들어 나가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는 물론이요 우리의 후대들도 제국의 노예로 만들고 말 것이다.  우리가 노예의 조상이 될 수는 없다.


3. 미국, 그 제국의 성립사

기존의 한미관계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은 주로 우리와 미국간의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한계가 있다.  우리와 미국간의 관계를 특수화시키기 쉽고, 미국이라는 나라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제한될 수 있는 것이다.  한-미 관계는 미국의 제국주의 발달사의 결과이다.  제국으로서의 성립역사를 파악하지 않으면 우리는, 미국이 우리를 통해서 관철하려는 바에 대한 이해가 분명해지지 못한다. 그것은 일부 정파나 권력의 정책이 아니라 미국이라는 나라의 제국주의적 본질과 깊은 관련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령 민주당과 공화당의 한-미 관계의 인식과 자세가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여기는 경우가 있으나 그것은 오해이다. 미국의 기득권 세력은 어느 정당과 정파를 막론하고 미국의 제국주의적 지배체제 유지에 일차적인 관심을 가진다. 다만 그 방식과 접근, 절차가 다를 뿐이다.  그 차이를 아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 차이가 확대 해석되어 미국의 제국적 본질을 인식하지 못하면 우리는 현재와 같은 식민지적 주종관계를 근본적으로 극복하는 길을 발견하지 못하게 된다.  4.19 혁명 당시 미국에 대한 안이한 기대나 1980년 봄, 카터 정권에 대한 소박한 인식 모두가 다 미국의 제국주의적 본질에 대한 이해가 바로 서 있지 못한 결과였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미국이라는 강대국은 다른 나라들에게 선의를 가지고 있는 제국이 결코 아니며 언제나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적 지배체제를 유지하는 일에 최우선의 관심을 가지고 있는 국가이다.  이 거대한 제국의 지배 망에 수동적으로 빨려 들어가면 그것은 우리를 영원한 제국의 신민으로 묶어 둘 뿐이다.  따라서, 예를 들어 부시 정권의 전지구적 미사일 방어망에 협조하는 것은 우리의 역량을 미국의 제국유지에 고스란히 바치는 일이 된다.  우리 민족의 귀중한 역량과 자원을 우리를 제국의 신민 또는 노예로 만드는 일에 더 이상 헌납할 수 없다.  이는 마땅히 거부해야 하는 일이며, 강력한 민족적 의지를 모아 이루어내야 하는 민족사적 과제이다. 김대중 정권이 이러한 과제의 민족사적 의의를 절감하고 나서지 않는 한, 김대중 정권은 매판 정권 내지 식민지 정권이라는 역사적 평가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되고 말 것이다.

미국은 1776년, 최초의 근대적 식민지 해방투쟁에 성공한다. 이것은 실로 역사의 역설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출발한 나라가 이후 다른 나라들에게 식민지 종주국으로서의 위세를 누리려고 한다는 것은 미국이라는 나라의 국가이념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의 국가성립 이전의 역사는 1776년의 과정에 이르기까지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아메리카 대륙 지배전략이 관철되었던 것이라는 점을 주목한다면 이는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침략사와 원주민 학살 및 토벌의 과정, 그리고 야만적인 노예제도의 유지에서 미국이라는 나라의 국가적 품성과 기본목표가 이미 설정되었던 것이다.  미국이라는 나라의 민주주의란 그래서, 백인 자신들만의 민주주의였을 뿐, 약소민족과 종족에 대해서는 가차없는 잔혹성을 발휘했던 과정이었으며, 그로써 최초의 근대적 민주국가라는 문명성과 잔혹한 학살자로서의 야만성이 공존하는 기이한 현실이 존재했던 것이다.  결국, 미국은 이후 제국주의 발달과정에서 자신의 문명(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을 앞세워 자신의 야만(제국주의적 지배)을 성취하는 길을 걷게 된다.

