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나미 (한신대 강사)


《통일뉴스》는 최근 등장한 뉴라이트에 대해 자세히 조망하는 '<뉴라이트 기획Ⅰ> 뉴라이트 들여다보기'와 <뉴라이트 기획Ⅱ> 내가 본 뉴라이트', '<뉴라이트 기획Ⅲ> 현장취재, 뉴라이트'를 연속해서 싣는다.

아직 뉴라이트 스스로 자기 정립이 덜 되었고, 이 분야에 대한 선행 연구나 취재가 많지 않아 미흡한 점도 없지 않겠지만 현 시점에서 가능한 한도에서 총정리한다는 입장에서 아래와 같이 첫 번째 기획 연재를 먼저 시작한다.

<뉴라이트 기획Ⅰ> 뉴라이트 들여다보기

1. 뉴라이트, 어떻게 볼 것인가?(김치관, 통일뉴스 편집국장)
2. 뉴라이트 등장의 사회역사적 배경(임영태, 통일뉴스 전문기자)
3. 뉴라이트, 그들은 누구인가?(김치관, 통일뉴스 편집국장)
4. 확장일로의 뉴라이트 조직(김치관, 통일뉴스 편집국장)
5. 자유주의의 본질과 역사(이나미, 한신대 강사)
6. 박세일의 공동체자유주의(민경우 통일뉴스 전문기자)
7. 역사바로세우기와 반북(민경우 통일뉴스 전문기자)
8. 아직도 냉전중인 조중동(양문석, EBS 정책위원)
9. 뉴라이트, 인터넷 전쟁중(이창은, 대자보 편집장)
10. 2007년 대선과 뉴라이트(한선범, FTA공대위 조사팀원)



자유주의의 전제가 갖는 문제

자유주의의 기본적 내용으로 여겨지는 생명권, 재산권, 자유권은 서구 사회계약론자들이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들 중 홉스는 자연상태에서 인간은 서로를 두려워하며 언제 죽임을 당할지 모르는 극단의 공포 속에서 살게 된다고 전제한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려고 하며 이것이 자연적인 인간의 권리라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마치 청소년들에게 무기를 주고 섬에 풀어놓아 서로를 죽이게 하는 것이 주요 스토리인 잔인한 일본 영화 ‘배틀 로얄’을 연상케 한다. 이러한 자연상태는, 정전사태로 인해 암흑상태가 되버린 도시, 강대국이 무소불위의 힘을 마음대로 휘두르는 국제사회를 생각하면, 논리적 가정일 뿐 아니라 실제로도 얼마든지 존재하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상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을 넘어 마치 이 상태가 절대적으로 지속될 것이며 더 나아가 바람직하다고까지 여기는 것이다. 이런 홉스의 무시무시한 논리를 신봉하고 있는 사람 중 하나가 오늘날 미국의 패권주의를 지지하는 네오콘의 철학적 기반을 마련한 레오 스트라우스이다.

이러한 적자생존의 논리에 규범, 도덕, 약자 보호의 사상이 있을 수 없다. 인간은 자동적으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모든 도덕과 규범은 사실상 인간의 자기보존 본능과 이기주의를 미화하기 위한 것이며, 실제 ‘사회’란 존재하지도 않는 것이다.

따라서 신자유주의자인 하이에크는 존재하지도 않는 사회의 이름으로 특정 개인의 논리를 옹호하지 말라고 하였다. 존재하는 것은 개인들과 그 개인들의 이익뿐인 것이다. 모든 개인은 자신의 이익을 최대화하기 위해 노력하며 이것이 자연스런 질서를 가져온다.

이러한 질서는 또 다른 사회계약론자인 로크의 자연상태에서 설명되고 있다. 나름대로 이성적인 인간들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며 살아가며 이러한 인간의 자유와 이익은 절대적으로 보호되어야 하는 것이다. 어떤 국가나 사회도 이런 인간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만 정당화될 수 있다. 즉 최소국가론인 것이다.

홉스의 자연상태는 흡사 맹수들이 우굴대는 상태라고 한다면 로크의 자연상태는 얼룩말들이 뛰노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연상태건 사회상태건 그 실제의 모습은 맹수와 얼룩말과 여우, 코끼리 등 다양한 존재들이 서로 다른 힘의 양을 가지고 존재하는 상태이다. 이런 상태에서 모두 반드시 절대적으로 자유로워야 한다고 했을 때 ‘자유’ 그 자체가 갖는 본질적인 보수성이 드러난다 하겠다.

