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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하구 군사사3-한국전쟁기(종합)<이시우의 한강하구 연재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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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6.11.03  11: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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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우 (사진가, www.siwoo.pe.kr)


평화활동가이자 사진작가인 이시우 씨가 '한강하구'에 대해 천착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금단의 수역으로만 알고 있던 한강하구가 최근 정전협정 상 비무장지대도 아니고 군사분계선도 아니라는 사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한강하구의 실체를 밝히는데 적지 않은 역할을 해 온 이시우 씨에 의하면 "한강하구는 개발과 보존, 통일과 평화 등 각종 사안이 충돌하고 조절되어야 할 ‘뜨거운’ 강이 되고 있다."

그동안 유엔사 문제와 정전협정 등에서 남다른 관심과 업적을 보여준 작가가 이번에는 '한강하구' 연재를 통해 우리를 어떤 항행로로 안내할지,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성원을 기대한다. 특정 요일에 구애됨이 없이 게재될 <한강하구 연재기획안>은 다음과 같다. (이 순서는 연재중 다소 바뀔 수도 있습니다.)

1. 한강하구의 근본문제-관할권
2. 정전협정의 한강하구 규정에 대한 해석
3. 한강하구에서의 민용선박 항행에 관한 규칙 및 관계사항에 대한 해석
    (1953. 10. 3. 군정위 제22차 회의 비준)
4. 한강하구의 비행과 ‘100톤급 바지선’
5. 한강하구 항행의 역사-시선배와 수인선
6. 한강하구 군사사① - 대몽전쟁시기
7. 한강하구 군사사② - 병인,신미양요
8. 한강하구 군사사③-한국전쟁기
9. 한강하구 간척사-새만금의 과거 강화
10. 한강하구 환경-숲과 갯벌
11. 한강하구와 전쟁의 생활사-양민학살
12. 한강하구의 유라시아 지정학



들어가며

▶강화군 더리미 해안의 철책. [사진-이시우]
한강하구에서 사회, 국가, 세계체계의 완전한 일치를 보여준 사건은 한국전쟁이다. 해방 직후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세계 냉전의 대립구도는 정확히 남북의 대립구도로 나타났고, 그것은 결국 바로 이웃한 사람과의 적대적인 분열로 나타났다. 그리고 남북내전으로서의 한국전쟁은 6월 25일 본격화 하자마자 하루도 지나지 않아 유엔안보리의 결의와 함께 세계전쟁으로 바뀌어 있었다. 세계로부터 개인생활로의 구심력이 이렇게 강력하게 작용한 예가 없고, 개인으로부터 세계로의 원심력이 이토록 정확히 작용한 예가 없다. 한강하구에서 한국전쟁은 지금까지도 유라시아대륙 지정학질서의 진행형이다.

한강하구에서 세계전쟁으로서의 한국전쟁이 내재되어 있다가 표면으로 폭발하며 결정적으로 부상한 시점은 인천상륙작전이다. 전쟁 초기 북의 한강하구 도하에 대해 완전히 무방비였던 남측군대의 준비상태에 비해 인천상륙작전에서의 인민군은 세간에 알려진 바와는 달리 놀라운 경계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결론에 있어 미군의 기습은 실패한 것이었으나 그럼에도 상륙에 성공한 것은 압도적인 화력과 그것의 집중 때문이었다. 상륙일자가 며칠만 지연되었어도 상륙전의 결과는 정반대로 흘러갈 것이었다. 6.25와 9.15인천상륙작전과 1.4후퇴 세 번에 걸쳐 한강하구는 전쟁의 중심이 되었다.

한강하구 전선에서 주목할 만한 특징의 하나는 남측군대의 미군의존성이 타지역에 비해 결정적으로 심화되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한반도란 한 지역에서 치러졌지만 그것은 제한전쟁이 아니었고, 무조건 항복과 절멸주의를 강요하는 전면전쟁이었으며 필연적으로 세계전쟁이었다. 우리민족은 6.25부터 9.15까지의 3개월과 9.15부터 1.4후퇴까지의 3개월 사이의 짧은 기간에, 집약되고 처절한 경험을 강요받았다. 그것은 개인의 체험에 국가문제와 세계냉전체제라는 복잡한 모순과 갈등을 모두 짊어지우게 했다. 우리 사회에 새겨진 수많은 모순들은 국가와 세계의 모순이 정리될 사이 없이 우리에게 내던져진 결과이며, 우리 스스로를 찾으려는 성찰과 반성 또한 이러한 모순을 외면하고 이루어질 수 없음을 직시해야 한다. 유라시아체계로서의 한강하구의 가장 비극적인 마지막 완결판은 한국전쟁과 함께 만들어졌다.

전쟁 전

1946년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과에 대한 미국측의 고의적인 오보가 국내에 보도되면서 탁치에 대한 찬반대쟁은 해방정국에서 분단정국으로의 일대 전환점이 되었다. 임시정부 수립과 미,소의 후견으로 요약되는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이 해방 1년을 맞이하는 조선인에게 신탁통치라는 굴욕적인 뉘앙스의 단어로 전달되면서 정치지도자들은 그 진위를 확인해보려는 약간의 신중함도 없이 탁치대쟁정국을 만들어냈다. 대몽항쟁기와 양대양요기를 경험하면서 반성되었던 유라시아 정세에 대한 무지가 만들어낸 역사의 재연이었다.

언제나 문제를 놀랍게 단순화하는 능력을 가진 김구는 ‘반공’으로 이 모든 의제를 수렴시켰고 위기에 처해있던 친일파는 반공을 무기로 수세국면을 공세국면으로 바꾸는데 성공한다. 해방직후 최대의 국가의제였던 ‘친일파 척결’은 탁치대쟁을 통해 친일파 척결을 주장하는 민족세력의 척결로 역전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분단과 전쟁의 기원은 바로 탁치대쟁이었다. 해방의 혁명적 열기는 친일파 척결에서 반공으로 목표를 이동하기 시작했다. 민족과 외세사이에 형성되었던 전선 대신 방법론의 차이정도에 불과했던 이념전선이 친구와 이웃과의 사이에 형성되었다. 그것은 국가와 세계차원에서 진행되고 완성된 분할구도의 정확한 반영이었다. 전쟁의 원인이 갈등이라고 했을 때 1946년은 세계적 갈등의 구조가 거의 여과 없이 사회내 갈등의 구조로 관통된 해였다.

해방직후의 혼란을 수습하고 있던 강화지역도 탁치문제로 다시 큰 혼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되었다. 강화사에 의하면 ‘강화의 좌익계 인사 등은 도시의 궐기대회에 참석화고 귀향하여 집회상황과 지지도를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있었다’(강화사편찬위원회, <증보강화사>, 강화문화원, 1994, p324)고 전하고 있어 당시에는 찬탁입장을 가진 좌익에 비해 친일파세력의 행동이 아직 활발히 조직되지 않았던 상황임을 알 수 있다. 좌익계열은 신속히 조직화 되어 있던 반면, 친일파는 아직 우익을 결집할 구심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강화군 교동주민들의 구술기록을 보자.

“하여튼 내가 볼 때는 뭐 그 이렇게 저렇게 얽힌 사람 한 팔십프론(80%) 돼. 한 팔십 프로는, 내가 볼 때는 87% 이상 될 꺼여.”(종철 구술: 김귀옥, 2006)

‘종철’의 증언에서 유념에 둬야 할 것은 종철의 기억에 교동에서 좌익적 분위기가 80% 이상이 되는 것은 ‘리’를 가로 질러 친.인척 집안으로 얽혀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이 문제는 후에 보게 될 한국전쟁 당시 만연되는 ‘학살’과 갈등 문제를 둘러싼 교동의 특수성에 반영된다는 점이다. 이제 해방이 되면서 교동에 ‘인민위원회’가 구성되었다는 증언은 접하지 못하였으나 양갑리나 다른 지역의 이장들도 대체로 친일파들은 정리되어 마을 주민들로부터 신임을 받는 사람들로 새롭게 구성이 되었고, 사회주의자 여부와 상관없이 좌익의 흐름에 접해졌던 것으로 보인다(강화도 교동 주민의 한국전쟁 경험과 지역공동체의 변화, p20, 김귀옥<한성대 사회학교수>, 2006).

그러나 국가차원의 좌익에 대한 반격이 시작되고, 국가의 기능으로서 합법적 폭력의 행사가 인정되기 시작한 단정수립기에는 강화도 어쩔 수 없이 예리한 갈등의 구조속으로 휩쓸려 들어간다. 단정에 반대하여 전국에 걸쳐 파업과 암살이 잇따라 일어나게 되자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은 이를 좌파의 행동이라 규정, 1947년 3월에 좌익요원 총검거를 단행하였다.

강화경찰서장 한천수는 1947년 8월 15일 예비검속이라 하여 <포고령>제2호를 근거로 좌파세력을 대량 검거하였다. 강화는 지역내 좌파세력의 강성으로 한때 ‘제2의 모스크바’라는 호칭까지 얻고 있었다(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국방사 제1집, 국방부, 1984, p306/신편 강화사 상, p710 재인용).

예비검속을 집행한 강화경찰서장 한천수를 비롯, 당시 남측의 경찰은 군대보다도 친일과 반공으로 철저히 무장되어 있었고 이승만과 친일파를 중심으로 한 사상과 지도체제를 가장 충실히 수행할 수 있는 집단이었다.

남측의 군대가 좌파의 침투에 의해 극도의 혼란상을 보이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1945년미군정이 군최고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서대문구 감리교신학교에 창설된 군사영어학교(Military Language School)는 좌익계는 물론 광복군도 불참하였다. 그것은 군정당국이 그들의 의사를 무시하고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들로 2/3나 대거 기용한데 따른 실망 때문이었다. 북에서는 1945년 말에서 46년 초 보안국 시절, 일본군 출신과 만주군 출신들은 전부 숙청당하거나 월남하였다. 남에서는 미군정이 1946년 1월 21일 군정법령 28호에 근거하여 모든 군사단체의 해산령을 내리자 오히려 좌익 무장단체 성원들이 군대로 대거 입대하여 군대는 좌익의 은신처로 변하고 말았다. 남에서는 군대가 좌파의 피신처가 되었던 반면, 북에서는 군대가 친일파의 피신처 역할을 해줄 수가 없었다. 1946년에 이미 북은 놀라운 속도로 그들이 목표한 혁명을 완성했다. 친일파 척결과 토지개혁이 그것이었다. 인민군 고위장교에까지 승진한 임헌일에 따르면 연안계열은 정치적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일본군 출신의 학병과 장교들을 보강하였지만 김일성 계열은 일본군 출신이 중요 간부직에 등용되는 것을 결사반대 했다. 일본군 출신 간부들은 자신들의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1사단 같은 경우 별도친목회를 결성하여 단결을 꾀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기도는 연속적인 숙정으로 실패했다. 임헌일에 따르면 1차 숙청 대상자는 해방당시 자본가 출신, 일본경찰 및 헌병에 복무한 자, 일본군 장교출신, 가정성분이 불량한 자, 근무태만자 및 불평불만자 등이었다(임헌일, “나는 북괴군 총좌였다”, 세대, 1970년 9월호, p230-231/한국전쟁의발발과기원2, 박명림, p701재인용).

이러한 경력이 있더라도 기술계통 전문가들은 숙청을 모면하였다. 숙청에 직면하여 일본군 출신의 장교들은 대부분 월남하였다. 이들은 남측군대에 들어가 고위 장교그룹을 형성하였다. 이로 인해 남북 양군 간부들의 친일, 항일 경력은 뚜렷이 대비되었다. 남측군대 고위 장교들은 누구보다도 공산주의와 북에 대한 증오와 타도의지가 높았다. 그러나 친일파 일색의 남측군대가 봉착한 태생적인 정통성의 결여는 오히려 좌파가 득세할 수 있는 온상이 되었다. 장교들에 대한 좌파의 침투기도는 특히 치밀하고 뿌리 깊었다. 남측군대 최고지도부를 형성한 감신대 군사영어학교 출신의 초기 군 최고 지도자들인 군번 1번부터 100번까지의 개인경력을 추적해보면 100명중 28명이 파면된 것으로 나타난다(한국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육군장교자력표> 군번 1~100/위 책 p421재인용).

이중 대부분은 전쟁 전 좌파 혐의나 반란가담, 반란기도로 파면되거나 처형되었다. 최고급 간부 1/4이 좌파였던 것이다. 이들의 영향으로 이들이 교육한 육군사관학교 출신과 그 간부들도 상당수가 연쇄적으로 좌파 지휘관이었다. 육사 3기는 여수반란을 주도한 김지회, 홍순석, 제주도 4.3진압차 출동한 박진경 연대장을 암살한 문상길 등이 좌파였다. 3기가 이렇게 고위 좌파장교들을 많이 보유하게 된 것은 그들이 재학 중, 오일균, 조병건, 김학림, 김종석 등의 좌파지휘관이 생도대장, 구대장 등으로서 이들의 교육을 담당하면서 깊은 사상적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었다. 6기는 아예 281명의 임관중 258명이 조사를 받았고, 그중 60명이 좌파로 숙청될 정도였다(창군전사, p510 <한국전쟁사>1권, pp496-497/한국전쟁 발발과 기원2, 박명림, p422재인용).

결국 부대 집단월북, 여수반란(14연대) 대구반란(6연대) 등 국가형성 이후, 이남의 주요 저항이 대부분 군내에서 발생한 것임을 볼 때 이남내 좌파는 핵심국가기구인 군대내에 가장 광범위하게 포진해 있었음이 증명된다. 여수반란사건에 대한 연구에 의하면 군내 좌파의 치밀함을 읽을 수 있다.

군내의 좌파 조직은 침투공작의 특성상 횡적으로는 조직 상호간에는 인지를 못하도록 되어 있었다. 14연대가 최초에 반란을 일으켰을 때 김지회는 14연대내 핵심 좌파장교였으나 반란군 사병과 하사관들이 그가 좌파장교임을 몰라보고 그를 감시했던 것만 봐도 이 침투가 얼마나 비밀스러운 침투였는지를 알 수 있다(한국전쟁 발발과 기원2, 박명림, p423).

단정수립기 강화에서는 비록 제헌 국회의원으로 윤재근이 선출되었지만 좌익계의 위세는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대단했다. 투표를 막는 것이 목표였던 좌파는 강력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투표를 효과적으로 저지하지 못하게 되자 급진적인 수단으로 경도된다.

투표를 마친 대부분의 지방 좌경분자들은 각 산정에 집합하여 있었는데 목적을 알 길이 없었다(증보강화사, 강화문화원, 1994, p325).

위의 기록은 단정수립 저지에 실패하고 난 뒤의 행동이란 점에서 주목된다. 단정 수립을 계기로 분단은 공식화 되었으며 이에 대한 좌익의 저항은 테러의 양상을 띠게 된다. 이후 강화도 좌익계의 열성분자인 구봉회 이성국 김용백 등이 조산출장소의 우호근 순경을 살해하고, 대문출장소 근무 서기석 순경 및 선원면장 김용철씨를 칼로 습격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한편 좌익단체는 아예 사회단체 및 관공서를 합법 쟁취한다고 선동하였다(증보강화사, 강화문화원, p327).

이러한 좌파의 행동은 단정수립후 권력을 장악한 이승만과 친일세력의 공세 앞에 무너지고 만다. 1948년 건국과 함께 의회에서 통과된 반민족행위특별처벌법의 집행을 앞두고 이승만과 친일세력은 친일파의 처벌을 극력 반대했다. 친일 극우단체들은 여러 곳에서 집회를 개최하여 법제정을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집회의 구호는 ‘친일세력처단 반대’ 가 아니라 ‘반공’이었다. ‘반공구국총궐기대회’란 집회 명칭에서 친일파가 구국과 반공이란 이름 뒤로 숨어 공세를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당시로부터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일관된 반공논리의 기원이다. 역사적 단죄의 대상이었던 이승만과 친일파의 리더십이 유라시아냉전체제를 신속히 파악하여 만들어 낸 ‘반공론’이야말로 그들이 집단 절명의 위기를 극복하고 회생하는데 있어서 전가의 보도가 되었으며, 유라시아냉전체제를 한반도화 하는데 완벽히 성공한 계기가 되었다. 1949년 이승만과 우익의 소위 6월공세는 반민특위 습격, 국회의원 대량체포, 김구의 암살로 이루어진 총공세였다. 척결된 것은 친일파가 아니라 척결을 주장한 사람들이었다. 한편 관제 반공데모가 휩쓸고 거대한 반공조직이자, 좌익분자전향교도사업 단체인 국민보도연맹이 만들어진다. 1949년 강화경찰서장 엄태섭은 보도연맹을 조직하였다. 강화군 보도연맹은 그 사무소를 강화경찰서 구내에 두고 서장의 지휘 감독을 받게 하고 그 위원장에 황염을 두고 각 면에는 각 지서에 사무소를 두고 예하조직으로 면지부를 설치하였다(증보강화사 강화문화원 1994 p327). 그러나 1950년 6월 25일 이후 그들은 위장전향을 증명이라도 하듯 친공활동에 앞장섰다.

