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렬(국제문제조사연구소 국제관계연구센터 센터장)


‘북핵 회담’에서 ‘한반도 비핵화회담’으로의 성격 변화

이번 4차 6자회담에서 합의된 「공동성명」(이하 베이징성명)의 커다란 의의는 ‘한반도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과 ‘한반도 및 동북아시아 전반의 평화와 안정’을 향한 이정표를 ‘동북아의 6개국 공동으로 합의’해 냈다는 점이다.

지난 1~3차 6자회담은 사실상 북한의 핵포기를 겨냥한 "북핵 회담”이었다. 그러나 이번 베이징성명에서는 회담의 목표를 “한반도의 비핵화”(전문)라고 명시함으로써 6자회담의 성격이 북한의 핵무기 및 핵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한국와 주한미군의 핵문제를 포함한 “한반도비핵화”를 다루기 위한 회담으로 바뀐 것이다.

베이징성명은 또 다른 회담의 목표로서 ‘한반도의 비핵화’를 넘어 ‘한반도와 동북아시아 전반의 평화와 안정’(전문)을 제시함으로써 핵문제의 해결 이후 동북아질서가 새롭게 재편과정에 들어갈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번 성명이 비록 조약과 같은 법적 구속력은 없으나 정치적ㆍ도덕적 구속력을 갖춘 6개국의 ‘공동성명’(Joint Statement)으로 나름대로 이행의 강제성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한반도 비핵화와 동북아 질서재편의 전망을 밝게 해 준다.

‘창조적 모호성’이 발휘된 베이징성명

한반도비핵화의 관점에서 볼 때 이번 베이징성명은 그 동안 쟁점이 되어왔던 CVID원칙(또는 HEU문제), 평화적 핵이용권, 대북 안전보장의 문서화 등에 대해 상호간의 처지와 입장을 고려하여 북ㆍ미간에 교묘한 절충이 이루어졌다.

첫째, 제2차 북핵위기의 원인이 되었던 고농축우라늄(HEU) 문제는 1992년도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남북 공동선언”을 준수, 이행한다는 선에서 우회적으로 처리되었다. 당초 미국은 CVID를 내걸며 원칙적인 입장을 고수해 왔으나, 이번에 우회적 표현에 동의한 것이다.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에서는 일체의 플루토늄 재처리와 우라늄 농축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것이므로, 우회적이나마 북한의 고농축우라늄(HEU) 프로그램을 부정하고 있다. 따라서 HEU프로그램이 없다는 북한의 체면을 살려주면서도, 만약 HEU 의혹이 제기된다면 언제라도 국제기구의 사찰을 통한 검증을 요구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 것이다.

둘째, 4차 6자회담 때부터 핵심적인 쟁점으로 떠올랐던 ‘평화적 핵이용권’ 문제가 모호하게 처리되었다. 미래의 ‘평화적 핵이용권’과 당장의 ‘신포 경수로’를 분리하고, ‘신포 경수로’를 “적절한 시기”에 “논의”할 문제로 미뤄놓는 방식으로 봉합해 놓음으로써 논란의 여지가 남아있다. 북한이 “검증가능한 비핵화”에 충실히 응할 경우에는 경수로 제공이 가능할 수도 있지만, 약속을 위반할 때는 중단될 수도 있는 것이다.

셋째, 그 동안 북한이 주장해 왔던 대북 안전보장의 문서화도 간접적인 방식으로 해결되었다. 미국의 한반도내 핵무기 부재선언과 함께 “핵무기 또는 재래식무기로 북한을 공격 또는 침공할 의사가 없다”(1항)는 표현을 공동성명에 끼워 넣는 방식으로 간접적인 문서보장이 이루어진 것이다. 하지만 앞 문장으로 볼 때 ‘모든 핵무기와 현존하는 핵계획의 포기’와 ‘NPT 및 IAEA안전조치 복귀’를 조건으로 미국이 ‘대북 불가침’을 확인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북ㆍ미 관계 : ‘폭정의 전초기지’에서 ‘민주화의 전초기지’로

베이징성명을 보는 국내 언론의 시각 중에 북한이 더 많이 양보했느니 미국이 더 많이 양보했느니 하는 논란이 있다. 한쪽은 북한이 원하는 것을 대부분 얻었다는 주장이고, 다른 한쪽은 북한이 대폭 양보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는 이번 공동성명의 의의를 고의로 훼손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무의미한 공론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북ㆍ미 양측의 태도변화에 담겨있는 강력한 관계개선 의지를 읽어야 할 것이다.

