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양희 객원기자 (tongil@tongilnews.com)

본사 김양희 객원기자가, <겨레하나>가 주최한 북측 지원사업장 방문단 일원으로 11일부터 14일까지 3박4일간 평양을 방문한다. <겨레하나>는 북측과 협력해 평양에 빵공장과 국수공장 등을 만들어 지원을 해 왔는데 이번에 이를 둘러보는 것이다. 평양방문 신청부터 소감을 정리한 김양희 객원기자의 평양방문기를 일기식으로 순차적으로 싣는다. / 편집자 주


2006. 11. 14
▶14일 양각도호텔을 떠났다.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객원기자]
‘호텔방에서의 경거망동’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그동안 나의 방을 치워준 얼굴도 모르는 봉사원 ‘동무’에게 편지를 쓴다.

내가 방을 얼마나 어지르는가 하면 우리 아빤 가끔 “방을 폭파해버리겠다”고 하신다. 또 지금 살고 있는 집으로 이사 오기 직전 “새 아파트로 이사 가니까 어지간한 건 모두 버리고 가자, 그치만 제일 먼저 버리고 갈 것은 김양희다”고 하시며 방을 하나 얻어줄 테니 따로 독립해 나가라고까지 하셨다. 다른 집들은 딸이 독립을 한다면 반대를 한다는데 우리집은 독립하라고 하니 이 정도면 설명이 되지 않을까? 쩝...

아무튼 평양에서도 짧은 시간이긴 하지만 나의 양각도 호텔 방 어지르기는 계속돼 함께 방을 쓴 신수경 사무차장이 첫날 내가 짐을 푼 곳에 나란히 가방을 두었다가 둘째 날부터는 따로 가방을 둔단다. 뭐 가방 따로 두는 거야 그럴 수도 있지만... 문제는 내가 가방을 풀며 너무 어수선하게 해놓아 신수경 사무차장의 방 열쇠와 나의 카메라 건전지를 잃어버린 것이다.

분명 방까지는 가지고 왔고, 또 나도 충전기를 꽂아놓은 채이기 때문에 그것들에 발이 달리지 않은 이상 잃어버릴래야 잃어버릴 수가 없는데 혹시나 호텔 측에 청소를 하면서 따로 치운 것은 아닌지 알아봐 달라고 요청을 했다. 우린, 호텔에 우리 분실물들이 혹시 나오진 않았는지 몇 번이고 물어보며 괴롭혔고 호텔 측에서도 “절대 그럴 일이 없는데 어찌된 일인지 모르겠다”며 남측 손님에게 불편함을 줬다는 마음에 안타까워했다.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객원기자]
그렇게 신수경 사무처장과 난 잃어버린 것을 어쩌겠냐며 마음을 비우고 있었다. 어차피 여행을 다녀오면 한두 가지 물건들은 잃고 오게 마련 아닌가.

그런데... 돌아갈 짐을 다 싸보니 그 어수선한 짐들 사이에서 열쇠와 건전지가 하나씩 나오는 거다. 허거걱~ 매일 방에 들어갈 때마다 불편하게 열쇠를 받으러 다녔던 신수경 사무처장, 그리고 또 나 때문에 불이익을 받았을 내 방을 정리해주는 봉사원 동무에게 정말 많이 미안했다. 편지에 한 자 한 자 성의를 다해본다.

‘덕분에 편히 묵었어요. 그리고 잃어버린 건전지는 결국 찾았습니다. 심려 끼쳐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이곳에 와서 많은 것 보고 느끼고 갑니다. 통일이 되면 또 만나요. 그동안 열심히 살겠습니다.’

그리고는 방안 곳곳을 사진에 남긴다. 휴~ 언제 또 이곳에 올 수 있을까?

나중에 신수경 사무처장을 통해 들은 이야기로는 “열심히 알아봤지만 찾을 수 없었는데 그래도 찾아 다행”이라고 하셨단다. 세심한 마음 씀씀이에 푸근함과 정이 느껴진다.

“남쪽에 가면 평화대첩 일으키길 바랍니다”

▶양각도호텔 직원들이 떠나는 우리를 환송했다.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객원기자]
가방을 싸서 나오니 일행들도 모두 다시 남녘으로 돌아갈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다. 우리일행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호텔에서 일하는 직원 모두가 밤늦게까지 근무를 했는데도 새벽 6시 이른 시각에 나와 환송을 해준다.

그리고는 다시 순안공항으로......

북측 림용철 안내원은 “그동안 평양에서 많은 것 보고 느끼셨습니까? 보시다시피 우리 조금 어렵게 살지만 어떠한 시련에도 맞받아칠 정신이 있습니다. 남쪽에 가시면 여러분들이 주축이 돼 평화대첩을 일으키시길 바랍니다.”