보도연맹은 과거에 좌익활동을 했다는 사람들이 가입을 요구받았지만, 어떤 지방에서는 할당된 숫자를 채우기 위해 좌익 활동을 하지 않은 사람도 가입을 강요받았다. 보도연맹의 숫자가 많을수록 반공체제의 성공을 과시하는 것이었지만 그만큼 체제에 대한 저항 세력이 많았다는 것을 시인한다는 점에서 보도연맹은 자기 분열증적 정책이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정부와 경찰은 초기 후퇴 과정에서 이들에 대한 무차별 검속과 즉결처분을 단행함으로써 전쟁 중 최초의 집단 민간인 학살을 일으킨다. 전쟁전에는 체제의 품안에 거두어들이고 전쟁발발과 함께 가장 먼저 죽인 것이다. 보도연맹에 대한 학살 사건은 곧 인민군 점령지역에서 일어난 좌익세력에 의한 보복학살의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강화의 경우에는 전쟁발발과 함께 보도연맹이 좌익의 손에 의해 빠르게 장악되었다. 처형당하는 대신 역공을 시도한 것이다. 이것이 준비된 반격이었는지 생존을 위한 저항이었는지, 아니면 위장가입이었는지, 전쟁직전 북의 대규모 후방교란작전과 연관된 것인지 정확히 알 길은 없다. 강화군지는 전자에 혐의를 두고 있다.

지하조직인 남로당원과 보도연맹원들은 6월 27일 일시에 활동을 시작했다. 전쟁 발발 후 보도연맹원들은 지방마다 차이가 있었지만 강화 지역은 인민군이 강화를 점령하자 적극적인 친공활동을 전개하였다(신편강화사, 강화문화원, p714).

6월 27일 강화경찰서 경찰대원은 상부의 지시에 의하여 인천 경기도 경찰국을 집결지로 정하고 눈물을 머금고 가족을 남겨둔 채 후퇴하게 되었다. 이때 전향하겠다고 맹서하고 보도연맹에서 교도를 받아 온 좌익분자들이 약동하기 시작하여 국립경찰이 후퇴하자 관내 치안을 해야 한다고 경찰관 지서를 점거하고 자유를 사랑하는 양민을 반동분자로 규정하여 색출 구속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강화군은 한때 공산당원의 난무에 짓밟히게 되었다(증보강화사, p334).

보도연맹원들에 대한 학살이든 보도연맹원들의 반란이든, 이는 군대보다 강력한 이승만지도체제의 보루로 급성장한 보도연맹 정책이 결과적으로 최종 실패한 것임을 의미한다. 자료의 진술처럼 6월 27일이 보도연맹원들의 본격적인 친공활동 시점이란 것이 확실하다면 전쟁전 6월초부터 대대적으로 이루어진 북측 게릴라부대들의 남쪽지역으로의 침투와 지하공작이 다른 지역과 달리 성공적이었음을 의미한다. 강화보도연맹의 저항과 반격은 보도연맹정책의 목적이었던 사상전향과 동원정책이 강화지역에서는 실패했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북은 보도연맹원을 변절자로 규정했지만 그러한 배신은 전쟁 수행을 위한 국가적 동원의 요구 앞에서는 사소한 것으로 되었다. 인민군은 미군의 개입과 함께 7월초에 조선인민군의용군 본부를 만들어 전시동원정책을 시작한다. 북로당은 같은 시기 <의용군 초모사업에 관하여>라는 결정을 통하여 전 남로당원으로서 변절자(보도연맹 가입자)도 의무적으로 참가시킬 것을 규정하였다(로동신문, 1950년 7월12일자/한국, 1950, p207 재인용). 강화의 경우 동원사업이 시작되기 전 보도연맹의 반란이 있었으므로 이들의 의용군 가입은 어렵지 않게 추정될 수 있을 것 같다.

이같은 강화지역 좌파의 득세는 일제시기 지주제에 대한 저항으로부터 유래한 해방정국의 필연이기도 했다. 강화는 수로를 통하여 지방의 물자를 서울로 대량 수송하는 수로유통경제의 중심지였다. 또한 인천이 개항하면서 경기지역 주요 쌀 생산지인 강화는 미곡상인들이 미곡을 수매하여 개항장 미곡무역상에게 전매하기에 가장 용이한 지역으로 부상되었다. 따라서 개항 후 강화지역의 지주들은 미곡무역을 적절히 이용하였으며, 미곡상인들도 농촌에서 미곡을 수매하여 이를 무역상에 전매함으로써 부를 모으고 이를 다시 토지에 투자함으로써 대지주가 되기도 하였다. 강화지역의 농업생산이나 지주경영은 국내외의 유통경제의 발달과 깊은 관계가 있다(강화사 상, p667, 강화의 농촌사회와 지주제, 김도형).

개항장에는 일반적으로 한국의 미곡과 일본의 면제품을 교환하는 무역체제인 미면교환체제가 형성되어 있었다. 한국에서 수출된 쌀은 주로 면제품 및 잡화품의 주요생산지인 오사카를 중심으로 하는 공업지대의 하층노동자, 도시잡업층의 주식용으로 수요되었다. 특히 일제는 대량의 미곡반출을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1896년 인천미두취인소를 설립하여 외지에서의 투기적 유통을 확대하고 있었다(김도형, 갑오이후 인천에서의 미곡유통구조 인천미두취인소 설립을 중심으로, 擇窩허선도선생정년기념한국사학논총, 일조각, 1992).

이에 따라 한말, 일제하 지주제 변동문제와 관련하여 강화김씨가, 강화홍씨가의 지주경영은 일찍부터 주목받아 왔다. 또한 강화는 비록 도서지역이었지만 토지가 광활하여 경지면적으로 자작한다면 그 소출만으로도 이 지역 농민들이 3년을 호구하는 것이 가능하였다(동아일보, 1926.8.20. 순회탐방 강화지방대관1). 그러나 경작지의 대부분은 소작농에 의해 경작되었고, 지주들은 고율 소작료를 수탈하고 있었다. 강화 출신인 조봉암의 주도와 이승만의 강력한 의지로 1949-50년 사이 이루어진 위로부터의 자유주의적 농지개혁은 일정정도 성과를 낸 것으로 평가된다. 북의 입장에서 전쟁의 정당성은 토지문제였다. 북에서의 토지혁명을 남에서도 실현시키고자 한 것이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쟁 후 북이 남측점령지역에서 실시한 무상몰수 무상분배식 토지개혁의 성과는 강화지역의 경우 어떻게 나타났을까는 전쟁명분의 정당성에 대한 판단기준이 될 것이었다.

각 지방의 토지개혁완료 경축군중대회에서는 “김일성 장군에 대한 감사문”이 쇄도했다. 강화군 송해면 신당리 토지개혁완료경축대회에서 농민들은 토지를 준 김일성에 대해 “전쟁의 최후 승리를 쟁취하기 위하여 끝까지 싸울 것을 경애하는 우리의 수령이신 당신 앞에 굳게 맹세합니다”고 다짐하였다(해방일보, 1950.8.19. <빨치산 자료집>6권, p260/한국, 1950, p273 재인용).

위 북측자료만 보면 북의 전쟁명분은 정당했던 것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전쟁 전 완료된 남측의 농지개혁은 그것이 북의 기준으로는 미흡했다 해도 전쟁을 해서라도 나머지 땅을 찾아야겠다는 남측농민들의 혁명의식으로까지 고양되어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점령지에서의 토지 정책은 북에서처럼 놀라운 속도로 시행되었고, 북의 계산대로라면 ‘이승만 도당’의 착취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농민들의 혁명적 봉기로 전쟁은 훨씬 빨리 끝나 있어야 했다. 그러나 북이 전쟁 후 시인했듯이 남측에서 예상했던 대규모의 혁명적 봉기는 일어나지 않았다. 1950년 5월에 완료된 남측의 농지개혁은 나름대로 이승만체제에 대한 정당성을 국민들이 일정정도 합의하는데 기여했던 것이다. 강화군 교동에 대한 전쟁시기 주민의 구술을 기록한 김귀옥의 논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흥미로운 점은 구술 조사과정에서 대부분의 구술자들이 당시의 경험을 ‘토지개혁’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교동에서의 유상몰수 유상분배는 이남식으로서 ‘농지개혁’을 의미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토지개혁’으로 기억하고 있는 것은 여러 원인이 있겠으나 선행한 농지개혁에 의해 토지개혁의 차별성을 특별히 피부로 느끼지 못한 때문도 있을 것이다. 이는 민주개혁이라고는 도저히 불가능 할 것 같았던 이승만 체제에서 조봉암이란 리더십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지금은 평양의 혁명열사릉에 안치되었으나 전쟁 당시에는 북이 그를 ‘변절자 조봉암’으로 낙인찍었던 것은 이러한 사정과 무관치 않았을 것이다. 해방 후 국가건설 의제였던 친일파 척결과 토지개혁은 국가정통성의 문제였다. 남북은 사회와 군대의 생성발전과정을 통해 이들 의제에 대한 뚜렷한 대비를 보여주었다. 북이 혁명을 통해 친일파척결과 토지개혁을 완수한 반면, 남은 친일파 척결에 실패한다. 그러나 반공논리로 친일파를 보호한 이승만조차 토지개혁만큼은 반드시 성공시키고자 했으며 지주정당인 한민당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승공논리를 내세워 자유주의적 농지개혁을 성사시킨다. 그러나 사회분야에서의 부분적인 개혁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첨예한 권력투쟁의 장이었던 군대는 6월 25일 당일까지도 혼란하기 그지없었다. 인천상륙전까지 전선의 외곽에 불과했던 한강하구지역에서는 해방정국의 좌파우세 분위기가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군사제도

경제가 사회연구의 기본이라면, 군사는 국가연구의 기본이다. 한국전쟁의 사회적 근본문제는 토지개혁이었다. 토지개혁을 둘러싼 사회의 첨예한 갈등이 집중되고 폭발한 곳이 군대였다는 점에서 더욱 군사는 주목을 받는다.

무어(Moore)가 지적한 바와 같이 “많은 사회에서 군사제도들(military institutions)은 그 사회를 전체로 분석하고 이해하는 데에 비할 데 없는 출발점을, 그것은 종종 경제적 분석보다도 더 좋은 출발점을 제공해 준다.”(Barrington Moore, Jr.,Reflections on the Causes of Human Misery and Upon Certain Proposals to Eliminate Them/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2, p686, 박명림, 나남출판 재인용)

국가가 폭력을 합법적이고 독점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조직이란 점에서 가장 발전된 폭력기구인 군대의 생성과 발전은 국가의 생성, 발전, 국가권력의 리더십을 형성하는 투쟁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반영되지 않을 수 없다. 군대는 국가의 성격을 반영하고 국가는 군대의 성격을 규정한다. 이 점에서 남과 북의 군사사상과 역사, 구조는 뚜렷하게 대비된다.

북의 지도부는 기본적으로 전쟁을 정치의 연장으로, 그리고 군대를 정치의 실현도구로 규정하고 있었다. 민족보위성이 발행하는 대표적인 군사잡지 <군사지식>의 설명을 보자

“전쟁의 본질과 특성을 규정하는데 있어서 정치의 역할에 대한 맑스-레닌주의 학설에 의하면 군대는 정치의 도구라는 것으로 된다. 다시 말하면 정치는 군대의 사명과 성질을 결정한다... 전쟁은 정치의 군사적 수단으로써의 계속이다. 그렇기 때문에 군대는 이 정치의 실천도구이다. 그러므로 군대의 면모는 무엇보다도 직접 정치의 성질, 전쟁의 내용, 그의 목적 및 의도에 의하여 결정된다.”(군사잡지부, “전쟁에서의 도덕적 요인의 역할에 대한 맑스-레니주의 학설”, NA RG 242, SA 2010 Item 3/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민족보위성 전투훈련국<군사지식> 1950년 4월 p71 /위의책 p732재인용)

이는 정치, 군대, 전쟁의 삼각관계를 잘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북의 군사론은 근본적으로 클라우제비치로부터 연유한다고 볼 수 있다. 레닌은 클라우제비치의 군사론을 그의 혁명 전략전술에 적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레닌의 ‘정의의 전쟁’론은 북에 의해 계승되었다. 1980년대 경 뒤늦게 소련의 영향을 받은 미군과, 같은 시기에 미국의 영향을 받고 있던 남측군대 역시 근본은 클라우제비치였다. 그러나 그 사상과 적용은 사뭇 달라 보인다. 정치우선을 강조한 북에 비해 남은 군사력 자체만을 강조하는 차이를 보인다. 아래 두 개의 진술을 비교해 보자.

클라우제비치는 “전쟁이란 자기의 의사를 관철하기 위해 적을 굴복시키려는 폭력행위”라고 정의했다. 전쟁에 관한 이런 정의로부터 우리는 전쟁의 목적은 적에게 자기의 의사를 강요하여 이를 관철시키는 것이며, 전쟁의 목표는 적으로 하여금 더 이상 저항하지 못하도록 적을 굴복시키는 것, 즉 적을 섬멸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전쟁의 수단은 바로 물리력 즉 군사력이다(교육지도서 국군정신교육 교본 p459 국방부1993).

조선인민군의 목적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보위하는 데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인민의 재산과 이익을 옹호하며 인민의 평화와 자유를 보장하는 인민의 나라이기 때문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보위한다는 것은 곧 인민의 이익과 재산과 평화와 자유를 보위하는 것”이라고 주장되었다(조선인민군의 목적 및 과업, p20-21/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2, p744, 박명림, 나남출판 재인용).

북에서 군대의 목적은 국가의 보위이고 국가의 보위는 인민의 보위라는 논리에서 우리는 국가와 인민의 일치 및 가족과 국가의 일체화를 엿볼 수 있다. 인민의 군대이자 정치사상우선의 군대이다. 이제 좀더 자세히 남북군대의 차이를 알아보자.

남측군대

남측군대는 건군 초기 친일파 청산의 실패와 군지휘부의 친일파 장악, 좌파의 대거 침투 등의 혼란상만큼이나 군사사상과 전략에 대한 일관성을 찾기는 힘들다. 현재 남측군대가 정통성의 뿌리로 삼고 있는 것은 광복군이지만 광복군조차 건군에서 배제될 만큼 친일의 잔재가 가장 강하게 남아 있는 곳이 군대였다. 1940년 9월 17일 중경에서 창설된 광복군은 중국전선과 미국의 ‘일본과 한국에 대한 침공 및 점령을 위한 전략계획’에 의거 미국 OSS(전략정보처)와 합동특수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무선, 정보, 파괴 훈련을 실시했다. 광복군시절부터 미군 첩보부대와의 깊은 인연은 한국전쟁을 통해 결정적으로 강화된다. 국내정진군으로 명명된 이 부대가 훈련을 완료하고 발진명령을 기다리고 있을 때 일본이 항복함으로써 광복군의 국내정진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1945년 12월 9일 그동안 난립하던 광복군 후원회 조직이 ‘대한민국군사후원회’로 통합되어 동대문 밖 광복군국내지구사령부에 본부를 두고 은하관 주인 김성자의 희사금으로 광복군 국내지대를 지원하였다. 그러나 미군정이 경비대를 창설하면서 1946년 1월 21일 군정법령 28호 3조에 의거 사설 군사단체의 해산령을 내리자 광복군 국내지대도 해체되었다. 광복군은 미군정하의 국방경비대와 해안경비대에 입대하여 군생활을 계속하였으나 태능의 제1연대 1대대에 입대한 상당수의 대원들은 1946년 5월 군수품의 부정처분과 좌익성 장교 및 자주성을 결여한 지휘관을 규탄하는 하극상 소요사건을 일으키기도 하였다(한국의 군제사, p219-222).

1945년 미군정청 등록 군사단체 30여개중 가장 두드러진 단체는 좌파에 조선국군준비대와 조선학병동맹, 우파의 조선임시군사위원회와 학병단이 있다. 조선국군준비대는 총사령관 이혁기, 부사령 박승환 등 간부들이 조선공산당의 당군으로서 조직되었고, 치안유지를 이유로 무장을 갖추었고, 건국준비위원회와 조선공산당의 재정지원을 받아 점차 좌파 성향을 노골화시키자 이에 반발한 일부 대원들이 1945년 12월 4일 대전에서 ‘조선국군준비대 남조선전체대회’를 개최하여 국군준비대 총사령부와 관계를 끊고 임정산하 광복군에 합류키로 한다’고 성명을 발표하였다. 1945년 12월 26일 계동에 있는 중앙중학교에서 개최된 대회에서 명예회장으로 김일성, 김원봉, 이청천, 김무정이 추대됨으로써 공산당 산하군사단체로서의 성격을 확실히 드러냈다.

