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봉 (pbpm@wonkwang.ac.kr, 원광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매주 월요일 이재봉 교수의 방북기를 연재한다. 이재봉 교수는 지난 10월 중순 ‘아리랑’ 공연을 비롯해 이제까지 북녘을 세 번 방문했다.
이 교수는 방북기를 쓰는 목적에 대해 “소박하게나마 통일 운동에 발을 담그고 있는 사람으로서 북녘의 실상을 나름대로 잘 알려보자는 데 있다”면서 “북녘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나 모습 또는 그들과의 대화를 소개하는 데 초점을 맞출 것”이라고 의지를 밝혔다.
한반도 및 세계 평화문제와 특히 남북 통일문제에 실천적으로 접근하려는 이재봉 교수는 원광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이자 ‘남이랑북이랑 더불어살기위한 통일운동’ 대표를 맡고 있다. - 편집자 주


3. 평양에 함께 들어가는 사람들

10월 16일 아침 10시 평양으로 출발하는 아시아나 항공 전세기를 타기 위해 8시까지 인천공항에 모이기로 했다. 6시에 집을 나서는데 간밤에 잠을 설친 탓인지 머리가 묵직하고 목구멍이 따끔거리며 감기 기운조차 있다.

전날 ‘학술 단체 협의회’와 ‘민주화를 위한 전국 교수 협의회’ 등 5개 학술 단체에서 주최한 ‘국가보안법과 강정구 교수 필화 사건’에 관한 긴급 학술 토론회에서 논문을 발표하느라 서울에 올라와 있었는데, 강 교수에 대한 걱정과 수구 극우 세력 및 사법 당국에 대한 분노, 그리고 북녘 방문에 대한 설레임 등으로 잠을 거의 이루지 못했던 것이다. 7년 전 처음 방북할 때도 설레지 않았는데 이상하다.

우리 ‘남이랑북이랑’ 일행은 모두 첫 방북이어서 들뜬 표정이다. 특히 앞으로 평화에 관한 공부 및 운동에 힘쓰고 싶다는 내 조교는 지난밤 한 숨도 자지 못했다며 거의 흥분 상태다. 대학에서 전자공학을 공부한 뒤 공군 장교 및 비행기 조종사를 꿈꾸다가, 어쩜 나의 영향으로 돈벌이가 전혀 되지 않을 평화 운동에 몸담을 생각을 갖게 되었으니, 몹시 부담이 되는 친구다.

‘어깨동무’ 실무자들로부터 방북자 명단을 받아 보니 일행이 모두 125명. 이 가운데 대학교수들이 20여명, 중고등학교 교사들이 7-8명, 대학생들이 5-6명 쯤 되는 것 같은데, 이번 방북단의 귀빈이랄 수 있는 어린이들이 20여명 섞여 있다. 가장 어린 아이는 초등학교 1학년. 이 아이는 무슨 생각을 갖고 평양에 가는 걸까. 얘가 나중에 크면 통일 운동을 얼마나 열심히 할까. 아니야, 얘가 통일 운동이 뭔지 알기도 전에 통일이 되겠지. 그런데 이 아이의 부모님은 무슨 일을 하는 사람들이고, 무슨 생각으로 아이를 평양으로 보내는 걸까?

이 아이가 우리 일행 가운데 최연소자라면, 아마 최연장자는 ‘000 선생님 모친’으로 소개되어 있는 분 같다. 000 선생은 서울대 의대 교수로 2003년 10월 나의 두 번째 방북 때도 함께 갔었는데, 어머님의 건강도 부럽고 아들의 효도도 보기 좋아, 나중에 조심스레 어머님의 연세를 여쭈었더니 78세란다.

원로 경제학자인 변형윤 서울대 명예교수도 걸음걸이조차 부자연스러운 모습을 보니 그 연배일 듯하다. 방북자 명단에는 ‘한겨레 통일문화재단 이사장’으로 소개되어 있는데, 내가 알기로는 과거 ‘개발 독재’ 시대에 정부가 국가 경제의 초점을 ‘성장’에만 맞출 때 ‘분배’에도 관심을 돌려야 한다고 주장하던 진보적 경제학자로, 요즘 청와대를 비롯한 노무현 행정부의 경제 관리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이 분의 제자들일 것이다.

민주노동당의 노회찬 의원도 보인다. 두어해 전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50년 쓰던 고기판에 삼겹살을 구우면 시커매진다”며 물갈이 정도가 아니라 ‘(정치) 판갈이’를 해야 한다는 말로 인기를 끌다가, 얼마 전에는 구속될 것을 각오하며 이른바 ‘삼성 X파일’을 정면 공개함으로써 환호를 받았던 국회의원.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는 아니지만 좋아하고 존경하는 정치인이다.

