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문화'의 전도사 신은희 교수.
[사진 - 통일뉴스 김규종기자]
주체사상과 기독교사상이 만날 수 있다며 이를 전도(?)하는 학자가 있다. 미 심슨대에서 종교철학을 강의하고 있는 신은희 교수. 그는 주체사상을 ‘종교적 차원’에서 보면서 포스트모더니즘을 방법론으로 해서 기독교와 접맥을 시도하고 있다. 주체사상의 ‘사회정치생명’ 안에 포스트모던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는 ‘주체문화도 북만의 문화가 아닌 우리민족의 문화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고 그가 북의 주체사상, 주체문화를 일방적으로 옹호만 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을 객관적으로 보되 북쪽의 입장에서 이해를 구하고 있다. 그는 남쪽의 기독교근본주의와 북의 주체근본주의의 비판적인 재해석을 통해 포스트모던 사회에 어울리는 공존의 문화, ‘모자이크 통일문화’로 변화해야할 필요성을 강조한다. 특히 그는 현안인 북미갈등에 대해서는 그 근본원인이 미국의 대북 강경론에 있다면서 그 해법을 문화적 차원에서 접근하면서 부시 행정부가 북의 사회와 문화에 대해 제대로 알 필요가 있다고 충고하고 있다.

심슨대에서 주체철학을 강의하고 있는 그는 북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강의를 한 적이 있고 또 여름마다 남쪽에 와서 특별강의도 한다. 미국에 살면서도 남과 북을 오가며 자유분방한 활동을 통해 그가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신학자이지만 신학에서 벗어나 인본주의로 가고 싶고 또 단순한 학문만이 아니라 실천 활동을 하고 있는 ‘주체문화’의 전도사인 신은희 교수와 지난 19일 통일뉴스 사무실에서 만나 장시간 얘기를 나눴다. - 편집자 주

▶ 신은희 교수와 5월 19일 통일뉴스 사무실에서 만나 '주체사상과 기독교사상'에 대해
장시간 얘기를 나눴다. [사진 - 통일뉴스 김규종기자]

주체사상과 기독교사상과의 만남은 생명사상

□ 통일뉴스 : 신 교수의 중심 연구과제는 주체사상과 기독교사상과의 만남으로 이해된다. 주체사상과 기독교사상이 만날 수 있는 공간은 무엇인가?

■ 신은희 : 나는 ‘생명사상’으로 보고 싶다. 요즘 기독교계에도 신앙운동에서 생명운동이 굉장히 강조돼서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은 북조선의 주체사상에 생명사상과 같은 게 없을 거라고 전제한다. 그러는 이유는 주체사상을 연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체에 대한 이해가 기독교 단체뿐만 아니라 모든 사회문화영역에서 정확하게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그럴 때는 어떤 대화도 힘들다. 굉장히 불균형한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와 주체사상 딱 두 가지 전통을 놓고 본다면 나는 생명사상으로 만날 수 있다고 본다. 요즘 성령운동이나 기독교 교리적인 부분에 있어서 생명신학, 환경신학, 여성신학 등 이런 고난의 신학이 합치면서 전부 ‘생명’으로 귀납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 아주 업데이트(update)한 신학인데 주체사상의 ‘사회정치적 생명체’, 내가 주체사상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인데, 사회정치적 생명체다. 그 생명이론이 주체사상에 있다는 것이다. 그것과의 대화를 우리가 충분히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민족의 생명권이라는 조금 더 큰 담론, 통일과 민족 평화 이런 담론속에서 기독교와 주체사상이 충분히 만날 수 있는 공감대가 있다. 사상적 공감대가 있다. 문제는 우리가 그 대화의 채널이 있는가, 그리고 우리가 또 얼마나 노력해 왔는가, 그건 또 다른 영역의 질문이겠지만 중요한 건 생명사상으로 두 사상이 만날 수 있다고 나는 주장하고 싶은 것이다.

□ 주체사상을 언제 접했나? 그리고 주체사상을 왜 종교철학 관점에서 접근하게 되었나?

