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두율 (독일 뮌스터대학 사회학 교수)

송두율 교수가 6.15남북공동선언 5주년에 즈음하여 통일뉴스에 특별메시지를 보내왔다. 지난 2003년 9월, 37년만에 고국땅을 밟았다가 곧바로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되어 1년간 고초를 받다가 2004년 8월 출국한 이래 10개월만의 일이다. 송 교수는 메시지를 통해 "자주"의 의미를 폭 넓게 이해한다면 6.15공동선언이 남북을 동시에 아우를 수 있는 민족통일의 인식론적인 틀로서도 새롭게 평가될 수 있음을 밝히고 있다. - 편집자 주

▶2003년 9월22일 37년만에 고국땅을 밟은 송두율 교수가 인천국제공항 기자회견장
에서 상념에 잠겨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연합제"와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은 이론적인 내공 필요

<6.15공동선언>의 발표 5주년을 맞아 그 내용을 다시 한번 살펴본다. 그간 어떤 조항들이 과연 선언의 기본정신에 따라 실천에 옮겨졌으며, 또 어떤 조항들이 그렇지 못했던가를 가늠해 보기 위해서다.

우선 인도적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을 위시한 남북간의 여러 분야에 걸친 협력과 교류를 규정한 공동선언의 제3항과 제4항은 비록 만족스럽지는 못해도 선언 이전의 상태와 비교해 본다면 나름대로 큰 성과가 있었다고 평가될 수 있다.

선언의 제2항, 즉 남측의 "연합제"와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간에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이를 토대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자는 내용을 구체적으로 다지는데 있어서 별로 진전은 없었다.

물론 이 항목의 내용이 장기적인 과정을 전제하고도 있지만, 또 정치형태에 관한 여러 가지 이론적인 내공도 필요로 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 일반국민의 정서 속으로 파고드는데 있어서 한계가 있었다. 또 이 항목의 내용을 보다 더 구체화시키고 풍부하게 만들 수 있기에는 북의 "연방제"가 남쪽에서 오랫동안 너무 부정적으로만 인식되어왔다.

"자주"는 통일문제의 사활이 걸려 있는 문제

무엇보다도 문제는 제1항, 즉 “통일문제를 주인인 우리민족끼리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한다”는 내용이다. 바로 이 내용을 공동선언의 첫째자리에 남북이 함께 놓았다는 사실에서도 이의 중요성은 분명하다.

여담이지만 남북정상이 만나기 바로 전날 <동아일보> - 이 신문은 작년 7월 말 서울 구치소를 나오면서 필자가 지적했던 바로 그 썩은 내나는 신문들 가운데 하나였지만 - 의 부탁으로 기고했던 글 가운데 공동선언 발표의 가능성과 함께 자주적 통일 원칙이 제일 먼저 부각될 것이라고 필자가 예견했던 적이 있다.

이 분석이 적중해서 필자는 북을 아주 잘 아는 사람으로 평가도 되었지만, 이로 인해 후에 필자에 대한 일부 사람들의 악의적인 평가를 더욱 부채질까지도 했다.

그러나 과학적인 입장에서 우리의 통일문제를 분석해 보고, 무엇이 가장 절실한 문제인가를 조금만 고민해 본다면 "자주"는 우리의 통일문제의 사활이 걸려 있는 문제라는 것은 곧 드러난다. 물론 이때의 "자주"의 개념은 그저 일직선(一直線)적인 "주체-객체"의 관계에서만 이해될 수 없을 정도로 다차원(多次元)적인 여러 가지 내용을 담고 있다.

"자주" 개념은 일직선적이 아닌 다차원적인 내용

공동선언이 발표된 지 얼마 안 되어 남북간에 "자주"의 내용을 둘러싼 해석상의 차이와 갈등이 곧 나타났다. 북이 "민족공조"와 "우리 민족끼리"를 강조하면서 남의 "한-미-일 공조체제"를 문제삼자, 남은 오늘날의 "자주"는 주변국과도 잘 지내는 것을 의미한다고 응수했다.

사실 이와 같이 "자주"의 내용을 둘러싼 상호공방은 이론적으로 보아도 무리는 아니다. 오늘날 철학과 사회과학에서도 "주체"를 둘러싼 인식론적인 논쟁은 치열하다.

한 쪽에서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전제하는 "주체"는 단지 가상(假像)에 지나지 않으며 우리는 이미 주어진 "체계(體系)"나 "관계(關係)"속에 있을 뿐이라고 주장하는데 대하여, 다른 쪽에서는 "주체"는 결코 사라질 수 없는 계몽과 해방의 담지자(擔持者)라고 반박하고 있다.

전자가 이른바 탈근대주의적인 해체(Deconstruction)의 철학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근대주의적인 주체(Subject)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도 남쪽의 "세계화"를, 북의 "주체화"를 담고 있는 서로 다른 인식론적인 틀을 엿볼 수 있다. "세계화"를 통해서 주체를 강화하겠다는 남쪽의 개발전략과 "주체화"를 통해서 세계 안에서 자기자리를 구축하겠다는 북쪽의 개발전략의 차이도 느낄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전자는 탈(脫)민족적 지평(地平)의 개념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후자는 민족적 경계(境界)의 개념을 고수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6.15선언은 민족통일의 인식론적인 틀로서 새롭게 평가될 수 있어

바로 이렇게 "자주"의 의미를 여러 차원에 걸쳐 보다 더 폭 넓게 이해한다면 <6.15공동선언>은 남쪽의 "세계화"를 통한 "주체화"는 물론, 북쪽의 "주체화"를 통한 "세계화"를 동시에 아우를 수 있는 민족통일의 인식론적인 틀로서도 새롭게 평가될 수 있다.

민족국가가 "세계화"의 엄청난 도전을 맞고 있는 이 세계사적 전환기에도 아직 통일된 민족국가를 건설하지 못한 불행한 현실을 타개하면서, 동시에 이를 넘어서서 보편적인 지구적 과제도 해결한다는 전망 속에서 <6.15공동선언>의 의미를 그의 발표 5주년을 맞아 다시 한번 음미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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