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 현대사연구소 월례발표회가 천리마작업반운동을 주제로 진행됐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북한 사회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 중 하나가 바로 천리마운동, 천리마작업반운동이지만 아직까지 우리의 이해 정도는 높지 않은 수준이다."

강호제 현대사연구소 상임연구원은 25일 '현대사연구소 제5회 월례발표회'에서 '1950, 60년대 북한의 기술혁신운동과 천리마작업반운동'이라는 주제로 발표하며 "1956년 시작된 천리마운동과 1959년 시작된 천리마작업반운동을 같은 것이라고 혼동하고 있을 정도"라며 이같이 말했다.

강호제 연구원은 "천리마운동이 아직 국가체제가 완전히 정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1956년 12월 전원회의에서 제기된 '저투자-고성장' 발전전략을 실행할 구체적인 방법을 찾기 위한 대중운동이었다면, 천리마작업반운동은 노동자들이 과학자, 기술자들과 협력하여 기술혁신을 이루어내고 이를 바탕으로 생산활동의 양적 팽창뿐만 아니라 질적 성장도 동시에 추구하기 위한 대중운동이었다"고 규정했다.

그는 천리마운동이 천리마작업반운동으로 넘어간 데 대해 "'현지연구사업'에 의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이하 과학원) 성원들의 현장 진출이 당시 생산현장의 상황을 변화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실험실이나 연구실에서 과학연구활동을 수행하던 과학원 성원들이 생산현장에 '현지 연구기지'를 세우고 과학연구활동과 기술지원활동을 동시에 수행했다는 것이다.

구체적 사례로 리승기의 비날론, 마형옥의 갈섬유, 려경구의 염화비닐 생산 공장 건설, 함흥식의 무연탄 가스화 성공, 주종명의 함철 콕스, 리재업의 합성고무 생산 성공, 전자계산기(컴퓨터) 조립성공 등을 당시에 거둔 의미가 큰 성과들로 꼽았다.

이같은 과학원 성원들의 현장 진출 배경에는 당시 중공업 우선론에 대한 불만, 중국과 소련의 국내 정치 간섭, 김일성 리더십에 대한 도전 등이 동시에 터져나와 '8월종파사건'으로까지 가시화됐고, 대외 원조 수입도 대폭 감소한 총체적 난관이 있었다.

따라서 정책 목표를 낮추고 계획을 수정했어야겠지만 김일성 주석 등 북한 지도부는 오히려 목표를 더욱 높게 잡았고 중공업 우선 노선을 계속 고수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결국 기술혁신을 통한 노동생산능률을 최대로 높여야만 했다.

▶강호제 연구원은 1959년부터 시작된 천리마작업반운동이 기술혁신에 의한 질적
성장을 가져왔다고 평가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강호제 연구원은 "1956년에는 노동인력을 최대한 확보하고 이직률을 최대한 낮추며 노동시간을 최대한으로 늘리는 등 노동의 양적 성장에 집중했다면, 1959년 이후에는 생산 설비의 성능을 높이고 작업 방법을 새롭게 바꾸고 생산자들의 기술수준을 높여 노동의 질적 성장에 더 집중하였다"고 주장하고 "당시 노동생산의 질적 성장을 위한 구체적인 목표치는 노동생산능률 향상, 원가절감, 제품의 질제고라는 항목으로 제시되었다"고 밝혔다..

천리마작업반운동은 기술혁신 분야에서 △생산 설비 자체를 더 효율적으로 개조하거나 새로 만드는 경우 △작업 방법을 더 효율적으로 바꾸는 경우 △생산 담당자들의 기술, 기능 수준을 높이는 경우 등 개별 작업반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진행되었다고 보고 이 과정에서 과학기술자들의 도움이 필수적이었다고 밝혔다.

노동자들은 오래 경험과 직접 작업을 담당하기 때문에 작업방법과 생산설비의 문제점을 개선할 수 있었고 과학기술자들은 구체적인 이론이나 지식이 풍부했기 때문에 서로의 장단점을 잘 융합시켜야 한다는 측면에서 과학기술자들과 노동자의 협력사업이 강조되었다는 것이다.

