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뉴스에서 <신은희의 통일문화 이야기>를 게재한다. 신은희 교수는 주체사상과 기독교사상이 만날 수 있다며 이를 전도(?)하는 흔치않은 학자이다. 그는 주체사상을 ‘종교적 차원’에서 보면서 포스트모더니즘을 방법론으로 해서 기독교와의 접맥을 시도하고 있다. 미 심슨(simpson)대에서 종교철학을 강의하고 있는 그는 북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강의를 한 적이 있고 또 여름마다 남쪽에 와서 특별강의도 한다. 신학자이지만 신학에서 벗어나 인본주의로 가고 싶고 또 단순한 학문만이 아니라 실천 활동을 하고 있는 ‘주체문화’의 전도사인 셈이다. 이미 3년 전부터 주체사상과 기독교사상과의 접맥 시도로 신선한 바람을 일으켜온 그의 <통일문화 이야기>는 매주(또는 격주) 화요일에 연재될 예정이다. - 편집자 주 |
‘가짜교회’란 없다
10월 21일 한국교회 백주년기념관에서 기독교사회책임 공동대표인 서경석 목사는 북의 봉수교회를 ‘가짜교회’라고 규탄했다. 서 목사는 북의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은 가짜 기독교인들이기 때문에 앞으로 공동기도문 채택이나 모든 교류를 중단하고 봉수교회 예배에도 참석하지 말아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단적으로 북의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모두 가짜라고 성토했다.
나는 이런 기사를 읽을 때마다 한국 기독교인들의 종교적 오만함과 단세포적 사고에 구토증세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남쪽 교회는 진짜교회고 북쪽 교회는 가짜교회인가? 과연 누가, 어떤 기준으로 진짜와 가짜를 정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서 목사가 말하는 ‘진짜교회’란 무엇인가? 그런 교회는 과연 어디 있는가? 미국교회인가? 한국교회인가?
한국의 대부분의 교회란 백인 선교사들이 일방적으로 던져 준 미국식 복음을 믿고 있다. 초기 백인 선교사들은 한국의 자생적인 종교문화를 모두 미신으로 규정하고 서양식 복음만이 진짜복음이라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진짜교회란 백인들이 던져준 복음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백인들의 종교의식을 그대로 흉내 내며 따라하는 교회를 말하는가?
기독교의 ‘복음 (Gospel)’이란 원래 ‘좋은 소식 (Good News)’이란 뜻이다. 자기 민족문화를 미신화한 복음이 어떻게 우리 민족에게 좋은 소식이 되는가? 처음부터 서양 기독교의 복음은 우리민족에게는 ‘나쁜 소식 (Bad News)’이었다. 불행한 소식이었다.
오늘날까지도 미국교회를 따라하면 정상교회, 진짜교회가 되고 ‘우리식으로’ 믿으면 이단교회, 가짜교회가 되는 것은 전형적인 종교제국의 지배논리일 뿐이다. 이런 제국주의자들 발밑에서 천박한 미국식 복음을 전달하지 못해 안달하는 한국 목사들의 종교적 노예근성은 남북의 통일문화를 이루는데 가장 걸림돌이 된다.
이 세상에는 진짜교회도 없고 가짜교회도 없다. 서로 ‘다른 교회’만이 있을 뿐이다. 근본적으로 ‘복음’이란 타문화권에서 일방적으로 던져지는 것이 아니라 각 민족의 고유한 문화권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복음이란 ‘문화적 발견’이다. 북이 특수한 역사적 상황에서 나름대로 정의한 기독교가 있다. 그것은 북의 기독교이며 북의 상황에서 탄생된 ‘조선식 복음’이다. 북의 교회와 신앙이 남쪽과 다르다고 해서 모두 가짜교회라고 폄하하고 저주할 자격이 우리에게는 없다. 우리는 다만 지치지 않는 ‘열린 대화’에 끊임없이 참여해야 할 책임이 있을 뿐이다.
한국교회, 이 보다 더 변태적일 수는 없다
그렇다면 서 목사가 주장하는 진짜교회란 무엇인가? 서 목사의 진짜교회는 남쪽교회를 뜻한다. 그러나 과연 남쪽의 교회들이 진짜교회일까? 나는 북의 교회들이 남쪽교회처럼 타락할까봐 오히려 두렵다.