■ 내가 주체사상을 처음 접한 것은 박사학위 논문을 쓰면서였다. 1990년대 말 캐나다 토론토 대학교에서 학위 논문을 쓰기 시작했는데, 내 전공이 비교종교사회문화이다. 비교문화이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동서간의 문화다. 그래서 무엇과 무엇을 비교할까, 기독교는 서구의 대표적인 문화이고 동양에서는 뭐를 공부할 것이냐, 그렇다, 유교도 있고 불교도 있고 도교도 있고 무교도 있고 많은 종교들이 있다, 나는 조선사람이다, 한국사람이다, ‘조선 여자’다, 라는 것이다.

그럼 나는 나의 정체성을 같이 대화해 볼 수 있는 전통은 무엇이 있나 하고 생각해 봤다. 그리고 밖에서 본 우리 한반도는 두 개로 갈라져 있었다. 그렇다. 남과 북이 있구나. 그때까지도 그걸 감히 인식 못하고 있었다. 남에서 가장 토속적인 한국적 사상은 뭐냐, 동학을 발견했다. 왜냐하면 동학사상은 민중적인 혁명적 전통이기도 하지만 유불선 등 고대에 우리에게 들어온 동양적 전통을 모두 합해서 종교혼합적으로 이뤄진 굉장히 토속적인, 우리 한국의 정신 원형이 그대로 녹아있는 전통이기 때문에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남한에서는 그런데 그럼 북은 나에게 무엇인가? 북은 도대체 나한테 무엇인가? 저 나라는 무엇을 믿고 어떤 전통 속에서 사는가 하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주체사상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때 LA(로스엔젤레스)에 북한서적 전문서점이 있었다. 고려서점이다. 그래서 학생이지만 거기서 굉장히 비싸게 책을 주문하다가 그때부터 연구를 하기 시작했다. 학문적 관심에서 주체사상을 연구하게 되었고 그 과정 중에 일종의 내 자아적 정체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 남쪽에서는 동학, 북에서는 주체사상, 그렇게 해서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불행히도 학위논문에는 주체사상이 포함되질 못했다. 왜냐면 내 논문을 검토해 볼 수 있는 전문가가 없었다는 이유와 또 그것에 대한 학술적인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주체사상 밖에서는 (주체사상에 대해) 정치적인 이용이지 학술적 가치가 있나? 하는 의문을 제기하기 때문이다. 학문적 영역에 못들어 온다는 것이다. 영어자료가 전혀 없다. 그리고 아직 주체사상에 대해 완전히 정치적인 프로파갠더(propaganda)로 사용되었던 그런 걸로 소개가 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서 당시 조금 어려웠다.

그래서 타협한 게 동학사상과 기독교사상의 비교다. 논문은 그렇게 썼고 그 이후로 나는 계속해서 주체사상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그것이 시발점이 되어서 조금씩 나름대로의 학술적인 호기심이 커지면서 공부를 하게 됐다. 또 내가 처음부터 공부를 했으니 선생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선생이 됐다. 그리고 첫 봉급타면 무조건 북에 간다, 그거를 목표로 세워놓았다. 진짜 북에 가봐야 알 것 아니겠는가? 가지도 않고 텍스트로 하는 거는 한계가 있는 거 아닌가? 그렇게 목표를 세우고 교수 직업을 잡고 처음 간 나라가 북조선이다. 그 때의 감회는 잊을 수 없다. 그렇게 시작이 되었다.

□ 방법론으로서 포스트모더니즘을 사용하고 있다. 북에서도 포스트모더니즘을 이해하는가?

■ 나는 솔직히 북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이해가 안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이란 21세기의 아주 업데이트된 트렌드(trend), 아카데미 트렌드(academy trend)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북에서는 잘 모른다. 내가 방북했을 때 김일성종합대학교 교수님들이 내게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책을 주문하셨다. “다음에 방북할 때는 책을 가져다 달라. 우린 솔직히 잘 모른다”라면서. 모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북에서는 그것에 대한 새로운 시각에 대해서 일단 보류하고 있는 입장이고, 나는 내가 먼저 알았던 내용이니까 ‘충분히 대화를 통해서 이렇게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다’며 나는 나름대로 선구적인 역할을 하고 싶은 것이다.

“북에선 포스트모더니즘을 이해 못한다”

그렇다고 나는 북의 소위 ‘승인’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예를 들면 기독교에 전통신학이 있는 반면에 흑인신학이 있고 생태신학이 있고 여성신학이 있고 굉장히 상호화된 신학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해방신학을 비롯해서 민중신학도 있다. 국내에서는 그런 신학들이 서구 기독교의 ‘승인’을 요구하지 않는다. 필요 없다. 왜? 우리 상황 속에서 우리가 주체가 되어서 우리에게 맞는 신학을 재건하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학적 합법성과 정통성이 그 안에 이미 있는 것이다. 왜? 민중의 경험이 기초가 되어 있는 학문이기 때문에 학문의 방법이 달라지는 것이다.