조선학병동맹은 1945년 9월 1일 결성되었다. 내세운 강령은 제국주의 타도, 신조선의 건설, 치안유지협력과 국군창건 노력 등이었다. 왕익권(동경제대법과 상등병 출신)을 위원장으로 선출, 학병 출신이 거의 참여했으며 미 24군단 선발대가 서울에 도착하자 9월 8일 학병들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한 시가행진을 벌렸으며, 종로경찰서를 접수했다가 미군에게 인계하기도 하였다.

우파조직인 조선임시군사위원회는 일본육사출신 친목단체인 계림회가 중심이 되고 원용덕 등 만주군 출신도 참여하여 1945년 8월말 경기여고 강당에서 발족하였다. 이 무렵 만주에서 국부군과 중공군 간에 전투가 벌어지자 북을 회복하려면 먼저 의용군을 모집, 만주에 파견하여 국부군을 도와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었으나 이승만이 건국도 안 되었는데 그런 일은 할 수 없다고 의견을 제시하자 의용군 모집을 중단하기도 했다. 임시정부를 지지하여 중국에 머물고 있는 광복군을 중심으로 국군을 편성하는 건군안을 작성하여 임정에 제출했다.

이외에도 손원일, 한갑수 등이 중심이 되어 1945년 8월21일 조직한 해사대가 있었는데 30여명의 대원을 선발, 해군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자금난 해결을 위해 한때 건준에 가입하였으나 건준이 좌경화되었다고 판단 이탈했으며 미군정청 교통국 해사과장이 한국해안의 경비와 밀수출입 방지 및 조난선구조를 임무로 하는 단체를 동협회가 주동이 되어 조직하도록 지시함으로써 1945년 11월14일 진해기지에서 해방병단(Coast Guard)을 출범시켰다.

해방 후 여러 군사단체는 정국의 태풍이었다. 미군 및 경찰은 물론 상호 충돌하는 사태가 야기되었을 뿐 아니라 자금조달을 위해 공갈, 협박을 자행하는 사태도 벌어지기까지 하였다. 남원에서는 ‘국군준비대’ 와 ‘인민위원회’가 합세하여 미군 및 경찰과 충돌하였고 서울, 경기지역에서는 찬탁편에 선 학병동맹과 반탁편에 선 학병단이 충돌하고, 김두한 부대가 학병동맹 및 국군준비대와 교전까지 벌였다. 이에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중장은 조병옥 경무부장에게 군사단체의 해산을 요구하기에 이르고 경비대 창설에 즈음하여 학병동맹사건이 발생하자 미군정은 1945년 11월13일 불법 군사단체 결성을 금지하고 1946년 1월 21일 군정법령 28호에 근거하여 모든 군사단체의 해산령을 내렸다. 이렇게 되자 지방조직을 가졌던 좌익성향의 국군준비대 요원들이 도단위에 창설되는 국방경비대 사병으로 입대하게 되었다(한국군제사 p224-226).

남측군대의 구조를 보면 역사는 일본, 기술은 미국, 정신과 사람은 친일파로 조합되어 있었다. 남측군대가 구조에 있어 미군화 된 가장 결정적인 계기는 이승만의 맥아더에로의 작전지휘권 이양이다. 이승만은 작전권은 언제든 가져오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가 작전권 환수를 결심한 순간은 38선으로의 북진결정 때였다. 부산에서 이승만은 직접 붓으로 명령서를 써서 3군 총사령관인 정일권에게 “대한민국 국군은 즉각 북진하라”고 북진을 명령하였다. 그는 맥아더에게의 작전지휘권 이양을 들어 신중할 것을 요구하는 군간부에게는 “작전지휘권은 내가 자진해서 맡긴 것이기 때문에 언제라도 찾아올 것” 이라고 말하며 “대한민국 국군인 여러분은 대한민국 대통령의 명령만 충실히 지켜주면 되는 것”이라고 정면으로 반박을 주었다.(정일권<6.25비록:전쟁과 휴전>, 서울 동아일보사, 1986, p156/한국1950, p556 재인용)

그러나 그는 목소리만 높였을 뿐 자신의 의지를 실행할 순 없었다. 1952년 미8군사령관 테일러(M.Taylor)는 이승만 제거 계획인 에버레디 계획(Plan Everready)을 작성했다. 그것은 남측군대가 유엔군의 작전권을 벗어날 경우 반항적인 지도자들을 제거하고 그들에 대한 모든 지원을 중단하며, 필요할 경우 유엔군 지휘하의 군사정부 수립도 검토한다는 내용이었다(Paper Submited by Taylor, May 4, 1953, FRUS 1952-1954 Vol.XV Part1, 1984 pp 965-968/주한미군, p65, 한울아카데미 재인용). 유엔사에 이양한 작전권은 이승만의 생각처럼 쉽게 가져올 수 있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 이후의 정치지도자들도 쉽게 작전권을 돌려받겠다고 말하지 못했던 것이다.

북측군대

인민군 장교의 상당수는 남쪽 출신이었다. 이는 남측군대 장교들의 상당수가 북측 지역 출신이었다는 것과 비유된다. 인민군 경력의 특징을 보면 첫째, 그들은 농민과 노동자의 군대였다고 할 수 있다. 사병뿐 아니라 지휘관의 경우도 동일했다. 둘째는 인민군병사들의 긴 투쟁 경력과 중국 혁명에의 참여자들이 많다는 점이다. 셋째는 소련의 진주와 점령으로부터 소련식 장비와 무기체계, 편제 및 훈련방식을 부여했다. 결국 인민군은 북을 중심으로 중국과 소련의 요소들을 흡수해 창조된 셈이다.

소련은 무기, 장비, 이론, 체제와 편제 등의 하드웨어를 제공했고 중국은 역사적 기원과 인원 투쟁경험, 조직운용관습, 군내 인맥과 인적 관계 등의 소프트웨어를 제공했다. 가장 주요한 핵심요소인 사람과 정신은 북에 의해 제공되었다. 전쟁의 결정과정에서도 이같은 결합은 그대로 유지된다. 이를 테면 통일을 위한 의지와 욕망은 북의 지도부로부터 나왔고, 그를 위한 인원과 자신감은 중국혁명 후 중국으로부터 제공되었으며 무기와 장비는 소련으로부터 흘러들어왔다.

이같은 조합은 남쪽 군대가 미국, 일본, 이남의 합작물이었던 것에 비유된다. 체제가 변화 발전하면서 소멸하고 잔존하는 순서는 체제 생성과정의 순서일 때가 많다. 북측군대는 외곽을 결정했던 소련의 요소가 가장 먼저 사라지고 1950년대에는 중국과 북측의 요소만 남았다가 60-70년대를 거치면서는 북의 요소만이 남게 되었다. 생성과정에서의 역사적 비중의 반영이었다(위의 책p730-731). 남측의 경우는 미군의 요소만이 남게 되었다. 체제의 생성과정을 지배한 본질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남에서는 이제 한창 논쟁중인 작전통제권 문제가 북에서는 해방 후 불과 1년 뒤인 1946년에 해결되었다. 남북군대의 정통성에서의 불균형은 50년 넘게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남측군대에 대해 인민군은 ‘인민군과 완전히 유리된 지배계급의 군대요, 미국의 침략의 도구’로 가차없이 낙인찍었다. 북에 따르면 남측군대의 모든 반인민적 정책의 배후자는 미국이었다. 또한 “자본주의국가의 군대는 낡은 제도를 원조하며 부르조아적 질서를 견고히 하는 가장 완고한 것이다. 자본주의 국가의 군대는 도저히 강한 군대가 될 수 없으며 그가 나가는 길은 다만 와해의 길밖에는 없다고 공격하였다(조선인민군의 목적 및 과업, p14/위의 책 p71 재인용).

인민군은 철저하게 당과 연결되고, 군내에서 정치조직으로서 민청조직과 군인회의가 조직되어 있었다. 군인회의는 각종 문제에 대한 토론을 통하여 끊임없이 상부의 지시를 침투시키는 군내학교의 역할을 하였다. 그리하여 인민군은 ‘민주주의적 민족간부를 양성하는 기관’으로 불렸다. 인민군은 국가와 사회를 연결하는 중심고리였다. 사회성원들은 인민군으로 들어갔고 인민군은 사회를 향하여 군사적 원리와 운용방법을 확산하여 체제를 군사주의가 지배하는 사회로 만들었다. 선군사상은 그 절정이다. 인민군은 지금까지도 혁명적 사회체제의 중심이다. 정치 군사 지도자들은 전원이 항일투쟁 참가자들이었다. 이는 광복군마저 배체한 채 친일파로 이루어진 남측군대에 대해 인민군이 보유한 강력한 정통성의 기반이었다.

북이 절멸의 위기에서 참전을 결정한 중국군과 인민군은 1950년 12월 4일 조중연합사령부를 만들었다. 북과 중국은 양군의 통일적 지휘체계에 대한 토의 끝에 중국이 정직을 맡고 조선이 부직을 맡음으로서 작전지휘권이 넘어가게 된다(한국전쟁, p202, 와다하루키/한국1950, p500 재인용). 그러나 이는 정전과 함께 조중연합군해체, 작전권 환수로 이어진다.

미소-중일-남북의 중층적인 냉전체제가 만들어낸 남북군대의 건군과정에서부터 노정된 성격의 차이는 인천상륙을 전후한 과정에서 다시 한번 확인되고 고착화 된다. 그것은 마치 종자가 어떤 조건을 만나 개화하고 결실하는 것과 같이 수미일관된 생성, 구조, 기능의 일치를 보여준다.

인천상륙작전

이승만 상륙전 요청편지  이승만이 맥아더에게 보낸 상륙전을 요청하는 편지원본.
[사진 - 이시우]
북 최초의 헌법에 수도를 서울로 정하고 있는 것은 한강에 대한 지정학적 역사가 연장될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었고, 이같은 지정학적 사고가 여지없이 드러나는 것은 인천상륙작전을 통해서다. 현지부대 한 자동총 중대 책임자 이명일의 9월12일 보고서를 보면 이것이 명확해 진다.

“우리당원들로 하여금... 놈들이 기도하고 있는 경기도일대 지구 상륙을 저지하며 특히 중심지에는 서울에 현관인 인천에 놈들에 피묻은 발을 일보라도 들여노치 말게 할 것이며...” (NA,RG242,2009 7/123 ‘보고서’ 자동총중대000책임자 이명일<1950년 9월12일. 0은 판독불능>/ 한국1950, p421 재인용)

당시 인민군은 미군의 상륙지점을 인천과 남양 안중리의 세 지역으로 상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서울의 현관인 인천에 놈들의 피묻은 발을 일보라도 들여놓지 말게 할 것’이라고 결의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 세 지역 중에서도 방어의 중심은 인천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그 이유는 서울의 현관이기 때문이다. 이는 서울이 수도가 되거나 경기지역이 된 이래 지금까지도 공식처럼 작용하고 있는 지정학 법칙과도 같은 것이었다. 당시 미합참은 맥아더에게 인천보다는 군산으로 상륙하도록 압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작전의 마지막 순간까지 맥아더를 제외하고는 심지어 함참에서까지 상륙 직전에야 구체적인 계획을 알 정도였으나 북의 방어력은 이미 인천으로 집중되어 있었다. 정보를 넘어선 판단기준이 이미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천 상륙작전은 기습이 아니었다. 최근 공개된 한 비밀문건에 의해 미군은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에 전쟁 발발시 한반도의 상당한 지점까지 후퇴하였다가 인천에서 다시 상륙하는 내용의 작전계획을 이미 가지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 같은 작전개념은 당시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미군의 한반도 작전계획의 골간을 이루는 것으로 한반도와 같이 길쭉하게 발달한 지형과 육군 중심으로 운용되는 적, 시간이 흐를수록 길어지는 적의 보급선 등을 갖춘 조건에서의 대응작전이 상륙작전이 되는 것은 군사적 상식이다. 이 같은 계획의 존재 자체가 미군이 한국에서의 전쟁 발발 가능성을 매우 높게 보았다는 유력한 증거가 되기에 충분하다. 이러한 전쟁 계획과 유사하게 실제의 전쟁도 치러졌다. 문제는 그것을 실제로 실행하는 단계까지 준비가 되어있었느냐 하는 점이다. 전시작전지휘와 통제권의 행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시점은 병력의 배치계획이 실행되는 순간이다.

맥아더가 인천 상륙작전을 최초로 떠올렸다는 시점인 6월 29일의 한강방어선 시찰 때의 구상은 바로 전쟁 전의 계획에 토대를 둔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는 한강 남안에서 강북을 바라보며 인민군의 진격을 수원선에서 차단한 뒤 인천쪽으로 부대를 상륙시켜 적의 배후를 공격하는 작전을 생각했었다(Douglas MacArthur, Reminiscences:General of the Army Douglas MacArthur(seoul:Moonhak Publishing Co.1964)p333-334/한국1950, p397 재인용).

6월 29일 이전인 26일에 이미 맥아더는 주일 총사령부에서 작전계획SL-17을 보고 떠났을 가능성이 높았다. 시찰을 마친 뒤 맥아더는 합참에 미지상군의 투입을 건의하는 동시에 참모장인 아몬드 소장에게 상륙작전계획을 수립하도록 지시했다. 이에 동경에서는 아몬드 소장과 라이트 준장의 주도로 합동전략기획작전단(Joint Strategic Planning and Operation Group.JSPOG)이 작전계획 수립에 착수했다. JSPOG는 한강방어선에서 상당기간 동안 적을 저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가정 하에 상륙작전을 추진했다. 이른바 블루 하츠(Blue Hearts) 작전이라는 것이었다. 이어 7월 4일 미극동군 사령부에서 상륙작전을 위한 최초의 회의가 소집되는 등 준비가 진행되다가 7월 8일 블루하츠 작전은 중지되고 말았다. 인민군의 진격속도가 너무 빨랐기 때문이었다. 미합참의 한국전쟁 관련 기록은 이를 증명한다.

2차대전 중 맥아더는 해상수송부대의 능력을 최대로 이용하여 상륙전을 실시함으로써 혁혁한 성공을 거두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그의 마음은 필연적으로 이 전략에 쏠렸다. 1개의 해병연대전투단을 일본에 있는 제1기병사단과 함께 인천에 상륙시켜 후방지역에서 적을 포획하기 위한 그의 조기계획에 관한 언급이 이미 있었다. 이 작전은 7월22일에 시작될 예정이었으나, 적의 전진 속도가 너무 빨라 무산되었다(합참본부사 한국전쟁 상, p157, 국방부군사편찬위원회).

이 계획된 작전의 본질에 대하여 합참은 7월13-14일 콜린스 장군과 반덴버그 장군의 도쿄 방문 때에야 비로소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맥아더는 워싱턴에서 보안이 누설될까 두려워하여 의도적으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콜린스는 인천을 상륙장소로 선정한 것에 약간 불안을 느꼈다. 상륙정(LST)은 조수가 최소한 깊이 30피트일 때에 이 지역을 건널 수 있는데 이런 조건은 한달에 단 며칠밖에 안되었다. 이리하여 계획자들은 공격일자와 시간 선정에 많은 제약을 받았다. 좁은 수로가 그 갯벌을 뚫고 항구에 도착하지만, 그것을 이용한다는 것은 주간일지라도 어렵고 힘든 일이었다. 더군다나 그 수로는 지형이 험하고 요새화된 것으로 알려진 작은 섬 월미도에 의해 감제를 받고 있었다. 본토를 공격하기 전에 이 섬의 위험을 감소시키려면 기습의 요소가 파괴될 것이다. 더욱 고려할 사항은 인천이 부산방어선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100항공마일 이상 떨어져 있기 때문에 상륙부대와 미8군이 계획대로 연결할 수 있을지가 의문시 된다는 점이었다(합참본부사 한국전쟁 상, p159, 국방부군사편찬위원회).

콜린스의 문제의식에도 불구하고, 합참의 직접적인 관심은 상륙장소가 아닌 9월 중순 특정한 마감시간까지 두 개의 주요부대-1개의 완전한 해병사단과 1개의 공정연대전투단-의 지원을 요청한 맥아더의 요구에 있었다. 그 부대 요구의 당위성에 대한 문의를 했을 때 맥아더는 2개 사단으로 구성된 1개 군단에 의한 상륙공격과 그 후 공수낙하작전을 결합하여 실시할 것이라는 그의 계획의 요점을 설명하였다. 정확한 D-Day는 아마도 9월25일까지 연기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맥아더는 조급히 필요함을 강조하였다. 적의 후방지역에서 조기에 강력한 공격을 한다면 “적의 주요병참선을 차단하고 결정적이며 격멸적인 공격이 가능할 것이다. 이 작전에 있어 어떠한 물자의 지원이 지연된다면 기회를 상실할 것이다”라고 그는 믿었다(위의 책, p160).

