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사에 가면 학사대라는 곳이 있는데, 그 곳에 최치원이 꽂아 놓은 지팡이가 나무가 되어 자랐다고 하는 전나무가 있습니다. 신라 말기의 혼란한 상황 속에서 나름대로 개혁을 꿈꾸다가 끝내는 좌절한 뒤 산 속으로 들어가 버린 최치원의 안타까움이 전설이 되어 깃들어 있는 나무입니다. 이런 전설을 남긴  최치원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그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고, 무엇 때문에 산 속으로 숨어 버렸을까요?

최치원은 신라 말기의 개혁 세력을 대표하는 사람입니다. 어느 시대에나 개혁 세력은 지배층이 될 실력과 의사가 충분히 있는데도 지배층으로 올라설 길이 막힌 사람들로 형성됩니다. 그러므로 개혁 세력은 그 시대의 지배층은 아니면서도 새로이 솟아오르는 세력입니다. 신라 하대의 개혁 세력은 6두품 출신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골품제 때문에 지배층으로 올라서는 길이 막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전제 왕권의 요직에 많이 등용됨으로써 떠오르는 세력이었습니다.

더욱이 골품제 때문에 신분 상승에 제약을 받는 이들의 불만을 달래기 위해 이들에게 주어졌던 당나라 유학의 기회는 오히려 이들이 개혁에 대한 생각을 더욱 강력하게 품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당나라의 선진문물과 제도를 보고 배워, 뒤떨어진 신라를 개혁하고 싶은 바람을 더욱 강력하게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의 세력을 형성한 개혁 세력으로서는 우리 민족사에서 최초의 세력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특히 그 때 당나라에서 개인의 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는 과거제도가 있는 것을 보고 이에 자극받아 과거제를 실시할 것을 요구하면서 개혁을 강력하게 주장하였습니다.

최치원은 이들 중 대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열 두 살 때에 당나라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6년 뒤인 열 여덟 살에 진사 갑과라는 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하고, 스무 살 때에는 선주(宣州)의 율수 현위(( 水縣尉)라는 자리에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문학에 매우 뛰어난 소양을 보여 스무 살 때에 135수의 시를 모아 세 권의 시집을 내 놓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당나라에서 황소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토벌군 사령관의 종사관으로 참가하여 유명한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쓰기도 하였습니다. 이 격문 때문에 반란군 장수였던 황소가 겁을 집어 먹었다는 것은 매우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한 마디로 최치원은 신라 사람으로서 당나라에서 문명을 드날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최치원이 당나라에서 순탄한 삶을 살았던 것만은 아닙니다. 그는 뛰어난 능력 때문에 당나라 사람의 질시의 대상이 되어 독살의 위기를 당하기도 하고, 마침내 유배를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최치원은 귀국을 결심하게 되고, 스물 아홉이 되던 해에 고국인 신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가 고국으로 돌아온 때에 신라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러한 상황을 목격한 그는 고국을 개혁해 보겠다는 의욕에 불탔습니다. 그리하여 지방 관리로서 일하면서 `시무십여책(時務十余策)`이라는 글을 써서 조정에 제출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부패한 권력층들은 그의 개혁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첩첩 바위 사이를 미친 듯 달려 겹겹 봉우리 울리니,           
   지척에서 하는 말소리도 분간키 어려워라.                    
   늘 시비하는 소리 귀에 들릴세라,                             
   짐짓 흐르는 물로 온 산을 둘러 버렸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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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이 쓴 제가야산독서당(題伽倻山讀書堂)이라고 하는 시입니다. 그가 그때 자신의 개혁을 받아들이지 않는 시대 현실에 얼마나 염증을 느끼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늘 시비하는 소리 귀에 들릴세라/ 짐짓 흐르는 물로 온 산을 둘러 버렸다네`라고 할 정도였으니까요. 그가 염증을 느꼈던 시대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바로 그가 가야산으로 숨어 버린 까닭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열쇠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최치원이 염증을 느낀 시대 현실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신라가 삼국전쟁에서 승리한 뒤 당나라 세력을 몰아내고 대동강 남쪽 지역을 완전히 차지한 것이 676년입니다. 그런데 기껏해야 100년쯤 지난 8세기 후반이 되면서 신라는 위기에 봉착합니다.

이 때의 위기를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서는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한번 보겠습니다.

  무열왕 직계 자손들의 전제 왕권은, 경덕왕 때에 오면서 진골 귀족 세력의 반발을 받아 기울기 시작하였으며, 전제 왕권을 뒷받침하던 김유신계 후손들도 몰락하여 갔다. 그런 가운데 경덕왕은 왕권 강화를 위한 제도의 개혁을 단행하였지만, 혜공왕 때에 다시 그 이전의 상황으로 복구되었다.

  아울러 혜공왕 때에 와서는 귀족들의 반란이 잇달아 일어났고, 그런 와중에서 왕이 피살되면서 마침내 전제 왕권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 때부터 하대 약 150여 년 간 신라 조정에서는 왕위 쟁탈전이 전개되어 왕이 자주 교체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지방 반란이 잇따라 일어나서 중앙 정부의 지방에 대한 통제가 크게 약화되었다고 합니다. 이 정도 되면 신라라는 국가는 이미 망하는 길로 접어들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막강한 고구려와 백제까지 무너뜨린 신라가 왜 그토록 빨리 부패하고 위기에 빠지게 되었을까요?

중앙 정부가 권력 쟁탈전으로 날새는 줄 모르고 지방에서는 호족들의 반란이 일어나게 되자, 농민들의 저항도 거세져 갔습니다.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를 보면 이 때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진성여왕 때에 이르러서는 정치가 더욱 문란해져서 수습할 수 없는 상태에까지 이르렀고, 잇단 천재 지변으로 민심이 흉흉하였다. 이에 살기가 어려워진 농민들은 귀족이나 사원의 노비로 전락하거나, 각처에서 초적이 되어 도둑질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일부는 고구려나 백제의 부흥을 내세우면서 저항을 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고구려나 백제가 망한 지도 100년이 훨씬 더 지난 시점에서 왜 농민들이 고구려나 백제의 부흥운동을 벌였는가 라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또 초적은 과연 도둑질을 하는 도둑이었을까 라는 의문도 가질 만합니다.

신라의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고자 개혁을 부르짖는 세력이 바로 최치원으로 대표되는 6두품 지식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신라 사회의 폐단을 시정하고, 새로운 정치 질서의 수립을 시도하였으나, 탄압 당하거나 배척 당하였습니다. 이들이 주장한 `개혁`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내용이었으며, 또 이들의 개혁 주장은 왜 실패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을까요?

이러한 의문들은 삼국 전쟁에서 승리하여 대동강 이남 지역을 통합한 신라가 왜 다시 후삼국으로 분열될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해답을 줄 것입니다. 지금부터 그 까닭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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