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희 (미국 심슨 대학교 종교철학부 교수)

통일뉴스에서 <신은희의 통일문화 이야기>를 게재한다. 신은희 교수는 주체사상과 기독교사상이 만날 수 있다며 이를 전도(?)하는 흔치않은 학자이다. 그는 주체사상을 ‘종교적 차원’에서 보면서 포스트모더니즘을 방법론으로 해서 기독교와의 접맥을 시도하고 있다.

미 심슨(simpson)대에서 종교철학을 강의하고 있는 그는 북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강의를 한 적이 있고 또 여름마다 남쪽에 와서 특별강의도 한다. 신학자이지만 신학에서 벗어나 인본주의로 가고 싶고 또 단순한 학문만이 아니라 실천 활동을 하고 있는 ‘주체문화’의 전도사인 셈이다.

이미 3년 전부터 주체사상과 기독교사상과의 접맥 시도로 신선한 바람을 일으켜온 그의 <통일문화 이야기>는 매주(또는 격주) 화요일에 연재될 예정이다. - 편집자 주


“너나 잘하세요!”

요즘은 피서철도 아닌데 한국사회에 ‘괴담’ 시리즈가 늘고 있다. 강정구 교수 사건으로 인한 동국대 학생들의 ‘취업괴담’에서부터, 분당지역 여자들을 납치하여 성폭행하는 엽기적인 택시 운전사에 관한 ‘택시괴담’에다, 청계천 다리 22개를 모두 건너야 수능시험에 좋은 점수를 받는다는 ‘청계천괴담’에 이르기까지. 이런 괴담은 추워지는 늦가을을 더욱 싸늘하게 만든다.

게다가 잊을만하면 또 다시 등장하는 괴담이 있다. 북의 ‘인권괴담’이다. 6자회담이 다시 성사될 분위기가 되자 미국과 일본은 합작이나 한 듯이 북의 인권문제를 들먹인다. 6자회담은 한반도 비핵화를 논의하는 자리로 인권문제를 의제화하지 않기로 합의했던 것을 단번에 뒤집어버린 것이다. 마치 선거철만 되면 ‘색깔공주’와 ‘색깔왕자’로 변신하는 정치판의 ‘색깔괴담’과 비슷하다.

국정감사 기간에도 확인하기 어렵거나 오래된 자료들에 기초하여 북의 공개처형 장면을 공개하는 등 일반인들의 막연한 공포심을 자극한다. 검증되지도 않은 탈북자 구타 동영상을 인터넷에 띄워 알게 모르게 북의 인권괴담을 기정사실처럼 몰아가기도 한다.

유럽연합 (EU)도 북의 인권문제를 유엔총회에 상정할 것을 결의했다. 급기야는 한국의 국가인권위원회까지 나서서 “북은 군수물자를 줄이고 인권문제를 해결하라”고 주문하고 나섰다. 참여정부는 북의 인권문제가 등장할 때마다 고민에 빠지는 모습이 역력하다. 온 세계가 북의 인권문제를 들고 나온다. 북의 지도자보다 북의 인민들을 더 사랑하고 책임질 것 같은 격앙된 목소리들이 끊임없이 터져 나온다.

그런데 이렇게 흥분하는 세계의 여론에도 불구하고 북의 표정은 일체 변화가 없어 보인다. 요지부동의 무표정은 시끄럽게 떠드는 이들을 향해 한마디 던지는 듯한 자세다. “너나 잘하세요.” 온 세계가 비난하는 북의 인권문제에 대해 외눈 하나 깜박이지 않는 북은 도대체 왜 그러는 것일까? 오히려 ‘강경에는 초강경으로’ 대응하겠다는 북은 정말 ‘인권이 괴멸된 폭정의 전초기지’인가?

“인권, 만만한 나라만 잡는 정치도살용은 아닌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인권’이란 무엇인가. 일단 ‘인권’이란 서구개념이다. 서구의 인권개념은 ‘천부인권설’에 기초한다. 천부인권이란 신이 인간에게 내린 권리로, 각 개인의 생명에 관한 권리가 신에 의해 주어졌다는 이론이다. 대부분의 서양사회에서는 천부인권설이 정설로 받아들여져 왔다. 기독교도 물론 천부인권설을 전적으로 따른다. 근본주의자들이 강조하는 개인구원도 천부인권설과 문화적 연관성이 깊다. 따라서 서구사회에서는 자유민주주의 정신과 맞물려 개인의 권리를 우선 강조한다. 개인의 인권은 신이 내린 생명에 대한 권리이기 때문에 종교문화적 가치를 지니는 중요한 덕목이다.