전시작전통제에서 배치계획, 배치명령은 전쟁으로의 발전도상에서 결정적 전기이다. 시간은 흘러가고 워싱턴이 맥아더의 계획에 확신을 갖지 못하자 합참은 그 요원들을 도쿄에 보내 맥아더와 그의 상륙계획에 관한 토의를 갖도록 결정하였다. 이 회의에서 콜린스는 10군단이 최초 인천에 발판을 획득하더라도 제8군단이 돌파를 하여 이와 연결하기 전에 바다로 구축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표하였다. 이런 가능성을 피하기 위해 그는 인천 100마일 남쪽이며 부산방어선에서 보다 가까운 군산에 상륙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곳은 인천보다 자연장애물이 적었으며, 논산과 대전으로 이르는 적의 주보급로에 가까워 위치상 장점을 지니고 있었다. 이 제안은 셔먼 제독의 지지를 받았다. 맥아더는 1시간 동안 전쟁은 물론 언어의 마술사처럼 웅변적으로 그의 계획을 옹호하였다. ‘군산에 상륙한다면 오직 얕은 포위만이 가능하다. 적은 차단당하지 않고 다만 그들의 작전기지로 철수하고 말 것이다. 인천침공부대가 압도당할 위험은 없다. 적이 그 목적에 운용할 충분한 예비를 보유하지 못하고 있다. 인천의 불리한 점이 바로 기습하는 데는 유리한 점이다’(위의 책, p163).

다음날 셔먼 제독은 극동해군사령관 조이 제독 등과 회담을 갖고 상륙을 위한 보다 양호한 장소는 인천 남쪽 30마일이며 언제나 물이 깊어 상륙할 수 있는 보성면이라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러나 이 역시 맥아더에 의해 거절당했다. 워싱턴에 돌아온 뒤에도 합참 요원들은 여전히 유보적이었다. 그것은 8월28일 맥아더에게 보낸 완곡히 표현된 메시지에서 명백히 드러났다.

콜린스 장군과 셔먼 제독이 휴대한 정보를 검토한 후 우리는 한국의 해안에서 인천부근의 방어태세가 무력하다고 증명될 경우에는 인천에, 또는 발견할 수 있다면 인천 남쪽의 유리한 해변에 상륙부대에 의한 우회기동을 준비하고 실시하는 것에 동의한다. 우리는 극동군사령관이 원한다면 군산부근에서 상륙부대에 의한 포위준비에도 동의한다. 우리는 잠재적 목표지역의 상황에 관계되는 가용한 정보와 공세작전에 관한 귀하의 의도 및 계획에 관한 적시적인 정보를 원한다((TS) Memo for Record, "Preparation of Instructions to FECOM." Acheson, Present at the Creation, p515/합참 한국전, p165 재인용).

합참의 완곡한 표현 뒤에 숨은 강력한 요구에도 불구하고 8월 30일에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 명령을 하달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 사본을 합참본부로 즉각 보내지 않았으며, 8월 28일자 그들의 메시지에 대한 응신도 하지 않았다. 9월 1일 북은 부산방어선의 전 전선에서 총공세를 폈다. 제1임시해병여단은 전선에서 철수하여 인천상륙작전을 위한 출항 준비 중에 다시 소환되어 대구 맞은 편 낙동강 중심부의 가장 위험한 돌파지역에 투입되어야만 했다. 이 경악할 사태 진전에 관한 보고서를 읽은 후 합참은 극동군사령관에게 인천상륙작전이 잘못 수행되든가, 만일 신속한 승리를 얻어내지 못한다면, 재앙적인 결과가 뒤 따를 것이라고 최후의 경고를 보냈다.

‘8군의 가용한 예비가 모두 투입된다는 사실을 포함한 모든 요인들을 비추어 볼 때 우리는 만일 계획된 작전이 예정된 대로 시작된다면 그 작전의 성공가능성과 기회에 대한 귀하의 판단을 원한다.’

당시 합참은 82공정사단을 제외한 미국에 있는 모든 가용한 훈련된 육군부대가 맥아더에 게 할당되어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만약 작전 실패시에는 훈련된 다음사단이 한국에 도착하는데 4개월이 걸릴 것이라는 것을 환기시키며 거의 위협했다. 맥아더는 주저함 없이 유사한 기동에서 오랜 동안 승리에 젖어온 지휘관의 자신감을 나타내는 답변을 보냈다.

“부산방어선의 상황은 그렇게 위급하지 않다. 방어선은 어느 정도 축소될 수도 있으며 이 우발상황에 대비하여 방어진지도 선정되어 있다. 그렇지만 우리 부대가 부산 교두보에서 축출될 가능성은 조금도 없다. 북쪽으로부터의 포위는 즉각적으로 남쪽 방어선에 대한 압력을 완화하게 되며, 사실 이것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 북으로부터의 우회기동의 성공은 8군과 10군단의 연결에 달려 있지 않다. 서울지역에 있는 적의 분배체계의 중심부를 점령함으로써 현재 이남에서 운영중인 적의 군수보급을 완전히 혼란시키며, 그리하여 종국적으로는 그들의 붕괴를 가져올 것이다. - 공군과 해군의 절대적인 우세권의 보유로 완전한 자체 지속능력을 공히 보유하고 있는 북쪽의 우리군과 남쪽의 우리군 사이에 포위되기 때문에 적은 군수지원의 붕괴와 우리의 연합작전활동을 통하여 종국에는 분산되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 양개군의 신속한 연결은 적의 완전 붕괴의 극적인 표상이 되겠지만, 작전의 치명적 분야는 아니다. 지금까지 언급한 이유로서, 계획되고 당신에게 보고된 작전에 있어서 계획상의 실질적인 변경은 없다.”(위의 책, p167)

명확하고 설득력 있게 주장된 그의 발표를 보고 합참은 인천작전에 대한 그들의 반대를 포기했다. 첫 부대가 해변을 공격하기 불과 몇 시간 전에야 합참은 그 계획의 구체적인 세부사항을 알았다. 그는 승리의 확신에 비례하여 철저한 보안을 유지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맥아더의 의도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기습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안전한 기지에서 상륙작전을 준비하여야 한다. 그러나 인천상륙의 경우에는 작전을 계획하고, 준비하고, 집결해야 하는 곳이 일본이었다. 그 당시 일본은 북의 첩보원과 공산당원들의 감시가 가장 집중된 곳이었다. 많은 함정들이 집결해 있는 것과 보급품을 탑재하는 것, 해군과 상륙군들이 함정에 탑승하는 것을 이들에게 숨기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실제로 인천상륙작전이 종료된 후 1951년 5월15일 도쿄에서 18명의 간첩들을 재판하였는데 일본에서 활동하던 북 간첩의 지도자인 요시마추 이와무라를 심문한 결과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비밀들을 갖고 있었다. 그는 상륙 1주일 전에 체포되었다(한국전쟁 해전사, p103-104).

이처럼 상륙계획은 이미 북이 알고 있었지만 문제는 어디에 얼마의 병력이 상륙하느냐였다. 북측의 첩보활동이 상륙지점과 병력규모 등을 알아내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어야 한다면 유엔사측 첩보활동은 더욱 완전한 상륙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상륙준비를 해야 하는 유엔사첩보부대는 사람관계가 드러나지 않는 작전차원의 전투와는 달리 전술차원에서 현지인들의 인간관계와 복잡하게 얽히고 스며들어가야 하는 특성을 가진다. 이와 더불어 미군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던 정보부대, 첩보부대의 독특한 구조는 세계차원의 냉전적 분열을 사회차원의 갈등으로 전화시키는 매개가 된다. 민간인들과의 대민활동, 포섭, 동원, 테러와 학살 등이 첩보부대의 광범위한 활동영역이었다. 켈로(KLO)부대라는 명칭이 유독 한강하구와 서해지역민들에게 낯익게 들리게 된 것은 KLO의 초창기 괄목할 전과가 인천상륙작전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켈로부대

KLO8240부대는 서울 명륜동에 본부가 있었지만 활동장소는 모두 한강하구와 서해지역이었다. KLO8240부대는 3개 부대로 구성되었는데 위스키대(Whiskey), 썬대(Sun), 고트대(Goat)가 그것이다. 고트대는 특수공작대(Special Operations Unit) 임무를 같이 수행했다. 각 부대의 지역대는 여도, 강화도, 교동도, 초도에 있었다. 이중 썬대는 대청도, 소청도, 볼음도(강화)에 지역 분견대를 두고 있었다.

3개 부대의 KLO가 1951년 10월 단일부대인 8240부대로 개편되면서 통합부대장에 러셀 대령, 한국인 책임자는 계인주 대령이었다. 실제인원은 섬에 나가 있는 2천명, 서울본부와 훈련캠프 및 북측 지역에 침투중인 공작원을 포함해 5천명 수준이었다. KLO의 지휘관이자 인천상륙전을 사전에 준비하여 팔미도 등대에 불을 켠 계인주의 내력은 남측군대의 친미적 성격을 집약하고 있는 그 어떤 전형을 보인다.

일제시 만주국군관학교 출신인 계인주는 다른 친일파와 마찬가지로 미군정치하에서 등용되었다. 1947년 의정부 경찰서장일 때 미군표 위조범 검거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으며 그 뒤에는 육군본부 정보국 제3과장과 차장으로 있으며 군 내부의 좌파 척결 작업에 전념했다. 그 뒤 육군정보학교 교장으로 전출되었다가 김포지구 위수사령관직을 임명받는다. 그가 김포로 내려갔을 때 위수사령부 요직에는 대부분 그가 정보국 3과장일 때 체포해 투옥시켰던 지난날의 고정간첩들과 좌익계 장교들이 장악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이같은 현상은 1949년 대대적인 군내 좌파숙청에도 불구하고 전쟁직전까지 여전히 남측군대에 남아 있는 것이었다. 그는 육본에 부당한 인사라고 항의했으나 육본은 그의 문제제기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상부에서는 좌익장교들에게 충성서약을 받아놓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충성서약을 공산주의자들의 위장술로 확신했다. 그는 머리맡에 권총을 놔두고 잠을 잘 정도로 불안감과 배신감에 싸여 있었다. 6.25이후 그는 김포지역 방어를 위해 육본에 병력지원을 요청했으나 반응이 없었다. 대통령마저 도망간 마당에 후방지원을 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는 것을 뒤늦게서야 그는 알게 되었다.

며칠 후 육본이 수원에 내려갔다는 소식을 듣고 수원으로 달려가니 육본은 벌써 대전에 내려간 뒤였다. 그는 다시 대전으로 달려갔고 그 와중에 한강 방어선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는 김포로의 귀환을 포기하고 아예 부산으로 도망했다. 그것은 어떤 변명에도 불구하고 직무유기이며, 인민군이 밀려오고 있는 최전방에 휘하 장병과 장비를 놔둔 채 자기 혼자 살겠다고 도망친 명백한 전선이탈이었다. 그러나 그가 이탈한 뒤 김포에 남아 있던 그의 부하들은 인민군에 투항하기는커녕 장렬히 싸웠으며 도망간 사령관을 대신해서 신임사령관에 임명된 부사령관 우병욱 중령은 인민군의 치열한 공격으로 방어선이 무너지자 자기 권총으로 자결하였다. 그의 좌익출신 장교들에 대한 문제제기는 기우였던 것이다.

이 같은 사태에 분노한 군 지휘부는 전선이탈을 감행한 비겁한 지휘관 계인주 대령을 맹렬히 비난하며 추적하기 시작했다. 궁지에 몰린 계인주는 아예 일본으로 밀항하기 위해 부산거리를 배회하다 헌병대에 체포되어 대구 형무소로 압송되었고 전시 군사재판에서 총살형을 언도받는다. 한국전쟁이 남북전쟁이었다면 그의 운명은 여기에서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전쟁은 이미 세계전쟁이었으며 이제 막 세계전쟁 본연의 모습을 드러낼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그의 운명은 도망하던 범인이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 체포되기 전 하늘에서 떨어진 권총을 움켜쥔 것처럼 대역전극을 기다리고 있었다.

도쿄의 미 극동군 총사령부 G-2는 인민군을 격퇴 반격하기 위해 JOS(합동비밀작전본부)를 신설하고 거기에 2차대전 때 부상당하고 퇴역했던 홀맨스다커 소장을 책임자로 기용했다. JOS는 작전을 위해 “인민군의 정세에 밝다”는 이유로 최규봉 당시 KLO 대장이 강력 추천한 계인주 대령을 찾고 있었다. 계인주가 대구형무소에 있다는 것이 알려지자 홀맨스 다커 소장은 최규봉을 군용기로 동경에 소환하여 유엔군총사령관 명의의 신임장을 내주며 무슨 수를 써서든지 계인주를 빼내오라는 특명을 내렸다.

특별기를 타고 대구로 날아간 최규봉은 유엔군사령관의 신임장을 내밀고 대구 형무소장에게 계인주의 석방을 요청했지만 육본의 허락 없이는 불가하다는 답변을 듣고, 육본으로 달려가 당시 정일권 국군참모총장에게 계인주의 신병인도를 요청했다. 그러나 그 역시 한마디로 거절하였다. 겨우 면회 허락만을 받은 유엔사령부팀은 단 30분의 특별면회를 신청해 놓고, 계인주가 일단 유치장을 나오게 한 뒤 헌병의 감시를 따돌리고, 그를 탈출시킨다. 당시 신문은 계인주납치 사건에 대해 KLO대원들이 총기를 난사하며 대구형무소에 난입한 것으로 보도했을 만큼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계인주 대령은 인천상륙작전에 앞선 팔미도 등대 작전의 성공으로 다른 4명의 군인들과 함께 미국 은성훈장을 받았다. 남측군대의 탈영병이 미국의 은성훈장을 받는 대목에서 미군이 필요로 하는 능력만 있으면 친일죄도, 사형죄도 문제가 되지 않음을 남측군대는 학습하게 된다. 한국전쟁은 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전쟁이 아닌 냉전체제하의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에겐 반공만이 전쟁의 유일한 가치였다. 해방공간을 거치며 친일, 반공, 탈영병이라는 요소를 모두 함축하고 있었던 군인 계인주는 냉전의 토양과 미군의 선택만으로 일거에 운명의 역전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친일을 극복하지 못한 취약한 정통성의 건군 과정이 군인들의 가치형성에 이후 어떻게 작용할지의 방향도 이미 그의 사례에서 예견되어 있었다.

그러나 남측군대와 미군의 정책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으며 여전히 갈등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미군의 울타리 안에서의 갈등일 뿐이었다. 계인주는 미국 은성훈장까지 받았지만 정전 때까지 남측군대에서는 탈영병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육군 본부에서는 그를 위한 원상복귀 신청서를 국방부에 상신했다. 그러나 장관이 끝내 그것을 결제하지 않았다. 이유는 계인주를 달갑지 않게 여긴 신성모 국방장관이 군의 인사문제에 거의 백지 상태인 신임 이기붕 국방장관에게 훈수를 두고 압력을 가한 까닭이다. 그것은 지난날 계 대령이 좌익계열 소탕전을 벌일 때 신성모 장관의 불미스러운 점을 파헤친 앙금이 가라앉지 않아서였던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1953년 국방장관 자리에 손원일 제독이 부임하자 손 장관과 친분이 두터운 해군출신인 연정 중령, 즉 팔미도 작전에서 같이 참여했던 대원인 연정이 정전협정체결 한 달만인 1953년 8월에 계인주문제를 해결해주었다. 육군본부 3과장일 때의 계인주 대령은 좌익활동을 하던 연정(당시 소령)을 체포하려 했는데 연정이 일본으로 밀항하는 바람에 놓친 일이 있었다(KLO의 한국전 비사, 이창건,지음, 지성사, p68).

미군과 한국군의 갈등과 충돌, 한국군내에서도 미국파들의 한국군 지휘부 배제와 충돌은 전쟁기간 동안 심심치 않은 일이었으며 특히 미군직속의 첩보부대에서 그러한 현상은 자주 일어났다. 북파공작원의 대부로 알려진 김동석의 행적이 그렇다.

김동석이 중요 첩보를 한국군 지휘계통이나 관련기관에 먼저 보고하지 않고 미군첩보부대에 먼저 직보하는 일이 잦아지자 모 고위층 장성이 그를 권총으로 사살하겠다고 위협한 일이 있었다. 그 장면을 마침 리지웨이 대장이 목격하고 격노하여 그를 질책하고 김동석을 지켜주었다. 김동석의 전기는 그같은 사건들의 배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당시 제반 공작을 위한 작전권을 미군이 행사하고 해상투입지원도 미군에 의존하고 있었던 바 고문관을 통하여 미군첩보부대에 먼저 보고하고 긴밀하게 협조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였음은 물론, 한국군 계통으로 보고해 보았자 조치시간만 지연되고 비밀이 누설되는 등 역기능이 자초되기 때문에 선행보고를 하지 못하는 임무 수행상 불가피한 여건이었던 것이다.” (김동석 이사람, p81, 이선호.주정연, 아트컴)

이 같은 진술은 한국군 형성과정에서 골간을 이루고 있는 친일파와 미군의존 전통의 재확인에 다름 아니다. 이는 강화도와 한강하구를 둘러싼 전쟁사에서 유독 주목을 받은 KLO부대의 성격에 대한 단적인 증명이기도 했다. 남측 육해공군이 유엔군총사령관 맥아더의 작전명령을 받고 있는 구조에서 불가피한 현상이기도 했다. 즉 한국전쟁을 통하여 남측군대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유엔군에게 이양함으로서 건군과정에서의 미군의존 전통은 마침내 구조화 된 것이다.