미국은 이른바 국가연합을 기초로 한 연방국가의 성립을 영국에 대한 식민지 저항전쟁의 과정에서 완수한다.  이것은 미국이라는 신흥국가의 국가적 역량을 극대화하는 구조를 만들어 냈다. 이러한 국가건설의 측면만 주목해본다면, 이는 부르주아 체제의 탁월한 정치철학적 소산이었고, 근대국가의 경영방식에 일대 혁명적 기초를 세운 것이었다고 하겠다.  그만큼 미국은 국가건설의 작업에 당대의 정치철학적 열매를 총집결시켰으며 이러한 과정은 이후 미국이 자신의 역량을 제국경영에 동원하는데 있어서 그토록 강력한 힘을 과시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가지고 있는 힘의 요소 가운데 이 대목은 깊이 주시할 대목이다. 즉, 백인 부르주아체제의 건설과 유지 강화를 위해서 이들이 전개한 각종 정치적 결정과 논의는 이들이 자신을 지배하려는 유럽 국가들에 대항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지켜내는 신흥 국가공동체의 미래를 위해서 얼마나 진력했는가를 알 수 있게 한다. 

아무튼, 이 연방국가의 유지에는 노예제도가 요구되었다.  그러나 흑인 노예노동을 기반으로 한 대농장 경영 중심의 남부와 자본주의적 생산 시스템을 근간으로 한 북부간의 공존관계는 19세기 중반에 이르면 파괴되고 만다.  경제체제의 차별성과 갈등, 노동력 확보를 둘러싼 주도권 경쟁으로 인해 내전이 발발한 것이었다.  남북전쟁으로 보다 널리 알려진 이 내전의 본질은 남부가 장악하고 있던 노예 노동력을 북부가 자신의 자본주의 체제 유지를 위한 값싼 임금노동력으로 흡수하기 위한 정치경제적 헤게모니 투쟁이었다.  북부의 승리로 종식된 이 내전으로 미국은 자본주의적 발전의 길로 급속하게 이행하게 되며, 이를 계기로 미국은 동서부를 잇는 철도건설에 주력하고 미국 전체의 자본주의 체제 강화에 나서게 된다. 

