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양희 객원기자 (tongil@tongilnews.com)

본사 김양희 객원기자가, <겨레하나>가 주최한 북측 지원사업장 방문단 일원으로 11일부터 14일까지 3박4일간 평양을 방문한다. <겨레하나>는 북측과 협력해 평양에 빵공장과 국수공장 등을 만들어 지원을 해 왔는데 이번에 이를 둘러보는 것이다. 평양방문 신청부터 소감을 정리한 김양희 객원기자의 평양방문기를 일기식으로 순차적으로 싣는다. / 편집자 주

▶창광유치원에서 만난 북측 꼬맹이들. [사진 - 통일뉴스 김양희 객원기자]
평양을 다녀온 지 한 달이 되었다. 그동안 우리 정부는 UN의 북한인권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지기도 했고 또 조만간 6자회담이 재개되는 등 정세는 급변하고 있다.

이와는 별개로 이번 도하아시안게임에서 남과 북은 동시입장을 했고 멋진 경기를 펼친 남과 북의 축구팀은 서로 격려와 위로를 아끼지 않으며 우정 어린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통일뉴스’에 연재하는 ‘민족음식이야기’에 직접 북녘의 음식들을 먹어보고 소개를 하고 싶다는 소박한 마음에서 출발한 이번 방북. 직항로에서 중국 경유로, 또 날짜가 바뀌면서 천천히 방북을 준비하고 또 가서 있었던 이야기를 일기로 쓰면서 나는 한 달 반여를 내내 평양에서 보낸 격이 되었다. 이에 따라 한 달이 넘는 휴가(?)가 되어버려 글을 쓰는 동안은 다른 사람들에게 미안할 정도로 즐거워하고 행복해했다.

재일동포 양영희 감독의 영화 ‘디어 평양’을 보면 일본에서 나고 자란 감독은 조국이라고 배웠지만 평양은 낯설고 이질감이 큰 도시인데 어느 순간 그곳은 보고 싶은 가족이 있는 곳이라고 말하는 부분이 있다.

나도 그곳에서 함께 웃고 떠들며 장난치고 놀던 그 사람들이 떠오르고 보고 싶다. 창광유치원 꼬맹이들은 갑자기 매서워진 날씨에 감기에 걸리진 않았는지, 나랑 이름이 비슷한 양각도호텔 회전 전망칸 김향희 봉사원은 애인이 생겼는지, 또 계원삼 아저씨와 영철이, 그리고 취재한다며 많이 괴롭힌 김종수 안내원은 내가 올린 졸고 있는 사진 때문에 혹시 혼이라도 난 것은 아닌지...

일기에는 다 못쓴 뒷이야기를 몇 자 적어본다.

오해 풀기

▶알록달록 옷을 입고 우리측 일행을 반겨준 아이들.[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객원기자]
우선 이번 평양, 개성 기사를 쓰면서 많은 오해를 받았는데 그것부터 풀어야겠다.

가장 많은 이야기를 들은 것이 어떻게 평양에서 그리 오래 머물렀냐는 것이다. 매 기사마다 분명 11월 11일부터 13일까지 겨레하나 빵, 우유 공장 지원사업차 평양을 방문 했다고 언급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차례 올라오는 기사들 때문에 그런 오해를 낳았나보다.

지난달 29일에 있었던 통일뉴스 후원회 행사장에서는 “지금 평양에서 바로 온 것이냐”는 이야기도 들었다. 29일 아침에 평양을 출발, 북경을 경유해 서울에 돌아왔다는 기사가 올랐기 때문이다.

‘너무 우려먹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를 들을 만큼 길게 늘인 기사가 지루한 분들도 있겠지만 ‘평양’은 그 자체만으로도 너무 신기한 곳이었기 때문에 내가 겪은 모든 것을 그대로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기사의 제목도 평양일기로 정한 것이다.

또 너무 북에 자주 왔다 갔다 하는 것 아니냐?며 평양전문 기자라는 말부터 심지어 농담어린 간첩이 아니냐는 질문도 받았다.

이 역시 기사를 많이 쓰다 보니 그런 오해를 낳은 것이라고 해명을 해야겠다.

