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민경우 전 범민련남측본부 사무처장이 전주 교도소에서 출소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양희 객원기자]
나는 8월 14일 오전 10시 전주교도소를 나섰다. 내가 국가보안법에 의해 사회로부터 격리된 지 1년 8개월 보름만의 있이었다. 전주교도소를 나서면서 느껴지는 공기는 말할 수 없이 상쾌하고 정겨웠다. 교도소 안과 밖의 공기가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교도소 안에서 맡았던 음울한 자취는 언제 그랬는가 싶게 빠르게 녹아 내렸다.

전주교도소를 나서자마자 나는 아내와 함께 8.15 대축전이 열리는 상암경기장과 경희대를 찾았다. 그 후 나흘 동안 꿈 같은 시간이 흘렀다.

상암경기장의 열기는 놀라웠다. 6만의 군중이 함께 부르는 통일의 외침은 거대한 파도가 되어 갓 사회인이 된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6.15 통일대축전에서 있었던 북측의 열기와 비교하곤 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개막식 시작 처음 듬성듬성 비어있던 관람석에 신경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경기장 한편에 자리잡은 자주통일진영의 조직된 응원과 그 반대편쯤에 자리한 일반 시민의 자발적인 참여가 잘 어울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14일 경희대에서 ‘조국광복 60주년 자주평화통일을 위한 결의의 밤’ 행사가 열렸다.
[사진 - 통일뉴스 김규종 기자]
내가 기억하는 통일행사는 주로 일사불란한 대오를 지어 경찰력의 봉쇄를 뚫고 대회를 사수하는 형태였다. 물론 여기서 느끼는 비장함과 감동 또한 적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소망했던 것은 공권력의 탄압을 이겨낼 각오가 있는 선각자들의 잔치가 아니라 국민대중, 민족 전체가 참여하는 대동의 광장이었다.

탁 트인 공간, 무질서하지만 나름의 멋과 정취를 풍겨내는 6만이 부르는 화합의 장은 내게 지난 기간 자주통일진영이 꿈속에 그렸던 통일행사의 한 전형을 눈앞에 펼쳐 놓았다. 그리고 이 광경은 조만간 거대한 물결이 되어 더 큰 대열을 이루리라. 지켜보는 사람이 없었다면 행사가 진행되는 3시간 나는 그냥 울고만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8.15 축전의 공식 행사 등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아쉬움은 남지만 언젠가 내게도 기회는 올 것이다. 통일운동 과정에서 주로 내가 했던 일은 남북해외 인사들이 상호 회합하고 통신하여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연락들이 오고 가도록 하는 일이었다.

90년대에는 남북해외 범민련 조직의 인사말과 공동 성명을 조직하는 일이 많았다. 내용으로 치자면 별 것 아닌 이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감옥을 오갔는가? 6.15 선언 이후에는 남북 민간통일운동 진영의 왕래와 만남을 주선하고 조정하는 일이 많았다. 범민련 남측본부 사무처장이라는 지위는 그런 일을 하기에 적당한 자리였다.

▶8.15 특사로 출소한 민경우 전 범민련 남측본부 사무처장
(오른쪽)과 이동진 한총련 조국통일위원장이 출소 인사를
전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규종 기자]
남북 공동행사의 전체적 양상도 범민련.한총련 성원들이나 노동자.농민보다는 공신력있고 지명도 있는 인사들이 우선하곤 했다. 이것은 6.15 공동선언 이후 6.15 공동선언이 안착되는 시기까지 어쩔 수 없었던 현상일 것이다.

그러나 이 족쇄와 굴레도 눈에 띄게 무너지고 있었다. 범민련 남측본부의 이종린 선생, 이경원 사무처장, 한총련의 송효원 의장 등이 정부의 동의 아래 방북하는가 하면 일본과 유럽, 미국 등에서 활동했던 통일인사들이 속속 방남하였다. 이 과정에서 정부의 통제와 사회 여론 또한 달라져 있었다. 

