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창준(한국민권연구소 연구위원)


10개월 만에 개최되었던 남북 당국회담이 큰 성과를 내고 끝났다. 그러나 대다수 언론에서는 비료만 주고 끝났다며 다음과 같이 평가절하 한다.

“북핵 진전없이 비료만 주는 회담은 안돼”(중앙일보, 5.18)
“남북차관급회담 核 빠진 합의… 절반의 성공”(세계일보, 5.19)
“남북차관급회담 3개항 합의, 비료주고 장관회담 성사시켜”(매일경제 5.20)
“또 南의 짝사랑으로 끝난 남북회담”(국민일보 5.20)
“이런 남북회담이 뭐가 그리 기쁘다는 말인가”(조선일보 5.20)
“북핵에 無力’ 확인한 盧 정부”(동아일보, 5.20)

평가절하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북핵문제’라는 심각한 상황에 대해서는 어떤 논의도, 합의도 이루지 않은 채, 비료만을 제공하는 회담이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장관급회담 재개라는 ‘상징적 합의’만 이루어 졌을 뿐 이산가족 상봉 등의 ‘실질적 사항’에 대해서는 어떠한 합의도 없었다는 비판이 추가된다.

<한겨레>만이 그나마 객관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한겨레는 5월 20일 인터넷판에서 “남북관계 복원 전기되기를”이라는 제목의 사설을 발표하면서, “남북 대화통로 확보는 복잡미묘한 핵 문제를 푸는 데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다. 우리 정부가 나름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 셈이다”라고 평가했다. “우리 사회 일각에서 핵 문제를 명쾌하게 언급하지 못한 채 비료만 지원하기로 한 것 아니냐며 지나치게 비판적 태도를 보이는 것은 남북 문제를 너무 대결적 시각으로 보는 것”이라며 대다수 언론의 논조를 비판하기도 하였다. 물론 <한겨레> 역시 “북한 핵 문제에 대해 구체적 언급을 하지 못하고 넘어간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그러나 당국회담은 대다수 언론의 평가절하와는 달리 의미있는 합의를 이룬 회담이었다. 다만 언론들이 회담의 성과를 무시한 채 문제점만을 부각시키고 있다. ‘핵수렁’에 빠져 객관적인 시각이 결여되어 있으며, 감정적이며 무책임한 선동이 횡행하고 있다.

10개월 만의 회담 복원, 한술 밥에 배부를 수 없다
- 남북 관계 복원의 계기를 마련한 당국 회담

이번 회담을 평가할 때 일반적으로 비료지원 문제가 먼저 언급된다. 그리고 북측의 회담 행태를 비판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즉 북측은 비료지원을 목적으로 회담에 임했으며 남측은 어떤 것도 따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는 비료지원의 성격을 도외시한 평가이며, 철저히 상호주의에 입각한 관점이라 할 수 있다.

비료지원은 인도주의적 지원이다. 상호주의를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비료지원은 상호주의와는 관계없는 것이다. 남측 당국이 회담이 없는 조건에서 비료지원은 어렵다는 입장을 표명했다는 점에서 회담이 재개됨과 동시에 비료지원은 기정사실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오히려 남북 회담이 재개됨으로써 남측은 비료를 지원할 수 있는 명분이 생겼고, 북측 역시 비료가 절실한 상황에서 남과 북은 상호 이득을 취한 것이다. 애초 지원 계획의 20만 톤 외에 30만 톤을 추가지원하기로 한 것 역시 북측의 요구에 남측이 인도주의에 입각해서 화답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남북 회담에서 어떤 합의의 대가로서 비료를 지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번 당국회담에서 남과 북은 제15차 장관급 회담을 합의함으로써 남북 관계를 정상화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남측의 많은 사람들이 아쉬움으로 표출하는 이산가족 상봉 문제 등은 6월에 열리게 될 장관급 회담이 성사된다면 원만히 추진될 것이다.