강자와 약자가 공존하는 사회에서 절대적 자유를 바랄 자는 누구인가. 또는 어떤 규칙을 만들어 어느 정도까지는 자유를 허용하고 어느 정도는 제한을 두는 것을 원할 자는 누구인가. 얼룩말들이 낮에는 맹수들이 사냥을 하지 않는다는 규칙을 알았을 때 그때만 자유로움을 느낄 것이다. 감시카메라가 있는 지역에서 부녀자들이 보다 안전하다고 느끼는 것은 이런 이치에서이다. 강자의 자유는 방치되어야 확보되고, 약자의 자유는 보호되어야 확보되는 것이다.

복지국가는 맹수에게 일정 제한을 가하는 것이라면 신자유주의는 얼룩말을 묶어놓는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갖는 치명적인 결함은 그 이름과 달리 모든 이의 자유를 인정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이 자유와 이익을 추구하는 가운데 형성되는 자연적 질서를 옹호한다면 왜 약자들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자연적으로 만드는 각종 단결을 못하게 하는가.

하나라도 덜 먹히기 위해 초식동물들이 뭉치는 것과 같은 이유로 단결 밖에 무기가 없는 노동자들이 뭉치는 것은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런데 왜 자유주의자들은 노조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려 할 때 자신들이 가장 혐오하는 규범적 비판을 하며 또한 가장 아끼는 ‘이기주의’라는 이름으로 그들을 비난하는가.

자유주의자들의 또 다른 큰 문제는 인간과 자연을 모독한다는 것이다. 자유주의가 전제하는 인간상은 하등생물을 모델로 하고 있다. 주로 개미와 벌이 자주 인간에 비유되는데 이들은 사회전체가 어떻다 또는 어떠해야 한다는 구상을 절대 하지 않으며 각자 개별적 본능에만 충실하다는 것이다. 그 결과 놀라운 개미집과 벌집을 만들게 되며 질서잡힌 사회를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감히 전체 사회가 이러해야 한다는 거대한 사회공학적 정책을 제시하려고 하는 개혁적 정부, 사회주의는 자연적 질서에 합당하지 않으며 이 질서를 해치기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시선을 조금만 위로 향하여 고등동물만 보아도 이들은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인간들만 행한다고 알려진 도덕적 행위도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크로토프킨은 자연상태의 생물이 상호 투쟁하면서 적자생존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는 투쟁과 적대보다 오히려 상호 협조하는 측면을 더 많이 찾아볼 수 있다고 하였다. 또한 어떤 동물은 의리를 위해 자신의 이익과 관계없거나 더 나아가 이익에 반하는 행위도 한다.

즉 자연에는 이익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도덕도 있다. 최근 자연과학에서는 인간의 ‘양심’이 학습된 것이 아니라 본능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는 것을 밝힌 바 있다. 또 다른 사회계약론자인 루소는 자본주의의 부패를 비판했으며, 양심이 이기심과 같은 본능처럼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임을 강조한 사상가이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자유주의가 개인의 자유와 이익을 중시하므로, 자유주의적 자유의 주된 내용은 개인적인 것이며 경제적인 것이다. 따라서 정치적 자유는 자유주의자들의 주된 관심사가 아니다. 때로 이들이 정치적 자유를 주장하는 이유는 이들의 재산권이 위협받을 때이다.

자유주의가 등장하게 된 계기 자체가 유산자 계급이 자신의 재산권을 법적, 정치적으로 보장받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을 대변한 로크는 전쟁으로 목숨은 빼앗을 수 있어도 재산은 빼앗을 수 없다 하여 사유재산의 신성함을 강조했다. 로크의 사상은 신자유주의자인 노직의 이론과 미국 자유민주주의가 출발하는 기초가 되고 있다. 신자유주의가 등장한 이유 역시 복지국가의 많은 세금 징수가 문제였던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자유주의, 신자유주의를 표방하는 사람들 역시 많은 세금, 사유재산 침해를 가장 문제시하고 있다. 이들은 정치적 자유가 억압당했던 시절에 모두 침묵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우리 사회에서 최근 자유주의가 주장된 것은 정부의 개혁조치와 더불어 기득권 세력의 재산권이 침해될 수 있는 것과 관계있다. 이들의 중요한 정치적 이슈인 반북·반공은 그 자체로 중요하다기 보다는 남북한 화해와 더불어 더 나아가 통일이 되었을 때 통일한국의 이념은 절대로 사회주의와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위기의식과 관계가 있다.

대다수 보수 단체가 남북정상회담 후에 만들어졌다는 것이 그 증거이다. 이들에게 있어 남북한은 영원히 통일이 되지 않던지 또는 북한붕괴를 통한 남한주도의 흡수통일이 가장 바람직한 것이다. 그들의 우려는 만일 남북한 통일이 해방 후 좌우합작의 노력처럼 중간적 체제를 지향하게 된다면 그들의 사적 재산권이 지금처럼 신성시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 그다지 절박하지도 실질적이지도 않은 뜬구름 잡는 추상적인 자유주의 이념 논쟁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경제생활만이 가장 중요한 것이므로 이를 침해하지 않는다면 독재정권이건 왕권이건 크게 상관하지 않는다. 홉스의 원자적 개인주의는 절대 권력을 탄생시켰고 유산자 계급은 파시즘정권을 도왔다. 현재 한국의 자유주의자들이 박정희를 숭배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박정희의 독재가 재벌을 성장시키고 보호했던 것이다.