오늘날 한국의 대형교회들은 교회기업이 되었다. 아버지가 담임목사로 키운 큰 교회가 다른 목사에게 넘어가는 것이 아깝고 싫다. 교회가 기업이 되고 재벌이 되었으니 남의 자식이 와서 경영하는 것도 기분 나쁘다. 내 교회니까 내 자식한테만 물려줘야 한다. 그래서 교회세습은 이루어진다. 세습을 위한 교회파벌은 형성되고 예배의 이면에는 정치판 이상의 치졸한 정치와 로비가 진행된다.
목사는 교회 기업의 최고 경영자가 된다. 온갖 특권과 권력을 향유한다. 봉사와 섬김의 종이어야 하는 목사는 교인들로부터 최고의 대접을 기대하고 또 당연하게 받는다. 교회의 계급은 일반사회의 계급차별을 능가한다. 돈 많은 자들은 거액의 헌금을 내고 교회에서 대단한 행세를 한다. 가난하고 못 배운 교인들을 무시하는 교회안의 계급화 현상이 심각하다. 경우에 따라서는 교회직분을 돈으로 직거래하기도 한다.
교회는 권력투쟁의 장이기도 하다. 교회 총회장 자리를 놓고 돈거래를 하는가 하면 난투극을 벌이기도 한다. 교회에서 담임목사는 최고의 권력자로 등극한다. 군대이상의 상하 복종체계를 잘 갖추고 있다. 헌신의 이름으로 가난한 전도사들을 착취하기도 한다. 여성 전도사들을 농락하는 부권문화의 추악한 모습도 있다. 기독교외에 다른 종교는 모두 악으로 규정한다. 좋은 신앙을 위해서 이성적 사고와 지성도 포기시킨다. 자기 조상과 뿌리도 부인하게 한다. 돈, 권력투쟁, 세습, 부권문화, 목사의 제왕적 모습, 교회의 계급화, 여성차별과 농락, 타종교의 악마화, 반민족적 신앙.
남쪽의 기독교인들이 욕하는 북의 사회보다 더 추악한 모습들이 바로 한국교회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이런 교회가 무슨 진짜교회인가? 이런 교회가 무슨 능력으로 북의 교회를 구제할 수 있는가? 한국 기독교인들의 희망 한점 없는 종교적 변태성. 오늘날의 한국교회, 이보다 더 변태적일 수는 없다.
증오의 신앙에서 연민의 신앙으로
사실 나는 봉수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많은 감동을 받았다. 눈물로 얼룩진 예배였다. 기독교인들의 용어로 정말 “많은 은혜를 받았다.” 초봄이라 난방이 들어오지 않아 몹시 추웠지만 마음은 훈훈했다. 설교의 내용은 ‘예수의 투쟁과 선군정치’였다. 비록 봉수교회의 예배가 남쪽과는 달리 일정한 신도들이 동원되고 전시적 성격이 강하지만 그 자리에 모여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목사와 성도들의 마음은 진실한 것이 아닐까. 종교적 격식을 초월하여 함께 기도하고 염원하는 마음은 남이나 북이나 모두 마찬가지가 아닐까.
난 북의 기독교인들을 가짜 기독교인들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과거 강대국의 위협 속에서도 독립된 국가를 지키기 위해 서양종교를 철저히 경계해야 했던 아픈 역사의 경험이 아직도 그들에게는 생생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그 불신의 마음을 열어 교회가 세워지고 예배가 진행되기 시작했다. 이제 15여년이 조금 넘어가고 있다. 참으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변화들과 노력들이 더욱 고맙고 소중하지 않은가.
북의 동포들은 과거 반세기 동안 주체문화 외에 다른 종교문화를 접하지 못하고 살아왔다. 그들에게 갑자기 모든 것을 한국교회처럼 하라고 주문할 자격이 과연 우리에게 있을까? 그들은 자신들이 혹독한 굶주림을 견디며 피땀 흘려 지켜온 민족정신과 주체문화가 훼손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타종교의 예배를 준비하는 것이다. 나는 차라리 그런 북녘 동포들의 심정을 보호해주고 싶다. 증오보다는 오히려 깊은 연민을 느낀다.