무엇보다 높게 평가해야 할 점은 6.15 통일민족대회에 양측 정부대표단을 파견하기로 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민(民)의 통일행사에 관(官)의 통일행사가 공동으로 진행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남북 관계의 특성상 민과 관이 독자의 몫을 수행함과 동시에 민과 관이 보조를 맞추어야 제대로 발전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번 당국회담에서 정부 대표단을 파견하기로 합의한 것은 남북 관계가 종합적으로 발전시키는 데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남북관계를 ‘핵문제’의 수렁에 빠뜨리려 하는가
- 남북 관계 발전을 시비질하는 무책임한 선동

남북 당국회담을 평가절하 하는 것은 글 서두에서 언급했던 언론사만의 행태는 아니었다. 이번 회담에 대한 한나라당의 5월 20일자 논평은 평가절하를 뛰어 넘어 폄하 수준이었다. 중요한 골자만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그러나 이번 회담은 결코 성공했다고 평가 할 수 없다. 형식과 내용면에서 보면 국민의 자존심을 매우 상하게 했다. 정동영 체제의 통일부는 대북 정책에서 실패했음이 입증 되었다.
남한의 차관급이 북한의 국장급을 모시고 하는 회의였고 북핵과 이산가족상봉 재개 등 우리 요구는 완전 묵살 당했다. 정동영 장관 체면 세워 달라고 애원하는 읍소 모임 같았다. 정 안되면 이산가족상봉 재개 하나라도 관철시켰어야 옳다.”

그나마 이 정도에 그쳤으면 다행이다. 그러나 한나라당 논평은 ‘저자세 비굴회담의 전형’이라는 비난으로 이어졌다. 정동영 장관 체면을 세우기 위해 비료만 제공하고 북핵문제와 이산가족상봉에 대해서는 말 한마디 하지 못했으니 ‘저자세 비굴회담’이었다는 것이다.

한나라당의 평가에는 ‘북핵문제’, 이산가족 상봉 재개, 비료 지원 등이 병렬적으로 나열되어 있다. 이 논평만으로는 한나라당이 무엇을 중심에 두고 평가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한나라당 홈페이지 ‘국회의원 발언대’에 게시된 송영선의 5월 23일 의견을 보면 한나라당이 무엇에 주목하고 있는지 정확히 드러난다.

“이번 남북 당국자회담에서 당초 우리 정부의 주장대로, 북핵문제 해결과 이를 위한 6자회담 북한 복귀가 주요 의제로 논의되어 비료지원의 결과가 이루어졌다면, 우리 국민들은 북에서 온 빈 배에서도 희망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주요한 북핵 문제는 단 한 마디도 언급되지 못하고, 장관급 회담 개최와 특정 정치인의 평양행을 위한 논의 끝에 나온 비료지원이기 때문에 국민들은 북에서 온 빈 배에서 새로운 희망을 찾지 못하는 것이다.”

한나라당 역시 ‘북핵문제’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대다수 언론들의 시각과 비슷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제 논해야 할 것은 남북 관계에서 ‘북핵 문제’가 갖는 의미이다. 과연 대다수 언론과 한나라당이 주장하는 것처럼 남북 대화에서 ‘북핵문제’를 강하게 거론하는 것이 옳은가? 남측이 북측에 6자회담 복귀를 요구하는 것이 남북 관계를 발전시키는데 어떤 작용을 할 것인가?

‘북핵 문제’로 통칭되는 이 문제는 본질상 북한과 미국과의 핵대결이다. 미국은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려 한다면서 문제를 제기했고, 북한은 미국이 핵위협을 가하고 있다면서 문제를 제기하면서 시작된 것이 ‘북핵 문제’이다. 따라서 ‘북핵 문제’라는 이 용어는 ‘북미간 핵문제’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

‘북미간 핵문제’는 북한과 미국 사이의 정치적 타결에 의해서 평화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 만약 정치적 타결을 볼 수 없다면 이 문제는 보다 장기간 지속되거나 군사적 충돌로 비화될 것이다. ‘중국 역할론’이 많이 거론되지만 중국 역시 북한과 미국의 중재자 역할을 하는 것이지 중국이 해결사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은 어떠한가. 한국 정부 역시 중국의 중재자 역할 이상을 해오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 이상의 역할을 하고 싶다는 주관적 욕망이야 존재할지언정 ‘북미간 핵문제’라는 구조상 중국과 한국의 역할은 한계가 있는 것이다.