그러나 동양의 유교문화권에서는 서구의 권리 (rights)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에게 이미 익숙해져 있는 권리로서의 인권개념은 19세기 기독교 문화와 함께 수입된 외래개념이다. 동양문화권에서는 권리와 상응하는 개념으로 어짐(仁)과 조화사상이 있었다. 이는 인간 삶의 기본원리가 개인의 ‘몫’과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 공동체의 화합과 조화를 이루는 유기체적 윤리관이었다.

북의 경우는 ‘동지애’라고 하는, 권리보다 의무가 강조되는 개념의 인권이 있다. 이는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 강력하게 연결되어 있는 ‘혁명적 동지애’로 사회주의 이상사회를 위한 공동체 중심의 ‘합동인권’을 뜻한다. 북은 그것을 ‘조선식 인권’이라고 부른다. 북에서 말하는 동지애란 단순한 친구관계가 아니라 삶과 죽음을 함께 걸고 호흡하는 하나의 생명체적 관계이다.

이 생명체는 신이 내리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주는 것이다. 이 때 국가란 각각의 개인이 관계성을 이루며 형성한 집단을 말한다. 즉, 북에서는 ‘내가 국가’인 셈이다. 북에는 부분과 전체가 함께 녹아있는 공동체 사회의 내재적 가치가 있다. 따라서 개인의 인권을 말하려면 국가의 인권 즉 ‘국권’을 동시에 말해야 한다.

개인의 인권을 보장하려면 국권이 함께 담보되어야 한다. 기독교가 천부인권을 말한다면 북의 주체문화에서는 ‘민부인권’을 말한다. 기독교가 개인구원을 강조한다면 북의 주체 문화는 ‘국가구원’을 강조한다. 따라서 현재 자유민주주의식의 개인구원이나 개인의 인권개념이 전혀 먹혀들어가지 않는 것은 북의 국권에 관한 국제사회의 보장이 함께 담보되지 않기 때문이다.

현실적인 예로 유엔보고서에 따르면 이번 6자 회담이 성사되면 북은 국제사회로부터 에너지지원을 받아 현재 GDP의 3배인 7% 경제 성장을 가져올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6자 회담 성사가 가능해지자 부시는 김정일을 또 다시 ‘폭군’으로 부르며 시작 전부터 재를 뿌리고 있다. 시카고대 부루스 커밍스도 미국은 북과 관계 정상화를 하고 싶은 마음의 진정성이 없다고 전한다. 한반도에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면 곧바로 미국은 강경냉기류를 보낼 것이라고 예견한다. 미국이 북의 인권을 그토록 열망한다면 왜 국교 정상화를 이토록 기피하고 있는 것인가? 이런 현실 속에서 어떻게 북이 국권을 주장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영국의 정치학자 커스틴 셀라스는 서구의 인권개념은 지극히 현대 정치의 흐름과 맞물려 형성되어 왔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서구의 인권개념은 18세기 대영제국과 북아메리카 식민지 사이에서, 그리고 프랑스의 내부에서 터져 나온 정치적 갈등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또한 역사상 서구인권은 ‘목적’이기보다는 정치적 ‘수단’이었던 사례가 더 많다. 반공산주의 개념이 시들해질 때면 항상 인권문제가 급부상되었다.

미국은 인권문제가 대단히 매력 있는 국제적 의제로 정치적 파급효과가 크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미국정부는 북의 정치범수용소와 고문, 그리고 종교탄압의 문제를 단골 메뉴로 꼽는다. 하지만 모순되게도 인권국가를 자처하는 미국은 세계에서 고문도구 수출을 가장 많이 하는 국가이며, 심지어는 CIA 중심으로 고문기술 전수까지 이루어진다.

