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경유해 방북, 그러나 취소 안돼 다행
2006. 10. 29. 일요일. 맑음

드디어 평양 방북 날짜가 나왔다. 어제 저녁 늦게 겨레하나측에서 연락이 온 것이다. 그러나 밖에 있다 보니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 양해를 구했다.

“지금 밖에 있어 잘 안 들리니 메일 확인하고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정확히 들리지는 않지만 그래도 방북이 취소됐다는 연락이 아닌 것은 알겠다. 일정이 조금 미뤄졌어도 갈 수 있다는 것이 어딘가?

처음 제시된 날짜는 1차팀이 11월4일부터 7일, 2차가 7일부터 10일까지였으나 중국을 경유해 가게 되면서 방북 날짜가 바뀌게 됐다. 이번 겨레하나 방북단은 1차 11월6일부터 11일, 2차는 11월10일부터 14일까지의 일정이다.

뒤숭숭한 분위기에 평양에 가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내가 초조해 했던 것 이상으로 겨레하나와 북측이 고심했다는 것이 느껴진다. 겨레하나 측에 고마움을 느낀다.

나는 회사에서 휴가를 받을 수 있는 기간이 얼마 되지 않아 주말이 낀 2차팀으로 가기로 했다. 일요일에도 불구하고 1, 2차 모두 선착순으로 50여명만이 갈 수 있다해 바로 겨레하나측에 전화를 했다.

“저 통일뉴스의 김양희 인데요. 2차로 가겠습니다. 입금할 계좌를 알려주세요.”
신청은 됐고 다음주 화요일까지 돈을 입금하면 된단다. 그러나 아직도 준비할 것은 많다.
여권이 나오면 중국 비자를 받아야하고, 또 방북교육도 받아야 한다. 전반적인 취재 밑그림을 그려야하고 구체적인 일정이 나오면 세부 취재 계획도 세워야한다.

일정이 미뤄져 여유가 생기긴 했지만 그래도 좀 느긋해진 만큼 더 열심히 준비해야겠다.

인간미 넘치는 북녘 군인들
2006. 10. 31. 화요일. 맑음

입금을 했다. 드디어 또 하나의 준비를 마치고 방북교육을 받으러 수유리로 향한다.
회사와 수유리는 멀어 점심도 거른 채 바삐 서두른다고 서둘렀지만 수유역에서는 택시를 탔다.

택시기사 아저씨가 통일교육원의 위치를 모르신다.
“4.19묘지 지나 조금만 올라가면 통일교육원이 있어요.”
평소엔 무심결에 지나쳤는데 그러고 보니 4.19묘지를 지나고 통일교육원이 있는 것이 또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이름을 내세우지도 않고 민주화를 위해 싸운 수많은 우리 민중 열사들, 그 열사들의 정신을 다시 한 번 기억하고 통일을 생각하자 그런 뜻 아닐까?

통일교육원 방북자 교육 명단에 내 이름이 빠졌다. 헐~ 그럼 이곳에 또 와야 하는 건가?
나 말고도 겨레하나측 인원 몇 명이 누락됐다고 한다. 방북 일정이 정확히 확정이 되지 않아 교육 일정에도 혼선이 왔다는 설명이다.

이곳에서 대구지역 통일연대 상임대표이자 6.15민족위원회 대경본부 상임의장이신 백현국님을 만났다. 이번 겨레하나 방북단의 1차 일정으로 떠나는데 ‘북측과 지역 통일운동 교류를 협의했으면 좋겠다’ 하신다. 백 대표는 “중앙의 통일운동 단체들은 북녘과 교류할 기회가 많지만 상대적으로 지역의 단체들은 교류할 기회가 별로 없다”며 “관광 등은 다음번에도 할 기회가 많은 만큼 이번에는 꼭 협의를 할 기회와 성과를 만들었으면 한다”고 설명했다.

