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경우(통일뉴스 전문기자)

《통일뉴스》는 최근 등장한 뉴라이트에 대해 자세히 조망하는 '<뉴라이트 기획Ⅰ> 뉴라이트 들여다보기'와 <뉴라이트 기획Ⅱ> 내가 본 뉴라이트', '<뉴라이트 기획Ⅲ> 현장취재, 뉴라이트'를 연속해서 싣는다.

아직 뉴라이트 스스로 자기 정립이 덜 되었고, 이 분야에 대한 선행 연구나 취재가 많지 않아 미흡한 점도 없지 않겠지만 현 시점에서 가능한 한도에서 총정리한다는 입장에서 아래와 같이 첫 번째 기획 연재를 먼저 시작한다.

<뉴라이트 기획Ⅰ> 뉴라이트 들여다보기

1. 뉴라이트, 어떻게 볼 것인가?(김치관, 통일뉴스 편집국장)
2. 뉴라이트 등장의 사회역사적 배경(임영태, 통일뉴스 전문기자)
3. 뉴라이트, 그들은 누구인가?(김치관, 통일뉴스 편집국장)
4. 확장일로의 뉴라이트 조직(김치관, 통일뉴스 편집국장)
5. 자유주의의 본질과 역사(이나미, 한신대 강사)
6. 박세일의 공동체자유주의(민경우, 통일뉴스 전문기자)
7. 뉴라이트, 역사바로세우기와 반북(민경우, 통일뉴스 전문기자)
8. 아직도 냉전중인 조중동(양문석, EBS 정책위원)
9. 뉴라이트, 인터넷 전쟁중(이창은, 대자보 편집장)
10. 2007년 대선과 뉴라이트(한선범, FTA공대위 조사팀원)


1. 민주개혁세력의 역사재평가와 보수세력의 위기감

한국의 보수세력은 대체로 경제성장을 중시했다. 상대적으로 역사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소극적이거나 회피하는 자세를 보였는데 이는 보수세력이 민족적, 민주적 관점에서 약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 시대의 친일파들은 해방 공간을 거치면서 친미파로 변신하여 기득권을 유지하였고 이승만 대통령의 경우 4.19를 통해 몰락했다. 박정희 정부 또한 경제성장에는 성공했지만 민주와 인권의 차원에서는 흠결이 있었다.

민주화 운동이 성장하고 민주세력의 정치 참여가 활발해지면서 민주개혁세력은 ‘역사바로세우기’라는 이름 아래 과거 역사에 대한 재평가 작업에 착수했다. 민주세력이 역사바로세우기의 관점에서 집중했던 것은 친일 잔재 청산과 독재정권 시절의 인권 유린이었다.

민주개혁세력의 역사재평가 작업이 추진되면서 이에 저항하는 보수세력의 대응도 예민해지기 시작했는데 민주개혁세력의 역사재평가에 대한 역반응으로 나타난 것이 뉴라이트의 역사 재해석이다.

2. 뉴라이트의 역사재해석

아래에서는 뉴라이트의 역사재해석 작업을 대표하는 『해방전후사의 재인식』(2006, 책세상)을 중심으로 뉴라이트의 역사재해석 작업에 대해 검토해 보겠다. 뉴라이트의 역사재해석 작업 중 주목되는 것은 다음의 세 가지이다.

첫째, 일제 시대에 대한 평가이다.

위 책 서장 ‘왜 다시 해방전후사인가?’에서 서울대 이영훈 교수는 일제 시대를 “조선의 전통문명과 일본을 통해 들어온 서유럽 기원의 근대문명이 상호 융합하는 시대”로 규정한다. 이는 위 책 편찬을 주도했던 서울대 박지향 교수의 시각도 동일하다. 또한 위 책의 모든 필자들이 공유하고 있는 인식 중의 하나가 바로 민족 담론에 대한 강한 거부감이다.

일제 시대에 대한 평가와 민족 담론에 대한 거부감을 조합하여 일제 시대를 재구성해 보면, 항일이란 근대 사회에서 만들어진 상상의 공동체인 민족을 위해 근대문명의 도입처인 일본에 맞서 싸운 정치적 행위가 된다. 항일운동은 실체하지 않는 가공의 공동체를 위해 그것도 근대 문명을 대신 전파하고자 하는 일본을 향해 싸운 반문명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운동이 되는 것이다.