금강산까지 포함하면 나의 방북은 4차례. 물론 4차례의 방북은 많으면 많다고 하겠지만 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맨 처음 방북이 2004년 6월 15일에 있었던 금강산 당일관광 취재. 금강산 관광 6주년을 맞아 현대 아산에서 당일관광을 기획, 처음으로 시험 운행을 한 것이고 운 좋게 이를 취재 하게 된 것이다.

그 다음은 2005년 10월 8일부터 10일까지 아리랑 참관단으로 평양과 묘향산을 방문한 것. 5,000여명의 남측 참관단들이 대규모로 방북을 하던 때 그 중 하나로 갈 수 있었던 것으로 당시 2박 3일의 기간이었지만 지난해 10월 10일은 북녘의 당창건 기념 60돌을 맞는 시점이라 거리에서 축제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는 이번 2006년 11월 11일부터 13일까지의 평양 방문, 11월 25일 민화련 주최 ‘청소년 평화의 숲 가꾸기’ 행사 취재차 방문한 개성공단 방문. 이것이 나의 모든 방북 경험이다.

당일관광이라 금강산은 단 10분여 밖에 오르지 못했고 또 개성공단에서는 나무 심기가 주목적인 행사인지라 방문기를 봐서도 알겠지만 그저 공단 내의 우리은행, 훼미리마트 등을 둘러보는데 그친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북녘 땅에서 잠을 잔 것은 모두 합쳐 총 5일. 4차례의 방북이지만 단 5일을 가서 본 것을 가지고 그렇게 기사를 쓴 것이라고 밝히면 얼마나 평양전문기자라는 말에, 또 간첩이 아니냐는 말에 내가 얼마나 부끄럽고 황당했을지 알 것이다.

나는 그저 운 좋게 내가 가게 된 평양을 함께 가지 못한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그곳의 사람들을 기사로나마 남측 사람들에게 만나게 해주고 싶었을 뿐이다.

선무당이 사람을 잡았다고 해야 하나? 그 의욕이 과하다보니 사람들에게 평양을 아주 잘 아는, 제집 드나들 듯이 한다는 오해를 낳았다.

고마운 인사

▶양각도 호텔 환송. "고맙습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양희 객원기자]
이번에 북측 김종수 안내원을 비롯, 평양에서 만났던 모든 사람들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하나하나 꼽아야겠지만 그저 한꺼번에 뭉뚱그려 말하자면 모두들 우리 남측 손님들에게 정말 황송할 정도로 잘 대해줬다. 영화제에서 수상한 여배우의 그 뻔한 수상소감처럼 ‘더욱 열심히 하라는 채찍질로 알겠습니다’라고 대답을 해야 할 정도였다. 휴~그 고마움을 언제 다 갚을지...

그리고 또 이번 평양, 개성 이야기를 쓰는 한 달여 동안 나는 함께 평양을 갔던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는 말을 반증하듯, 중요한 순간에 카메라가 제대로 작동이 되질 않아 속을 많이 끓였다.

그러다보니 기사를 쓰면서 함께 평양에 갔던 이들에게 필요한 사진을 밤낮 없이 요청, 사진 동냥을 많이 했고 또 몇 장은 내가 찍은 사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진에 내 이름이 나가기도 했다.

‘우리 친하잖아요. 친한 사이끼리 사진 보내주는 일쯤은 아무것도 아니죠?’ 하며 뻔뻔하리 만큼 들이대 “두 번 친했으면 아주 큰일 났겠다”는 이야기도 듣고, 밤 12시 경 “퇴근 후 깜박 잊고 있다가 사진 지금 보냈다”고 전화가 오기도 했다.

사진만이 아니라 꼼꼼히 적는다고 적었지만 그때그때 우리가 어떤 노래를 불렀는지, 어떤 구호를 외쳤는지 또 빠듯한 일정 상 이동에 바빠 메모하지 못한 것들도 함께 간 이들의 도움이 컸다. 동영상을 찍어온 분들은 동영상 찍은 것을 직접 확인해 주기도 했고 또 아이큐가 160이라던 모 분에게는 “그 좋은 머리로 한 달 전 갔던 민족식당에서 부른 노래를 떠올리라”며 괴롭히기도 했다.

또 몇 분은 바쁜 와중에도 통일뉴스 후원행사에 찾아와 주었다. 친한 사이끼리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것이 참 쑥스럽긴 하지만 이곳을 통해 한마디 남길까 한다.

