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어혼란전술

어릴 적 반공교육을 받으면서 북한은 `용어혼란전술`이라는 것을 사용한다고 배웠다. 북한이 말하는 `평화`의 진짜 뜻은 `전쟁`이고, `통일`이라는 말도 `적화`를 숨기기 위한 방편에 불과하다고 교육받았다. 그래서 어린 나는 좋은 말에는 으레 반대되는 뜻이 숨어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사회에 대해 눈을 조금씩 뜨면서 이런 용어혼란전술은 우리 사회 곳곳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학 초기에 어떤 철학도는 내게 서양의 철학자가 말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라는 말로 시작한 그 친구는 `생각`한다는 말을 `의심`한다는 말로 바꾸어 해석해야 한다고 했다. 이 말을 듣고 나는 엄청난 지적 충격을 받았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해석을 달리 해놓은 것이 틀림없었다.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과 글에는 나름의 철학과 의미가 숨어있다. 이것은 오랜 교육과 경험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고,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회를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런데 원래 말과 글의 상징을 왜곡하고 혼란스럽게 만드는 행위는 사람들을 바보로 만들어 이익을 얻기 위함이다.

그런데 우리 사람들은 그리 우매하지 않다.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 대부분이고, 지연, 학연, 혈연 따위의 모임을 통해 수많은 정보를 교환하고 있다. 박정희의 `잘살아 보세`라는 노래가 힘있고 잘난 사람들만의 노래이고, `정의사회구현`이 결국 가진 자의 정의를 실현하고, `보통사람`이 일반 서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다. `의리`하면 조직폭력배에게 어울리는 말이라고 생각하지만, 아무리 의리를 잘 지켜도 `안중근 의사(義士)`라는 명칭처럼 `불사파 의사(義士)`라고 부르지 않는다. 물론 이것은 나만 알고 있는 특별한 지식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다. 선거철에 `국민의 머슴으로 살겠다`라는 후보자의 말을 곧이 듣는 바보 국민이 있는가? 정치인이나 돈 많은 사람들이 `법대로 하자`는 말은 헌법을 준수하자는 뜻으로 해석해야 하는데, 이렇게 이해하는 사람은 바보 취급받는다. 다시 말해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지 않는다.
이렇게 사람들이 똑똑하고 본질을 잘 꿰뚫고 있는데 여전히 사람들을 속이는 말은 없어지지 않는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지금도 정치판에는 수많은 단어와 말이 홍수같이 쏟아진다. `민족`, `통일`, `민주주의`, `언론탄압`, `경제회생`, `안보`, `사랑`, `희망`... 하지만 너무 많이 속아온 사람들은 원래의 뜻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더욱 문제는 반대의 의미가 숨어있다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대와 극단으로 길들여진 탓이다. 결국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이렇게되면 사람들은 판단능력을 상실하고 본능적이면서 감각적으로 행동한다. 돈과 권력이 판을 치는 약육강식의 사회가 만들어진다. 용어혼란전술이 성공하는 지점이다.

어떤 지식인은 이를 두고 `정치불신`이 극에 달했다고 개탄하면서 반성을 촉구하지만 별로 좋아질 기미는 없다. 시민의 의식을 바꾸고 사회를 좋게 만들고자 노력하는 시민단체들이 고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오랫동안 키워온 병을 단번에 고치기는 어렵다.
하지만 여전히 꿈꾸는 자들이 있다. 희망을 버리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혹시 오늘 저녁 친구들과 술자리를 가진다면 이런 사람들을 위해 잔을 들어보자. `건배`.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출근길/김종/유화/147*87/1992

이번 작품은 93년 코리아통일미술전에 출품된 `출근길`이라는 제목의 그림이다. `김종`이라는 북한화가에 의해 유화로 그려졌다.
이 작품은 북한 인민들이 출근하는 버스 안의 모습을 담은 것이다. 계절은 겨울이고, 사람들은 두터운 옷을 입고 있다. 독서를 하는 여성이 있고, 신문기사를 보고 밝게 이야기하는 군상이 보인다. 오른쪽에는 어린 아기를 안은 부부의 웃음이 있다. 왼쪽을 보면 차창 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청년의 모습도 있는데, 이 모든 장치는 작가의 의도에 의해 충실하게 배치되고 연출되었을 것이다.

작품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물론 이 두 개의 요소는 유기적으로 결합하고 있다. 하나의 요소는 출근버스와 바깥쪽에 써있는 `인민을 위해 복무함`이란 구호이다. 90년대는 북한이 물난리 같은 내부문제와 소련의 붕괴와 미국의 압박 같은 외부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시기이다. 이런 분위기를 창밖에 흩날리는 눈발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인민을 위해 복무하는 사람은 단순하게 생각해서 북한의 노동당과 당원이다. 출근 버스가 소재로 등장한 것은 어려움이 있더라도 전진할 것이라는 암시이다. 결국 이 출근 버스는 북한의 노동당을 상징하고 구호는 내용이 된다.

두 번째는 버스 안의 사람들이다. 출근 버스가 노동당이면 그 안의 사람들은 당연히 북한의 인민들이다. 작품은 인민들이 어떤 모습과 내용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일단은 미래에 대한 낙관성을 가지는 것이다. 따라서 작가는 화면의 전체 분위기를 바깥 풍경에 비해 밝고 힘차게 표현하고 있다. 둘째는 노동당의 지침을 잘 따라야 한다. 신문을 보고 이야기하는 모습이 주형상으로 배치되어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론 신문은 `노동신문`일 것이다. 셋째는 공부하고 고민하는 청년의 미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넷째는 아기와 부부의 모습처럼 가정의 화목을 강조한다. 정리를 하면 노동당은 인민을 위하고, 인민은 노동당의 지침과 낙관성으로 무장하여 행복한 나라로 전진하자는 내용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북한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 것이 아니라 희망과 미래를 표현한 것이다. 이런 작품경향을 일반 사실주의와 다르게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라고 부른다.

나는 사람들이 구질구질한 현실 속에서 그나마 살기를 포기하지 않는 이유가 있다고 본다. 그것은 존재의 본성이 아닐까. 사람은 본성적으로 발전과 성숙을 지향한다. 사람들이 모여있는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이 이러한 본성을 놓지 않는 한 더디고 어렵더라도 사회는 발전할 것이다. 내가 술 때문에 쓰린 가슴을 안고 새벽부터 이 글을 쓰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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