이 단계에 이르게 되면, 연방정부의 중앙집권적 기능이 강화되고, 독점자본이 출현하면서 미국은 대외 팽창정책의 내부적 기초를 마련하게 된다.  자본주의 체제가 전면화되고, 이를 바탕으로 미국은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미국의 지배적 영향권을 행사하기 시작하며 아시아 지역으로 뻗어나가는 시도를 하게 되었다.  이것은 미국이 이제 바야흐로 제국주의 국가로서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을 의미하였다.  1823년 몬로 닥트린 이래 지향해왔던 제국의 건설에 박차를 가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제국의 건설은 기본적으로 정복전쟁을 요구했다.  이른바 이 시기 미국의 대외팽창정책을 뒤받침했던 "함포외교(Gun boat Policy)"는 바로 이러한 정복 내지 침략전쟁의 성격을 드러내주고 있다.  이는 또한 미국 자본주의 체제 내부에 전쟁 경제적 요소가 구조화되는 과정을 뜻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대외 팽창기를 거쳐 미국은 제국주의 열강의 주도적 일원으로 위상을 정비하게 된다.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발전과정에서 이제 영국에 이어 미국의 역량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 되었으며, 영국 제국주의의 절정기 이후에 대한 국제적 투쟁은 두 차례의 대전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은 대전의 과정에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 않고 초강대국으로서의 역량을 축적하게 되고, 다른 제국주의 열강의 도전이 거의 전무해진 2차 대전 종료 이후 본격적으로 세계경영의 제국주의적 전략을 추진하게 된다.  오늘날 우리가 <세계화>라고 일컫는 현실은 사실 2차대전이 종식된 이후 미국이 꾸준히 추구해온 세계경영 전략의 결과이자 애초부터의 목표였다. 미국은 영국의 제국주의가 달성하는데 일정한 한계를 보였던 "전지구적 제국의 건설"에 있어서 실질적인 역량을 갖춘 인류역사상 최초의 나라인 동시에, 이를 국가적 목표로 삼은 거대한 체제인 것이다.  따라서, 이후 미국의 대외정책은 기본적으로 이 전지구적 제국의 건설에 기본목표가 있는 것이며 이에 저항하는 세력에 대해서는 봉쇄 내지는 진압의 방식으로 나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냉전의 시기는 이러한 전지구적 제국의 건설 내지는 세계자본주의 확대과정이 일정한 견제에 직면했던 시기였다.  따라서 이 시기의 당장의 관심은 일단 자신의 영향권 내에 속한 지역에 대하여서는 최대한의 지배권을 행사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영향권 밖의 체제나 세력에 대해서는 이른바 봉쇄정책(Containment Policy)을 밀고 나간 것이었다.  이것은 소위 진영대립으로 나타났고, 민족해방투쟁 세력에 대한 진압전략으로 구체화되었다.  우리에게 있어서, 해방공간의 미군정이 수행한 역할은 바로 이렇게 한반도 내부에 제국의 질서를 장치하고 이를 작동하기 위해 동원할 식민지 내부의 세력을 집결시키는 동시에, 이에 저항하는 세력은 토벌의 대상으로 삼은 과정이었다.  그 결과는 구 파시스트 세력의 복원과 좌파 민족진영의 궤멸이었으며, 이로써 냉전 파시즘은 이 땅에서 미국의 제국경영을 위해 봉사하는 권력구조가 되었던 것이다.  미국은 이들 구 식민지 국가 내부의 민족해방 혁명세력이 정국을 주도하지 않도록 이들을 정치적으로 무력화시키는 작업을 진행하면서 이들에 대한 무자비한 폭력과 학살을 저질렀다.  그리고 이러한 일을 내부의 파시스트 세력에게 맡겼다. 내부의 적을 만들어 이들을 공격하는 대리 통치의 방식을 선택했던 것이다.  미국의 영향권내에 편입된 구 식민지지역이던 제3세계 국가에서 군부정권이 오랫동안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미국의 제국주의 유지전략의 산물이었다.  2차대전 이후 과거 제국주의의 지배하에 있던 무수한 나라들이 다시 식민지 해방투쟁으로 나서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처하게 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 대한 대응으로 미국은 군사쿠데타, CIA의 비밀활동, 민족해방투쟁 진압작전, 군사적 개입, 경제지원등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제국주의 체제 유지를 위한 정책을 추진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미국이 유지한 냉전전략에 내장된 제국주의적 면모에 대하여 직시할 수 있어야 하며, 우리에게 냉전의 극복은 바로 이 미국의 제국주의적 지배체제에 대한 저항 그리고 거부와 동일한 과제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탈냉전은 단지 냉전 파시즘의 극복이라는 문제만이 아니라 제국의 질서를 청산하는 일을 함께 요구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탈냉전의 과정에서 새롭게 포장된 제국주의의 전략은 갈파하지 못하고 마는 상태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미국의 전후 정책에 대한 미국 내부의 비판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지배층은 이데올로기적 공세를 추진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맥카시즘으로 나타나고 비미국인 조사 위원회의 설치로 구체화되었던 것이다.  이 같은 미국의 이데올로기 공세는 제3세계 국가 내에서 그대로 복제되어 무수한 희생자들을 낳았다. 이 땅의 냉전이데올로기가 휘둘렀던 폭력의 근거지는 바로 미국이었으며 따라서 냉전 이데올로기의 청산은 미국이 유지하고 있는 제국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적 극복과 직결되는 일인 것이다. 