또한 이영훈 교수는 위 책에서 “한편으로는 일제에 종속된 위치에 분노하면서 동시에 처음 맞부딪친 근대성에 환희를 느낀 식민지기를 산 우리 선조들의 복잡한 심사가 마음에 와 닿는다”고 쓰고 있다(이영훈 교수를 비롯 위 책의 필진들은 이 부분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는지 위 인용문을 책 뒷장에 특별히 강조해 두고 있다). 이렇게 되면 친일은 전근대성과 근대성 사이에 방황한 어쩔 수 없었던 문제, 즉 이해하고 감싸 안아야 할 대상으로 바뀌는 것이다.

둘째는 해방 정국에 대한 평가이다.

이영훈 교수가 궁극적으로 역사를 평가하는 기준은 “자유와 이기심”이다. 이를 정치적으로 표현한다면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또는 개인과 자유주의일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남은 성공적인 반면 북은 실패하였다고 평가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역사를 거슬러 당시 상황을 재평가해 본다면 “어리석고 고집이 센 인간들 가운데서도 역사가 그러한 잣대로 밖에 발전하지 않음을 익히 안 소수의 선각자”들이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토대에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를 세운 것”을 중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위의 평가가 의미하는 주요 대상은 아마도 김구와 이승만일 것이다.

김구는 민족이라는 허구의 잣대를 가지고 “어리석고 고집스럽게” 완전한 자주독립과 남북협상을 추진하다 암살당한 반면, 미소 양극 질서가 수립되기도 전에 선구적으로 단선과 단정, 즉 미국 주도의 세력권으로의 편입을 주장하여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초석을 놓은(달리 표현하면 민족분열을 강행한) 이승만은 고뇌에 찬 “소수의 선각자”인 셈이다.

셋째는 박정희 정부에 대한 재평가이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뉴라이트는 개인과 자유주의라는 관점하에 역사 전체를 재구성한다. 이런 관점에서 일제 시대의 친일 행위는 전근대문명과 근대문명 사이에서 방황한 것이 되고 이승만의 단선단정은 미국 주도의 세력권에 편입된 고뇌에 찬 결단이다. 이러한 논리를 연장하면 박정희 시대는 선조들이 닦아 놓은 밑바탕에 기초하여 산업화, 근대화를 추진한 역사의 대(大) 중흥기가 될 것이다.

3. 뉴라이트의 역사관

그러면 『해방전후사의 재인식』과 이 책의 기초가 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역사관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역사관의 기초가 개인의 “자유와 이기심”이라는 견해는 전형적인 서유럽 자유주의의 관점이다. 그리고 이런 관점에서 민족을 위험한 것으로 평가하는 경향은 제도권 학계의 일반적인 경향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서유럽 자유주의에 경도된 제도권의 역사학자들이 모두 위 책의 필자들과 같은 난폭한 주장을 내놓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개인과 자유주의를 중심으로 하더라도 일제 시대에 일제 침략 세력에 저항하여 싸운 독립투사들을 응당하게 평가하며 해방 정국에서 미국의 정치적 의도와 그에 맞서 통일국가를 주장했던 민족주의자들을 공정하게 다루는 것이 오히려 상식적이고 일반적인 견해일 것이다.

반면 재인식의 필진들이 위와 같은 무리한 접근을 시도한 이유는 근본주의적인 태도와 정치적 의도 때문이다.

이영훈 교수는 역사를 다룸에 있어 근본주의적 태도를 비판하고는 있지만 정작 가장 근본주의적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인 이영훈 교수 자신이다. 이영훈 교수는 현재의 남이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이루었다고 보고 이의 관점에서 무려 200~300년의 역사를 이런 관점에서 재해석한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역사의 종언’을 선언할 만큼 완성된 가치라고 평가할 수 있는가도 의문이지만 수천만이 살았던 지난 수백년의 시대를 하나의 잣대를 가지고 설명하고 여기서 벗어난 평가를 촌스럽고 비문명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태도야말로 식자연하는 사람들의 대표적인 오만일 것이다.