자유주의가 말하는 최소국가는 실제로 국가가 자본의 흐름에 간섭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흐름을 돕는 역할을 한다. 예를 들면 투자가 더 많이 이루어지도록 한다던지 노조를 억압한다던지 민주적 제도를 폐지하는 것 등이다. 실제로 영국의 대처는 집권하자마자 이러한 조치를 취하였고 이전보다 더 강한 경찰력과 교도소 신설에 많은 예산이 쓰여졌다.

현재 자유민주주의보다 자유주의가 더 강조되고 있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의미있는 현상으로, 예견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젠 ‘자유민주주의’에서 장식용으로 있던 ‘민주주의’를 버릴 때가 된 것이다. 사실상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본래 어울리기 어려운 이념이다. 동서양 역사를 통틀어 볼 때 민주주의는 체제 간 경쟁에서 통치자가 더 많은 민을 확보하여야 할 때 생겨났다. 즉 통치자가 자신이 민을 위한다고 주장하는 것만이 살길이라고 여겨질 때 민주주의가 작동된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민주주의의 황금기라 불린 페리클레스의 시대에 페리클레스가 민주주의를 주장한 이유는 경쟁자인 키몬이 많은 재산을 가지고 지지자를 모을 수 있었기 때문에 자신은 민주주의에 대한 지지를 내세워 지지자를 모아야 했기 때문이다. 동양의 애민 사상은 춘추전국시대에 등장했는데 그때는 여러 군주가 난립하여 서로 전쟁을 일삼던 시대로, 각 군주는 얼마나 많은 병사를 확보할 수 있는 가로 승리를 점쳤다. 그 병사는 바로 민에서 나오는 것이었고 그래서 천하를 얻으려면 민심을 얻어야 한다는 말이 나오게 된 것이다.

서구에서 자유주의자들이 자유민주주의를 부르짖은 이유는 사회주의자들과의 경쟁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제 사회주의라는 경쟁자는 사라졌고 따라서 이제 더 이상 민주주의를 얘기할 이유는 없어졌다. 더 많은 다수의 복지를 의미하는 민주주의는 이젠 자유주의자들에게 거치적거리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젠 자유민주주의가 아닌 자유주의가 주장되는 것이다.

이렇듯 자유주의의 이념의 등장은 신자유주의적 질서의 독주와 더불어 등장한 것이다. 그런데 신자유주의는 복지를 버리자고 주장하면서 등장한 것이므로 어쩐지 냉정한 느낌이 든다. 그래서 그 누구도 자신을 신자유주의자라고 자처하지 않는다. 신자유주의 대신 자유주의를 주장하는 것을 그것이 더 인간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자유주의는 비록 일부 유산자 계급의 해방만을 추구했다 하더라도 어쨌든 봉건적 질곡을 뚫고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자유주의는 등장하자마나 아동노동을 비롯한 비인간적 노동착취를 일삼았고 제국주의 전쟁으로 치달았다. 오늘날 자유주의자 역시 비정규직 등 현대판 노예노동을 ‘노동의 유연성’이란 이름으로 미화하고, ‘국가경쟁력 강화’란 이름으로 현대판 제국주의 전쟁을 정당화하고 있다.

자유주의 연대를 비롯하여 우리사회의 보수단체는 자유주의 이념을 내세우고 있다. 자유민주주의를 주장한다고는 하나 민주주의가 만병통치가 아님을 강조하면서 자유주의가 제대로 실현되어야 정상적인 자유민주주의를 이룰 수 있다고 하여 민주주의보다는 자유주의를 강조하고 있다. 기득권집단의 민주주의 폄하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공통된 것이다.

서양역사에서 민주주의는 가난한 다수자의 지배를 의미하며 이 ‘가난한 다수’는 서구 정치사상사의 출발부터 현재까지 우려의 대상이 되고 있다. 사회계약론자들이 구상한 ‘계약을 통한 국가’라는 것은 민주주의를 이상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대의정체, 공화국이 목표였다.

프랑스 혁명 당시 가장 과격한 사람도 공화제를 주장했지 민주주의란 용어는 사용하지 않았다. 즉 민주주의와 대의정체, 공화국은 서로 다른 것이다. 최근까지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전체주의로 나아갈 위험이 있는 제도로 인식하고 있다. 즉 민주주의는 통치자가 기존의 법과 제도를 뒤엎고자 할 때 국민을 선동해서 그들의 힘을 이용하여 기존체제를 바꾸기 위한 위협적인 이념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볼 때 현재 포퓰리즘에 대한 우려와 비판은 바로 민주주의에 대한 우려와 비판임을 알 수 있다.

