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영웅의 사회


우리 주변에는 과연 몇 십년의 고통과 바꿀만한 사회적 가치나 목숨과 바꿀만한 진리가 존재하는 것일까?

아무리 돈이 좋다고 해도 말년의 반짝 행복을 위해 대부분의 청춘을 시베리아 벌목장에서 썩을 수는 없다. 사랑을 위해 목숨을 건다지만 영화나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일 뿐이다. 특히 남녀간의 사랑의 감정은 3년을 넘기기가 어렵다고 한다.

종교적 신념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나 석가모니를 닮아가려는 종교인보다는 반대의 길을 가는 사람이 훨씬 많다. 우리나라 종교인이 5천만 명을 넘지만 사랑과 자비가 넘치는 사회는 여전히 까마득하다. 정의와 의리를 위해 목숨을 건다지만 우리 사회에 목숨을 걸만한 정의는 사라진지 오래이다. 의리는 깡패들의 유치한 전리품일 뿐이다.

나는 예술을 하는 화가이지만 예술과 목숨을 바꿀 자신이 없다. 그런 역사적 사례도 없다. 고흐가 자살을 한 것은 예술을 위해서가 아니라 삶이 구차했기 때문이다.

과거 부패 관리의 학정과 외세의 침탈로 백성들의 삶이 도탄에 빠졌을 때 사람들은 미륵 같은 영웅을 원했다. 사회의 부조리와 병폐를 일소하고 민중의 염원을 풀어주는데 목숨을 거는 그런 영웅 말이다. 하지만 현재의 백성들은 영웅을 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조금이라도 영웅의 모습을 보이면 죽이지 못해 안달이다. 영웅은 배부른 자나 권력자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민중들에 의해 탄생되는데도 말이다.

우리 시대의 영웅들은 살아서 대접을 받지 못했다. 죽거나 권력을 상실해야 영웅처럼 받들어진다. 일제시절 독립운동을 했던 지사들은 죽어서야 인정을 받았다. 영화와 권력을 누린 자는 친일파였다. 민주주의와 자유를 위해 싸웠던 열사들이 비참하게 죽어갔을 때 누군가는 룸살롱에서 계집을 끼고 양주잔을 기울였으며, 노동자들이 거리에 쫓겨나도 재벌회장은 외국을 유람하고 있다. 이들에게 면죄부를 주고 침묵한 사람은 착하디 착한 우리 백성이었다.

나는 영웅이 꼭 개인이어야 한다거나 사람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다. 집단이 될 수도 있고, 아름다운 가치일 수도 있다. 어쨌든 집단에 동의하고 힘을 몰아주며, 가치를 만들어 가는 것도 결국 이 나라 백성의 몫이다.

영웅을 필요로 하는 사회에서 영웅을 만들지 못하는 백성은 슬프다.


조국의 향기

▶조국의 향기/최계근/조선화/107*81/1993

이번 작품은 북한의 인민예술가 최계근이 그린 <조국의 향기>란 조선화 작품이다. 창작연도는 1993년이고 소재는 북한으로 돌아간 이인모 노인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알다시피 이인모 노인은 비전향 장기수이고 문민정부 시절 대북 화해 조치의 일환으로 북한으로 돌아갔다. 남쪽에서의 이인모 노인은 그야말로 `간첩`이었고, 돌아간 북쪽에서는 `영웅`으로 환대 받았다.

작품 속으로 들어가 보자. 10년 이상은 젊어 보이도록 표현된 이인모 노인이 의자에 앉아 진달래를 만지고 있다. 가슴에 금빛 훈장이 달려있는 걸로 봐서 영웅칭호가 수여됐을 것이다. 작품에서는 이인모 노인을 분명 영웅으로 표현하고 있다. 얼핏 <조국의 향기>라는 작품 제목처럼 진달래는 북한을 뜻하고, 북한의 품에 안긴 이인모 노인이 행복해 하는 모습을 표현했다고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인민예술가 칭호를 받은 최계근의 수준을 무시하면 안된다.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봐야할 부분은 바로 진달래이다. 1990년대 초반까지도 북한의 국화(國花)가 진달래일 거라고 믿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북한의 국화는 진달래가 아니라 목란(함박꽃)이다. 그럼 왜 북한의 상징인 목란을 그리지 않고 진달래를 그린 것일까?

그것은 작품 제목의 <조국>이 북한이 아니라 `통일조국`을 뜻하기 때문이다. 진달래는 우리 민족이 오래 전부터 좋아했던 꽃이다. 떡을 만들어 먹을 때도 진달래 꽃잎을 넣었으며, `즈려밟고 가는` 김소월 시의 소재가 되고, 노랫말 속에도 들어가 불리는 그야말로 민족의 꽃이며 상징이다.

제목을 제대로 쓴다면 <통일조국의 향기>라고 해야 할 것이다. 실제 민족미술 작가들이 진달래를 표현할 때는 `통일`이란 상징으로 사용했다. 또한 이인모 노인을 영웅으로 받드는 것이 단지 전향서를 쓰지 않았거나 감옥살이를 오래했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도 진달래를 통해 은유되어 있다.

정리를 하자. 이 작품은 이인모 노인을 소재로 삼았지만 주제는 조국의 통일을 위해 싸운 사람이 곧 영웅이며, 통일은 아름답고 향기로우며 행복할 것이라고 소곤거리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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