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현우 (KAL858기 사건 진상규명 시민대책원회 조사팀장, 소설 『배후』 작가)


“불필요한 오해와 의혹!”
“두 김에 의해 KAL858기가 폭파되었다는 심증을 갖기에 무리가 없다!”

이는 지난 8월1일 ‘국가정보원 과거사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이하, 발전위)’의 ‘KAL858기 사건 조사결과 중간보고서’에 나타나는 KAL858 사건(이하, 이 사건)의 의혹 및 실체에 대한 발전위의 시각이다. 필자는 보고서를 접하고서 ‘KAL858기 사건 진상규명 시민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의 조사팀장으로서 심각한 유감과 더불어 참담함을 금할 수 없다.

우선 이번 보고서의 전체적인 인상이 ‘한 마디로 이것이 어찌 조사보고서라 할 수 있느냐’는 초보적이고 원론적인 문제를 던지고 있음을 지적하고 싶다.

주지하다시피 근대 형법체계의 확립 이후 범죄수사의 기본은 증거물증주의에 바탕 한 과학적 방법, 그리고 객관성을 그 모토로 하고 있다. 달리 말하면 과학적인 방법, 객관적 태도의 견지야말로 범죄수사의 생명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건에 대한 이번 발전위의 조사보고서 또한 마땅히 그것의 반영이어야 함은 불문가지의 일이다.

그런데 이번의 조사보고서는 그야말로 ‘추정’과 ‘추정을 통한 판단’, 또 ‘심증’이란 어휘를 너절하게 늘어놓으며, 기존의 구 안기부가 내린 결론으로 일관하고 있다. 마치 결론을 미리 내려놓고 그것에 억지로 끼어 맞추려는 듯이 말이다.

놀라운 사실은 김현희 조사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폭발물이 임의 추정된 것임을 확인하면서도, 보고서엔 그동안 제기된 이 사건의 의혹에 대해 ‘불필요한 오해와 의혹’이라 전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필자가 보기엔 폭발물의 ‘임의 추정’ 확인이야말로, 이 사건에 대한 의혹의 핵심 중 하나가 조작으로 드러난 것인데도 말이다.

더하여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은, 확인할 수 없는 의혹에 대해 ‘확인 불가’ 또는 ‘미확인’이라 명시하면 될 것을, ‘그렇기 때문에 추정, 판단’이란 말을 덧붙여 주관적으로 결론을 도출한 데에 있다.

예를 들어 다시 폭발물에 대해서 말해 보자. 국정원은 이번 중간발표 이전에 이미 이 사건 범죄사실의 구성에 있어서 결정적인 증거이자, 범죄의 도구인 폭발물(C4와 액체폭약PLX)에 대한 더 이상의 의혹제기를 견디지 못하고, 폭발물은 임의 추정한 것이라 시인한 바 있다. 이번 중간발표의 내용은 이 사실을 재확인해 주었다.

“폭발물은 임의로 추정 발표했다.”
이렇게 발표하면 그만이다. 기존에 발표되고 법정에서 인정 판시된 폭발물에 대한 의혹은 이것으로 확인이 된 셈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발전위의 보고서는 그것에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무려 5쪽에 걸쳐(48~52쪽) 폭약물의 종류와 양, 폭발력에 대해 언급하는데, 놀라운 점은 국방과학연구소와 경찰의 회신문을 들먹이며 플라스틱 폭탄이라면 검색에 걸리지 않는다는 둥, 기존의 C4는 어떻고 PLX는 어떻다는 둥 장황하게 늘어놓는다. 게다가 양에 대한 아무런 언급 없이 문제의 라디오에 C4를 넣어도 라디오의 작동이 확인된다는 둥 하며 이미 실체가 무너진 가상폭발물을 전제하여(김현희 진술에의 추종) 3쪽(40~42)에 걸쳐 친절히 언급하고 있다.