더욱 큰 문제는 이들이 정치적 목적을 위해 그렇게 하고 있다는 점이다.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의 필자들은 위 책에서 1980년대에 출간된 『해방전후사의 인식』에 대한 노무현 대통령의 평가(“피가 거꾸로 흘렀다”)와 노무현 정부가 추진했던 역사재평가 작업(일제강점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등으로부터 자극받았음을 숨기지 않고 있다. 결국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의 발간과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의 역사 인식 또한 역사를 매개로 한 정치 투쟁의 일환으로 기술된 것이다.

그것은 그런대로 좋다. 역사 해석은 언제나 현재의 정치적 쟁점을 반영하기 마련이다. 문제는 이들의 정치적 지향이 한번도 제대로 밝혀진 바도, 청산된 적도 없는 일제 잔재와 일제 잔재 청산을 방해하는 보수우익세력의 입장을 노골적으로 대변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 한국사회가 나치즘의 잔재를 청산하고 새로운 번영과 화합의 시대를 열어가야 하는 독일 정도의 역사재평가 작업을 이미 수행한 상태라면 뉴라이트의 역사재해석에서 읽혀지는 정치적 맥락은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여전히 친일잔재가 곳곳에서 어른거리고 이를 젖줄로 반민족적인 정치 행각이 공공연히 재연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영훈 교수 본인의 주장처럼 개인과 자유주의가 만개한 사회를 열기 위해서라도 친일잔재의 완전한 청산을 내거는 것이 옳지 않은가?

이영훈 교수와 같은 뉴라이트가 진정한 의미의 자유주의자라면 친일잔재 청산에 대한 민주개혁세력의 역사재평가 작업에 시비를 걸기보다는 국가보안법과 같은 전근대적인 유산에 더욱 날을 세웠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뉴라이트들은 서구의 가치관을 차용하면서 그것이 담고 있는 정치적 신념을 온전히 대변하려 하기보다는 이를 친일잔재 청산을 방해하는 논리로 악용하고 있다.

4. 북에 대한 태도

전통보수세력은 박정희 정부의 산업화를 높이 평가하면서도 박정희 정부의 인권유린과 독재를 인정했고 친일전력은 재해석의 대상이 아니라 은폐의 대상이었다. 이는 이들 또한 민족이라는 관점을 어떤 형태로든 수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뉴라이트는 개인과 자유주의의 관점에서 민족이라는 관점 자체를 부정한다. 그렇다면 북에 대한 태도는 어떻게 될까?

뉴라이트의 대북관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리고 뉴라이트가 보여 주는 여러 유형의 대북관은 아래의 양극단을 부분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따라서 두 가지 양극단의 대북관을 살펴보면 뉴라이트의 대북관의 윤곽이 잡힐 것이다.

하나는 통일 무용론(?)이다.

통일이란 남북을 포괄하는 민족공동체라는 관점이 전제되어야 가능한 개념이다. 만약 뉴라이트처럼 개인과 자유주의에 기초한 정치공동체를 중심에 두고 사고한다면 혈연과 문화의 공통성에 기초한 민족공동체의 형성, 즉 통일해야할 이유는 없어진다.

이런 견해는 최근 폭넓게 유포되고 있다. 여기에는 남에서 경제상황이 악화되고 남북간의 경제적 격차가 심화되면서 굳이 통일할 필요가 있는가하는 소극적인 견해로부터 6.15 공동선언 이후 민족공조론이 확산되는 것에 대한 수세적인 위기감이 함께 깔려 있는 듯 하다. 일반 대중의 경우 전자의 입장이 강한 반면 후자는 보수기득권층을 대변하는 지식인에게서 흔히 볼 수 있다.

통일무용론을 나름대로 가장 순수한 형태로 서술하고 있는 사람은 본 연재물에서 언급한 바 있는 박세일 씨다. 박세일 씨는 『대한민국, 선진화전략』에서 대한민국의 선진화를 위한 전략을 다루면서 북과 통일 문제를 거의 완전히 주변적인 변수로 치부해 버렸다.

이것은 뉴라이트류의 역사관의 필연적인 귀결일 수 있다. 박세일 씨에게 사회역사의 주체는 자유로운 개인이고 사회란 자유로운 개인들의 정치적 선택의 대상이다. 따라서 박세일 씨에게 선진화의 주체가 되는 ‘우리’는 남북을 포괄하는 ‘민족공동체’가 아니라 개인과 자유주의를 기본으로 하는 정치공동체인 ‘대한민국’이 되는 것이다.