버스 안에서 그동안 놀림도 받았지만 내가 참 많이 괴롭힌 김종수 안내원과도 인사를 나눈다. 김종수 안내원은 나의 수첩에 ‘통일뉴스의 번영을 기원합니다’라는 문구를 써준다.

그러면서 하는 말, “남녘의 젊은 층들이 정치에 관심이 없다는 게 참 안타까워요.”
언제쯤이면 김종수 안내원의 마음이 덜 안타까워질까?

▶평양 순안공항에서.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객원기자]
언제 도착했는지도 모르게 순안공항에 도착했다. 아니 이리 가까웠나?
“벌써 도착한거예요? 여기 순안공항 맞아요?”

공항에는 북경에서 비행기가 들어와 입국수속, 출국수속에 분주하다.
일행은 떠나기 전 기념품을 사기도 하고 정들었던 안내원들과 사진을 찍는다.

그러던 중 한 서양인을 만났다고 김두현 사무처장이 귀띔을 한다. 어쩌면 국제적으로 북핵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곳에 들어온 미국인일지 몰라 취재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공항을 이리저리 찾았으나 결국 그를 만나진 못했다. 그는 이미 떠난 뒤였다.

김두현 사무처장이 물어본 바에 의하면 그는 유진벨재단 소속의 영국인으로 지원사업차 평양에 들어온 것이라 했단다.

“요즘 평양에 들어오는 외국인이 많습니까?”
“예 많습니다. 한 달 전에는 ABC 방송에서도 취재차 다녀가기도 했습니다.”

출국수속을 하던 중 김두현 사무처장은 평양을 떠나며 아쉬운 마음에 “내 비록 몸은 떠나지만 마음만은 이곳에 두고 갑니다”한다.(그리 북측 여성분들에게 마음을 주시더니 이번에도 역시 또 마음을 흘리고 가시는군) 이에 나는 “마음은 남으로 보내고 몸은 이곳에 며칠 더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했다.ㅋㅋ

김재선 남북물류포럼 감사는 “나중에 평양주재 기자를 추천할 기회가 생기면 꼭 당신을 추천 하겠다” 하신다.

‘그냥 평양에 오니 좋았던 아이들’

▶승무원의 안내를 받아 고려항공에 오르니 기내는 만원이었다.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객원기자]
승무원의 안내를 받고 비행기에 오르니 만원이다. 중국, 몽고 등 동양인이 많지만 흑인을 비롯, 파란 눈의 서양인도 많다. 핵실험 등으로 국제적인 제재를 받고 전쟁위기가 고조되고 있다는데 이처럼 많은 서양인들이 평양을 방문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웠다.

비행기 내에서 또 반가운 이들을 만난다. 우리 일행 말고 또 남녘의 어린이들을 16명이나 만난 것이다. 어린이들은 중국으로 축구 유학을 온 학생들로 경기를 위해 평양을 방문, 관광 등을 하며 한 10여일을 머물렀다고 한다.

“평양에 온 소감이 어떠니?”
“좋았어요.”
“뭐가 좋았는데?”
“.....”
“뭐가 좋았는지 기억 안나니?”
“사람들도 잘해주고...에이 그냥요.”

하긴, 그냥 좋은 걸 왜 좋았냐고 물어본 내가 잘못이다. 좋고 싫은 것이 내 맘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왜 좋은지 어떻게 말로 표현한단 말인가? 머릿속에서 치밀하게 계산을 하는 어른들이나 왜 좋았냐 물으면 “이러저러 해서 보람됐고 앞으로 어찌저찌 해서 어떻게 되길 바란다”며 소위 있어 보이는 대답을 만들어서 해내지 않는가.

그냥 평양에 오니 좋았던 아이들, 얘들아 그 기억 오랫동안 잊지 말고 북녘사람들은 모두 뿔 달린 도깨비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뿔도 안 달렸고 또 우리에게 친절했던 사람들’이라고 이야기해주렴.

‘차로 가도 바로 갈 거리를 이렇게 힘들게 가다니’

▶베이징을 경유해 귀국했다.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객원기자]
북경도착 시간이 오전 10시30분. 오후 3시20분 비행기(우리 시각으로는 4시 20분)라 시간이 좀 남아 천안문광장이라도 잠깐 들르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시간이 빠듯해 그냥 공항 내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우선 비행기표를 끊기로 했는데 여기부터가 고행의 시작이다. 우리는 비행기표를 바로 끊은 후 점심을 먹고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려 했으나 기다려도 기다려도 우리 차례는 돌아오지 않는다.

나도 행동이 느린 편이지만 우와~ 중국인들 만만디라더니 어찌나 느긋한지, 우리가 지쳐갈 때쯤 드디어 우리 차례가 돌아왔고, 우리 비행기표를 발권하는 것을 기다리다 우린 거의 지쳐 쓰러졌다.

발권을 지켜본 사람들도 복창이 터졌다한다. 독수리 타법으로 탁...............탁...............탁............... 치고 발권 후에도 보고 또 보고 또 보며 몇 번을 확인했다니, 마음 급한 사람은 혈압으로 쓰러졌을 것이다.