서로의 일터와 연락처는 알고 있지만 3-4년 전부터 전혀 소식을 주고받지 못한 동갑내기 친구도 끼어 있다. 40대에 사무적으로 만나 알게 된 여인이라 친구라는 말을 쓰기가 좀 어색하기는 하지만, 1999년 8월 ‘남이랑 북이랑’ 1호를 내보내자 가장 많은 성금을 즉각 보내주었던 첫 번째 평생회원으로 ‘남이랑북이랑’의 방북길에 다시 만난 게 재미있다.

언론인들도 10명 정도 섞여 있는 것 같다. 대부분 큰 신문사들이나 방송사 소속인데, 수구 극우적이라는 이른바 ‘조중동’ 가운데서도 ‘꼴통’의 대표격인 ‘월간조선’의 간부도 끼어 있고 ‘중앙일보’의 00팀장도 들어있는 게 놀랍다. 이들은 도대체 무슨 맘을 먹고 평양에 들어가는 걸까. 북녘 사회를 염탐하기 위해? 아니면 남쪽 방북객들의 친북 행위를 감시하기 위해?

요즘 우리 사회에서 논란의 한 가운데 있는 강정구 교수가 2001년 평양에서 열린 8.15 남북 공동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북녘에 들어갔다가 만경대 방명록에 “만경대 정신 이어받아 통일 위업 이룩하자”는 글을 남겨 엄청난 곤욕을 치른 것도 방북단에 끼어 있던 ‘중앙일보’ 기자의 고발 기사가 발단이 되지 않았던가. 이들이 새로운 맘과 눈으로 북녘을 바라보고 자신들이 속한 신문과 잡지가 전향적이고 건설적인 자세로 통일 문제를 다룰 수 있게 되길 기대하면서도, 이들에게 조그만 꼬투리라도 잡히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더구나 나는 학기중이든 방학중이든 해외 여행을 자주 하는 편이어서 내가 몸담고 있는 학과 교수들의 눈치를 조금 봐야 하는데, 북녘이나 통일 문제에 관한 견해가 나와 크게 다른 동료 교수 한 사람은 나의 이번 방북에 동의하는 서명을 하지 않았다. 내가 평양에서 무슨 사고를 치면 나의 방북에 동의한 자신도 어떠한 책임을 지게 될 줄 모른다는 생각이었나 보다. 이래저래 소신껏 말하고 행동하는데 구속감을 느껴야 하는 서글픈 현실이다.

4. 서울에서 평양까지 : 직선이 아닌 디귿 (ㄷ)자 항로

오전 9시부터 탑승 수속을 밟아 9시 반쯤 평양행 아시아나 전세기에 올라탔다. 좌우 양쪽으로 세 사람씩 앉게 되어 있는데 125명의 일행으로 꽉 차버린 조그만 여객기다. 일요일이라 전날 신문들 밖에 없으니 읽을거리도 별로 없는 데다 피곤하기도 하고 감기 기운도 있어 일찌감치 눈을 감았다. 그러나 잠은 오지 않는다.

비행기가 이륙하자 잠시 뒤 ‘어깨동무’ 사무처에서 방북 일정 안내와 함께 방북 교육을 실시한다. 많이 좋아졌다. 정말 간편해졌다. 1998년 처음 북녘 방문을 앞두고는 며칠 전 일부러 서울에 올라와 통일교육원에서 3-4시간 방북 교육을 받았어야 했다. 북녘 사회의 실상, 남북 관계, 북녘에서 삼가야할 언행 등의 내용이었다.

2003년 두 번째 방북을 앞두고는 바로 전 날 통일교육원에 들어가 2시간의 교육을 받았었다. 그 때 통일교육원 교수는 북핵 문제에 관해 ‘반북적으로’ 강의한 반면, 국가정보원 관리는 북녘의 실상에 관해 뜻밖에 ‘친북적으로’ 얘기하는 게 이채로웠다고 지난 방북기에 쓴 적이 있는데, 이번에는 통일교육원이나 국가정보원의 인사가 아니라 대북 지원 민간 단체 실무자가 평양으로 들어가는 비행기 안에서 10분 정도 방북 교육을 실시한 것이다.

일일이 나누어주었다가 다시 걷어간 ‘특별 방북 교육 자료’라는 1쪽 짜리 인쇄물의 중요한 내용은 ‘남한-북한’이라는 호칭 대신 ‘남측-북측’으로 써달라는 지당한 분부와 북녘의 술은 대개 도수가 높으니 환영연이나 환송연 때 주량을 잘 감안해서 마시라는 합리적 충고였다. 남북 관계의 변화에 따라 방북 교육의 형식과 내용도 이렇게 바뀌고 있는 것이다. 이 마저도 머지않아 완전히 없어지는 게 바람직하겠지만.