서양에서는 텍스트로 해야 된다 어쩐다 하지만 민중의 고통이 기초가 된 신앙은 다르다. 그런 방법론이 거기에 적용이 된다면 얼마든지 주체사상도 우리의 관점으로 우리의 이해로 재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재해석한 결과를 가지고 북쪽 사람뿐 아니라 어떤 곳에 계신 분들과도 대화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대화적 소산을 가지고 인문학이 발전하는 거고 우리의 의식과 인식의 관점이 변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북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잘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도 앞으로 미래의 대화 과제로서 남겨두고 싶다.

▶ 통일과 민족, 평화라는 담론속에서 주체사상과 기독교가 충분히 만날 수 있다는
신은희 교수.  [사진 - 통일뉴스 김규종기자]
□ 독자들을 위해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서 좀 설명을 해 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일반적으로 모더니즘은 근대, 현대를 뜻하고 포스트는 ‘이후에’, ‘벗어나다’, ‘탈’(脫) 이런 개념으로 알고 있다.

■ 포스트모더니즘을 해석하는 시각도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역사적 신앙적인 흐름, 그러니까 연대기적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봉건사회를 지나서 중세사회, 근대사회를 넘어서 현대사회에서 탈현대사회로 넘어서는 이런 시간적 개념으로 보는 분들이 있다. 다른 하나는 저희처럼, 철학적이나 문화적 사회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조금 더 질(quality)적 사상에 근거해서 해석을 한다.

예를 들면 지금 포스트모더니즘의 대표적인 사상가로 서양사람들이 동양에서 꼽는 거는 노자 장자 같은 인물이다. 시간적으로는 고대사람이다. 그렇지만 그 사람의 사상 속에는 지금 우리가 찾고 있는 관계성, 유연성과 같은 포스트모던적인 요인들이 깊이 녹아 있다. 그럼 우리가 그것을 봉건시대의 유산으로 볼 것인가. 아니라는 거다. 포스트모던적인 요소가 그 안에 있기 때문에 그것은 포스트모던의 사상적 발현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시간적으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철학적으로 질적 사상적인 요인을 뽑아서 우리가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얘기할 때마다 사람들이 해체주의를 얘기하고 탈근대를 넣어서 얘기하는데 그러면 북한 사회에서 현대를 언제 경험했는가? 봉건사회가 아니냐? 이러는데 그건 포스트모더니즘의 한 종류밖에 모르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다. 그래서 포스트모더니즘을 시간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사상적 유입의 어떤 발전과정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 사상적 유입으로 볼 수 있다면 주체사상에서 어떤 면이 포스트모던적인 요소가 있다고 보는 것인가?

■ 관계성이다. 북쪽 사람들이 사회정치생명체를 얘기할 때는 생명체에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본다. 하나는 생물학적 생명이다. 부모로부터 받는다. 그걸로 인간이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동물과 별로 다를 게 없다고 주체사상이 얘기를 하고, 거기서 진정으로 우리가 역사의 주체로서 살아남기 위한 인민 중심의 역사가 되려면 또 한 가지 생명이 필요한데 그것이 즉 ‘사회정치생명’(‘social political life)이라는 것이다.

그럼 사회정치생명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건 부모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여러 인민들 각각의 생명이다, 개인적인 생명이 연합할 때 무엇으로 연합하는가? 공동의 선을 위해서 연합하는 것이다. 그런 연합의 관점으로 주체사상에선 나름대로 ‘주체 삼위일체’를 얘기를 한다. 이건 내 용어다. 내가 해석한 용언데 당과 인민과 수령이 하나가 되는 ‘주체 생명체’인 것이다. 그래서 이게 일사분란하게 외부적 요소에 의해서라든지 내부적 필요에 의해서라든지 이런 삼위의 요소들이 모여서 하나의 큰 관계성을 이루어갈 때, 거대한 생명체를 이루어 갈 때 그 관계성 안에 포스트모더니즘이 있다.