계인주와 팔미도 작전에 같이 참가한 연정의 이력은 좌익출신 군인들의 운명에 대한 또 하나의 극적 드라마를 보여준다. 연정은 일제시 학병 신분으로 해방을 맞고 국방경비대에 들어가 좌익 계열인 학병연맹에 가입해 있었다. 말썽이 일자 해군으로 옮긴 그는 새 출발과 함께 인천지구 해군기지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여기서도 좌익활동에 연루된 탓에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자 묵호에 있는 동해안 해군기지 책임자로 자원해 옮겨갔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어머니가 당시 해군의 제1인자인 실세이자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운 손원일 제독 모친의 친구라는 인연 때문이다. 손 제독의 부인은 이승만 대통령 내외가 다닌 정동제일감리교회의 오르간 주자여서 대통령 가족에게 언제라도 접근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당시 우리나라 정상급 만담가인 신불출이 북의 거물간첩이라는 것이 알려져 온통 떠들썩한 와중에 그와 그 일행이 감쪽같이 종적을 감춘 사건이 일어났다. 알고 보니 그들의 탈출의 길을 터준 것이 동해지구해군사령관 연정 소령이었다. 그런 비밀이 탄로나자 연정은 그길로 일본으로 밀항했고 도중에 사세보의 미해군에 붙잡히고 말았다. 밀항중 맹장이 터진 그는 고통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자기 몸에 혼자 모르핀을 많이 주사했으므로 체포되었을 때는 거의 인사불성이었다. 연정의 이용가치를 안 미해군 정보당국은 그를 첩자로 역이용해 요코하마 해군기지 앞의 술집 바텐더로 심어놓았다. 그는 G2휘하의 캐논첩보기관(일명 Z기관) 소속 특수정보관 신분으로 일했다. 말 재주와 붙임성이 있고 영어를 괜찮게 하는 그는 정보보고 때의 기회를 이용해 고위 제독을 비롯 유력인사들과 교제의 폭을 넓혔다.

그럴 즈음에 한국전이 일어나자 그는 고위 제독들에게 읍소하여 전방에 나아가 목숨을 걸고 싸울 각오가 되어 있으니 원대복귀 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달라고 졸랐다. 클라크팀장은 그가 유능하니 한번 써보라는 고위층의 적극 추천에 마지못해 받아들이긴 했으나 그의 전력을 알고는 동료 미국인들과 최 대장에게 그 사실을 귀뜸해 그만은 무기를 못가지게 했고, 특히 팔미도 작전에선 개별행동을 못하게 감시해야 했다(KLO의 한국전 비사, 이창건 지음, 지성사, p69-70).

연정은 미국을 위해 헌신, 3개의 은성무공훈장을 받았다. 그는 신분을 드러내지 못하는 정보원의 특성상 LA 모처에서 노후를 보내는 것으로 알려져만 있었으나 2003년 한 TV다큐멘타리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있다. 한쪽에서 보면 그의 생은 배신의 이력이고 다른 한편에서 보면 성공의 이력이다. 좌파와의 절연을 입증하기 위해 더 적극적으로 미군에 충성을 바치게 되는 연정형의 인간유형을 우리는 많이 보아왔다.

1946년 남로당 결성 이전부터 좌파활동에 가담했다가 1949년 숙청작업에서 검거된 박정희가 미군장교들의 탄원으로 구명된 뒤 보여준 그의 파란만장한 행보 또한 연정형 인간유형의 재확인이다. 개인의 성공과 실패가 체제의 극단을 오가며 전개되고 개인만의 고유한 영역 없이 국가와 세계와 직접 연결되고야마는 이러한 연결이 낯설지 않은 데에는 전쟁이 만들어 놓은 냉전체제가 놓여 있는 것이다. 이념과 원칙보다 시류에 부합하는 처세와 실용이 가치관을 압도함으로써 진정한 보수도 설자리를 갖지 못하는 것은 또한 한국전쟁의 영향력 범위에서 아직도 우리가 자유롭지 못함을 의미한다.

이제 KLO의 활동을 보자.

계인주 대령을 동경의 GHQ G-2에 인계한 최규봉 대장은 귀국 후 동래의 본부회의에 돌아와서는 여기저기의 피난민 수용소를 순방하며 피난민을 통해 정보를 수집했다. 그러던 중 8월 10일 “부산으로 내려가 백구호에 승선하라”는 명령을 받고 24명의 대원을 이끌고 해군함정 백구호에 승선했더니 거기에는 당시 해군정보국장 함명수 소령과 해군 정보부대원 12명도 타고 있었다. 백구호는 부산을 떠나 서해 남양만 앞바다의 덕적도로 향했다. 8월12일 오전 5시 해군참모총장 손원일 제독(해군소장)의 명령을 받고 남측해군 701함(함장 이정)에 승선한 해군육전대(해병대전신)는 인민군이 무방비로 방치해 두고 있던 서해안의 덕적도를 점령했다.

덕적도에 도착한 다음날 최규봉 KLO대장은 어선을 구해 완전무장한 간부요원 1명, 대원 3명과 어민 두 사람을 안내원으로 선발해 영흥도의 상황을 정탐케 했다. 정탐보고를 받은 남측해군육전대가 인천항에서 25킬로미터 떨어진 강화만의 요충지인 영흥도에 기습 상륙, 탈환함으로써 인천상륙작전 준비를 위한 교두보를 마련케 되었다. 켈로팀은 남측해군702함을 타고 영흥도로 향했다. 파견대는 면사무소 앞에 천막 다섯 개를 쳤다. 그로부터 켈로 영흥도 파견대원들은 어부를 가장하여 주변해역의 수로, 수심, 조류의 흐름, 간만의 차, 인천항 인근에 부설된 기뢰의 수와 위치 및 해안과 내륙지방에 포진한 적의 병력 규모를 정찰하기 시작했다(KLO의 한국전 비사, 이창건 지음, 지성사, p56~57).

최규봉 대장(KLO Goat대 대장)이 9월14일 쾌속정을 타고 다섯 사람과 함께 영흥도 파견대에 나타났다. 유진 F. 클라크(Eugene F. Clarke) 해군대위, F.클라크혼(F.Clarkhorn) 육군소령, 존포스터(John Foster) 육군중위, 계인주 육군대령, 연정 해군소령. 여섯 명중 계급이 중간급인 클라크 해군대위가 팀장인 것은 그가 GHQ 정보국에서 한반도의 해안 정보를 집중적으로 다루며 처음부터 인천상륙작전 계획수립에 깊이 관여한 때문이다. 특히 팔미도 작전계획은 그가 주도하여 수립했고 그것을 고위층에 멋지게 브리핑하여 칭찬 받는 자리에서 자기가 그 작전을 담당하겠다고 지원한 것이다.

클라크는 해군사관학교 출신으로 입이 무겁고 명철한 두뇌의 소유자이며, 인천상륙작전만큼은 해양자료에 근거한 해상작전이니 해군이 주도해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다. 인천 주변의 많은 자료를 그가 갖고 있어 윗사람도 인천얘기가 나오면 꼭 그에게 묻곤 했다고 한다. 그는 인천지역 전문가였다. 클라크 혼 소령은 일반 대학출신이고 해양학의 공학사 학위를 가진 해저 측량, 해류조사 및 분석전문가이며 신중한 성격의 주인공이다. 그는 육군에서 전문가로 차출되어 나왔으며 국무성 정보당국과도 인연을 맺고 있었다. 그는 지휘관 성향이 아니라 공병장교로서 전문지식이 풍부한 참모형 전문가였다.

육군사관학교 출신 엘리트인 포스터 중위는 통신공학 전공의 전형적 군인이고 클라크 대위를 보좌하여 본부와의 연락을 책임진다. GHQ에서 작전 계획을 짤 때 클라크 대위와 손발이 잘 맞아 클라크가 끌어들인 인물이다. 최규봉 대장은 계인주와 함께 한국전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대북 첩보활동, 군표위조범 체포 등 공로가 있어 맥아더 사령부에서는 일찍부터 그를 주목하고 있던 차에 한국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전쟁이 시작되면서 GHQ의 G2에서는 휘하의 KLO의 조직망을 크게 확장하면서 기존의 활동과는 성격을 달리했다. 그들은 유격대 조직활동을 비롯 적진 교란, 역정보 유포, 인민군 후방에서의 민심교란 등 활동영역을 꽤 다양하게 넓혀갔다. 인력동원 규모는 많을 때는 1개 사단 규모를 초과할 때도 있었다. G2는 한국전쟁 발발과 동시에 조직을 전시체제로 확대편성하였다. 부대이름을 KLO에서 8240AU.FEC/LD(극동군연락부대)로 개편하고 전쟁 후 신설된 G2휘하 JSOB(종합특별작전본부) 예하의 행동부대로 편입시켰다. JSOB 초대 부장에는 2차대전 중 유럽전선에서 부상하여 퇴역한 홈즈 K 대거 예비역 육군소장이 임명됐다. 그에게는 8240부대와 캐논첩보기관과 연합하여 북, 만주, 중국본토와 소련의 연해주지역에까지 첩보공작활동을 넓히라는 임무가 부여되었다.

한편, G2 월로비 부장의 특별지시에 의해 JSOB 직속으로 편의상 COIC(종합작전첩보대)를 임시로 편성했다. 여기에 참가한 기관은 G2, JSOB, 캐논첩보기관, 8240부대, 남측해군정보국 등이다. 이들은 북의 평양 이북 여러 도시와 그 주변 그리고 만주의 심양, 장춘, 하얼빈, 대련, 여순, 산해관, 산해관의 연안지대, 열하성, 금주성, 안동, 산동반도(청도일대)등 각지와 서해의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 등 섬에도 분산 침투되어 지령된 각종 정보를 수집하여 무전으로 보고하거나 귀환하였다. 이들 특수첩보요원들은 주로 낙하산으로 투하되어 잠입했다. 또 부산동래에서 서울로 근거지를 옮긴 CIA(잭크부대)에서도 8240부대와는 활동양상이 좀 다르기는 하지만 위에서 말한 규모로 밀파작업을 진행했다. 그리고 ASIS(미공군특수첩보부대)가 서울 오류동에 본대를 설치하고 1949년 말까지 김포 미공군기지 CIC(방첩대) 대장으로 있던 도널드 니콜스 소령이 대장으로 있으면서 꽤 폭넓은 첩보조직망을 펴고 대북 첩보공작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고양시의 민간학살 피해관련자의 증언에 의하면 1950년 9월20일 한강도하작전 성공이후 여맹위원장이 체포되어 김포공항의 미군정보부대로 끌려가 심문을 받았는데 그중에 일본인이 있었다고 한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미군첩보조직에는 원산상륙작전시 소해부대 파견과 별도로 이미 유엔사지휘 아래 일본이 참전하고 있었을 가능성도 가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아직 교차확인이 필요한 증언이다.

한편, 미국의 전세계 도청조직인 NSA의 전신인 국군보안국도 전장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하위수준의 음성도청(LLVI:Low-Level Voice Intercept)을 수행하는 다른 부대는 지프를 타거나 전방근처의 벙커에서 도청작전을 수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입수한 첩보는 바로 전투부대들로 송신되었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 22개의 LLVI팀이 작전을 수행했다(NSA1, p47, 제임스뱀포드, 서울문화사). 이들은 국군보안국산하의 육군보안국 부대들이었으며, 1952년 11월 이후에는 NSA창설과 함께 NSA소속으로 바뀐다. 신호정보부대들의 최고 관심사는 소련의 참전 특히 소련 공군의 참전이었다. 스탈린은 인천상륙작전 이후 참전하게 되지만 소련의 참전사실을 숨기려고 무던히 노력하였다.

당시 참전조종사로서 한 소부대의 지휘관이었던 스몰체코프(Alexander p. smolchekov)의 증언은 그같은 정황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소련은 공군을 참전시키면서도 비행기에 소련 마크를 달지 못하게 하였다. 최초로 부대가 이동했을 때 나를 비롯한 조종사들은 아무도 한국전쟁에 참여하는 줄 몰랐다. 아무도 모르는 상태에서 만주로 이동하였다가 한국전쟁에 참전한 것이다. 전투중에도 관제탑과 교신할 때 한국어나 중국어를 사용하여야 했으며 군복도 소련 군복을 입지 못하게 했다. 러시아어의 내용은 금지되었다. 탑승시 한국어로 교신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조종사들이 익힌 한국어 실력은 아주 초보적인 것에 불과해서 급박하게 전투가 수행될 때에는 무용지물이 되었다. 우리는 결국 곧바로 러시아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1950, p490)

소련은 자신들의 참전사실을 숨기기 위해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이 미국의 도청부대라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설픈 대신호 정보작전은 금방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암호와 위장은 끝까지 완벽해야만 상대를 속일 수 있기 때문이다. 체 게바라가 NSA에 도청당하는 줄 알면서도 무선통신을 사용한 것이나 빈 라덴이 위성이동통신 전화를 계속 사용한 것 등은 대신호 정보작전의 오류임이 분명할 것이다. 북에서 조금 떨어진 작은 섬들에서 활동하던 신호정보부대들은 북, 중국 및 소련이 자국조종사들에게 보내는 명령을 입수할 수 있었다. 도청요원들은 입수한 정보를 '레이더 신호'로 위장해 북 영공에서 작전을 수행중인 미군조종사들에게 실시간으로 전송했다. 조종사들이 정보를 받으면 '공격 성공률'이 현저하게 증가했다(NSA,1 p47, 제임스뱀포드, 서울문화사).

위의 자료에서 북에서 떨어진 작은 섬들이란 서해의 도서군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위 소속부대는 국군보안국 산하의 공군보안국 부대였다. 한편 공군소속 첩보원들은 정보수집뿐 아니라 우익무장대들과 연계하여 후방교란전투 등도 수행하고 있었다. 다음은 KLO 문서에 등장하는 자료이다.

“SOURCE: TROUBLE RADIO AIR TEAM
두 명의 방첩대원(agent)중에 한명은 황주 인근에서 ANGR 9 SET와 함께 떠났던 무전기 기술자중에 한명이었다. 그리고 다른 한 명의 방첩대원은 1950년 12월 9일에 보급품들과 함께 공수된 보충지원된 방첩대원들 중 하나였다. 그 방첩대원들 중에 한 명이 무전기와 함께 연안(연백) 부근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그 그룹의 네 번째 멤버가 1950년 12월 20일에 북과의 포격전에서 사망했다. 무전기는 발전기에 총알이 맞았기 때문에 고장이 났다.”
(KLO.TLO 문서, 한림대학, pp400,401,409,412)

1950년 12월 20일 연백읍에서 인민군과 우익 무장대와 전투가 벌어진다. 이 사건은 '북한민주통일운동사(황해도편)'와 '연백군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사건이후 우익 무장대들은 연백의 서쪽인 해성면과 남쪽인 교동으로 철수를 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 공군소속 KLO대원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연백의 연백치안대, 홍현치안대, 금산치안대호국군 등과 같은 우익 무장대와 함께 전투를 하였고 거기서 사망했다. 공군소속 첩보원들의 주 역할이 무엇이었을까? 무전기라는 것이 그것을 대변해 주고 있다. 황주에 떨구어진 첩보원은 연안까지 오는 모든 길목에서 적(중공군과 인민군)의 위치를 파악하여 보고했고 이 정보를 토대로 미군기가 폭격을 가한 것이다(최태육, http://cafe.daum.net/genocide21, 읽기자료 62번).

강화 서쪽 볼음도에는 ‘제2 정보사령부’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 제2 정보사령부는 15개 이상의 건물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그 터도 2000평이 넘었으며 부대를 보호하기 위해 부대 앞과 맞은편 산에 야포로 무장해 있었으며 701함대가 바다에 정박해 있었다(최태육, http://cafe.daum.net/genocide21, 강화학살대책위, 읽기자료 27번). 어떤 편제에 해당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위의 NSA 관련자료를 통해 추정할 때 제2 정보사령부가 국군보안국 소속 부대였을 가능성이 있다. KLO부대가 한 것은 순수한 첩보활동만이 아니었다. 민간인 학살이 일어나던 시기와 장소마다 그들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KLO란 이름이 알려지게 된 것도 그와 무관치 않았다. 민간인 학살 문제는 다음 연재에서 다시 다루도록 하자.

한강하구 첩보전이 미국에 끼친 영향

교동의 타이거여단 전적기념비.  [사진 - 이시우]
한국전쟁은 남측군대의 미국화 등 많은 영향을 끼쳤지만 동시에 미국 스스로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한국전쟁을 통한 미국의 발산과 수렴이다. 현재의 5027작전계획은 한국전쟁전 존재하던 한반도전쟁계획의 대강을 확정지었으며 다른 나라의 전쟁계획으로도 확장되었다. 한국전 발발 당시 난립하던 정보기관은 한국전을 거치며 중앙집권화 되었고 1952년 NSA의 창설로 이어진다. 위에서 살펴본 한강하구와 서해지역의 첩보전은 전선 전체에서도 특별한 민감성을 지닌 것이었다. 한강하구와 서해에 큰 영향을 끼쳤던 첩보조직을 중심으로 미국내부로 향한 한국전쟁체제의 수렴과정을 살펴보자.