사실, 북의 주체문화에서 보면 북의 기독교는 민족종교로 가는 과정에 있다. 민족 신앙을 고수하였던 히브리인들과 같이 북에서는 기독교도 민족종교로 정착시키기 위한 ‘토착화의 과정’을 진행시키고 있는 것이다. 종교에는 진짜와 가짜가 없다. 서로 다른 종교성과 다양한 신앙색채가 있을 뿐이다. 나의 신앙과 다르다고 해서 모든 대화와 교류를 중단하고 북의 교회를 저주하는 행위는 평화를 꿈꾸는 통일문화의 창조에 가장 방해가 되는 종교적 독소일 뿐이다.
나는 북의 기독교인들을 보면 늘 생각나는 성경구절이 있다. 바울사도의 고백이다. “나에게는 큰 슬픔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에는 끊임없이 번민하고 있습니다. 나는 혈육을 같이 하는 내 동족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조금도 한이 없겠습니다.”
나는 오늘날 북의 기독교인들이 바울사도의 심정과도 같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바울에게 있어서 강렬한 기독교 신앙은 결코 민족과 상반되는 것이 아니었다. 결코 그럴 수 없노라고 고백하고 있다. 어쩌면 민족과 기독교 신앙을 양자택일 하려는 시도자체가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이 아닐 수 있다.
불교에서는 타인을 저주하고 싶을 때 ‘차마 그리 하지 못하는 연민의 마음’이 있다. 한국교회의 전투성과 증오심은 이제 불교로부터 그런 깊은 연민의 마음과 겸허함을 배워야 할 것 같다. 자신들과 다른 기독교인들을 보면 반사적으로 뿜어내는 한국 기독교인들의 종교적 광기가 이제는 깊은 동포애로 조금씩 희석되어야 하지 않을까. 예수가 십자가상에서 보여주었던 진실한 사랑의 신앙으로 북의 ‘이질적인’ 교회와 기독교인들도 따뜻하게 품고 함께 기도하며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이 위원장은 신앙을 입으로 시인하는 이에게 "당신은 가짜"라고 하는 것은 북한의 변화와 종교의 자유를 바라는 진정한 태도가 아니라고 했다. 이 위원장은 "조선그리스도교련맹 강영섭 위원장과 손효숙 목사(봉수교회)·장승복 목사(칠골교회) 등은 남측 인사들 앞에서 그들의 신앙을 입으로 시인한다"면서 "입으로 시인하는 이상 신앙은 그와 하나님과의 관계"라고 말했다. 이 위원장은 "진정 남북이 고귀한 신앙을 공유하길 원한다면 동원된 신자를 대상으로 설교도 하고 지원도 하는 방향이 현재로는 최선"이라고 강조했다.
이 위원장은 "궐기대회 형식의 인권 문제 제기는 이념 갈등을 피할 수 없고, 바람직한 방향도 기대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그는 북한 인권 문제와 피랍인 송환 같은 인도주의 문제를 분리하여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북 협상력을 가져야 하는 정부에 북한 인권 문제를 제기하라고 압박하는 것도 실효성에 의문이 있다고 덧붙였다.
이 위원장은, 교회와 목회자들이 북한을 고정된 시각으로 평가하려는 경향이 강하다고 지적했다. 북한정권을 사탄으로 규정하면 북한의 어떤 변화도 변화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미가 된다고 말했다. 이 위원장은 북한이 본능적으로 생존을 추구하며 지속 가능한 발전을 추구하기 위해 끊임없이 환경에 적응하려는 '생물'이라고 했다.
토론자로 나선 김병로 교수는, 북한교회가 정치적 통제 받으면서 세워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북한의 교회에 동원되는 이들에 대한 연구가 더욱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김 교수에 따르면, 이들 중에는 과거 그리스도인의 후손이거나 투옥됐다가 사면된 그리스도인도 있다.
김 교수는 북한에 감정적으로 발언하고 정치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안타깝다고 했다. 김 교수는 "한국교회가 북한에 필요한 것이 인권과 민주화냐 화해와 공존이냐를 두고 의견 차가 있지만, 그리스도인이라면 평화와 화해·협력을 추구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인권 문제를 바로 제기하기보다 인도적 사안(이산가족 상봉·납북자 송환)을 먼저 다루는 것이 적절하다고 말했다.
2005년 10월 31일 16: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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