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미국을 압박하고 있다. 북한의 대미압박은 두가지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하나는 강한(hard) 압박이고 다른 하나는 연한(soft) 압박이다. 1990년대 중반 북한붕괴론이 한창 대두될 때 미국의 대북정책이었던 경착륙(hard landing)과 연착륙(soft landing)을 연상시킨다. 과연 그런가.

이미 알고 있듯이 지난 3월초 김대중 대통령의 방미와 한미정상회담 이후 북미관계는 급작스레 경색되었다. 북한은 가만히 있었는데, 부시 행정부가 김 대통령을 향해 노골적이고 돌출적으로 대북강경책을 던진 것이다. 그것도 북한을 향해 직접 던진 것이 아니라 남한을 통해, 게다가 단순히 북한만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남한으로 하여금 대북관점과 대북관계를 근본적으로 뜯어고치라는 것이다. 미국이 대북강경책만이 아니라 대남강경책도 쓰고 있는 것이다.

자존심 강한 북한이 가만 있을리 없다. 북한은 `미제는 북과 남이 이전처럼 서로 반목, 질시하고 대결하게 함으로써 민족 자주통일의 궤도에서 탈선시켜 보려 하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북한은 한미정상회담 이후 지금까지 언론매체를 통해 연일 대미비난을 하고 있다. 그 요지는 `대화에는 대화로 전쟁에는 전쟁으로`이다. 하지만 많은 전문가들이 말하듯 북한은 한반도문제를 풀기 위해 미국과 대화를 원한다. 대화를 거부하는 미국을 향해 북한은 대화 재개를 위한 압박용 두 개의 `준비된` 카드를 꺼냈다.

하나는 강한 압박용 카드로서, 오랜 우호국가인 중국 및 러시아와 전통적 관계를 복원하겠다는 것이다. 올해 신년초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전격적인 비공식 중국 방문은 강성인 부시 행정부 출범에 따른 힘의 시위였다고 볼 수 있다. 또한 3월 20일부터 닷새간 장쩌민 국가주석의 최측근이자 후계자중의 한명으로 거명되고 있는 쩡칭홍(曾慶紅) 중국공산당 조직부장이 평양을 방문한 바 있다. 올해 말 장쩌민 주석의 북한 방문도 예정되어 있다. 양국이 빈번히 상호방문한다는 것은 그럴만한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4월 17, 18일로 예상(예정이 아니라)되어 있던 김 위원장의 러시아 방문은 일단 순연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방러 카드를 서둘러 쓰고 싶지 않을 것이다. 러시아에 대해서가 아니라 미국에 대해서이다. 물론 김 위원장의 방러를 원하는 쪽은 북한이 아니라 푸틴 대통령이다. 푸틴의 야심적인 사업 한반도종단철도(TKR)와 시베리아횡단철도(TSR)의 연계작업 때문만은 아니다.

지난해 7월 방북후 푸틴의 `북한 인공위성 대리 로켓발사` 발표는 그의 주가를 세상에 한껏 올렸다. 러시아로서는 북한의 인공위성 대리발사 문제는 미국의 NMD(국가미사일방어) 체제구축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사안이다. 김 위원장이 러시아를 방문한다면 푸틴은 이 문제에 대한 확실한 추가 언질을 받아야할 필요가 있다.

김 위원장의 방러 연기의 공백을 메꾸려는 듯, 아니면 인공위성 대리발사의 후속언질을 극대화하려는 듯 북한 김일철 무력부장이 러시아를 방문, 4월 27일 북-러간 `2001년 군사협력 협정`을 체결했다. 이바노프 러시아 국방장관은 군사협력협정을 체결한뒤, 북-러 두 나라간의 역사적인 우호관계를  강조하면서, "두 나라간 대화는 질적으로 새로운 선린관계를 기반으로 이뤄지고 있다"고 과시했다.

북한이 중국, 러시아와 만나서 무엇을 꾸밀까? 단순히 경제원조, 경제협력 수준일까? 과거 사회주의 종주국이었던 러시아와 21세기 중반안에 `특색있는` 사회주의로 미국을 추월하겠다는 중국, 그리고 `우리식` 사회주의를 뽐내는 북한 등 세나라가 경제적인 면만을 수수(授受)할까?

부시의 등장은 이들 세 나라와 운명적으로 대척(對蹠)되는 것 같다. 최근 미군 정찰기 불시착문제로 불거진 미중갈등은 그 시초일지 모른다. 또한 미국의 NMD 강행은 미-러간 ABM 조약 존속여부를 놓고 러시아에게 시련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 세 나라는 분명 미국과 관계있는 일을 작당할 것이다. 반미전선이다. 북-중-러의 반미전선의 주요 고리는 반NMD전선이 될 것이다. 북한이 중국과 러시아를 부추켜 부시 행정부의 세계지배전략인 NMD 체계구축에 정면으로 반하는 전선을 친다면, 이는 미국으로서도 최악의 시나리오가 될 것이다.

북한이 미국과의 대화재개를 위한 또하나의 카드는 부드러운 압박이다. 작년 초부터 북한은 서방세계를 향해 전방위외교를 펼쳐왔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부시의 돌변에 때맞춰 그 결실이, 특히 EU(유럽연합)와의 관계에서 맺어지고 있다. 북한은 EU 15개국중 프랑스와 아일랜드를 제외한 13개국과 외교관계를 설정했고, EU집행위가 EU와 북한간 외교관계 수립을 제의했으며, 또한 페르손 스웨덴 총리가 EU 의장국 대표자격으로 5월 2일부터 4일까지 남북한을 연쇄 방문할 예정이다.

페르손 총리의 방북은 그 의미가 크다. 페르손이 제시한 방북조건은 남북한 정상회담 공동선언 이행,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답방 노력, 북한-EU 대화, 미사일, 인권, 인도주의적 지원, 북한경제개혁 등으로 알려져 있다. 모두가 미국이 원하기도 하고 껄끄러워 하기도 하는 문제들이다. 미국이 나서야 할 문제를 EU가 대신 하는 격이다. EU가 한반도문제에 적극 개입한다는 것은 그만큼 미국의 입지가 좁아지는 것을 뜻한다. 미국으로서는 부드럽게 난처해지고 부드럽게 압박받는 것이다.

북한은 외부인을 받아들일 때 엄격하게 제한한다. 사소할지 모르지만 북한은 페르손 스웨덴 총리 등 EU 고위대표단의 방북시 75명의 취재진 입북을 허용키로 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75명의 취재진은 지난해 10월 올브라이트 당시 미 국무장관의 북한 방문때의 서방 취재진 44명보다 많은 것으로서, 이는 미국으로서도 이른바 스타일 구기는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즉 북한은 올브라이트의 방북보다 페르손의 방북을 더 크고 의미있게 받아들이겠다는 메시지이다.

이쯤되면 북한의 대미위협론은 미국이 주장하듯 북한의 미사일이 아니라 중러, EU를 통한 압박카드라 아니할 수 없다. 북한이 김정일 위원장의 방러를 연기한 이유는 페르손 총리의 방북을 통한 부드러운 카드를 먼저 쓰고 그것이 여의치 않을 경우 방러라는 강한 카드를 쓰겠다는 속셈으로 보여진다.

이제 공은 미국쪽으로 넘어가고 있다. 북한의 강온 압박카드에 미국이 답할 차례다. 부시 행정부는 대북강경책을 쓸 것인가, 대화재개에 나설 것인가? 판단할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 부시 행정부를 괴롭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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