북의 대규모 공격이 이루어지기까지 몇 주 동안 한반도는 NSA의 전신인 국군보안국의 신호정보 대상국에 올라있지도 않았다. 2개의 중대사안 목록 중에서도 북은 부차적 목록에서 15위를 차지했다. 일본 카미세야의 도청기지와 기타 몇 군데 기지에서 입수한 정보의 대부분은 러시아에 관한 내용이었다. 또한 공산화된 중국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었으므로 87명의 도청요원들과 해독 전문가들은 여기에 집중되었다. 전쟁발발 당시 남측에는 단 2명의 미국도청요원이 배치되어 있었다. 훗날 NSA의 분석에 의하면 “국군보안국에는 한국어 전문가도, 한국어 사전도, 통신분석 요원들도 그리고 한국어 타자기도 전혀 없었다.” 상당한 극비수준의 NSA보고서가 최근 밝힌 바에 따르면 국군보안국은 전쟁이 터졌을 때 엉뚱한 곳을 주시하고 있었다. 워싱턴에 전달된 첫 번째 정보는 서울주재 특파원의 뉴스보도였다(NSA1, p45).

1949년 육해공군의 암호해독 기관들이 국군보안국으로 통합되었다. 하지만 미국은 전세계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신호정보 기관들을 관리할 만한 강력한 중앙집권적 기관을 만드는 대신 각각의 기관에 정보입수 및 해독 활동에 관한 통제권을 부여했다. 따라서 국군보안국 국장은 각 기관에 지시를 내릴 권한이 거의 없었다. 심지어 국장은 현지본부에 임무를 하달 할 수조차 없었다. 설령 임무가 각 첩보기관에 전달된다 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다시 바뀌거나 무시되기도 했다. 국군보안국에서 러시아 정보분석을 담당했으며 훗날 NSA의 러시아 암호해독 부서를 이끌기도 했던 허버트 L. 콘리는 국군보안국장에 대해 “자신이 있는 건물 밖에서는 아무 권한도 없었다”고 말했다.

여러 첩보기관들이 각기 독자적인 체제에서 활동하다보니 조직의 하부계통에서는 알력 따위의 마찰이 빈번했다. 이는 특수조직의 성격상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지만 종종 불합리한 분규도 생겼다. 심지어 이들은 서로를 적으로 간주하였다(NSA1, p51). 정보의 혼란과 복잡함을 해결하고 서로의 협력도모와 보다 효율적인 첩보작업을 위해 이들을 통합, 조절하는 모종의 기구가 필요하게 됐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CCRAFE(종합심사지휘본부)다. 이 부대를 8177부대라고 명명하고 그 본부를 8240부대가 있는 서울의 태화기독교사회관 옆의 구 한국전력회사 건물에 두었다. 8177부대 사령관에는 A.W스튜어트 장군이 임명됐다. 그는 미극동군총사령부(FEC)CIC사령관으로서 오랜 방첩 및 첩보업무의 경험을 가진 인물이었다. 모든 첩보기관을 조율하는 조직인 CCRAFE의 우두머리를 육군에서 선발한 것은 극동군총사령부가 유엔군 총사령부를 겸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38선도 6.25한국전쟁도 미국의 작품이었다, p181-184, 하리마오, 새로운 사람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전술차원에선 부분적으로 성공했지만 전략차원에서는 성공하지 못했다. 1952년 6월 미8군 사령관 밴플리트 장군은 “분명한 사실은 전쟁 종결 후 휴전기간 동안 우리는 무지와 무관심 그리고 아마도 질투심으로 인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우리가 너무도 힘들여 얻어냈던 첩보활동의 효율성을 대부분 상실했다는 점이다. 현재 한국전에서의 우리의 첩보활동은 지난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우리가 이루어냈던 수준에도 채 미치지 못한다”고 불만을 표했다.

이로부터 1년 후 NSA국장인 랠프 캐나인 육군중장도 밴플리트 장군과 의견을 같이했다. 이 문제가 심각해지자 1951년 12월 국가안보회의(NSC)에 상정된다. 이 문제를 상정한 CIA의 월터베델 스미스 국장의 비망록에 의하면 그는 당시 “현재 정부가 수행하는 신호정보 활동의 효과와 보안에 대해 심각하게 우려된다”고 경고했다. 그는 미국의 신호정보 활동이 ‘분권적 시스템과 책임소재의 다중성’으로 인해 ‘비효율적’으로 되었다며 불만을 표시했다.

1952년 10월24일 트루먼은 국군보안국을 해체하고, 대신 국회와 국민은 물론 전세계 그 누구도 모르는 새로운 기관을 만들라는 비밀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11월 4일 미국국가안보국(NSA)이 탄생했다. 아이젠하워가 당선되던 날이다(NSA1, p53). 한국전쟁의 첩보전과 NSA의 탄생이 얼마나 직접적이고 총제적인 관계를 갖는지는 더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한국전쟁 당시 첩보전사에서 한강하구지역의 첩보전이 갖는 특수한 지위와 역할에 대해서도 더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NSA창설이 한국전쟁 과정에서의 첩보전의 심각한 혼란과 문제의식으로부터 발단되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듯하다.

인민군의 대응

북측이 김포에 상륙, 점령한 것은 7월1일, 연이어 4일에는 인천을 점령한다. 그 와중에도 7월3일 강화 수로를 경비중이던 남측군 50호 경비정이 북측 선박(40톤급으로 군인 만재) 4척을 격침시키는 등 해군의 활동이 상대적으로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 7월6일 부산에서 한미연합해군방위사령부가 창설되고, 7월14일에는 영국함대가 이미 서해안 작전에 가담. 인천부근에서 연안에 포사격을 실시하는 등 초반부터 제해권을 장악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한국전쟁일지, p103-110, 군사문제 연구소, 1991).

8월 초부터 해군과 공군의 인천 폭격이 시작되었다. 8월4일에는 B26이 인천을 폭격, 1만톤급 수송선을 격침, 8월5일에는 미 순양함 2척과 구축함 2척이 인천의 군사목표에 대해 2시간 함포사격을 실시했으며, 미5공군 B26이 야간 소이탄 공격을 실시했다. 8월15일에는 남측 해군 초계선이 인천에 접근중인 정크9척을 격침하고 8월18일 남측해군이 덕적도에 상륙한다. 8월20일에는 영국 해병대가 인천 팔미도에 상륙 라디오 중계소를 파괴하고 21일에는 남측 해병대가 인천 남서쪽 45마일의 어도 25마일의 선갑도를, 이작도 등을 탈환한다(한국전쟁일지, p118-12, 군사문제 연구소, 1991).

육지에서 북측군대가 파죽지세로 진격하던 것과 달리 바다에서는 유엔군과 남측군대가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8월18일 남측해군의 덕적도 장악을 시작으로 한 영국 해병대의 팔미도 상륙 등 일련의 작전은 한 달 뒤 있을 인천상륙뿐 아니라 2차 인천상륙과 1.4 후퇴기까지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 상륙전 남측해군을 작전통제한 것은 유엔군산하 영국의 95.1기동전단이었고 남측해군과 해병대 정보조직들은 민간인 반공유격대들과 연계되며 작전을 수행했다.

1950년 9월12일 인천상륙작전에 돌입하면서 봉쇄와 폭격부대의 조직이 바뀌었다. 알란 스미스 제독이 딕시(AD-14)함에 승함하여 새로운 95기동부대를 맡게 되었다. 이후로 95기동부대가 전쟁이 종료될 때까지 봉쇄와 호송임무를 수행하였다. 95기동부대의 공식명칭은 '유엔봉쇄 및 호송부대'였다. 95.1기동전단은 한국의 서해안을 담당하였으며 영국제독이 전단을 지휘하였다. 동해안은 미군이 지휘하는 95.2기동전단이 담당하였다. 서해안을 담당한 95.1기동전단은 항모 해상봉쇄 및 초계세력 그리고 서해안 도서 방어세력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동해안과는 달리 서해안은 섬들이 많아서 게릴라들의 활동무대가 되었다. 전쟁의 마지막 18개월은 38선 근해의 섬들을 장악하기 위한 치열한 대결기간이었다. 점령한 몇 개의 섬에 유엔군은 유엔군항공기들의 통제를 위하여 레이더를 설치했다. 일부 서해안 섬들은 손상을 입은 아군 항공기들의 조종사를 탐색하고 구출하는 기지로 사용하였다. 일부 섬들은 정보수집을 위하여 사용되었다. 서해안 작전은 동해안과는 달리 섬을 지원하는 작전이 많았다(한국전쟁해전사, Malcolm W. Cagle Frank A. Manson -21세기군사연구소, p342-344).

섬을 장악하기 위한 싸움이 치열했던 것은 유엔군의 해상봉쇄와 폭격, 근접지원 등의 전통적인 해군임무뿐 아니라 첩보작전과 게릴라작전 등 그 범위가 확장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섬들이 유엔군 항공기 탐색 및 구출기지로 쓰인 것은 7월14일부터 영국함대가 서해안 작전에 공식가담하기 전부터였으며 7월12일 덕적도를 중심으로 이미 영국함대가 활동하고 있었으며 남측해군이 8월18일 덕적도에 상륙한 것은 이미 영국함대에 의해 장악된 뒤 1달 뒤의 일임을 다음의 강화사기록을 통해 확인 할 수 있다.

1950년 7월12일 하오 3시경 공산군진지를 폭격하고 돌아오던 미공군 B-29 1대가 강화군 서도면 주문도 서남방에 추락하였는데 탑승한 미공군 7명은 구출하여 미해군 기지가 있는 덕적도로 후송하였고 매음리 전방에서 낙하된 미병 3명 가운데 2명은 인민군에 납치되었고 한명은 해상에서 익사하였으나, 공군 7명이 낙하산으로 낙하하였는데 한 명은 볼음도 전방 백사장에 내려 주민 김규성, 김태흥, 김경환, 나정희 목사 등에 의하여 구조되었으며 또 3명은, 그곳 해상에 내린 2명은 최재철, 박춘의, 김희선, 이원근, 황호천, 김학윤 등에 의해 구조되었으며 석포리 전면 해상에 낙하한 한 명은 주민 문형식이 구출하여 통역이 가능한 박조원씨 댁에 집합하여 상처 입은 공군은 치료하는 등 손보았다. 다음날 13일 아침 5시에 범선으로 후송조치 하였는데 총지휘자는 방위군 소위 김태흥의 지도에 응하고 선장 이근홍, 선원 전경수, 전덕원, 통역 박조원 도합 12명이 강화 서남 해상을 거쳐 덕적도에 작전중인 영국 구축함에 인계 되었다(하였다). (증보강화사, p356, 강화문화원)

이제 북측군대의 대응을 보자. 8월 27일 북의 전선지구경비사령부의 <전투명령 No.100>이 하달되었다

제107, 106연대는 다음과 같이 배비(배치)를 변갱(변경)할 것 107연대본부는 32대와 함께 금포(김포)에 31대대는 강화도에 27대대는 한다리(개성남쪽 10km지점), 33대대는 봉일천리에 각각 이동할 것. 제 106연대본부와 24대대는 홍성에, 17대대는 상야리(남포남쪽 12km지점), 5대대는 서산에, 22대대는 당진에 각각 주둔할 것. 부대이동은 8.28 20:00부터 행동을 개시하여 8.30. 5:00까지 완료할 것. (NA,RG242,2009 7/80 107보연 참모부, <전투명령 No.100><상급명령서철>/한국1950, p407, 재인용)

이 명령을 통해 볼 때 인민군은 강화도와 개성, 김포의 한강하구와 임진강의 파주를 축으로 하여 서산-당진까지 이어지는 긴 방어선의 구축을 시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서해만이 아닌 한강하구 깊숙이까지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는 점이다. 북도 미군의 상륙전이 대규모가 될 것임은 예상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대규모는커녕 유격대 규모의 작전만이 가능했던 한강하구에까지 방어선을 넓힌 것은 고도의 병력집중이 필요한 상황에서 현대이전의 지정학적, 지군사적 사고가 작용하고 있음을 추측케 한다. 한강하구를 통한 보급수송을 생각하더라도 그것은 육지의 전선이 장악되었을 때 가능하다.

107연대는 8월14일 창설된다. 이 부대의 첫 창설 목적은 점령지역에서의 패잔병 소탕과 전선 수송의 보장이었다. 107연대는 경기도 일대와 천안, 아산, 진천 일대를 담당하며 31, 32, 27대대의 세 대대로 편성되었다. 이중 31, 32대대는 신편부대였다. 각 대대들은 전선부대의 후송과 수송을 보장하기 위해 내무서와 협의하여 지방주민을 교량수리 등에 동원하였다. 또한 전리품 수집 보관과 지방 내무서기관의 경비사업 협조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특히 27,32대대는 “해안보병려단의 해안방어조직에 참가, 감시를 조직하고 진지를 완강히 굴설하고 도서에 잔존한 패잔병 소탕을 조직 진행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 시점에 벌써 해안보병려단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8월17일 경기도방어지역군사위원회의 설치를 보면 이 시점에서 또 다른 군사적 준비를 하고 있음이 분명히 드러난다. 위원회 위원은 7인으로 구성되었는데 서울지역 위수사령관, 경기도인민위원장, 서울시인민위원장, 부위원장, 경기도 내무부장, 서울시 내무부장, 서울시당위원장, 서울시경비사령관 등이 그들이었다. 경인지역의 군-경찰-행정-당의 최고지도부가 총망라되어 방어위원회를 구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위원회의 사령관은 서울시위수사령관이었다. 전시였기 때문에 당연히 군인이 최고직위를 맡고 당조직까지 정식으로 군사편제에 편입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방어지역군사위원회의 사령관은 민족보위상에게 복종한다”고 하여 위원회는 평양의 직접적인 군사적 지휘를 받았다. 방어지역군사위원회는 구역 군면리위원회는 물론 직장자위대, 일반자위대 돌격대(무장자위대)에 이르기까지 명령을 내릴 권한을 가졌다. ‘방어’위원회는 지역내의 최고지휘관이 되었던 것이다. 경기도 방어지역위원회는 총 6개 구역으로 나뉘었는데 1구역은 서울을 중심으로 고양 등이 포함됐고, 2구역은 인천을 중심으로 강화, 김포 등이 포함되었다. 면과 리의 방어위원회에는 경비조, 감시정찰조, 통신연락조, 공작조, 구로조, 소방조, 수송조, 돌격조로 구성되었다. 이처럼 8월15일 이전에 매우 치밀한 지역방어조직이 구축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07연대도 8월21일의 명령부터는 내용이 현저히 바뀌고 있었다.

“적은 50.8.20 6:00 령흥도, 대구도에 함포사격 엄호하에 미군과 국군 패잔병 약 1개 중대가 상륙하였으나 령흥도를 경비하는 내무원들과 의용군에 의해 일부역량이 소멸되었다. 계속 함포(사격)를 가하면서 상륙을 기도하고 있다. 해안으로부터의 적의 침입을 불허하고 그의 기도를 분쇄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부대를 변갱(변경)할 것. 107연대의 31대대의 1개중대를 안중리에 배치, 아산에 주둔한 27대대의 구분대와 아산만 방면으로부터의 적의 침습을 불허할 것. 32대대는 남양에 주둔 남양만 방면으로부터의 적의 침습을 불허할 것, 1개 중대는 대구도와 령흥도에 완강한 해안방어를 조직할 것...이상의 부대배치는 8월21일 야간중으로 이동 완료할 것.” (NA,RG242, 2009, 7/80, 107보연참모부, <전투명령No.92>(극밀), <상급명령서철>/한국1950, p405, 재인용)

이 명령을 보면 북은 아산만으로부터 영흥도에 이르기까지 긴 해안 방어선을 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명령을 내리면서 명령이 하달된 당일로 바로 부대배치를 완료 하라는 것도 알 수 있다. 매우 긴박한 대치로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독립부대로서 사단이나 군단의 지휘를 받지 않고 직접 전선지구경비사령부의 지휘를 받던 107연대 앞으로 8월26일 18:00에 하달된 <전투명령 No.94>에 의하면 본격적인 상륙에 대비 부대를 재배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적의 패잔병들은 해안에 산재한 도서들에 상륙하여 가진 만행을 감행하며 해안선까지 상륙을 기도하고 있음으로 제 107연대와 관하 각 대대들은 다음과 같이 이동배치할 것을 명령한다. 제 107연대본부는 32대대와 같이 부평 게양산(계양산) 일대에, 31대대는 강화도에, 27대대는 남양에 각각 1950.8.28.5:00까지 이동할 것.” (NA,RG242, 2009, 7/80 107보연참모부<전투명령 No.92>(극밀),<상급명령서철>/한국1950, p406 재인용)

상륙기도에 대비하여 북은 병력을 강화도와 대구도 등 인천 앞바다에까지 전진 배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같은 조치에는 아직도 남측군대의 간헐적인 소도서 상륙을 차단하려는 의도와 앞으로 있을 대규모 상륙을 대비하려는 의도가 혼용되어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8월28일에는 모든 것이 확실해졌다. 8월28일 조선인민군최고사령관 김일성의 직접 지시에 근거한 <전투명령 No.1>에 의하여 ‘인천방어지구사령부’를 창설한다. 상륙작전 20일전에 북의 최고사령부는 미군의 인천상륙작전을 거의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다(한국1950, p409).