이같은 한계는 1994년 1차 핵위기 국면에서 명확히 드러났다. 당시 미국은 북한을 폭격하기로 결정하고 주한미대사관 직원들의 가족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고 있었다. 전쟁이 임박했던 것이다. 김영삼 당시 대통령이 클린턴 대통령과 30분 넘게 전화통화를 하면서 전쟁은 안 된다고 역설하였지만 클린턴의 마음을 변화시키지 못했다. 1994년 6월, 임박한 전쟁 위기가 해소될 수 있었던 것은 북한의 김일성 주석과 미국의 지미 카터 전 대통령간의 극적 합의에 의해서였다. 북한은 미국의 요구를 수용하여 영변 핵시설을 동결시키기로 하였으며 미국은 경수로 원자로를 제공하고, 해마다 50만 톤의 중유를 북한에 제공하기로 함으로써 1차 북미간 핵문제는 해결되었던 것이다.

2002년 10월부터 발생한 북미간 2차 핵문제 역시 1994년의 경우와 다르지 않다. 지금도 핵문제는 북미간의 첨예한 정치군사적 대결로 진행되고 있으며, 여전히 문제 해결의 관건은 북한과 미국이 쥐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남북 대화의 의제로 핵문제를 상정하여 남과 북이 무엇을 논의할 수 있을까. 남측은 북측이 요구하는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을 철회시킬 수 있는가? 안타깝게도 남측 당국은 그와 같은 책임과 권한이 없다.

책임질 수 없는 사안을 회담 의제로 상정하고, 북측이 수용할 수 없는 요구를 남측이 제기한다는 것은 남북 관계를 다시 한 번 경색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남북 관계는 그야말로 ‘핵수렁’에 빠지는 것이다.

따라서 남북 회담에서 북미간 핵문제를 집중적으로 거론하지 못했다며 이번 회담을 평가절하 하는 것은 남북 관계를 ‘핵수렁’에 빠뜨려 남북 관계 발전을 막고자 하는 반통일적이며 무책임한 선동이라 할 수 있다.

노무현 대통령, 미국에게 할 말을 할 때가 왔다
- 한미 정상회담은 남북관계 발전과 한반도 평화를 위한 중요한 분수령

6월 11일 한미 정상회담이 개최된다고 한다. 김만수 청와대 대변인은 이번 회담의 주된 안건이 한미 동맹과 북미간 핵문제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혔다. 한미 동맹을 통해 북미간 핵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조건을 마련하겠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의 이같은 입장이 쉽게 관철될 만큼 한미 동맹의 현실은 간단치 않다.

일본의 <니혼게이자이> 신문에 의하면 부시 대통령이 이번 회담에서 ‘작전계획 5029’를 재추진할 것이라고 한다. 만약 이 보도가 사실이라면 노무현 정부의 핵문제 평화적 해결 원칙은 크나큰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노무현 정부가 일관되게 추진했던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과 미국이 일관되게 추진하고 있는 ‘작전계획 5029’는 결코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의 박진 국회의원은 ‘일본 방위청과 미국 정부가 노무현 정권에 불만이 있다’며 은근한 압력을 노무현 대통령에게 가하는 것도 우려스러운 대목이다.