“그동안 고마웠어요. 지난번엔 2차까지 밖에 못 있었으니 조만간 한 번 만나 밤새도록 이야기 나누며 진정한 평양 뒷풀이를 하자구요. 아핫~제가 쏘는 것은 아니구^^;; 연락만 제가 할게요. 우리 친하잖아요ㅋㅋ 기사는 다 끝났지만 아직 ‘민족음식이야기’에 그때 먹은 음식들 관련해 쓰고 있으니 아직도 부탁할 일이 많습니다. 우리 친하잖아요~”

궁금한 점

▶묘향산 안내원들. [사진 - 통일뉴스 김양희 객원기자]
나는 두 번째 방북을 준비하면서 지난번 방문 때 국제친선전람관에서 수첩을 들고 들어가지 못해 그저 기억에만 의존해 기사를 쓴 것을 보완하고자 특별히 양해를 구하고 수첩을 들고 들어가 반공을 국시로 외치던 대통령들이 김일성 주석,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보낸 선물 목록을 적어오고 동아일보사가 보천보전투 기사 동판을 선물로 보냈다는 기사를 1년여 만에 금판으로 바쳤다고 정정 보도를 한 바 있다.

하나하나 궁금한 점을 해소하는 재미도 있지만 나는 이번 두 번째 평양 방문에서 또 2가지 의문을 안고 왔다.

100여 개국이 넘는 국가에서 수 십 만점의 선물을 받은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그들이 말하는 대로 정말 그 훌륭함에 반해 세계 각국에서 그렇게 선물을 받은 것인가?

그렇지 않고 그저 국가의 수반이기 때문에 그렇게 선물을 받은 것이라면 그간 우리의 대통령도 그에 상응하는 선물들을 받았을까?

또 받은 선물을 북녘은 ‘인민의 재산이며 국가의 재산’이라고 모두 국제친선전람관으로 보내와 함께 볼 수 있도록 하고 있는데 우리의 대통령들은 그냥 본인이 가지는 것인가? 그럼 그래도 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해외 순방을 갈 때 보면 선물을 교환하는 모습이 보이기도 하는데 그 선물을 대통령 개인 돈으로 사지는 않을 것이고 그 돈은 모두 우리 국민의 세금으로 사는 것일 진데 그 많은 금은보화를 그냥 본인이 갖는 것인가? 그래서 대통령은 물론 국회의원, 아니 그 어떤 부스러기라도 하려고 그렇게 난리인가... 국제친선전람관을 보며 참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다음 의문. 영철 안내원, 너 선보러 다니니 좋더냐? 앞으로 장가가서 잘 먹고 잘 살게냐? 흠~설마 내가 전혀 기억도 안 나는 게냐?

익숙치 않은 북녘 화장실

나는 사실 북녘의 화장실이 익숙하지 않았다. 양각도 호텔에는 외국인 관광객들이 많으니까 그렇지 않았지만 일반 식당이나 건물 등에서는 화장실에 문을 잠그는 고리가 없다.

안내원들에게 물으니 오히려 내가 더 이상하다는 투로 “어차피 들어가기 전에 문을 두드리는데 잠그는 고리가 왜 필요합니까?” 한다.

사실 남녘의 화장실은 문을 잠그게 되어 있어서 그런지 노크도 없이 갑자기 문을 확 여는 아줌마들이 가끔씩 있다. 혹시라도 잊고 문을 잠그지 않기라도 한다면 아주 황당한 상황이 연출되는 것이다. 흠~이건 남측 아줌마들만 해당되는 것인가?

30년을 넘도록 늘 좁다란 화장실에 들어갈 땐 문을 잠그는 게 버릇이 된 나는 문이 언제 열릴지 몰라 불안했다. 평양에서 화장실 문이 단 한 번도 열리지 않았지만 그래도 늘 불안하기만 했다.

작가 류시화 씨가 인도에 여행을 가서 길거리에서 용변을 보는 이들에게 “너희는 왜 위생적인 화장실이 없느냐?” 했을 때 “좁은 곳에서 문 잠그고 냄새나게 용변을 보는 것이 위생적이냐? 오히려 넓은 대지 위에서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용변을 보는 것이 훨씬 위생적이다”는 대답이 돌아왔단다.