아니, 도대체 뭘 말하자는 것인가? 갑자기 웬 플라스틱 폭탄이라니? 그럼 KAL858기가 플라스틱 폭탄에 의해 폭파되었다는 말인가? 아니면 다시 C4와 PLX를 주장하겠다는 말인가?
그러한 해명은 폭발물의 존재가 확인되고, 또 그 종류가 입증된 전제 하에서 검증할 수 있는 성질의 것임에도 말이다.

이 같은 발전위의 태도는 또 한번의 임의 추정에 다름 아니며, 임의 추정은 오직 객관적 사실만을 다루어야 할 발전위의 권한 밖의 일일 것이다.

게다가 발전위는 폭발물에 대해서 마치 일부만이 의혹이 제기된 양, 전제(48쪽)한 뒤 KAL858기가 ‘범인 김현희, 김승일’이 폭파했을 가능성에 초점을 맞춰 이러저러한 개연성을 논하고 있다.(이미 폭발물에 대한 것은 백 퍼센트 사기인데도 말이다)

심지어 보고서엔 2003.3.15자 국정원이 가족회에 보낸 답변서에 언급한 추정사고 지점을 임의대로 수정하여 바로잡아주는 수고마저 마다하지 않았다. 허나, 그것은 명백히 발전위의 권한을 넘어서는 영역으로, 발전위는 국정원 답변서의 오류를 단지 지적하고 진위 여부를 확인하면 되는 것일 뿐이다.

이렇듯 이번 발전위 보고서의 의혹을 다루는 전반적 태도가 기존 국정원의 그것과 별반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이에 필자는 과연 발전위가 이 사건에 대해 제기된 의혹의 범위와 깊이에 대해 제대로 인지하고 있는 것인가에 우려를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국정원은 그동안 제기된 이 사건의 의혹에 대해 땜질식 답변을 이어왔다. 땜질식이다 보니, 때에 따라 답변이 다른 점도 허다했다. 그런 과정 속에서 의혹의 상당한 부분이 구체화되고, 또 설득력을 얻기도 했다.
폭발물의 임의 추정 확인은 그동안 KAL858 가족회(이하, 가족회) 및 대책위를 비롯한 여러 시민단체들의 눈물겨운 노력의 결과임에 틀림없다.

폭발물은 이번 사건의 구성요건 상 핵심적인 요소이다. 즉 건물로 말하면 주춧돌이나 기둥에 해당된다. 기존 폭발물(C4와 PLX)에 대한 의혹은 1988.1.15 수사발표 당시부터 제기된 것이지만, 당시 국정원(구 안기부)과 검찰, 사법부 모두는 제기된 의혹을 묵살한 채 기존폭발물을 수사결론과 공소유지, 대법원 판결에 이르기까지 범죄사실의 핵심적 구성요소로 삼아왔다. 더구나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사실은 구 안기부가 파렴치하게도 실체가 없는 폭발물로 국내와 국외에서 요란한 실험을 하는 등 부산을 떨었다는 것이다(대단한 안기부다!).

그런데 그것이 무너졌다. 그것의 무너짐은 즉 건물이 무너져 내린 것이자, 위에서 언급한 수사.사법기관의 위법행위, 범죄행위가 드러남에 다름 아닌 것이다.
국정원(구 안기부)은 범죄사실을 가공.날조하고, 검찰과 사법부는 공소유지 조차 될 수 없는 사건을 기소하고 사형 판결했다는 것이 확인된 셈이다.

더하여 필자가 경악할 수밖에 없는 점은, 국정원이 사법기관과 공모한 이러한 범죄사실을 시인하면서도 마치 별 것 아니라는 듯 태연자약하다는 점이다(여기선 정말 할 말을 잃었다!).