냉전시대 이후 전개된 <세계화>는 제국주의 확대전략의 다른 이름이다. 이것은 미국의 제국주의적 패권전략에 대한 진영대립의 제동이 사라지면서 가능해진 상황의 산물이다.  이것은 과거 군사적 지배를 통해 이룩해온 냉전시스템에 대하여 자본의 직접적인 지배를 결합한 전략의 결과라고 하겠다.  따라서 냉전과 세계화는 미국의 제국주의 관철과정에서 단계만 달리하는 현상일 뿐 그 본질은 동일하다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게 되면, 냉전의 극복이 미국의 자본에 직접적으로 지배받는 체제로의 이행이라는 현실로 이어지게 된다.  우리는 지금 냉전의 극복도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하고, 미국 자본의 직접적인 지배에 대해서도 바르게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그 까닭은 냉전시기 이후 미국이 이 땅에 관철해온 제국주의 지배 질서 전체에 대한 청산의식과 의지가 바로 서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것은, 미국이 냉전 이후 세계화를 앞세워 자본의 직접적인 지배를 행사하는 쪽으로 비중을 이동시켰다고 해도 냉전시기의 군사시스템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부시정권의 전지구적 미사일 방어망 강행추진에서 그대로 드러나는 일이다.  하여 우리에게 있어서 미국의 문제는, 냉전이 우리 땅에 장치한 전쟁 시스템을 해체 청산하고 자본의 지배를 구조화시킨 일체의 정책을 전면 검토하여 민족의 이익에 맞게 재정비하는 일이 된다.  이러한 작업은 다만 우리에게만 특별하게 존재하는 과제가 아니라, 미국의 제국적 지배 체제하에 있거나 그 위협의 대상이 되는 나라들 모두에게 공통적인 작업이다.  미국의 전지구적 제국건설의 본질은 어디에서나 동일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미국은 제국주의 국가이며 우리는 이 제국주의 지배 아래 놓인 식민지라는 사실, 그리고 이러한 식민지적 주종관계를 청산하기 전까지는 우리 민족의 장래는 언제나 제국의 신민 또는 노예의 신세를 벗어날 수가 없다는 점이다.  제국의 지배 아래 있는 민족의 제1차적 과제는 따라서 어디까지나 민족의 자존을 회복하고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민족해방투쟁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낡아버린 구호가 아니며, 우리에게 엄연히 절박한 현실인 것이다.

4. 식민지 지배의 본질, 변하지 않았다.

이렇게 보자면 우리와 미국의 역사적 관계가 형성해온 본질이 그대로 드러날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필자의 근간 저서 <보이지 않는 식민지(삼인)>의 일부 대목을 그대로 여기에 옮겨 보겠다.  

"해방정국에서 미군정이 추진했던 정책의 정치적 목표와 경제적 지향점은 기본적으로 민족해방의 완결을 향한 진로를 가로막은 남한사회의 재식민지화 과정이었으며 이후의 정국은 바로 이에 토대를 둔 연장선에서 파악될 수 있는 사태라고 하겠다.  2차대전이 종결되고 민족해방의 열기로 가득 찬 조선반도에 진주한 미군은 곧바로 <점령정책>을 실시한다.  미군정의 점령정책은 맥아더 사령부가 일본에서 관철한 점령정책의 복사판이었다.  해방정국에 선포된 미국의 점령정책은 당시 조선민족의 자주적 권리를 일체 부인한 맥아더 포고령 제1호에 그대로 드러났던 것이다.  미국은 해방된 식민지에 걸 맞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접근해온 것이 아니라, 우리를 어디까지나 자신의 제국주의적 지배체제에 봉사하도록 하기 위한 근거지로 재편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며 그로 인해 우리는 엄청난 희생을 강요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민족자주와 함께 정치경제적 차원에서 민주주의적 근거를 가진 새로운 정치를 지향하려 했던 민족내부의 절실한 요구는 무시될 수밖에 없었으며 이 요구를 감당하려 했던 세력은 미국의 재식민지화 점령정책의 진압대상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진압의 기구는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기구를 고스란히 동원하는 방식이었다는 점에서 미국의 전후 점령정책은 친일세력의 정치적 복원과 파시스트적 군사체제 성립의 기초를 필연적으로 결과했던 것이다.  "국민(國民)"이라고 하는 일제하의 식민통치국가가 규정한 제도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인간 그 자체로서의 자율적 존재인 인민(人民:People)을 주체로 한 인민 민주주의를 지향했던 역사적 실험은 이로써 궤멸되었다.  해방정국의 공간을 발판으로 한 민중의 자치조직이자 민족해방투쟁의 맥락 속에서 형성되었던 인민위원회의 미군정에 의한 해체는 앞서 언급했던 <영향권 분할정책>에 따른 분단정권 수립을 위한 시발이었으며, 이후 역대정권이 미국의 압도적 지배아래 놓이게 되는 역사적 전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형성된 이승만 정권은 미국의 냉전정책을 관철하는 작업에 충실하였다.  제1공화국 성립과정에서 미국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史實)이며, 이로써 우리의 대미의존은 건국의 기반에 구조적으로 내장되고 만 것이었다.  6.25 전쟁의 과정에서 이루어진 미국의 재개입은 한미관계의 종속성을 보다 심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졌고, 민족 분단의 극복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말았다.  역사의 가정이 허용되는 것이 불가능하겠으나, 미국의 대대적이고도 전면적인 개입이 없었다면 희생자들이 일정하게 제한되는 민족 내부의 내전양상으로 그쳤을 전쟁이 제2차 대전 시기를 능가하는 미국의 가공할 화력으로 수 백만명이 죽는 <민족대학살>로 증폭됨으로써 두고두고 민족분열과 대립의 비극을 연장하는 사태로 되고 말았다.  이것은 일본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을 제한하기 위한 목적으로 결정된 원폭투하로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서 희생되었던 일본인들의 수를 훨씬 넘는 수라는 점을 주목한다면 미국의 전쟁개입이 우리민족의 운명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인지 좀더 깊이 되짚어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초기의 내전에서 국제전으로, 그리고 미국의 제국주의적 지배체제의 안정을 위해 중국을 겨냥한 침략전쟁의 면모로까지 발전했던 6.25 전쟁은 미국의 지배체제를 우리민족 내부에 보다 뿌리 깊게 장치하는 계기로 작용하였고, 이 전쟁에서의 미국의 역할은 이후 한미관계의 개념을 근본적으로 규정하는 요인이 되었다. 즉, 미국이 우리에게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마땅하고 정당하며 필연적이라는 인식이 요지부동으로 확립되었던 것이다. 