참으로 놀라웠던 것은 북측 참가단의 움직임이다. 그 중 경탄을 자아낼만한 사건은 현충원 참배일 것이다. 나는 현충원 참배에는 분명한 정치적 목적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세상을 순수한 것, 정치적인 것으로 갈라놓는 잣대 자체가 황당한 이분법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정치적 목적이란 남에 존재하는 보수반북 정서를 완화하기 위한 정치적 의도일 것이다. 현충원 참배는 남북이 적대하는 가장 커다란 암초인 6.25전쟁을 뛰어 넘겠다는 정치적 지향을 보여 준 것이다. 나는 이러한 대담한 정치력이 남에서 나오기를 진심으로 바랬다.

그러나 2004년 국가보안법 개폐 과정에서 보듯 남의 정치력은 통일 정세의 흐름을 따라잡지 못했다. 과거와 당파의 이해에 얽매여 절절 매는 모습은 남의 미래를 어둡게 했다. 시대를 따라 가지 못하는 자는 미래를 열 수 없는 법이다. 반면 현충원 참배는 시대의 한계를 뛰어 넘는 참다운 정치력을 잘 보여 주었다. 남과 북, 북과 남이 언젠가는 털어버려야 할 과거의 굴레를 한 웅큼 덜어낸 북 대표단의 행보에 깊은 경의를 보낸다.    

현충원 참배의 한 측면이 보수반북 정서를 완화하기 위한 정치적 행보였다면 다른 측면은 화해와 단합의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자는 민족적 메시지이기도 할 것이다. 자주통일운동의 진전을 위해서는 훈련되고 잘 기획된 공동의 주장과 행사도 필요하지만 대중의 심금을 울리는 화해의 메시지도 중요할 것이다. 자주통일운동이 진정으로 8천만 민족 전체의 운동이라면 무지렁이 대중, 남녀노소 모두에 다가서는 큰 걸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현충원 참배에서 내가 본 것은 모두와 화해하고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형제자매, 피를 나눈 동족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용서와 관용의 정신이었다. 아름답고 감동적인 화폭을 만들어낸 남북의 당국자들에게 진심으로 박수를 보낸다. 민간 통일운동 진영이 자그맣게 열어놓은 오솔길을 따라 당국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큰 길을 여는 작업을 이번 8.15 축전은 유감없이 했다고 생각한다.

▶17일 범민련 해외본부 인사들을 환송하는 행사에서 '6.15공동위원회' 곽동의 공동위
원장과 민 처장이 감격적인 포옹을 나눴다.  [사진 - 통일뉴스 이강호 기자]
8월 17일 저녁 나는 용산 웨딩홀에서 개최된 범민련 해외본부 성원들을 환송하는 모임에 참가했다. 이 자리에는 6.15해외준비위의 곽동의 의장을 비롯 양은식, 양동민 선생 등 범민련 재일조선인본부, 일본지역본부, 미국본부, 유럽본부의 성원들이 참석했다.

나는 이들의 이름을 역사책에서, 각종 범민련 문서에서 숱하게 보아왔다. 매년 범민족대회, 범민련 회의가 있을 때마다 빠짐없이 볼 수 있었던 낯익은 이름들, 그러나 실제로는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사람들... 나는 이름과 얼굴을 맞추어 가며 범민련을 감싸고돌았던 국가보안법의 망령이 서서히 그리고 의미있게 무너지고 있음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편안하고 아늑했던 즐거운 시간이었다.

6.15축전에서 8.15행사에 이르는 기간 자주통일정세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2005년 벽두가 시작되면서 지루했던 2004년과는 다른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새 시대의 징표는 다음의 4가지 점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첫째는 북미 대결이다.