9월9일 미군과 남측군이 본격적으로 인천지구에 대한 사전정찰을 실시하던 시점에서 박훈일 사령관은 <전투명령 No.4>를 내리는데 상륙시점이 9월15일 전후가 될 것임을 거의 인지하고 있었다.

3. 각 지역 방어책임 부대장은...자기지역내의 방어시설을 이미 지적된 9월15일까지 완성할 것.
4. 영구화점, 토목화점, 음폐호 등을 반드시 적의 맹렬한 항공폭격과 함께 함포사격에서 피해를 면할 수 있게 견고하게 설비할 것
5. 방어작업 진행정형에 대하야 매일 1차씩 보고할 것이며 9월 18일까지 방어작업 완료에 대한 서면 및 략도보고를 제출할 것.

이 시기 방어시설을 완성하기 위한 주민동원은 강화, 교동주민들의 증언에서 거듭 확인되는 사실이다. 3,5번 항목은 상륙개시일을 9월15일경으로 거의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게해 주며 4번 항목은 단순한 상륙전이 아니라 대부대와의 전면적인 결전을 준비하고 있음을 할 수 있다. 즉 대비는 하였으되 낙동강에의 전력집중과 시간의 촉박함, 장비와 부대의 부족 등으로 인하여 실제의 준비는 완전하고 충분치 못했을 것으로 판단난다.

인천상륙작전 역시 노르망디상륙작전처럼 비슷한 수준의 전략가들이라면 상대방 역시 인식한 상태임을 전제하고 감행하는 것이었다. 그 성공여부는 실시시기와 군사역량의 문제였다. 즉 인천상륙작전이 9월18일 경으로 조금만 늦어졌으면 인민군은 인천지역에 철의 요새를 구축했을 것이고 상륙의 성공은 거의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그것은 인천에 상륙이 성공한 이후에도 곧바로 서울로 진격하지 못하고 인민군과 의용군의 완강한 방어로 인하여, 유엔군이 13일이나 걸리는 격전과 지연 속에 9월28일에서야 서울에 진격하는 것에서도 확인될 수 있다(한국1950, p420).

미군측 또한 상륙장소와 날짜를 기만하기 위해 전력투구 했다. 다음의 기록을 보자.

“인천 상륙을 성공하려면 월미도를 먼저 점령하여야 했다. 계획단계에서 이것을 어떻게 하면 성공할까 고민을 많이 했다. 공격하는 날 아침에 폭격하면 될까? 그렇게 하면 상륙의 기습효과를 높일 수 있지만 2차대전의 경험에 비추어 충분한 폭격의 효과를 달성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스트러블 제독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월미도를 무력화시키기 위한 일련의 작전들을 9월10일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첫 번째로 루블 제독이 지휘하는 96.8기동전단 항공기들의 네이팜탄을 이용하여 섬을 불태울 것이다. 그리고 9월13일과14일에 선견부대가 공격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인천공격 당일 아침에 폭격할 것이다.” “전진을 계획할 때 나는 서해안 전반에 항공공격을 실시함으로써 적군이 인천에 대하여 의심을 갖지 않도록 하였다. 따라서 항모 항공기들은 월미도와 인천지역 뿐만 아니라 남쪽의 군산 지역과 북쪽의 평양지역도 공격하였다. 그리고 9월7일에 군산지역에 기만 상륙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내 생각에는 우리의 상륙지점을 9월13일 첫 폭격전까지만 숨길 수 있다면 그 이후에 적들이 우리의 상륙지점이 인천이라는 것을 알아도 적절한 행동을 취할 수 없을 것으로 판단하였다.” (한국전쟁해전사, p113-114)

북은 총력을 다해 상륙을 막고자 했고 9월14일에는 미군의 구축함을 지상포 사격으로 파괴시켰다. 그러나 이 또한 스트러블 제독의 유도전술이었다. “우리의 구축함들이 정지상태에서 월미도를 공격하는 것에 대해 토론한 결과 적의 포격을 유도해서 그들의 위치와 규모를 파악하기로 결정하였다.” 구조 및 예인함의 함장이었던 레들 중령은 이 작전을 위한 준비실태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적의 공격 등으로 손상된 함정을 예인하기 위한 준비를 하였다. 또한 구축함들의 위치가 섬과 너무 가까워 갯벌을 건너서 함정에 침입하는 적군을 격퇴하기 위해 수리팀에게 무기를 지급하여 훈련을 시켰다.” ‘드헤븐’ 구축함은 적의 공격을 유도하기 위해 갑판 위에 헝겊으로 옷을 입힌 마네킹을 세워놓은 이상한 행동을 하기도 했다. (한국전 해전사p115)
당시 월미도에는 약 400명의 인민군이 저항했으나 108명 사살, 150명 이상 생매장의 피해를 남긴 채 15일 11:15에 점령했다(<인천상륙작전>,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1983, p138-139/ 한국1950, p426 재인용).

당시 강화의 상황은 어떠했는지 보자. 강화에는 7월 이후 민주청년반공돌격대, 반공지하결사대, 대한정의단, 일민주의청년동지회, 백민돌격대, 향토단 등의 우익무장대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이중 일민주의 청년동지회를 보자.

강화읍 신문리 218번지 지하실에서 애국청년학생들은 결사적으로 투쟁할 각오하에 동 7월4일 일민주의 청년동지회를 조직하였다. 동회는 이승만 대통령께서 주창하던 일민주의 이념으로 3천만 민족이 함께 뭉칠 것을 주장하며, 구체적 활동 방침을 세워 죽음으로써 적구소탕에 나서기를 맹서하였던 것이다. 회장에 곽노웅을 추대하고 동지 구민서로 하여금 정치보위부에 침투시켜 비밀을 탐지케 하는 한편, 소년동지 4인으로 하여금 강화읍 신문리 홍종문 댁을 점거중인 공산군에게 노래를 배운다는 구실을 붙여서 잠입시켜 정보를 얻어, 9월16일 유엔군의 인천상륙을 계기로 당황한 공산군이 무기고의 감시를 게을리하는 틈을 이용하여 동일 12시경 소총3정 탄환 5백여발을 입수하는데 성공하였다(증보강화사, p341, 강화문화원).

일민주의는 안호상에 의해 체계화된 이승만주의라고 할 수 있는 이념으로 이 조직은 이념을 중심으로 뭉친 조직이란 점에서 다른 조직과 차별성을 보인다. 여느 조직들과 달리 공작 방법이 대담하고 치밀함을 알 수 있다. 일청은 인천상륙작전이후 반공유격대를 통합하여 치안대를 만드는데도 주도적 역할을 한다.

10월2일 일민주의 청년동지회 조양회사(조양방직)에서 치안대를 조직 10월2일부터 결사적으로 잔여 괴뢰군과 그의 주구를 추격하였다. 이때 양사면 철산리에는 괴뢰군 1000명이 집결하여 있었고 강화읍 월곳리 포구에 20여명이 후퇴하려 집결중이었다. 10월3일 일민주의청년동지회, 대한정의단, 민주청년반공돌격대 간부들이 회합하여, 강화군 치안대를 편성하여 회장에 홍재승, 부대장 곽노웅 최중석을 추대하여 조직을 강화하였다(증보강화사, p342, 강화문화원).

조직 결성 장소는 조직의 물적, 경제적 기반과도 직접 연관된다고 볼 수 있다. 강화의 주력산업은 직물업이었으며 경기지역에서 가장 경쟁력 있는 산업 가운데 하나였다. 조양방적은 강화도 경제를 이끄는 견인차였던 것이다. 조양방적주식회사의 총 출자금액은 50만원, 건평은 150평으로 강화지역의 부호인 홍재묵, 홍재용 형제와 정주의 이정근의 출자로서 설립되었다(조선중앙일보, 1935.8.16, 방적생산지 강화에 인조견 공장 신설기사).

치안대장인 홍재승은 조양방직출자자인 홍재묵, 홍재용 형제와는 같은 가문으로 해방 후에도 대지주였다. 홍재용은 군수를 지냈으며 9월28일 내무서에 잡혀 있다가 인민군의 후퇴와 함께 납북된다. 이러한 가문의 사연은 홍재승이 치안대의 대장직을 맡게 되는 배경과 무관치 않다. 경제관계나 봉건적 인간관계 등을 집약 표현하는 것이 군사관계라는 것을 확인되는 대목이다.

강화사 기록에는 다시 일민주의 청년동지회의 구민서란 이름이 등장한다. 그는 정치보위부에 직접 침투하여 정보활동을 했던 대담한 인물이다. 그의 이력에 대해 더 이상 밝혀진 것은 없지만 다음의 사실은 구민서가 유격대와 유엔군 서해안 작전부대를 연결하는 인물임을 추측케 한다.

덕적도에 파견하였던 구민서가 귀환하여 그의 보고를 듣고 조직 부장 경종오와 통신부장 송윤석을 인천에 있는 강화경찰대에 연락케 했다. 10월 10일 강화경찰대가 귀환하게 되어 사무를 인계한다(증보강화사, p342, 강화문화원).

덕적도는 영국군함대의 서해작전 근거지이자 남측해군이 장악하고 있던 섬이고 첩보부대의 근거지였던 곳이다. 덕적도의 지시를 구민서가 전달함으로써 강화경찰대가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한강하구와 서해지역의 민간유격대는 KLO부대 등을 통해 미군과도 깊이 연결되어 있는 상태였다. 김포에서도 치안대와 군조직의 긴밀한 관계는 마찬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김포군의 인민들은 각 정권기관이 없기 때문에 반동파 치안대가 조직되어 분산된 아군을 발견만 하면 무조건 총살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연락병도 파견하기가 곤란한 형평에 있습니다...또한 적정을 요해할 결심으로 지방인민과 전투원과 같이 파(견)하여도 치안대들의 경비에 발견되어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자들은 진격할 목적으로 행군을 출발하였다면 즉시로 적에다 연락을 조직하여 적은 만단의 전투준비로서 대기하고 있습니다.”(NA RG242, 2009 9/66. 3, 5656부대참모부, <상급보고서철>/한국1950, p429 재인용)

강화기록에서 주목할 것은 9월17일 북측군대가 철수하였다가 다음날인 18일 다시 돌아온 것이다. 9월18일 김포와 낙동강 전선에서 급속도로 후퇴하던 시점에서 강화는 다시 전선으로 복귀하고 있는 상황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당시 인민군의 선택은 두 가지였다. 북으로의 후퇴 아니면, 제2전선 형성 즉 적후방에서의 게릴라활동이었다. 강화지도부는 후퇴대신 후방에서 제2전선을 형성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김포와 서울축선에서의 만만치 않은 저항과 강화에서의 전선의 부활이 이 기간의 특징이다. 그러다가 10일 뒤인 9월28일 유엔군의 서울 점령과 함께 강화도 철수를 시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보도연맹위원장 구안모가 강화 장날인 9월28일 조리를 돌리고 처형당하는 중에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정황과 일치한다. 그러나 위의 서술은 10월2일까지도 1000명의 인민군이 강화에 잔류하고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 유엔군의 진격축선으로부터 벗어난 섬이란 특징도 완강한 저항을 설명하는 한 이유가 될 것이다.

인천상륙작전이 전쟁의 새로운 국면을 열기 전 한강하구지역에서 첩보부대들의 비밀공작과 민간유격대의 연결은 세계차원의 냉전체제가 국가를 지나 민간영역에까지 관철되도록 하는 계기를 만들었으며 이같은 계기가 한강하구체계에 미친 영향은 정전이후 한강하구지역 곳곳에 세워진 전적기념비의 무게만큼이나 큰 것이었다.

중국군 참전과 한강하구

중국군의 한국전쟁 참전 결정은 1949년 10월 1일 건국한지 1년 밖에 안 되는 신생국가로서는 힘든 결정이었다. 소련은 중국의 참전을 지시, 추동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참전을 피했다. 모택동은 신중했지만 조선공산주의자들이 항일전쟁과정에서 보여준 혁명적 의리를 앞세워 수많은 반대를 물리치고 참전을 결정한다. 모택동은 한번 결정하자 대담하게 움직였고, 만주는 항일전쟁기와 국공내전기에 이어 세 번째로 조중공산당의 연대를 상징하는 성지가 되었다. 이제 전쟁은 미국-중국의 전쟁으로 정확히 변화해갔다. 서로가 피하려 했던 세계전쟁이 된 것이다.

2차대전에서 성공한 ‘무조건 항복’과 절멸주의의 승리에 도취한 맥아더는 후방을 고려하지 않고 무모한 진격을 계속하고 있다가 중국군이 참전하자 낙동강에서 북이 퇴각하듯, 파죽지세로 밀리기 시작했다. 팽덕회의 노련하고 신중한 전략은 밖으로는 유엔군을 유인, 섬멸하며 1,2,3차 대공세를 승리로 이끌었으며, 안으로는 중국군 내부의 조급성과 승리에의 도취증을 비판하며 병력집중, 분할포위, 각개격파의 지도원칙을 수립해가고 있었다. 조중연합군은 계속전진을 중단하고 후방과 전선을 다시 추스렸다. 승리지상주의에 도취되어 계속 진격하던 맥아더와는 다른 전략이었다. 이 과정에서 한강은 다시 전략기준선이 되었다. 중국은 한강근처에서 정전협상을 준비하고 있었다. 모택동은 1951년 1월28일 제 4차 공세를 앞두고 팽덕회의 원칙과는 달리 강경한 지시를 내려 보냈다.

“4차 공세작전 준비에 즉각 착수할 것. 대전-안동 북부지역을 점령할 것. 제물포와 서울 그리고 한강이남을 확고히 장악한 뒤 전선을 남하 시킬 것. 중국군-인민군 병력을 15-30km 후퇴시킨 뒤 휴전협상에 임하는 것은 우리에게 불리함. 적들은 우리 병력이 북쪽으로 후퇴하고 한강을 자기들이 장악한 뒤에 군사행동을 중지하고 싶어 하기 때문임. 4차공세 이후 적들은 조선문제의 해결을 위한 평화협상을 제의할 것임... 아군이 대전-안동북부지역을 점령한 후 2-3개월의 휴식과 준비기를 거친 뒤 결정적인 마지막 5차 대공세를 감행할 것임.”(한국1950, p711)

그러나 전세는 불리해지고 있었고 팽덕회의 방문을 받은 뒤 3월1일 모택동은 스탈린에게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내야 했다.

“심대한 패배를 당하지 않는 한 적군은 조선에서 물러날 것 같지 않음. 그리고 이들에게 큰 패배를 안겨주기까지는 다소의 시간이 필요할 것 같음. 장기전이 될 가능성이 생겼으며 최소 2년은 더 싸울 대비를 해야 할 것 같음.” (6.25내막 모스크바 새 증언, 서울신문, 1995.6.27, 한국1950, p712 재인용)

팽덕회의 회고록에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판단하고 있었다.

“적의 계획은 어떻게 해서든 우리를 유인하여 자신들의 강력한 진지를 공격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런 연후 우리가 지친 다음에 우리를 향하여 정면공격을 개시하고, 동시에 자신들의 부대를 우리의 후퇴로를 차단하기 위하여 우리의 측방으로 상륙시키는 것이었다....
우리의 병참선이 길어짐에 따라 보급문제도 매우 어려워졌다. 전투와 비전투 요인에 따른 손실로 인해 우리의 병력은 거의 절반 가까이 줄어들었다. 우리는 재차 공격에 앞서 병력보강, 휴식, 그리고 재정비가 절실히 필요하게 되었다.(Peng Dehuai, Memorirs of a Chinese Marshal-The Autobiograpical Notes of Peng Dehuai(18918-1974) (Beijing:the Foreign Languages Press, 1984, p478/한국1950, p713 재인용)

모택동의 한강의 가치에 대한 정책판단과 팽덕회의 전략판단은 400여 년 전인 1627년 1월부터 3월 사이에 일어났던 후금과 조선의 전쟁인 정묘호란에서 후금이 후방공격과 병참선이 길어지는 이유를 들어 진격을 멈추고 한강하구와 염하수로가 만나는 강화도 연미정에서 평화조약을 체결한 것과 놀라울 만큼 유사하다. 한강하구에 작용하는 지정학적, 지군사적 가치는 시대와 전략목표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겐 강력한 영향을 끼치는 환경요인이었던 것이다. 결국 400년 전과 마찬가지로 한강하구의 연미정은 정전의 경계선이 되었고 그 앞에는 남측 해병대 초소가 위치해 있다.