1차팀으로 갔다면 곁에서 많은 기사꺼리를 만들 수 있었을 텐데 아쉽다. 다만 백 대표님께 소기의 성과를 얻으신다면 꼭 통일뉴스에 기고를 해 달라 부탁만 드리고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다행히 단순착오로 담당자들과 연락이 돼 교육을 받을 수 있다. 3시간을 꼬박 북녘의 현재와 다녀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 채워졌다. 사실 좀 지루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최근의 남북관계 역사를 한 번 정리를 하는 듯 해 재미도 있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남북교류협력법이 시행되면서 1990년도부터 2004년까지 남북을 오간 사람이 9만여 명인데 지난해 한 해만 9만여명이 오갔다고 한다. 뭐 여기까지는 지난해 거센 통일열기가 달아올라 아리랑 참관단도 대거 가고 했으니 그렇다 치지만 올해는 미사일에 북핵실험까지 겹쳐 분위기가 경직된 가운데서도 10만 명 교류, 교역 10억 달러 시대를 돌파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단다.

비무장지대라지만 지뢰가 가득 매설된 중무장지대에서도 개성공단, 금강산관광길, 경의선 등이 추진되면서 방파제에 구멍을 내듯 만든 100만평의 평화의 땅. 매서운 한파 속에서도 땅속에서는 조금씩 봄기운이 움트듯 우리는 그렇게 통일을 만들고 있었다.

강사는 군대를 갔다 온 남자들조차 군사분계선이 철조망 등으로 표시가 되어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실제로는 200m마다 콘크리트로 말뚝이 세워져있어 육로로 금강산을 가는 사람들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어야지 아니면 언제 군사분계선을 넘었는지 모르게 벌써 북녘의 군인들을 만난다고 설명한다.

나는 북녘 군인에 대한 나름의 환상(?)이 있다.

이전엔 북녘 군인하면 떠오르는 것이 국가의 중요행사 등에 수십, 수백의 군인이 줄을 딱 맞춰 사열하며 걷는 것. 북녘의 군사관련 보도가 나올 때면 늘 쓰는 자료화면으로 군인들이 다리를 높게 차고 총도 박자 맞춰 움직이며 걷는 모습은 어찌나 한 치의 오차도 없는지 무서울 정도로 완벽하지 않은가.

TV로 박힌 나의 북녘 군인들의 이미지는 금강산과 평양을 가면서 확 바뀔 수밖에 없었다.

지난 2004년 6월 15일, 금강산 당일 관광이 처음 시행되던 날, 취재차 갔지만 그래도 첫 방북인지라 심하게 긴장하고 떨렸다. 버스는 점점 북녘으로 향한다. 민통선을 지나고 남방한계선을 지났는데도 초소가 많다. 군인들은 질서정연했고 한 무리는 일을 하고 있는 지 웃통을 벗은 채 열심이다. 긴장긴장긴장...긴장의 연속이다.

북측의 군사분계선을 지나고 검문 차 들어온 군인아저씨는 또 어찌나 크고 무섭던지, 인사라도 던지고 싶었지만 나를 비롯해 모두들 숨죽이고 있었다. 하루는 금방 지나고 아쉬운 맘을 뒤로 한 채 남녘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긴장이 풀려서 일까? 유난히 창밖의 노을이 아름답다 느끼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순간, 군인 하나가 초소에 기대앉아 기타를 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헉~

북녘 최전방에서 본 그 군인은 잠깐을 스쳐 얼굴도 모르지만 내가 이제까지 살면서 본 사람들 중 누구보다 낭만적인 사람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지난해 10월 8일, 평양 순안 공항에 도착했을 때 공항 경비를 맡은 군인들이 군기가 바짝 든 채 사열하고 있는데 순간, 난 또 봤다. 사람들이 내리자 벌써 내렸냐는 식으로 군인하나가 당황해 하고 있었다. 그는 다른 사람 몰래 까치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당황한 와중에도 담배를 버리기 아까웠는지 급히 쭉쭉 빨고 또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한다.

나뿐 아니라 아는 사람 하나는 북녘 군인이랑 눈이 딱 마주쳤는데 그는 콧구멍을 파고 있는 중이었단다. 순간 어찌나 당황을 했는지 얼었다는데 우린 또 어찌나 웃기던지.

가끔은 낭만적이기도 하고 몰래 까치담배를 피우고 콧구멍을 파는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준 북녘의 군인들, 이번엔 또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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