6자회담이라는 외피를 쓴 북미 공방은 2004년의 완만하고 느슨한 교착국면을 지나 가파른 대치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북미 공방의 시시콜콜한 쟁점을 언급할 필요는 없을 듯 하다. 그저 감(感)만으로도 결과는 분명해 보인다. 미국은 결코 북을 넘어 설 수 없다. 이것은 지난 기간 제국주의에 맞섰던 전 세계 민족해방 투쟁 과정에서 여지없이 실증되었다. 어떠한 강대한 제국주의도 민족에 눈을 뜬 민중의 힘을 이길 수 없다. 북미공방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미국은 2003년 자신들이 이라크에서 저지른 수렁에서도 미처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둘째는 남북관계의 발전이다.

2005년 상반기의 어느 시점부터 남북관계는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다. 이것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잘 기획된 계획의 결과이다. 현충원 참배에서 보듯 남북의 당국자들이 보여주는 이벤트를 소화할 만큼 국민 여론 또한 성숙되어 있다. 아마도 이것은 중간 과정에 불과할 것이다. 2005년이 끝나는 어느 시점이 되면 우리는 이전에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던 새로운 상황에서 남북관계를 바라보게 될 것이다. 8.15는 시작에 불과하다.

셋째는 남에서 반미자주화 투쟁의 진전이다.

2005년 상반기 광주 송정리와 평택에서 대규모 반미투쟁이 벌어졌다. 미군기지 재편을 둘러싼 치열한 공방전의 핵심은 주한미군 존재 그 자체이다. 길고 험난했던 반미자주화 투쟁은 2005년에 접어들어 주한미군 전체를 정조준하여 진행하는 마지막 단계로 서서히 접어들고 있다. 고난으로 점철된 반미자주화 운동의 최종 기착지로 빠르게 다가서고 있다. 이를 북미공방의 귀결, 남북관계 개선 속도와 결부해서 판단한다면 그 결과 또한 낙관적일 것으로 생각한다.

넷째는 6.15 공동위원회의 결성이다.

90년 결성된 범민련은 남북해외 민족 전체를 단합시킨 통일운동조직이다. 우리는 범민련을 통해 민족대단결의 실체를 보았고 민족대단합의 여망을 키워 왔다. 그러나 범민련은 90년대와 6.15공동선언 발표 5돌에 이르는 시기까지 숱한 시련과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것은 조국통일 정세의 진통과도 맥을 같이 하는 것이었다. 6.15 공동위원회의 결성은 우리가 꿈에도 그렸던 통일운동조직, 민족 전체의 조국통일의지를 하나로 결집시킬 대연합조직의 탄생을 의미한다.

위 4가지의 징표는 6.15공동선언을 배경으로 이루어진 것이면서 6.15공동선언이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표라고 할만 하다. 6.15공동선언은 7.4공동성명의 조국통일 3대원칙을 온전히 계승한 민족의 자주.평화.민족대단결 선언이며 조국통일의 이정표이다.

지난 5년의 기간이 6.15공동선언의 의의가 서서히 착근하는 시기였다면 앞으로의 시기는 6.15공동선언이 자신의 온전한 모습을 드러내는 통일의 시대가 될 것이다. 우리는 머지않은 장래에 6.15선언이 가리키는 궤도를 따라 통일조국의 시대로 들어서게 될 것이다.

8.15특사를 통해 다시 자유의 몸이 된 것이 기쁘다. 아내와 아들과 보냈던 꿈 같던 나흘 또한 너무 기쁘다. 그리고 조국통일 정세가 새로운 단계로 접어 든 시점에서 내가 다시 사회인이 된 것 또한 너무나 기쁘다.

시대와 인간은 함께 어울리며 함께 가는 법이다. 인간이 시대와 어울리며 정방향에서 함께 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한 행복이 어디에 있겠는가? 고통스럽던 감옥생활이지만 8.15축전은 내가 살았던 지난날이 시대와 조응하는 것이었음을 잘 보여주었다. 이번 8.15축전은 내가 시대와 엇서는 부랑아가 되지 않았음을 보여준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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