하기야 1980년에는 북녘이 아니라 일본을 가는데도 꽤 살벌한 내용의 반공 교육을 받았었다. 대학교 2학년일 때 여러 학교 학생들과 단체로 일본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 무렵엔 아마 해외 여행자들에 대한 ‘소양 교육’ 명목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일본엔 조총련계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 그들은 북녘의 지령을 받은 간첩이나 마찬가지니 그들을 만나서는 안 되고, 만에 하나 그들과 옷깃이라도 스치게 되면 반드시 신고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1983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날 때는 ‘자랑스런 한국’을 잊지 마라는 내용의 ‘소양 교육’을 받았던 것 같다. 그런 쓰잘데없는 소양 교육들이 언제부터인가 슬그머니 없어졌듯이, 방북 교육도 곧 자취를 감추게 되길 기대한다.

잠시 뒤엔 ‘어깨동무’ 실무자들이 기내를 돌며 휴대 전화를 걷었다. 북녘에서는 사용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아예 가지고 들어갈 수도 없기 때문이다. 꼭 한 달 전인 9월 중순 금강산에 들어갈 때는 ‘현대아산’ 안내원들이 휴대 전화 배터리까지 걷는 모습을 보고 속으로 혀를 끌끌 찬 적이 있다. 남쪽에서는 “국헌을 문란하게 하거나 국가 안보, 공안 또는 풍속을 해할 물품”을 단속한다는 이유로 북녘에서 만들어진 비디오 테이프나 노래 테이프는 말할 것도 없고 책이나 신문 잡지 심지어는 지도까지 압수하고 있는데, 북녘에서는 휴대 전화가 체제를 위협하는 가장 위험한 물품으로 인식되는 모양이다.

참고로, 남쪽에서는 몇 해 전부터 유선 전화보다 무선 전화가 많아졌다고 하지만 북녘에서는 아직 유선 전화도 널리 보급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휴대 전화를 쓰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얘기를 듣긴 했어도 내가 직접 확인하지는 못했다. 이와 관련하여, 북녘에서는 내부 통신용이랄 수 있는 인트라넷은 점점 퍼져가고 있지만, 외부 통신망과 연결될 수 있는 인터넷 사용은 매우 제한적이라는 사실은 확인했다.

2차 방북기에서 소개했듯, 2003년 10월 두 번째 방북했을 때 북녘의 안내원에게, 미국에서는 가만 앉아서 북녘 땅 속까지 들여다보고 있고 남쪽에서도 초등학생만 되면 인터넷을 통해 세계 여기저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즉시 알 수 있는 세상에, 여기서는 교수나 연구원들조차 세상 돌아가는 일을 하루이틀 지난 뒤에야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알 수 있다면 어떻게 미제와 싸워 이길 수 있겠느냐고 안타까움을 표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우리가 북녘에 들어가면, 금강산에만 가더라도, 외부와 거의 단절된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게 참 안타깝다. 물론, 꽤 비싼 통화료를 물면 외부와 유선으로 전화할 수는 있지만 휴대 전화는 사용할 수 없고, 인터넷 이용도 거의 불가능하며, 외부의 신문이나 방송도 접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이는 북녘에서 걱정하는 체제 안전 문제와 관련된 것이기에 금세 해결되지 못할 것 같다.

그런데 인천을 떠난 지 30분쯤 흐른 뒤 비행기 안에 드문드문 설치된 모니터를 보니 인천에서 평양까지 항로가 디귿 (ㄷ)자로 표시된다. 정확하게 말하면 평양 북쪽에 있는 순안 비행장까지 개성이나 황해남북도 상공을 거쳐 직선으로 가지 않고 바다쪽으로 빙 둘러 간다는 말이다. 인천에서 중국 산뚱 반도를 향해 황해 (서해)로 빠져나와 북쪽으로 올라가다가 평양 (순안) 쪽으로 꺾어 들어가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서울 (인천 공항)에서 평양 (순안 비행장)까지 비행 시간이 50분 정도 밖에 걸리지 않는다고 놀라워하지만, 이렇게 ㄷ자로 가지 않고 일직선으로 가면 10-20분 정도 단축시킬 수 있으리라는 욕심을 부리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아직까지는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귀중한 연료의 낭비도 줄일 수 있을 텐데...

주한미국대사관에서 전문위원으로 일하는 친구는 그 디귿자 항로 그림을 보고 마음이 착잡해지며 눈물이 나오더라는 얘기를 나중에 전해주었다. “이 행성에서 가장 비극적이고 우스꽝스러운 냉전의 잔유물 같은 한반도”라는 생각이 들어 서글펐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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