강호제 연구원은 "1998년에 또다시 '천리마대진군'을 선언한 것에 대해 일부 연구자들은 시대에 뛰떨어진 경제성장전략을 고수할 수밖에 없는 북한 사회의 경직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폄하하였다"며 "천리마운동, 천리마작업반운동은 노력동원에 의한 경제활동의 양적 성장뿐만 아니라 기술혁신을 통한 질적 성장도 동시에 추구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1999년 이후 북한이 '강성대국' 건설을 주창하며 과학기술을 3대 기둥의 하나로 내세운 사실과 2000년 '과학중시사상'을 부각시킨 것에 대해서도 1998년의 '제2의 천리마대진군 선언'과 연관지어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보근, 천리마운동은 사상성 강조한 '양적 성장'운동

그러나 지정토론자로 나선 김보근 한겨레통일문화재단 사무총장은 자신의 박사논문인 『북한 '천리마 노동과정' 연구 - '소련식 테일러주의'의 도입.변질 과정』을 토대로 상반된 견해를 제기했다.

▶김보근 사무총장(왼쪽)은 천리마운동이 주로 양적 성장에 치우쳤다고 비판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김보근 사무총장은 "천리마운동을 너무 높게 평가한 것 같다"며 "좋은 평가를 내리게 된다면 그 이후의 북한 경제의 침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라고 문제제기하며 "북한의 주장의 뒷모습과 외부적인 주장이 다를 수 있는데, 정치한 구분을 한다면 평가를 좋게 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고 반박했다.

그는 "북한이 잘 살 수 있으려면 원인 평가를 정확하게 해야 한다"며 "당시 높은 성장률을 질적 성장으로 평가하고 과학의 도움 때문이라고 결론지었는데,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 양적 성장일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천리마운동 시대를 다룬 많은 북측 소설들 중 하나에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불면불휴'이듯 "노동시간 투여가 늘어나 성장이 가능한, 기술진보도 있었지만 양적 성장이 위주였다"는 것이다.

특히 발표자가 강조한 천리마작업반운동에 대해서도 사상성을 작업장 밖에서 작업장 내까지 결합시킨 것이라며 "사상적 측면이 강했지 (천리마운동과) 과학기술 차이가 두드러지게 나타나지는 않았다"고 반박했다.

그는 "핵심구호를 보면 명확하다고 생각한다"며 "천리마운동은 '공칭능력'을 파괴했다"고 지적했다. 공칭능력은 과학적으로 규정한 능력인데도 조국사랑과 사회주의 헌신성 등을 통해 공칭능력을 뛰어넘으려 했다는 것이다.

김보근 사무총장은 실제로 공칭능력 파괴과정에서 성공사례 만이 아니라 실패 사례도 많았고, 무연탄으로 코크스를 만드는 사업은 지속적으로 시도됐지만 실제로는 효율적이지 못했다는 지적도 있다고 덧붙였다.

이같은 반박에 대해 강호제 연구원은 천리마작업반운동 당시 기술혁신이 있었는지가 관건이라며 '역설계 방식'으로 자동차와 포크레인, 대형 프레스, 정밀한 측정 게이지 등을 60년대 초에 만들어낸 사실들을 들었으며, 천리마운동작업반운동을 처음으로 발기한 직응원작업반의 결의문을 통해 볼 때도 이 운동은 사상운동에 중점을 두기보다는 기술혁신에 중점을 둔 운동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공칭능력 파괴운동은 "기술신비주의, 과학신비주의에 대한 비판이다"고 해석했다.

발표회 참가자들 사이에서는 북한의 경제가 초기에 빠른 성장을 구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쇠퇴하게 된 이유에 대해 건설과 국방 병행전략, 오일쇼크 등 외부적 요인도 감안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으며, 이후 대안의 사업체계, 3대혁명소조운동, 3대혁명 붉은기 쟁취운동 등도 시대적 상황을 반영해 나온 대중적 기술혁신운동이었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현대사 자료수집과 현대사 연구 심화, 현대사 대중화를 기치로 지난해 12월 창립한 현대사연구소(소장 정창현)는 제1회 학술토론회를 '김남식 선생의 생애와 연구활동'을 주제로 개최한 이래 매월 정기적인 학술발표회를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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