전통보수세력이 대한민국을 강조할 때의 대한민국은 민족 전체를 대표하는 존재라면 박세일 씨의 경우, 대한민국은 개인과 자유주의에 기초한 정치공동체인 대한민국 즉 ‘남(南)’이다. 남북을 포괄하는 공동체를 추구할 것인가 말 것인가는 해도 좋고 안 해도 그만인 일종의 선택 사항이다.

그러면 박세일 씨의 통일관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한국사회의 모든 중요한 정치ㆍ경제ㆍ군사적 과제는 분단ㆍ통일 문제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주한미군의 재조정, 주변 열강과의 관계 설정, 군비와 사회복지비 사이의 관계 등 한국사회의 진로를 결정하는 모든 중요한 의제들 중 통일과 무관한 과제는 찾아보기 어렵다.

박세일 씨와 같은 주장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현실을 없다고 강변하는 허구의 주장이거나 이들 본질적으로 중요한 문제에 관한 한 미국에 기대어 왔던 사대(事大)의 산물이다. 외교ㆍ안보ㆍ국방 등의 문제에 관한 한 미국의 이해와 맞설 가능성이 있는 즉 통일과정에서 미국의 이해가 부정될 수 있는 또 다른 외교ㆍ안보ㆍ국방정책의 길은 고려 대상이 아예 아닌 것이다. 이렇게 되면 친미적인 통일경로 즉 남이 주도하는 보수적인 통일이거나 통일무용론만이 남게 된다. 박세일 씨의 위 책에서 통일부분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둘째는 반북론이다.

뉴라이트의 또 다른 대북관은 반북이다. 이는 전향 386과 이들이 추종하는 황장엽 씨 등의 주장에서 볼 수 있다.

뉴라이트의 신념이 (공동체) 자유주의라면 논리적으로는 통일무용론이 일관된 견해일 수 있다. 뉴라이트의 신념대로 사회역사가 ‘개인의 정치적 신념에 따라 구성되는 것’이라면 ‘혈연과 언어를 같이 하는 공동체’를 구성해야 하는 이유, 즉 통일해야 하는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통일해야 하는 이유가 없다면 반북 감정을 가져야 할 이유 자체가 없을 수 있다. 그저 한일 사이의 관계처럼 실용적인 차원에서 북을 대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뉴라이트는 전통보수세력을 대신하여 새로운 논리적 근거와 철학을 가지고 출현한 집단이라기보다는 전통보수세력의 집권 기반이 흔들리는 조건에서 이를 새로운 차원에서 재구성해야 하는 정치적 필요에 의해 출현한 집단이다. 따라서 이들은 전통보수세력이 가지고 있던 반북관을 그대로 계승하면서도 이를 새로운 차원에서 재구성하였다. 예전에 비해 전반적인 사회분위기가 남북화해와 협력에 호의적인 조건에서 ‘새로움’을 주창하며 등장한 뉴라이트가 오히려 노골적인 반북적 색채를 가지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더구나 이들은 전향(386)했거나 북에서 망명한 사람(황장엽)이다. 따라서 누구보다도 자신들의 현재를 합리화해야 하는 처지에 있다. 이는 탈북자들이 자신들의 탈북을 합리화하기 위해 자신들의 처지를 과장해야 하는 이유와 동일한 것이다. 이로부터 시대의 추세와 부합하지 않는 극단적인 반북론이 새로움이라는 수사를 붙이고 재등장하고 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이들이 탈북자들과 달리 인텔리 또는 정치집단이라는 것이다. 탈북자들이라면 자신들의 과거 경험을 과장하면 그만이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뒷받침하는 논리와 철학이 필요했을 것이다.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자유주의이론이다. 전통 보수세력이 북을 민족공동체를 배반한 집단, 가령 ‘소련의 괴뢰’, 민족공동체를 위협하는 ‘전쟁광신자’로 규정하여 반북론을 세웠다면 뉴라이트는 북을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가장 극렬한 전체주의 집단으로 몰아감으로써 반북론을 새로운 차원에서 제기하고 있다.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뉴라이트들이 반북하는 논리는 부차적이다. 문제는 이들이 사라져 가는 반북 논리를 새로운 논리를 통해 재구성하고 궁극적으로는 이를 통해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세우려 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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