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희 (미국 심슨 대학교 종교철학부 교수)

통일뉴스에서 <신은희의 통일문화 이야기>를 게재한다. 신은희 교수는 주체사상과 기독교사상이 만날 수 있다며 이를 전도(?)하는 흔치않은 학자이다. 그는 주체사상을 ‘종교적 차원’에서 보면서 포스트모더니즘을 방법론으로 해서 기독교와의 접맥을 시도하고 있다.

미 심슨(simpson)대에서 종교철학을 강의하고 있는 그는 북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강의를 한 적이 있고 또 여름마다 남쪽에 와서 특별강의도 한다. 신학자이지만 신학에서 벗어나 인본주의로 가고 싶고 또 단순한 학문만이 아니라 실천 활동을 하고 있는 ‘주체문화’의 전도사인 셈이다.

이미 3년 전부터 주체사상과 기독교사상과의 접맥 시도로 신선한 바람을 일으켜온 그의 <통일문화 이야기>는 매주(또는 격주) 화요일에 연재될 예정이다. - 편집자 주


기독교와 주체사상, 어느 쪽이 문제인가?

기독교와 주체사상과의 만남. 이 둘의 대화는 과연 가능한가? ‘하나님 아버지’와 ‘수령 아버지’가 정말 만날 수 있을까?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절대 안 된다고 펄펄 뛴다. 주체사상가들은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진리가 기독교에만 있다고 주장한다. 주체사상가들은 진리는 다원적이라고 본다.

어느 쪽이 문제인가? 어느 쪽이 평화를 위협하는가?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이 둘의 대화조차 불가능하다고 부르짖는다. 대화가 불가능하면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가? 공존은 없다.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죽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생명의 문화가 아니라 죽음의 문화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불행히도 한국사회의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종교적인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전쟁은 종교전쟁이고 제일 무서운 병은 종교병이다. 종교적 신앙이 강할수록 종교전쟁은 끔찍하고, 종교병은 치유 가능성이 적어진다. 한국사회이건 해외동포사회건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이런 종교적 정신분열증은 대단히 파괴적이다.

서로 다른 두 전통이 만날 때 ‘문화적 차이’는 반드시 발생한다. 그러나 문화적 차이는 차별이 될 수 없다. 또한 문화적 차이를 없애고 하나로 통합하고자 할 때 종교 제국주의는 즉각적으로 살아난다. ‘차이’가 ‘차별’이 되지 않으려면 상대방의 고유문화를 일단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신앙의 형태를 ‘인정’하는 것이다.

기독교가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고유한 종교문화라면 주체사상은 수령 아버지를 믿는 북의 고유한 문화이다. 기독교는 유일신 사상을, 주체사상은 유일사상을 각각 강조한다. 각 전통의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우리는 먼저 서로 다른 신앙의 대상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대화는 거기서부터 출발한다. 한국사회에서 여전히 기독교와 주체사상이 대화조차 할 수 없는 것은 기독교인들이 주체사상가들을 대화의 동반자로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주체사상가들이 오히려 기독교인들의 참여를 기다리고 있는 현실이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절대적 배타성과 상대적 배타성의 차이

기독교는 유일신 사상을 고수하고 있다. 북도 주체 유일사상을 고수하고 있다. 둘 다 근본주의적인 성격이 있다. 둘 다 배타성이 있다. 유일신 사상은 기독교의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길 수 없는 신적 명령으로 대단히 배타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물론 주체사상을 포함하여 모든 종교문화에는 일정 수준의 배타성이 있다. 배타성은 그들의 '신앙고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배타성에도 차이가 있다. ‘절대적 배타성’과 ‘상대적 배타성’이 그것이다.

절대적 배타성의 아주 쉬운 예는 이렇다. “우리 엄마가 최고다. 그러니까 너희 엄마 버리고 모두 우리 엄마 자식이 되라”는 것이다. 상대적 배타성은 첫 문장에서 끝난다. 그것도 단서를 달고 있다. “우리 엄마가 나한테는 최고다.” 기독교의 유일신 사상이 갖는 배타성이 절대적이라면, 주체사상의 유일사상이 지니는 배타성은 상대적이다.

기독교는 모든 인류가 "예수의 이름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주체사상가들은 기독교인은 예수이름으로 구원받고 주체 신봉자는 주체사상으로 해방된다고 본다. 주체 신봉자도 예수 이름으로 구원받아야 한다고 할 때 절대적 배타성의 횡포는 시작되고 종교 제국주의의 폭력성은 드러난다.