먼저, 북측은 몇 가지 중요한 양보조치를 취하였다. 무엇보다 신포 경수로와 관련하여 “당장”이 아니라 “적절한 시기에”, 그것도 “제공 합의”가 아니라 “제공문제를 논의”하는 데 동의하였다. 또한 북한은 “핵무기 프로그램”의 포기에 국한해야 한다는 기존의 주장에서 물러나 “모든 핵무기와 현존하는 핵계획”을 포기할 것을 약속하였다. 더 나아가 2.10 ‘핵무기 보유선언’에 근거하여 주장해 왔던 ‘동북아 핵군축회담’, ‘한반도비핵지대화’ 주장을 철회하고 1992년의 「한반도비핵화 공동선언」에 따르기로 한 것이다. 이것은 북측의 기존입장에서 보면 대단한 변화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미국도 국내 여론의 비판을 무릅쓰고 그 동안 취해왔던 “합의문에 경수로라는 문구를 삽입하지 않겠다”는 주장과 “대북 에너지 제공 불참”이라는 주장을 거두어들이는 결단을 내렸다. 미 공화당은 1994년 제네바기본합의 때부터 줄곧 경수로 제공을 반대해 왔으나 이번에는 그 가능성을 열어준 것이다. 또한 부시 미 행정부는 ‘나쁜 행동에는 보상하지 않는다’는 방침에 따라 대북 에너지 제공을 거부해 왔다. 하지만 이번 베이징성명에서 미국은 비록 부담을 최소화한 상징적인 수준이 될 것으로 보이지만 동참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렇다면, 이처럼 북한과 미국이 종래의 강경한 입장에서 서로 한발씩 물러서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우선, 북한으로서는 오랜 경제난으로 새로운 돌파구 마련이 필요했고, 내부적으로 7.1경제관리개선조치 이후 개혁ㆍ개방에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미국도 이라크 전후처리, 이란 핵문제 등 중동문제가 커다란 숙제로 남아있는 데다가, 북핵문제의 지연으로 한미동맹, 미일동맹 재조정 작업이 차질을 빚고 있어 어떻게든 이 문제를 매듭짓고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북한문제’를 잘 푼다면 오히려 북한을 ‘폭정의 전초기지’에서 중국 등을 겨냥한 ‘민주화의 전초기지’로 전략적 활용이 가능하다는 계산도 깔려있는 것으로 보인다.

‘북핵 이후’ 동북아질서 재편의 주도권을 둘러싼 암중모색

이번 베이징성명의 가장 커다란 특징은 단순히 “한반도비핵화”를 합의한 데 그치지 않고, 이를 발전시켜 한반도 및 동북아 냉전구조의 해체를 약속했다는 점이다. 공동성명 제4항은 회담 참가 6개국이 동북아시아의 항구적인 평화와 안정을 위해 공동 노력할 것을 공약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으로, 한반도 차원에서 직접 관련당사국들은 적절한 별도 포럼에서 한반도의 영구적 평화체제에 관한 협상을 가질 것을 약속하였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6자회담의 모든 참가국이 아니라 “직접 관련당사국”에게만 참가티켓이 주어진다는 점이다. 한반도평화협정체제의 참가범위는 남북한과 미국의 3자회담 형식이 되거나 아니면 중국도 포함된 ‘3+1’방식이 될 수 있다.