같은 의미로 당연히 밖에서 노크를 하고 대답이 없으면 들어가는데 잠그는 고리가 왜 필요하냐는 안내원과 30년 넘게 문을 잠가 안 잠그면 너무 불안한 나 사이에는 간극이 존재하고 있었다.

차이를 인정하고 서로를 배려를 해야 한다고 머리로는 생각을 하는데도 고리타분하게도 30년의 생활 습관에 의해 불안한 마음은 어쩔 수가 없다.

자신과의 싸움

지난 2001년 8월, 강원도 고성에서 강화도로 ‘휴전선평화통일대행진’을 할 때였다.

넷째 날쯤인가, 아흔아홉 구비라는 해산령을 오르는데 뜨거운 태양아래 아무리 아무리 올라도 언제 끝날지 모르는 그 길을 오르며 참 많이 힘들었고, 결국 나와 후배 하나는 낙오를 해 더욱 느려져만 갔다. 함께하는 사람이 없는 그 길은 더욱 힘들게만 느껴졌으며 우린 거의 기절하기 직전까지 숨이 턱턱 막히고 있었다. 그 때 다른 조 낙오한 여자들을 챙기던 남자 몇이 우릴 하나씩 맡아 챙겨주기로 했다. 그들은 우리의 생명의 은인으로 그들이 앞에서 끌어주고 힘을 내라 격려를 해주지 않았다면 해산령에 결국 못 올랐을 것이다.

그런데 나의 후배, “언니 나 사실 해산령 거의 다 올라갈 무렵 정말 쓰러지기 일보직전에 그 남자가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조금만 힘을 더 내십시오’ 하는데 죽이고 싶었어. 자신이랑 왜 싸워? 그리고 자신이랑 싸우면 이겨도 나고 어차피 져도 내가 이기는 거잖아”한다.

나를 비롯한 우리 조 행진단원들은 그 아이의 다소 깨는 사고에 숨이 넘어가도록 웃어재꼈다. 그러나 그 이후 난 그 이야기가 와 닿곤 한다.

평양에서도 우리랑 똑같이 귀여운 아이들, 익살스럽게 농담하고 거하고 배포 좋게 술 한 잔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린 자신과의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마지막 밤에 환송 만찬에서 북측 민족화해협의회 정덕기 부의장의 “남에 대한 간섭과 침탈은 북의 아픔이며 북에 대한 간섭과 침탈은 남의 아픔이다”는 말도 바로 우리가 하나이고 또 자신과의 싸움을 하고 있어서겠지. 자신과의 싸움은 스스로에게 상처만을 남긴다. 도대체 왜 자신이랑 싸우느냐, 이기는 것도 나고 지는 것도 나인 한심한 싸움을 왜 하느냐는 후배의 말대로 이제는 제발 너그러이 마음을 먹고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겠다.

‘미국이 우리를 질식시키려 하지만 조선이 없는 지구는 생각할 수 없다’는 김일성 주석, 그리고 푸에블로호에서 ‘강대국 미국은 다시 한 번 조선 앞에 무릎을 꿇었다’고 말하는 박인호 영웅, ‘우리 사는 것 보시다시피 조금 부족하지만 미국이 100년을 경제제재 해도 우린 일심단결 해 이겨 낼 수 있다’는 림용철 안내원 등 그들은 자신감에 넘쳤다.

이번 일기를 쓰면서 나는 그들의 자신감 넘치고 자존심 강한 그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는 동시에 북녘 땅이 그저 핵무기와 미사일이 있는 ‘불량국가’가 아니라 그곳에도 따뜻하고 재미있는 우리 이웃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나의 이런 어조가 마음에 안 드는 분들도 많았겠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나의 개인적인 생각을 밝힌 일기였으니 이해를 바랍니다. 그래도 남의 일기장을 몰래 들춰보는 재미는 있지 않으셨습니까?).

연말을 맞아 각종 크리스마스 장식들로 무장된 거리와 구세군 냄비 등을 지켜보면서 이 따뜻한 온기가 남과 북 모두를 훈훈하게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바래본다.

앞으로도 그곳에 있는 사람들의 웃음과 눈물들을 많이 보여주고 싶다. 제2의 또 제3의 평양, 개성 일기를 쓰기 위해 앞으로 부지런히 돈을 모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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