아프가니스탄 전쟁 이후 관타나모 베이에서 자행됐던 회교도들에 대한 인권유린과, 현재까지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이라크 포로들에 대한 잔혹한 고문과 학대, 종교탄압 사례들은 한때의 유행처럼 잊혀지고 있다. 이교도의 인권은 무참히 짓밟아도 된다는 이중적 잣대가 용인될 수 있다면 인권의 문제는 정치적 실리주의 외에 과연 무엇인가? 인권이란 정치적 상황에 따라 때론 천사로, 때론 악마로 그 역할을 번갈아 해내는 서구정치의 시녀인가? 물론 우리는 열악한 북의 인권을 개선하기 위한 인도주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원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서구의 인권정책이 ‘만만한 나라만 잡는 정치 도살용’으로 전락되지 않도록 한번쯤 인권문제를 뒤집어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조선식 인권과 조선식 아픔

조선식 인권개념에는 조선식 아픔도 있다. 나는 평양에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소속 참사들을 만날 때마다 북의 인권문제에 관한 질문을 한다. 지난번에는 다양한 출판물에 대한 통제와 관련해 ‘인민들의 알 권리’에 관한 질문을 했다. 그는 자신 있게 “당은 인민에게 좋지 않은 것을 주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즉, 당 지도부가 먼저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선별하여 인민에게 전한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통제’였지만 참사가 주장하는 것은 ‘보호’였다. 나도 옳은 것 같았지만 참사도 옳은 것 같았다. 개인적 차원에서는 통제지만 국가적 차원에서는 보호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런 대화를 나눌 때마다 정확히 설명하기 어려운 ‘조선식 아픔’을 느낀다.

용천 폭발 사고 때 순직한 여교사의 이야기가 기억난다. 그녀의 품에는 타다 만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위원장의 초상화가 남아 있었다. 불에 타들어 가는 수령의 사진을 꺼내 오다 불길 속에서 숨진 사건이다. 기독교 용어로는 그야말로 ‘순교’ 사건이다. 기독교 ‘복음’을 위해 아프리카 오지에서 죽어갈 수 있는 헌신적인 신앙심과 비슷하다.

많은 사람들은 북에 다양한 문화가 소개되면 주체문화가 삽시간에 붕괴될 것이라고 짐작한다. 그러나 인간의 종교성이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이는 기독교인들의 신앙양태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기독교인들은 세상에 다양한 종교문화가 있음을 알고 있지만 기독교만이 진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무리 타종교의 훌륭한 법문을 들어도 감동받지 않는다. 결코 쉽게 자신의 신앙을 바꾸지 않는다. 기독교 근본주의건 주체 근본주의건 종교성이란 죽음을 초월하는 순교성으로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이런 공동체 중심의 주체문화가 절대문화로 자리 잡고 있는 북의 사회에서 개인의 인권개념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개념이다. 그들에게 서구사람들이 문제 삼는 인권이란 ‘체제 전복을 유도하는 강대국의 정치적 시비’로 인식될 뿐이다. 따라서 북의 인권문제는 반드시 택일논리 (either/or)가 아니라 합치논리 (both/and)로 가야 한다.

개인의 인권인가? 국가의 주권인가? 이 둘 중 하나의 선택이 아니라 인권과 주권이 동시에 담보되어야 한다. 인권과 국권이 함께 강조되어야 한다. 국내외 많은 단체들이 북의 인권문제를 부르짖는 것만큼 북의 국권을 위해 발언할 수 있어야 하며 미국의 반북정책에도 강도 높은 비판을 동시에 할 수 있어야만 한다.

북도 내부적 아픔을 스스로 치유할 수 있어야 한다. 인민이 진정으로 역사의 주인으로 살아 움직이려면 먼저 인민에게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선택할 권리가 주어져야 한다. 인민에게 그것을 선택할 능력이 없다면 인민은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될 수도 없고 역사의 주인은 더더구나 될 수 없다. 정치권력에 대한 견제와 내부적 개혁 없이 고립된 민족주의에 사로잡혀 ‘조선식’ 만을 강조한다면 이는 과거 전체주의의 닫힌 인권개념으로 전락할 위험성이 많다.

이제 우리는 북의 조선식 아픔을 흉측한 괴담으로 변질시켜 공격할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부분적 아픔이 통일을 위한 평화의 조화 원리로 재탄생할 수 있도록 믿음직한 산파 역할을 제대로 해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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