권오헌 단장은 “이게 또 바로 분단의 아픔이다. 차로 가도 바로 몇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이렇게 힘들게 가다니... 앞으로 직항로로 가는 것이 아니면 가지 말아야겠다”고 말한다. 이틀이나 중국에서 버린 시간과 돈이 아깝기 그지없다. 우린 그렇게 온몸으로 분단의 아픔을 체험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문제가 발생, 김재선 감사가 여권을 잃어버렸다. 꼼짝없이 중국에서 여권이 나올 때까지 며칠을 머물러야 한다. 일정을 마친 후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런 일이 또 발생하다니...

좌절에 또 좌절, 평양에서 술을 한 병씩 기념품으로 사온 우리 일행은 그 귀한 술 깨지면 안 되지 하는 맘으로 부쳐지는 짐에 넣지 않고 기내에 가지고 타려했는데 비행기내에 유리병이 반입 금지란다.

이미 평양 순안공항에서 바로 인천 공항으로 가도록 짐을 부친 상태였다.
어쩌나...어쩌나...

공항 측은 비용을 내고 자신들이 정한 규격에 맞는 포장을 하도록 권유했고 우린 선택의 여지없이 그 많은 술들을 2~3병씩 박스 포장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한 병의 자리가 모자랐던 것인지, 2시간 넘는 기다림이 무료했던 것인지 한 켠에서 작은 돌버섯술 한 병이 돌려진다. 워낙 작은 술병이라 얼마 되지 않았지만 나도 뚜껑으로 한 모금 마실 기회가 됐다.

돌버섯술 한 모금이 내 가슴을 더욱 따뜻하게 휘감는다. 나도 따뜻한 이 기억을 오랫동안 잊지 말아야지.

중국 남방항공 비행기 안은 정말 소란스러웠다. 시끌시끌한 관광객 아줌마 아저씨들, 게다가 코미디 프로그램을 방영해 줘 여기저기서 갑자기 웃어대고 난리도 아니었다.

휴~ 나는 평양에서의 기억을 차분하게 정리하고 싶었는데 쉽지 않았다. 차분한 정리는 포기하고 곁에 앉은 서상철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안산본부 집행위원장과 이야기를 나눈다.

“평양에 오기 전 바라던 일은 다 이루셨나요?”
“나는 잊지 못할 입맛인 룡성맥주 마시기, 막내 여동생 같았던 향산호텔의 기념품판매대의 강선금 판매원 만나기, 어려운 이 시기 나라도 가야 한다는 생각과 목적으로 이곳에 왔는데 벌써 도착한지 둘째 날에 모든 것을 이뤘다. 그 이후부터는 편안히 마음을 먹고 사진이나 많이 찍자는 생각이었다.”

‘정세가 엄혹해도 무사히 평양을 다녀왔다’

‘따뜻하고 좋은 사람들, 서울에 도착하면 시간이 늦어 밥 한 끼 같이 못하겠지, 나중에 연락해 만나자고는 하지만 또 빠듯한 일상에 치여 흐지부지될 것이고...’

우린 아쉬운 대로 기내에서 제공되는 북경맥주와 기내식을 안주삼아 뒷풀이를 하기로 했다. 맥주 한 잔이 들어가니 아까 돌버섯술을 한 잔해서 그런지 얼굴이 빨개지는 것이 느껴진다.

‘하~기분 좋다. 일 년에 한 번씩은 평양에 갈 수 있으면 좋겠다.’
인천공항 도착이 가까워오자 비로소 내가 남녘으로 돌아왔다는 게 실감이 난다.

아직 비행기가 멈추지도 않았는데 여기저기서 꺼내든 핸드폰들, 또 일간 신문을 보는 사람들... 그들을 보니 며칠간의 휴가로 산더미처럼 쌓여있을 일들이 떠올라 머리가 아프다. 휴~

짐을 찾고, 며칠 동안 평양을 함께 느낀 이들과 인사를 주고받는데 부산팀들은 또 다시 비행기를 타고 가야하기에 제대로 인사도 못하고 서두른다.

평양, 그리고 평양에서 맺은 인연들과 기약 없는 헤어짐이다.

며칠 전부터 갑자기 추워졌다는 서울은 오히려 평양보다 훨씬 추웠다. 옷깃을 단단히 여몄는데도 찬 기운이 휘감는다.

지하철을 타니 사람들이 흘끔흘끔 나의 여행용 가방을 쳐다본다. 나의 커다란 여행 가방에는 노란색의 ‘평양순안공항검색’이라는 노란색 딱지가 붙어있기 때문이리라. 그래 많이들 쳐다보고 또 쳐다보시라.

‘아무리 정세가 엄혹하다 떠들어도 나는 무사히 평양을 다녀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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