발전위는 이번 보고서에서 국정원(구 안기부)이 이 사건을 정략적으로 이용한 ‘무지개공작’을 확인.발표하며 이것은 국가기관으로서의 책무를 저버린 행위라고 점잖게 훈계(이것도 권한 밖의 행위)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번의 보고서가 정작 위에서 언급한 국정원의 범죄적 행위엔 침묵으로 일관하고, 나아가 여타 불필요한 설명을 덧붙이면서까지 적극적으로 국정원의 거짓을 해명하려는 인상을 주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발전위가 국정원의 직속기관이 아니라면 필자로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이번 발전위의 중간조사보고서는 그동안 국가정보원의 여러 답변서(천주교 인권위원회, KAL858기 가족회, KBS에 보낸)의 논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일 뿐 아니라, 어쩌면 그것과 궤를 같이하는 연장선상의 것이라 보아진다. 그 이유는 의혹해명에 있어 물증을 포함한 구체적이고 본질적인 사실에로의 접근이 아니라, 단지 국정원의 내부문건(보고서엔 주로 ‘전문’이라 언급됨)에 의존하여 확인한 사실만으로 추정.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복하건대 필자에겐 이번 보고서가 국정원의 내부문건을 중심으로 일부 보강조사에 그친 정도에서 작성되었다는 인상이 짙어 보인다. 그것도 사건 구성에서의 핵심적인 의혹들은 죄다 빠뜨린 채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지할 것은 발전위가 국정원을 피혐의 대상으로 하여 태동하였다는 점이다. 그런 만큼 국정원의 내부문건을 중심으로 한 조사는 한 마디로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조사에 그칠 수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발전위는 이번 보고서에서의 추정.판단을 위한 장황한 설명에 앞서, 추정과 판단의 주 근거로 삼은 그 ‘전문’들을 공개했어야 마땅한 것이었다고 본다. ‘전문’이라면 대체 어떤 것을 말함인가? 당시 국정원(구 안기부) 해외 파견관의 전문을 말함이 아닌가?

국정원은 그동안 대책위와 가족회에 대한 의혹해명에 있어 근거로서 항상 내부 자료를 들먹여왔지만 내부 자료의 공개는 일관적으로 거절하여 왔다. 정보공개를 허용하라는 1,2심 법원의 판결에도 불구하고 굳이 대법원에 상고한 검찰의 행위 또한 그러하다. 대책위와 가족회는 그렇게 정보에의 접근으로부터 차단되고 소외되어 온 것이다. 어쨌든 그러한 가운데 출범한 발전위가 아닌가? 그러므로 발전위는 마땅히 지금까지의 조사결론에 대한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근거들을 제시하여야 할 것이다.

한 가지 주지하는 것은 조작의 의혹을 받고 있는 사건일수록 때로는 공식적이고 정리된 2,3차적 자료가 아닌, 1차적인 자료(직접적 증언 등)가 때 묻거나 가공되지 않은 순수한 것일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지난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에서 그것을 확인하지 않았던가? 필자는 더 나아가 국가간 이해관계에 의해 형성된 정부 상호간의 공문이나 전문도 위의 시각에서 투영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음은 이번 보고서에서 발전위가 주로 근거로 삼은 내부문건, ‘전문’의 문제점을 예로 들어 내부 자료에의 의존의 위험성을 말해 보겠다.

보고서(17~18쪽)엔 김현희, 김승일(이하, 두 김)의 여권 위조 사실을 사전에 인지하지 않았다는 근거로, 외교부 ‘동남아과철’에 있는 1987.12.6자 UAE주재 한국대사관의 전문을 드는데, 그 전문엔 ‘1987.12.1 새벽 4시(현지 시간) 일본정부(외무성)가 두 김의 여권이 위조여권이라는 사실을 바레인주재 일본대사관에 통보했고, 동同 일본대사관은 그날 아침에야 한국당국에 통보했다’고 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엔 이 전문이 두 가지 이유에서 거짓 전문이거나, 사후 조작된 전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는, 1987,12.1 새벽 4시(현지 시간) 바레인 주재 일본대사관이 일본외무성으로부터 통보받은 내용에 오직 ‘하치야 마유미’의 여권이 위조된 사실을 언급했을 뿐 ‘하치야 신이치’의 여권에 대한 사실은 언급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두 김이 바레인 공항에서 출국할 시, 일본대사관의 스나가와 쇼준은 ‘하치야 마유미’의 탑승을 저지했을 뿐 ‘하치야 신이치’에 대해선 탑승을 허락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치야 신이치’의 여권위조 사실이 확인된 때는 그가 죽고 난 뒤 바레인 경찰의 수사과정에서였다.