이승만 체제의 내적 모순에 의한 붕괴는 우리에게 미국의 패권적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중요한 기회를 제공해주었으나 대미인식의 한계로 말미암아 도리어 대미의존을 통한 정국변화를 꾀하는 종속적 선택을 하고 만다.  4.19 학생혁명으로 인한 자유의 공간은 분단문제와 미국문제를 혁신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주었으나, 당시 제3세계 민족해방투쟁의 확산을 경계하고 있던 미국의 대응으로 인해 사태는 급변하였다.  즉, 군부정권 수립이라는 방식으로 쿠바혁명을 비롯한 제3세계 민족해방운동에 대한 대응을 강구하고 있던 미국 케네디 정권의 노선에 따라 박정희 군사정권 체제의 성립은 저항없이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이다.  박정희 체제는 미국에게 있어서 동북아시아 지역의 냉전정책 관철과, 미국 자본주의 체제의 안정적 발전 및 확대를 위한 세계적 거점의  하나가 되었다.  따라서 박정희 체제는 기본적으로 미국의 요구에 순응할 수 밖에 없었으며 냉전체제의 극복은 기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이후에도 계속되었으며 탈냉전 시기에 해당하는 김대중 정부에 이르러서는 자본의 직접적인 지배가 보다 노골화하는 국면이 전개되었고, 김대중 정부의 "신 자유주의적 세계화 추종노선"은 민족경제의 방어망을 해체하고 미국의 세계자본주의 체제 확대과정에 보다 심각하게 종속되는 단계에 진입하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주한미군의 존재를 비롯하여 SOFA협정 개정의 부진 등 미국의 군사적 지배체제의 극복도 여전히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음으로 해서, 이중의 굴레를 쓰고 있다고 하겠다.  1945년에서 출발한 한미관계의 식민지적 지배의 본질은 그 양상만 변화했을 뿐 근본적인 해결에는 여전히 이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실로, 우리의 민족적 처지는 외형적 해방은 되었으나 진정한 해방이 실현되지 못한 상태이다. 미국의 발언 한마디에 우리의 남북관계가 가로막히고, 민족내부의 협력과 단결의 길이 봉쇄되는 현실은 자주국가의 모습이 결코 아니다.  김대중 정권이 남북관계의 진전에 권력의 명운을 걸었지만, 그것은 식민지적 현실을 극복하는 작업과 동시에 진행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점이 날이 갈수록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다.  미국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서는 정치와 경제, 군사와 문화 그 어느 분야에서도 민족적 과제를 제대로 성취할 수 없게 되고 있는 것은 이제 부인할 수 없다.  김대중 정권의 탄생이 미국의 제국주의 지배전략과 깊은 관련이 있었던 것은 김대중 대통령 자신이 IMF체제의 전폭적인 수용과정에서도 그대로 입증이 되는 바이다. 경제문제에 대한 이러한 인식과 자세가 대외관계에 있어서 그로 하여금 자주적 정책을 추구할 수 있도록 해주지 못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김대중 정권의 이러한 한계와 대미 굴종적 현실은 실로 극복의 대상이다.  건국이후 최대의 야당인 한나라당의 이회창 총재에 이르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그는 미국 부시정권의 대한반도 전략에 자신의 위상을 철저히 맞추고 있다.  식민지 체제의 총독기능을 적극 수행하겠다는 의사를 확실히 밝힌 셈이다.  이래 가지고서는, 우리의 민족적 자주를 이루는 일은 절망적이 된다.  식민지적 지배의 본질에 대한 인식이 대중적으로 바로 서고, 이를 극복해내는 역량의 새로운 집결이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5. 새로운 민족 주체세력의 육성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 답은 분명하다. 이러한 현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이를 위해 정치적 의지를 강력하게 관철할 새로운 민족 주체세력을 육성하는 것이다.  식민지 근성에 찌들고, 미국에 대한 노예적 처신에 능한 세력들이 한국의 정치무대를 주름잡는 사태를 종식시켜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민족의 복리와 민족의 평화와 민족의 자존을 최우선의 가치로 삼는 사람들이 정치적 주도권을 갖도록 하는 사회적 노력이 힘있게 쏟아져야 하는 것이다. 