지난 4자회담(1997~1999)의 경험에 비춰볼 때, 한반도 평화협정체제가 논의되기 위해서는 이에 앞서 또는 병행하여 군사적 긴장완화 논의가 불가피하다. 이런 점을 감안한다면, 오는 12월로 예정된 제17차 장관급회담에 앞서 군사적 신뢰구축과 군비통제를 협의하기 위한 국방장관회담의 조기개최도 기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제2차 남북정상회담의 조기 개최도 예상해 볼 수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답방을 통해 가칭 ‘남북 평화선언’을 발표하고, 이를 기초로 남북 양측이 실무팀을 구성해 평화협정 체결을 위한 작업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이번 베이징성명을 계기로 6개국들은 동북아 다자안보틀(multilateral security framework)의 구축에 본격적으로 나설 것으로 보인다. 이미 지난 8월초 로버트 죌릭 미 국무부 부장관의 베이징 방문 때 미국과 중국은 한반도의 현상변경과 동북아 다자안보틀의 구축에 관해 20시간이나 의견을 나누었다고 한다. 이러한 움직임은 오는 10월 새로 부임할 알렉산더 버슈보 주한 미 대사의 임명과도 관계가 있다. 그는 나토대사와 러시아대사를 역임한 거물급 외교관으로, 미 국무부 소련과장으로 있을 당시 소련과 동국공산권의 붕괴과정, 즉 동서냉전구조의 해체를 직접 보고 관리한 경험을 갖고 있다.

이러한 미ㆍ중 양국의 움직임에 일본도 발 빠르게 대처하고 있다. 지난 9.11 총선에서 압승을 거둔 고이즈미 일본총리는 기자회견에서 임기중 수교노력을 강화하겠다고 천명했다. 이미 두 차례나 평양을 방문했던 고이즈미 총리는 동북아질서재편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는 더 이상 북ㆍ일 수교협상을 늦출 수 없다고 판단한 것 같다.

“행동 대 행동”원칙을 담을 ‘이행합의문’ 도출과 사찰ㆍ검증이 남은 과제

이번 베이징성명에서는 5차 6자회담을 오는 11월초 베이징에서 열기로 합의하고, 이번 베이징성명의 ‘공약 대 공약’ 선언을 넘어 ‘행동 대 행동’ 원칙에 입각하여 단계적 방식으로 이행합의문을 작성하여 상호 조율된 조치를 취하기로 약속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원칙 합의에도 불구하고, 이행합의문을 작성하는 데는 수많은 난관이 도사리고 있다.

무엇보다 공동성명에서 우회적으로나 미봉적으로 모호한 표현의 경우, 이행합의문의 작성에서 새로운 갈등의 불씨로 작용할 수 있다. 이러한 조짐은 벌써부터 나타나고 있다. 9월 20일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담화를 발표하여 "경수로를 제공하는 즉시 NPT에 복귀할 것"이라고 밝혀 북ㆍ미간 논란이 시작될 조짐이다. 미국의 대북 서면 안전보장도 NPT, IAEA 복귀를 전제로 한 것이므로, 그 전까지는 여전히 ‘선제공격 독트린’이 유효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사찰ㆍ검증에 관한 방식을 놓고는 북ㆍ미 양측이 쉽게 합의하기 어려운 부분이 나타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HEU의 사찰문제를 둘러싸고 합의의 봉합이 터질 가능성도 있다. 이란핵문제의 경우도 영ㆍ독ㆍ프 3국과 「테헤란합의」(2003.10)와 「파리합의」(2004.11)를 통해 원칙 마련에는 성공했지만, 사찰의 범위를 둘러싸고 여전히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베이징성명에 따른 한반도비핵화의 미래를 비관적으로 바라볼 필요는 없다. 극복할 수 없을 것 같던 장애물들을 이미 여러 차례 뛰어넘어 원칙선언문‘의 합의에 도달한 저력이 있다. 또한 북한의 개혁ㆍ개방과 남북관계의 발전도 이미 되돌이킬 수 없는 단계에 들어섰다. 무엇보다 새로운 동북아 다자안보협력 논의가 미ㆍ중간의 대립구도를 완화시키고 일ㆍ중간의 충돌을 예방할 수 있는 ‘윈-윈 게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점검해 봐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한반도평화협정 체제를 논의하기 위한 회담형식을 확정하고, 장성급회담, 국방장관회담 등 남북간의 고위급 군사회담을 통한 군비통제회담을 시작해야 한다. 아울러 본격적인 평화협정 체결에 맞춰 국내 법적, 제도적 정비를 서두르고, 특히 단순히 교류ㆍ협력과 평화공존에 머무르지 않고, 평화통일을 내다보는 보다 완성된 형태의 「남북관계기본법」 제정이 필요하다. 여기서 제2차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된다면 한반도비핵화의 달성과 한반도평화협정체제의 구축을 앞당기는 데 기여하게 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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