하이에크는 민주주의는 법치를 위협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민주주의는 ‘독재적’ 이 될 수도 있다. 만일 의회 내에서, 사회의 압도적 다수를 대표하는 사람들이 다수가 된다면 모든 법안을 일사천리로 통과시킬 것이고 그들을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은 의회 내에도 의회 밖에도 없다.(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독재적’이라 하지 않고 ‘혁명적’이라고 부른다.) 우리의 국회와 다른 나라의 의회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여러 견제를 받는 것은 바로 의회가 사회 내의 다수가 아닌 소수를 대표하고 있기 때문이다.

존 스튜어트 밀을 비롯한 많은 자유주의자들이 사회 내의 다수자가 대표가 되지 않도록 노력하고, 여러 가지 대의적 장치를 마련한 것은 이를 막기 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즉 대의제는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것이 아닌 이를 제한하여 위험하지 않은 방향으로 조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실제 선거제도는 여러 가지 방식을 통해 민의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도록 기능한다. 그러한 ‘정신’은 미국의 연방제에도 잘 나타난다. 미국이 여러 주로 나뉜 것은 저항세력이나 빈민들의 과도한 영향력이 한 주를 넘어서 다른 주로 퍼지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의 효과는 대통령 선거의 표 계산 방식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양원제, 간접선거와 삼권분립 역시 마찬가지 이유에서 제시되었다. 즉 과도한 한 인물, 또는 한 세력이 많은 인민의 지지를 업고 등장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한 세력이 정치사회에 등장할 유일한 가능성은 의회 그중에서도 하원을 통해서인데 하원은 상원에 의해, 다음엔 관료에 의해, 또 사법부에 의해 이중 삼중 사중으로 견제를 받아 결국 실현될 수 없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우리사회의 보수집단이 주장하는 양원제가 어떤 의미인가 하는 것은 자명하다.

자유주의와 귀족주의

보수주의자들이 자유주의를 표방하기 시작한 것은 보수주의의 귀족주의 주장이 시대의 변화와 더불어 지속되기 어렵게 되었기 때문이다. 즉 리더십을 수행할 집단으로 귀족에서 능력과 업적을 갖춘 개인으로 넘어가게 된 것이다. 하버는 이 점을 보수주의 정치사상에 있어 한 중요한 변화로 본다. 또한 비레크는 보수주의가 이데올로기화되고 논리와 자기의식을 갖게 되면 자유주의적 합리주의와 비슷해진다고 하였다.

대체로 많은 현대의 보수주의자들의 특징이 자유주의적이라고 하는 것이며 이들은 공통적으로 과거의 보수주의를 자유주의적으로 해석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이들은 20세기의 개혁적 자유주의에 반대하여 사유재산과 자유시장경제를 주장하는 18세기 및 19세기 자유주의 신념을 옹호하며 사기업가의 창의력과 자본주의 사회의 자유를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귀족주의는 사라진 것이 아니다. 미국의 보수주의자 존 애덤즈는 “귀족은 왕이나 민중으로부터 자유를 지키기 위해 필요한 요소”라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귀족은 “특별히 한 사람의 세습적 귀족이나 누군가 특별히 한정된 사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 속의 자연스럽고 현실적인 귀족사회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것은 자연이 만든 것이요, 우리가 폐지할 수 없는” 것이다.

귀족주의를 주장하는 이유는 불평등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즉 귀족사회는 사람들 간의 불평등을 당연시하는 사람들의 머리 속에, 그리고 현실적으로도 존재한다. 우리 정치계에서 ‘사회의 주류,’ ‘명문학교를 나온 좋은 가문 출신’을 강조하고, 특정 계급 내의 인맥, 혼맥, 학맥과 ‘서민 대 귀족’의 구도가 전재한다면 우리 사회에도 역시 귀족사회가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한 사회 내에서 품위, 온정주의, 노블리스 오블리제, 자선 등의 용어가 범람한다면 그 사회 역시 귀족주의 사회이다. 이러한 사회는 못 가진 자 또는 정당하게 받아야 할 것을 받지 못한 자가 당당히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구걸하게 하는 사회이다.

노동조합이 탄탄하게 서있고 각종 복지 혜택이 있다면 노동자나 하층민이 구걸할 이유가 없다. 그들은 자신의 권리로서 혜택을 ‘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수주의에 온정주의가 같이 따라가는 이유는 보수주의가 ‘따뜻’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빌어야지만 주겠다고 하는 귀족주의적 심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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