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 마당, 치숙(痴叔)인가 치질(痴姪)인가?

우리는 지난 번에 현실을 바라보는 것도 사람의 시각에 따라서 굉장히 차이가 날 수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지난 역사를 보는 시각도 마찬가지로 천차만별일 수 있다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런 차이가 나는 까닭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이해 관계에 차이가 나기 때문입니다.

지난 6월 15일 남북정상회담 때 대다수 사람들은 기쁜 마음으로 정상회담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극히 일부분이지만 정상회담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북한을 이롭게 하고, 결과적으로 대한민국을 해롭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남북의 대결 상황이 지속되고, 북한에 대한 적개심이 국민 속에 자리잡고 있어야 그것을 이용해서 자신이 이득을 누릴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결 상황이 완화되면서 남북이 화해의 분위기로 가게 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할 정상회담이 반갑지 않은 것입니다.

과거를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도 이해 관계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일제 시대를 좋게 말하는 사람들은 일제의 지배 때문에 이득을 누린 친일파이거나 그들의 후손입니다. 그러므로 일제 시대에 친일파였던 사람, 혹은 그들의 후손인 사람으로서 일제 지배로 이득을 얻은 사람들은 어떤 이유로든 신뢰해서는 안됩니다.

물론 자기 혹은 자기 조상의 과거를 진심으로 뉘우치고 과거와는 다른 행동을 보여 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일제 시대를 미화해서 말하곤 합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자기의 이해 관계에 따른 견해를 갖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의 이해와 다른 견해를 갖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태평천하`의 주인공 윤직원은 일제의 통치 때문에 이득을 얻는 사람이기 때문에 당연히 일제 시대를 태평천하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일본 유학생 이인화는 일제 통치가 자기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주기도 하지만, 거꾸로 그 가운데 이득도 얻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는 일제가 지배하는 당시 상황이 공동 묘지처럼 느껴집니다. 그것은 그가 자기의 이해 관계보다 좀더 크게 민족의 이해 관계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자기의 이해 관계보다 큰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와는 정반대로 자기가 직접적으로 피해를 보면서도 그것조차 깨닫지 못하고 남의 말에 따라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우리가 배우는 소설 속에서 한번 더 찾아 볼까요?


"내 이상과 계획은 이렇거든요.
우리집 다이쇼[주인]가 나를 자별히 귀여워하고 신용을 하니깐 인제 한 십년만 더 있으면 한 밑천 들여서 따루 장사를 시켜줄 눈치거든요.
그러거들랑 그것을 언덕삼아가지고 나는 삼십 년 동안 예순 살 환갑까지만 장사를 해서 꼭 십 만원을 모을 작정이지요. 십만 원이면 죄선 부자로 쳐도 천석꾼이니 머, 떵떵거리고 살게 아니라구요.

그리고 우리 다이쇼[주인]도 한 말이 있고 하니까 나는 내지인 규수한테로 장가를 들래요. 다이쇼가 다아 알어서 얌전한 자리를 골라 중매까지 서 준다고 그랬어요.

내지[일본] 여자가 참 좋지요. 나는 죄선 여자는 거저 주어도 싫어요. ...... 그리고 내지 여자한테 장가만 드는 게 아니라 성명도 내지인 성명으로 갈고, 집도 내지인 집에서 살고, 옷도 내지 옷을 입고 밥도 내지식으로 먹고, 아이들도 내지인 이름을 지어서 내지인 학교에 보내고...... 내지인 학교래야 죄선학교는 너절해서 아이들 버려 놓기나 꼭 알맞지요.

그리고 나도 죄선말은 싹 걷어치우고 국어[일본어]만 쓰고요. 이렇게 다아 생활법식부텀도 내지인처럼 해야만 돈도 내지인처럼 잘 모으게 되거든요."


윗글은 채만식이 쓴 `치숙`의 한 부분입니다.

서술자는 사회주의자인 오촌 고모부를 비판하면서 자기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일본 사람처럼 살아서 돈을 벌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봤자 일본 사람 밑에서 고생만 실컷 하게 되어 있다는 것을 그는 모르는 것입니다.

지난 번에 보았던 윤직원 영감이나 이중생, 이인국 같은 사람들은 `나쁜` 사람이지만, `치숙`의 화자와 같은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사실 이 소설의 작가는 어리석은 아저씨 즉 `치숙(痴叔)`을 말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조카 즉 치질(痴姪)을 말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말기를 독자에게 당부하고 싶었던 것이겠지요.

우리는 물론 `나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서도 안 되겠지요. `나쁜 사람`이 되는 것도 죄악이지만, `어리석은 사람`이 되는 것도 적지 않은 죄악입니다. 왜냐하면 `나쁜 사람`들은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 현실을 바라보는 올바른 눈을 가져야 합니다. 현실을 바라보는 올바른 눈은 과거를 바라보는 올바른 눈 속에서 형성됩니다. 왜냐하면 현실은 과거의 어깨를 딛고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과거를 바라보는 올바른 눈, 그것이 바로 올바른 역사관이고, 올바른 역사 의식입니다. 그것을 갖기 위해 우리는 역사를 공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무엇이 올바른 역사관이고, 올바른 역사 의식인지 다음 번부터 살펴보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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