그렇다면 바레인 주재 한국대사관은 ‘하치야 신이치’의 여권위조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가? 발전위는 위 전문을 한국당국이 이 사건의 사전인지를 부정하는 근거로 내세울 것이 아니라, 우선 이 의문점을 해명했어야 했다.

그 전문이 거짓, 또는 조작이란 또 하나의 이유는 다음에서도 엿볼 수 있다. 필자가 확인한 당시 외무부 동남아과장의 증언녹취록에 의하면 외무부가 일본경시청으로부터 두 사람의 여권에 대한 조회 결과를 통보받은 시점은 1987.12.1. 새벽 3시(바레인 시간 전날 밤 9시)경으로, 두 사람의 여권 모두가 위조란 것이었다. 그래서 위 동남아과장은 즉시 바레인 주재 한국대사관에 두 사람의 조사를 지시했고, 이에 김정기 대리대사가 두 김이 묵고 있던 리젠시 인터콘티넨탈 호텔로 찾아갔다는 것이다.

즉 당시 한일 양국 정부가 두 사람의 여권위조를 인지한 시점은 늦어도 위에 언급된 시간을 넘지 않으며, 바레인에서만은 어찌된 일인지 한국대사관이 일본대사관보다 이른 시기에 하치야 신이치의 여권 위조 사실마저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필자는 지난 3년 가까이 동안 이 점에 커다란 의문을 품어왔다. 그러다, 이 사건에 대한 일본의 태도를 지켜보며 하나의 결론을 내렸는데, 그것은 이 사건이 일본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보아왔다. 과거 전두환 군사정권과 나카소네 정권의 깊은 유착을. 이 사건이 발생한 당시는 그 나카소네 정권이 주도적으로 참여한 한미일 삼각군사동맹이 절정을 이루고 있던 시점이다.

필자는 지난 2003년 KBS가 두 김의 위조여권 상에 나타난 (국정원이 위조된 스탬프라고 발표한) 일본출입국 사실의 재확인을 위해 일본법무성에 협조를 요청했을 때 일본법무성의 거절에서 위 필자의 결론에 대한 심증을 더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일본법무성에 대한 협조요청은 새로운 사실의 확인에 있는 게 아니라, 기 확인된 사실을 재확인하는 데에 있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거절할 이유가 없지 않는가? 게다가 당시 일본 정부는 한창 반북(反北) 열풍을 주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했다.

이러한 점 등으로 필자로선 이 사건에 대해 일본이 제시한 증거들도 비판적인 시각에서 분석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이번 보고서엔 두 김의 일본출입국을 나타내는 여권 상의 스탬프의 위조사실을 일본 당국의 공문이 아니라, 단지 도쿄파견관의 전문을 근거로 내세우니 필자로선 도저히 받아드릴 수 없는 것이다. 도대체 발전위가 언급한 도쿄파견관은 누구를 일컬음인가?

정리하자면 이번 보고서의 특징이자 한계는 바로 이 무슨 ‘전문’과 무슨 ‘파견관’을 추정.판단의 주요 근거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필자는 위에서 언급한 이러한 점들을 우선 지적하며 이번 보고서의 전체적인 인상을 밝혔다. 더하여 세부적인 보고서의 문제점과 중간보고서가 빠뜨린 중요한 의혹들에 대해선 다음 기회에 다시 밝히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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