이는 우선, 교육과 언론의 공간에서 최대한의 효력을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 아카데미가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원탁 토론>같은 작업은 매우 귀중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작업의 소산은 각급 학교의 교육과정에 반영되도록 해야 하며, 교과서의 내용에도 포함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또한 언론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대중교육의 현장이라는 점에서, 미국 문제의 본질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끌어내고, 보다 정교하고 엄밀한 국제관계의 분석을 통해서 민족적 이해를 증진할 수 있는 방향을 마련해나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특히 외신을 다루는 부서는 미국과 관련된 국제관계의 해설에 있어서 과거와는 다른 심도와 시각으로 접근하여, 우리가 통과하고 있는 식민지적 지배의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대중정서와 인식의 발전에 공헌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민족적 주체성을 확고히 가진 인물들이 정치권의 주류로 나설 수 있도록 판을 바꾸는 운동이 보다 열정적으로 수행되어야 한다.  미국의 눈치를 보면서 권력에 다가가려는 자나 세력은 비판의 대상이 되도록 해야 하며, 민족자주의 의지를 분명하게 관철해나가려는 정치인을 사회적 존경의 대상으로 삼는 작업을 강화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기회주의적 처신으로 미국의 대리세력이 되려는 정치인은 반민족적 정치행위를 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인물과 세력이 우리의 정치를 주도하게 할 수 없다.  우리 민족의 자유와 진정한 번영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그래서 제국의 질서와 위력에 사육(飼育)당하지 않는 나라를 만들어 가는 새로운 건국의 열정과 꿈을 우리는 회복해야 한다.  이 과정은 지난한 투쟁의 단계를 요구할 것이며, 강력한 인내와 의지 그리고 지혜를 필요로 할 것이다.  그러나 그 길이 어렵다고 해서 포기할 일이 아니며, 끝내 이 민족의 누대를 걸친 자유와 복리를 위해 지금 우리가 나서야 하는 절체절명의 과제인 것이다.  제국의 신민 또는 노예라는 유산을 후대에게 물려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민족의 자주를 위해 결연히 나서고, 이로써 제국의 폭력과 지배를 거부하는 진정한 자유인으로서 거듭나는 기쁨을 누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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