중국군의 참전과 함께 전황이 불리해지자 이승만 정권은 1950년 12월15일, 군경과 공무원이 아닌 만 17살 이상 40살 이하의 장정은 제2국민병에 편입하고 제2국민병 중 학생이 아닌 자는 지원에 의해 국민방위군에 편입한다는 것을 골자로 한 ‘국민방위군 설치법안’을 상정했고, 다음날 국회는 큰 논란없이 이 법안을 통과시켰다.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강화에서도 국민방위군이 소집되었고, 12월19일 이들은 강화를 출발한다. 강화도의 거의 모든 청장년이 국민방위군에 끌려감으로서 전투력을 가진 인원은 거의 강화를 비운 상태가 된다. 당시를 서술한 기록을 보자.

“청장년들의 결속은 가장 중요시되어 청년방위군을 계속 재정비하야 강화군은 제 3지대로서 지대장으로 송정헌이 임명되었으며 본도를 3개편대로 편성하고 각면에는 중대를 두어 장정 훈육과 방위 결속에 주력하여 왔다. 이 청년 방위군은 전원 내가면 외포리에 집결시켰다. 당시 국회의원 윤재근씨의 주선으로 선박 13척과 미군용 상륙정 LST를 내가면 외포리로 보내어 청년방위군(제2국민병)과 일반인 등 5000여명을 남하시키는데 서해안 각 도서를 지나쳐 부산을 거쳐 제주도에 도착하여 고산에서 교육훈련을 받았는데 그 동안에 전염병이 창궐하여 수많은 장정이 쓰러졌다. 이 실정이 알려져 51.3.20일 교육대는 해체되고 곧 귀향 조치하였으나 도중에서 병사자는 많이 있었다. 이 교육대 부정으로 책임자등 6명은 처형되었다.” (증보강화사, p346, 강화문화원)

위의 서술은 국민방위군의 모집과 후퇴 해체에 이르기까지를 요약하고 있다. 후퇴에 미군용 상륙정이 동원될 만큼 인천상륙 이후 강화를 비롯한 인근 섬에서 미군과의 직접적이고 긴밀한 관계를 읽을 수 있다. 여기서 서술자는 국민방위군을 청년방위군, 청년방위대와 혼동해서 쓰고 있다. 청년방위대와 국민방위군의 관계는 이렇다.

1948년 국방경비대의 여순반란 사건이 일어나자 이승만은 우익청년단체를 국군의 기간조직으로 재편해야 한다는 우익청년단체들의 주장에 관심을 갖고 난립해 있던 우익청년단체들을 통합해 대한청년단을 만들었고, 1년 뒤에는 대한청년단을 기반으로 청년방위대를 창설했다. 청년방위대는 사설단체였지만, 한국전쟁 발발 중에는 국가기구를 대신해 모병과 후방의 치안을 담당했다. 이승만 정권은 국민방위군을 설치하면서 이 부대의 운영을 사설단체에 불과한 대한청년단과 대한청년단을 중심으로 구성된 청년방위대에 맡겼다.

대한청년단 단장인 김윤근은 민간인 신분에서 하루아침에 별을 달았고, 윤익헌 등 청년단 간부들은 대령, 중령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이들이 고스란히 국민방위군의 지휘부를 맡게 되었다. 이들 지휘부는 국고금과 군수물자를 부정처분하여 착복함으로써 기아로 인한 아사자, 추위로 인한 동사자가 속출하였는데, 사망자 수만도 90,000여 명에 이르렀다. 이 참상은 국회에서 폭로되어 진상조사단이 구성되었다. 신성모 국방부장관이 물러났고, 이시영 부통령은 사임서에서 국민의 의혹을 풀기 위한 국회의 적극적인 조치를 촉구하였다.

국회는 1951년 4월30일 국민방위군의 해체를 결의하였고, 7월19일 중앙고등군법회의는 사령관 김윤근, 부사령관 윤익헌 이하 5명에게 사형을 언도하였으며, 8월12일 총살형이 집행되었다. 인민군은 그들의 교재에서 “자본주의 국가의 군대는 도저히 강한 군대가 될 수 없으며 그가 나가는 길은 다만 와해의 길밖에는 없다”고 공격하였다(조선인민군의 목적 및 과업, p14/p71재인용).

이러한 비판이 모든 자본주의 군대에 대한 비판으론 적합지 않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우익조차 경악해마지 않았던 국민방위군 사건에 이르러서 북의 비판은 저주에 찬 예언처럼 적중하고 있었다. 국민방위군 사건은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국가기구가 반체제적 국민이 아니라 충성스런 국민을 향해서까지 반인권적 범죄를 자행할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국민방위군 스스로의 비참한 말로와 더불어 국민방위군 동원으로 남성부재의 사회가 된 강화 등 도서지역에서는 또 다른 문제가 일어나고 있었다.

1950년 겨울 전선이 하루가 다르게 변할 무렵, 강화와 교동에는 피난민과 ‘특공대’라고 불렸던 일군의 10대말 20대초의 무장한 한복바지를 입은 이북 피난민들이 들이닥쳤다. 이 낯선 사람들은 황해도의 우익치안대, 대한청년단(서북청년회), 학도대, 유격대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노인과 부녀자 아이들만 남은 섬에서 힘의 공백 기간이었던 6개월간 그들은 자체가 ‘법’이었고 질서였다. 1951년 6월경 통폐합된 유격대인 ‘타이거여단’은 강화에선 두려움의 존재였다. 주민들의 증언을 들어보자.

“사람(유격대)들은 쌀을 주면서 쌀을 한말이나 한 달에 한 말을 줬나? 그리 주면서 (……) 한 집에 하나씩 맽겨서 밥을… (……) 근데 인제 그 분들이 여기서 근무하면서 주민들을 피해를 많이 입힌 거는 나무, 불 땔 나무 뭐 이런 거를 자꾸 가져오라 그래서- 그게 줄 게 있어야지, (……) 지붕을 이렇게 해서(벗겨서) 갔다 줘야지 안 그러면 큰일나- 그래서 우리 동네는 그 때 당시에 얼마나 어려웠나면 반장을 한달 반장, 한달 반장 처음에는, 한달 반장해도 한달동안 너무 고생하니까 안 되겠다, 일주일 반장으로 하자. 일주일 반장이 하루 반장이 됐어요. 하루 반장. 맨날 반장을 바꾸는 거야. 왜 바꾸냐면 그, 그 사람들이 원하는 일 감당하기 힘드니까. 그래서 xxx수염이 허연 사람들이 반장을 하는데 그 사람들한테 매 맞고 그래요. 말 안듣는다고, 주로 '황해도' 침투 들어 가는데 인원동원 안 해준다고. 인원동원 들어가서 죽고 그래. (……) 그래서 그거 안 해 온다고 그냥, 그 굉장한 피해를 줬어, 그 분들이...” (강화도 교동 주민의 한국전쟁 경험과 지역공동체의 변화, p20, 김귀옥<한성대사회학교수>, 2006).

이들 유격대의 배후는 미군의 강력한 지원을 받고 있던 육군첩보부대였다. 강화군 송해면 하도리에는 이들의 전적비가 서 있다. 그 내용을 보자.

“육군 제4863부대(육본소속) 제 1지대장 김동석 대위는 보병 제 1사단에 배속되어 임무 수행중 1951년 2월 중순 강화 교동 등지에서 지방출신 단위로 무장대를 조직, 산발적으로 게릴라전을 전개하고 있는 연백지구 반공 청년단체들과 접선. 그들 인적자원으로 제 5816부대 강화유격대 창설을 지원하는 한편 그 일부는 수하의 무장호위대로 흡수통합하여 유격부대로 확대개편, 1951년 3월 9일 강화 철산리에 배치했다. 이후 5816부대와 합동 작전 비롯 개풍군 연백군 일대에서 대소 40여면의 침투작전을 감행하여 적의 주전선 후방을 교란하면서 주임무인 서부전선 전투전략정보 수집에 크게 공헌하였다. 1951년 7월26일 육본 작명 제7호에 의거 을지병단으로 통합되어 교동도로 이동 을지병단 제 23연대 기간조직으로 재편되었다.” (육군 제 4863부대 강화유격대 전적비, 1981.6.25-강화군 송해면 하도리 파라다이스묘원)

1951년 1.4후퇴 당시 김동석은 중국군의 진격으로 전선이 대전부근까지 남쪽으로 밀려갔음에도 불구하고 육군 첩보부대 1지대장으로서 파주군 송탄리에 본부를 두고 강화도 양사면 철산리에 공작거점을 운용하면서 제17연대에 귀순한 인민군 105전차사단 1대대장 김영(김홍으로 개명)을 공작 소대장으로 영입, 임명하여 대북 공작을 전개하여 적지 않은 성과를 올린다. 황해도 연백군 일대는 38도선 이남으로 미군정하에 있었으나 전선이 밀고 밀리는 과정에서 1.4후퇴 이후론 북측 지역이 되어 있었다. 주민 중 일부가 남쪽으로의 탈출 기회를 노리며 석산치안대를 조직하고 있었는데 대장은 박재엽이었다. 6.25 당시 옹진반도 육군1사단에 근무하다 한강폭파로 남하하지 못하고 패잔병으로 낙오된 장기락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은신하던 중 석산 치안대의 무장대를 지휘하는 책임을 맡고 있었다. 박재엽은 강화도에 육군 첩보부대의 공작대가 있음을 알게 되었고 야간 간조시에 배를 타고 건너와 김영 공작소대장과 접선되었다. 김영의 공작대와 석산결사대가 합세하여 공작을 하기로 합의가 이뤄짐에 따라 석산결사대원 20여 명이 야간에 북을 탈출, 강화도에 도착하게 된다. 제1지대 공작소대는 1951년 초부터 그해 가을까지 지상전투가 현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교착상태를 이루는 동안 이들 원주민을 대동하고 황해도 대동반도일대의 장단, 조산, 개풍, 개성, 금천, 흑교, 평산, 남천 등 8개 지역으로 진입하여 지하 거점을 구축하고 인민군 병사와 내무서원을 사살하고 생포해 오는 등 40여회의 작전을 수행했다. (이사람 김동석, p78-79)

미군과 김동석의 인연의 깊이는 파주 광탄면 창만리 ‘육군첩보부대 제1지대 전공비’에서 다시 확인된다. 이것은 1978년 미 2사단에서 처음 세워준 것이다. 2002년 한국전 전쟁영웅으로 선정, 미2사단 전쟁박물관에 맥아더, 리지웨이, 백선엽과 함께 김동석 영웅실이 설치되었다.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로 되어 관리되고 있는 데서도 이 부대의 위치를 알 수 있다. 1997년 11월30일 창만리 이장 광탄면장 파주군수 강도희, 국회의원 박명근에 의해 다시 세워진 기념비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이곳 창만리 두만동은 6.25사변 중 1950년 12월31일 중공군의 정월 대공세로 임진강 방어선이 무너지고 1월4일 두 번째 서울이 함락되는 시점에 적진 후방에서 육군첩보부대 제1지대가 반공청소년들과 1951년 4월 초순까지 목숨을 걸고 싸워서 연합군의 3월 반격계획인 ‘리 타’ 작전의 기여로 혁혁한 전공을 남긴 터전이다. 당시 지대장은 육군소령 김동석이다. 그는 나철호를 특별 공작대장으로 하고 공작조원 허지신, 정선모, 유조화로 하여금 이곳 반공청소년 25명과 규합하여 항전결사대로 점조직하여 파주군내와 임진강변을 주로 한 적정감시체제를 수립 24시간 적 동태를 파악 보고하고 특히 야간에만 행동하는 부대와 물자의 남하를 추적 탐색하고 때로는 기습공격함으로써 그들의 임무를 지연시키고 퇴각하는 적 부대는 매복함으로써 그들의 대오를 함락케 하는 등 후방 교란 작전으로 전력 약화를 초래케 하는 한편 임진강 북방 개풍군에는 육군 중위 김진수를 유격대장으로 하는 공작조 육군상사 강성식, 김홍, 홍순문을 잠입시켜 작전범위를 장단, 개성까지 넓혀 행동하면서 연합군의 공세에 맞추어 황해도 평산에 침투 유격전을 감행하였다. 약 100일간의 작전은 적 행동의 감시와 더불어 기습과 매복이 50여회, 생포 37명을 밀로로 후송하였고 그중 중공군 소대장 1명 인민군 장교 2명이 아군작전에 직접 참여 한 바 있다. 기간 중 적 사상자 및 물자 손실은 막대하였다. 우리측 피해는 1951년 4월1일 평산에서 전개된 격심한 유격전에서 희생된 자를 포함 전사 4명, 전상 10여명이었다.” (파주 광탄면 창만리 ‘육군첩보부대제1지대전공비’)

중공군의 보급, 병참선이 길어지면 팽덕회의 예측대로 유엔군은 후방상륙을 시도할 것이었고 다시 그 지점은 한강하구를 기준으로 한 인천지역이 될 가능성이 많았고 그 때문에 가장 친미적인 군인사중의 하나로 분류되는 김동석 부대는 적진 한가운데서도 완강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2월3일부터 시작된 서울 탈환작전과 2월10일 2차 인천상륙에 성공함으로써 정전시까지 한강하구 지역은 가장 중요한 정보기지가 된다.

맺으며

한국전쟁을 통해 한강하구는 우리의 의사와는 무관하고, 광폭하게 세계냉전체제에 편입되었다. 한강하구의 유라시아체계는 우리의 의지와 멀어질수록 외세의 의지와는 가까워진다는 역설의 교훈을 남겼다. 1952년 2월7일 정전협상에서 처음으로 한강하구 의제가 제안되었다. 다른 의제들이 최소한 1년 이상 논쟁한 것에 비하면 놀랍게도 한강하구 의제는 제안과 함께 아무 이견 없이 합의되었다.

첫 제안의 내용은 공동감시였다. 마지막 정전협정문안에는 한강하구를 민간선박의 항해에 개방(open)한다는 것으로 발전되었다. 육지의 비무장지대와 전혀 다른 규정에 그토록 쉽게 합의할 수 있었던 배경에 대한 연구는 향후 한강하구를 둘러싼 미래를 설계해 가는데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이것은 다음의 과제로 남겨둔다.

끝으로 인천상륙작전의 와중에서 붙여지지 못하고 미군의 전리품이 된 인민군 병사의 처에게 보내는 편지를 소개한다. 글을 제대로 쓸 수 없었던 병사의 편지를 그대로 읽어본다.

“처에게 들이는 편지. 그간 편지를 못바다바서 마는 금심하신지. 나는 몸건강하여 조국가 인민을 위해서 정치학습과 훌년를 심둑하고 이스이. 하라버지와 몸 건강하오이까 어머님도 몸건강합니까. 나는 혼자서 경기도 인천시를 왓슴니다. 그세간 편지열악 엿서스니 이제부턴 열락해주시기를 바라나이다. 나는 근심하는 것슨 강치수동무에게 금전을 五百원 꿔서 가지고 왓슴니다. 신선옥동무는 이금전을 어덧컷선지 갚아주시오. 신선옥동무는 나는 통일리대면 만나볼수가 잇슴니다.
경기도 인천시 내무성 三00부대 二대대 二중대 日소대 一분대
1950년 9월12일”
(자료: National Archive/한국 1950, p425 재인용)

9월12일 인천에서 남편 한응수가 자강도 만포의 부인 신선옥에게 쓴 편지는 미군의 인천상륙에 의해 부쳐질 수 없었다. 그간 편지를 못받아 봐서 많은 근심을 하였을 부인을 위로하고 자신은 조국과 인민을 위해서 정치학습과 훈련을 열심히 하고 있다고 안심시킨 뒤 혼자서 인천의 전선까지 찾아왔다고 말한다. 어째서 그가 혼자서 인천까지 와야 했는지를 말할 겨를은 채 없었던 것 같다. 그간 편지연락이 없었으니 이제부터 연락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공손히 처에게 존대하던 그는 살육전의 와중에 다시는 편지를 받을 수 없는 몸이 된 듯하다. 그는 친구에 5백원을 꾼 것이 못내 걱정이 되어 죽음이 예감되는 상륙전의 대결전을 앞두고 부인에게 이 돈을 어떻게 해서든지 갚아달라고 부탁하고 있다.

플라톤의 <국가론>에 의하면 소크라테스가 독약을 받고 남긴 말은 ‘악법도 법이다’가 아니라 이웃에게 꾼 돈을 갚아달라는 것이었다. 한응수 역시 그랬던 것이다. 그가 죽음을 예감하고 쓴 편지라는 것은 ‘신선옥동무와 나는 통일이 되면 만나볼 수 있다’는 마지막 문장이다. 그러나 그의 편지는 부인에게 부쳐지지 못했고 미군의 손에 노획되어 미국의 전리품으로 되고 말았다. 부인에 대한 애절함과 사랑도 적이 된 상대방에 의해 전리품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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