또 하나 걱정되는 것은 한미 정상회담의 시기이다. 이번 한미 정상회담은 6.15 대회를 불과 4일, 제15차 장관급 회담을 10일 앞두고 열린다. 지난 2003년 한미 정상회담에서 노무현 정부는 핵문제에서 ‘추가적 조치’에 대해서 합의하고 돌아온 바 있다. 만약 이번 정상회담에서도 2년 전과 유사한 형태의 합의를 보게 된다면 당국 사이에 합의된 두 개의 일정이 원만하게 추진될 수 없을 뿐더러 남북 관계는 다시 한번 표류하게 될 것이다. 또한 미국의 군사적 옵션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즉 더 깊은 ‘핵수렁’에 빠지는 것이다.

이같은 파국을 막기 위해서 노무현 대통령은 다음과 같은 점을 분명히 하면서 정상회담에 임해야 한다.

첫째,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이라는 원칙적 입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내용을 미국에게 요구해야 한다. 바로 미국의 ‘대북 선제공격’을 반대한다는 분명한 메시지 전달이다. 미국 행정부는 지금까지 ‘대북 선제공격’을 부인해 왔다. 그러나 1994년 당시 미국이 ‘선제공격’을 천명하고 대북 군사 행동을 계획한 것이 아니었다. 부시 행정부의 ‘선제공격’ 부인 발언을 믿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둘째, 미국 행정부의 ‘작전계획 5029’를 원천적으로 봉쇄해야 한다. 한국 정부가 ‘작전계획 5029’를 반대하자 미국은 7함대 사령관을 내세워 독자적인 추진 의사를 밝힌 바 있다. 이번 회담에서 노무현 정부는 미국의 독자적인 ‘작전계획 5029’ 추진도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전달해야 할 것이다. 어떠한 형식으로건 ‘작전계획 5029’가 발동하게 되면 북미간에 군사적 충돌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셋째, 북미간 핵문제에서 미국의 역할을 분명히 제시해야 한다. 시각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북미간 핵문제 해결에서 미국의 책임과 역할은 분명히 존재한다. 1994년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서와 2000년 북미 공동코뮤니케는 미국의 책임과 역할을 규정하는 초석이 된다. 제네바 기본합의서에서 미국은 북한의 요구를 수용하여 경수로와 중유를 제공하고 북한에 핵위협을 가하지 않으며 북미 관계를 정상화한다고 약속한 바 있다. 북미 공동코뮤니케에서도 미국은 북한과의 관계를 정상화하고 평화협정을 체결할 것을 약속하였다.

최근 고조되는 북미간의 핵위기를 해소하기 위해서 미국이 해야 할 책임과 역할은 엄연히 존재하는 북한의 국가적 실체를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리고 북한과의 선의 있는 대화를 통해 북미 간의 적대적 관계를 청산하고 정상화의 길로 나가야 한다. 이와 같은 내용을 노무현 정부는 미국 부시 대통령에게 분명히 전달하여야 한다.

부시 대통령의 주문과 압력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중국과 한국 정부를 대북 압력과 제재에 동참시키려 했던 지난 몇 달 동안의 노력이 큰 성과를 내지 못하여 초조해하던 미국으로서는 이번 한미 정상회담은 절호의 기회이다. 또한 북한이 폐연료봉 인출을 마무리했다고 발표한 상황에서 한국 정부를 끌어들여 대북 압박을 가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 미국은 처해있다. 부시 행정부로서 이번 한미 정상회담은 북미간 핵대결의 중요한 분수령이 되는 것이다.

지난 대통령 선거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미국에게 ‘할 말은 하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국민 앞에 공언한 바 있다. 이제 그 공약을 실행할 때가 왔다. 남북 관계 발전과 한반도 평화를 위한 중요한 분수령이 될 이번 한미 정상회담은 국민과의 약속을 지킬 절호의 기회이다.

이번 한미 정상회담을 통해 불평등한 한미 관계를 바로 잡고, 다시 재개된 남북 관계를 전면 복원시키고, 북미간 핵문제로 인해 고조된 한반도 위기를 해소하는 계기로 만들어야 한다. 그같은 막중한 책임과 임무가 노무현 대통령 어깨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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