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발전위는 1일, 북한공작원 이선실과 중부지역당이 실재했다고 발표하면서 당
시 안기부 조사발표의 기본 내용은 사실이라고 밝혔다.  [사진-통일뉴스 이현정 기자]

1990년대 대표적 간첩사건인 '남한조선노동당사건'을 조사해온 '국정원과거사건진실규명을통한발전위원회(이하 국정원발전위, 위원장 오충일)'는 당시 안기부의 조사 내용에서 특별한 조작혐의를 발견할 수 없었다고 1일 발표했다.

또, 손병선, 황인오를 포섭한 남한조선노동당 사건의 총책 북한공작원 이선실은 4.3항쟁 당시 제주에서 월북한 이화선(1917년생)이며 민주당에 출입하던 이선화와 동일인물인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그 실체에 대해 의혹이 잇따랐던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의 존재도 실재했던 것으로 국정원 발전위는 판단했다. 황인오, 최호경 등이 대외명칭을 '민애전'으로 하는 중부지역당을 결성하고 강원도당으로 '조애전'을 조직했으며 산하조직으로 '95년위원회'를 재편한 '애국동맹'을 두었다는 것도 사실이라고 결론지었다.

단 "북과 직접 연결된 중부지역당과의 관계를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남한 내의 자생적 운동조직인 95년위원회 또는 애국동맹의 다수 구성원들의 활동은 중부지역당을 주도적으로 조직한 지도부의 활동과는 다르게 평가되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국정원발전위는 또, 안기부가 '남한내 이선실을 책임자로 하는 현지공작지도부를 구축하고 김낙중. 손병선. 황인오 등 3개 간첩망을 중심으로 한 남한 내 조선노동당을 결성했다"고 발표한 것은 "개별사건을 기계적으로 결합시켜 단일한 사건으로 부풀려 발표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렇게 과장된 사건이 14대 대선에서 전형적인 '북풍'으로 활용돼 노태우 정권 측에 유리한 정국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남한조선노동당 총책 이선실. 재야단체 활동가 이선화.신순녀는 '동일인물'
 

▶(왼쪽부터) 이선실 묘비석 사진-74.11민단등록시-
78.6모방단 입국시-80.4주민등록발급시-83.12주민
등록갱신시-90.6.21민중당 창당대회

이 사건의 총책인 이선실은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장으로 알려졌으며 평양애국열사릉에 그 묘가 있다. 묘비석에는 사망일시(2000년 8월 7일), 사진, 직책 등이 음각돼 있는데 묘비석 사진과 74년 민단 등록사진, 80년 주민등록 발급사진, 90년 민중당 창당 대회 때 찍힌 사진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국정원발전위는 이선실이 제주출신의 '이화선'으로 전주완주 출신 '신순녀'로 신분을 위장하고 1980년 3월 영주 귀국한 뒤 1980년대 후반부터 '이선화'와 '신순녀'라는 이름으로 민가협과 민중당을 출입했고 1990년 황인오와 손병섭을 포섭했으며 1991년 10월 황인오, 김동식 등과 함께 강화도 해안을 통해 북한으로 복귀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당시 안기부 조사결과도 이와 일치한다. 그러나 민중당 관련자들도 '이선실'을 알지 못했고 10여 년간 재야단체를 출입하며 공개적으로 활동한 이선실의 실체를 안기부가 파악하지 못했다는 점은 이선실 실체의 유무 논란을 불러왔다.

이선화가 이선실이란 사실은 손병선으로부터 입수한 암호체계로 이선화의 지령을 해독한 결과 밝혀졌다.

지령에는 '동지가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재선되었으며 가명을 리선실로 함(1980.11.6)', '동지는 당대회에서 정치국후보위원으로 재선되었음. 가명은 리선실로 하였음. 신변안전에 류의하여 련락사업에서 비밀을 철저히 지킬 것(1981.7.16, 8.16, 1991, 4,16)', '당 중앙에서 김일성 훈장, 영웅칭호가 배려되었고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재선(1982.5~1990)'되었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고 한다.

국정원발전위는 이를 바탕으로 '이선화'와 '이선실'이 동일인물임을 1차 확인하고 이선화의 주거지를 찾아 동 주거지 주민등록자가 '신순녀'임을 확인, 신원확인 작업에 착수해 이선화, 신순녀, 이선실이 동일인물임을 확인했다.

김낙중 36년 고정간첩 암약은 무리한 해석

당시 안기부가 '간첩으로 남파된 뒤 1961년 안행협을 월북시키고 1973년 정부전복을 음모하는 등 북한의 지령을 수행했다'고 발표한 김낙중 사건은 국정원 발전위의 조사결과 과장된 측면이 있었음이 확인됐다.

국정원 발전위는 "1957년과 1963년 사건 당시에는 김낙중이 '북한의 간첩으로 남파되었다'는 내용과 관련해 실형을 선고 받은 사실이 없고 김낙중 월북했던 때로부터 무려 16년이 지난 1973년 사건 당시의 수사결과와 판결내용을 별도 조사 없이 그대로 인정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고 지적했다.

비록 김낙중이 1990년 공작원을 접선하고 공작금 210만 달러와 공작장비를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36년간 고정간첩으로 암약했다는 안기부 발표 내용은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다.

사법부는 1957년 월북사건에 대해 간첩죄 등을 적용, 징역 1년.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가상고심에서 간첩죄 부분을 무죄로 판결했다. 김낙중은 자서전과 국정원발전위 면담에서 "직접 만든 평화통일방안을 가지고 김일성을 만나러 갔다"고 진술하고 있다.

안기부는 1992년 김낙중 사건을 발표하며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를 밀어야 한다'는 북한의 지령이 있었다고 공개했다. 이에 민자당은 이에 대한 해명을 요구함과 동시에 김대중 민주당 대표의 국회 국방위원 사퇴를 요구하면서 정치쟁점화 됐다. 노태우 정권은 '간첩단'과 정치권이 관련돼 있다는 설을 지속적으로 제기했다.

'간첩단과 정치인 관련설'은 그 근본이 민주당의 의지와 상관없는 북한의 일방적 지령에 있었지만 안기부는 굳이 이 내용을 발표문에 포함시켜 결과적으로 북한과 민주당이 연결돼 있음을 시사했다.

국정원 발전위는 "안기부의 이례적인 홍보활동은 오히려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사건의 정치적 파장을 증폭시켜 정치에 개입한 것과 같은 결과를 가져온 측면이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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