이러한 근본주의에 기초하고 있는 한국 기독교와 교회의 현실은 불행히도 종교적 정신분열상태로 많은 사람들을 병들게 해왔다. 기독교의 절대적 배타성은 다문화가 공존해야 하는 21세기에 가장 먼저 '치유'받아야 한다. 치유와 회개의 과정을 거쳐야 다른 문화와 공존할 수 있는 사회의 건전한 구성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주체사상의 유일사상 체계는 기독교의 절대적 배타성에 비하면 양호한 편이다. 북의 유일사상 체계는 북의 '민족제일주의' 정신과 같은 맥락에서 출발한다. 김일성은 우리 민족제일주의란 우리 민족만이 완전하고 유일하다는 사상이 아니라 “조선사람에게는 조선민족과 문화가 최고다”라는 뜻이다. 이는 애국적 사회주의 정신을 민족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원리를 뒤집어 보면 종교 다원주의에 근접한 사상이다. 즉, 기독교는 예수 믿고 구원받고, 불교인은 수행을 통해 각자 부다가 되고, 회교도인은 알라를 믿고, 주체인은 민족의 지도자 수령을 따른다는 다원주의적 입장이다. 여기에는 상대적 배타성의 원리가 포함되어 있다.

사실, 상대적 배타성의 원리는 어느 종교나 신앙 혹은 정치적 이념에 모두 녹아 있기 때문에 옳고 그름의 판단이 어렵다. 상대적 배타성은 '문화적 침투성'을 가능하게 한다. 이 침투성은 상호적 원리를 갖는다. 기독교와 주체사상의 만남은 처음부터 통합의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질성의 공존에 목적이 있다. 다르지만, 정말 다르지만 공존할 수 있는 문화적 코드, 즉 연결고리를 찾는 것이다.

조금씩 열리는 창사이로 바라보기

북도 어려운 과제를 안고 있다. 21세기의 다양한 문화의 조건속에서도 인민들이 전적으로 주체만을 선택할 것인가의 열린 과제가 있다. 종교문화의 선택이 강요적이지 않고 자발적일 때 그 전통은 진정으로 생명력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북의 사람들이 일차적으로 고민해야 할 미래의 과제일 것이다. 다만 우리가 말하는 종교간의 상호적인 대화는 상대적 배타성을 서로 인정하되 여전히 다양성을 존중하며 각자의 종교문화 전통을 열린 세계로 발전시켜 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연대의 틀에 참여 할 수 있다면 희망적이다. 현재 상태로 보면 희망이 없는 쪽은 주체사상이 아니라 오히려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다.

어느 종교전통이든지 긍정적 요소와 부정적 요소가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종교학에서는 '사이비종교'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신흥종교' 혹은 ‘민족종교’일 뿐이다. 어느 종교의 진리가 진짜이고, 어느 종교의 진리는 사이비라는 것인가. 그것은 누가 판단할 수 있는가.

종교재판에 의해 십자가형을 받은 예수는 당시 유태교 사회에서 사이비종교 지도자였지 않은가. 종교문화는 인간들의 역사이기 때문에 완벽한 종교란 없다. 세계종교의 역사는 항상 생명적인 요소와 반생명적인 요소가 함께 있어왔다. 이러한 불완전성 때문에 다양한 종교가 역사 속에서 서로 엮여 발전하여 왔던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와 수령 아버지는 상호적인 유대관계를 통하여 생명의 그물망 속에서 만나야 한다. 만날 수 있는 연결고리는 각 전통의 생명적 요소인 것이다. 생명사상은 기독교와 주체사상에도 있다. 서로 다른 문화적 옷을 입고 있으나 생명을 추구하는 질적 차원은 동일한 것이다.

기독교의 하나님 숭배나 북의 수령 숭배나 문화적 표현이 다를 뿐이지 그 신앙의 깊이와 영성은 질적으로 같은 종류라는 말이다. 좋은 신앙과 나쁜 신앙을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는 종교적 독백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종교간의 대화를 통하여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만남조차 불가능하다면 기독교인들은 대화를 시작하기도 전에 대화의 절망속에 빠져 있는 것이다.

생명의 그물망이 그리는 전체 미학은 닫혀진 창이 아니라 활짝 열려있는 창이다. 서로를 포용할 수 있는 문화적 침투성이 가능한 열린 창이다. 닫혀진 창을 하나씩 조심스럽게 여는 것. 나는 남북의 평화공존을 꿈꾸며 결국 기독교도, 주체사상도 이렇게 하나씩 열리는 창 사이로 서로를 조금씩 바라볼 수 있으리라는 희망, 그 만남의 희망과 가능성을 제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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