“주체사상의 ‘사회정치생명’ 안에 포스트모던적인 요소 있다”

지금 부시 정부가 계속해서 절대적 선 얘기를 하고 있다. 부시가 얘기한 것이 기독교적인 악을 얘기하는 것이다. 그건 아직도 우리가 볼 때 모더니티한 사고에서 벗어나지 않은 정치이론이다. 그런 절대적인 선이라는 것이 어디 있는가? 내가 어디 가서든지 강의할 때 사용하는 비유가 그런 것이다. “나는 우리 엄마가 나한테는 최고의 엄마였어요.” 그렇지만 다른 사람의 어머니랑 비교해서 봤을 때는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의 어머니가 ‘best mother’가 아닌가? 다른 사람한테는 그 사람 어머니가 최고인 거다. 그럼 최고와 최고가 만났을 때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이긴 한데 ‘상대적인 절대’라는 것이다. 그게 전부 포스트모던 아이디어이다.

북은 미국이 주장하는 ‘절대 선’, 도덕적 절대주의에 노예가 되지 않겠다는 것이다. “당신들이 주장하는 절대 선 그거 한 가지만 주장하지 말라”는 것이다. 다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에 대한 인정을 요구하는 것이지 자기네 식대로만 어떤 봉건사회에서 하던 전체주의적인 방법만 하겠다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변했다는 것이다.

□ 주체사상을 종교로서 이해하고 있는가?

■ 종교적인 차원이 강하다고 본다. ‘종교’라기보다는 ‘종교적인 차원’에서 본다. 거기에는 또 따져야 할 문제가 있는데 종교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서 ‘예스 또는 노’가 될 수 있다. 그 질문에 대해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종교라는 말은 대개 서구적인 용어다. 19세기 말까지는 우리 동양문화권에 종교라는 말이 없었다. ‘릴리전’(religion)이라는 말이 없었다. 대신 ‘문화’라는 것이 있었다. 우리에게는 종교라는 것이 문화적인 유산이었다. 서양사람들은 타 문화와 구분하기 위해서 종교라는 말을 써 왔을 뿐이다. 그 사람들의 문화는 단일문화 아닌가? 그러니까 기독교외에 다른 문화는 이 사람들에게 타 종교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종교적인 용어가 필요했지만 우리에게 있어서는 모두 문화유산이었다. 그렇다면 종교가 뭐냐? 종교는 문화의 틀이다. 그럼 문화는 뭐냐? 문화는 종교의 내용이다. 틀과 내용을 구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주체’가 종교문화라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꼭 내가 첨가를 하고 싶은 부분은 오해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주체사상을 얘기할 때 난 항상 우리가 두 가지를 구별해서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하나는 ‘기관화된 주체’다. 기관화된(institutionalized) 주체는 정치화된 것이다. 기관화되었거나 정치적인 선전으로 사용되는 나름대로의 대표적인 주체문화가 있다. 다른 하나는 기관화된 주체와 상관없이 인민들의 심성속에 이미 심성적으로 ‘영성화’되어 나타난 주체사상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두 가지로 구분해서 볼 수 있는 성숙한 시각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가 어디 가서 북 사람들의 주체를 ‘김일성이즘’이라 할 수는 없다. 절대 할 수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북한 주민의 사회구조 속에 이미 반세기동안 자리 잡은 영성화된 그 주체의식을 존경해 줄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거 없이는 대화가 힘들다는 것이다.

□ 신 교수는 후자를 보는 건가?

■ 그렇다. 주체사상을 얘기할 때 나는 이 정치적으로 선전(propaganda)된 주체에 대한 비판의식이 대단히 강하다. 그거는 왜냐하면 민족을 섬기는 의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재로서는 나는 비판을 많이 하는데 이 두 가지가 균형이 맞을 때 주체사상에서 해방적 사건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그런 미래적인 진단을 하고 있는데 그거는 북쪽 사람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특히 북쪽 정부가 평화통일을 내다보면서 앞으로 어떤 ‘개혁 개방’ 정치를 할 거냐에 따라 달려있는 문제이다.

□ 우문 같지만 주체사상을 불교나 다른 종교가 아닌 하필이면 기독교와의 만남으로 상정을 했나?

■ 왜냐하면 서구사회와의 문화충돌로 여겨지니까. 부시 정부가 기독교 근본주의자 아닌가? 나는 문명간의 충돌로 보는 것이다. 북미간의 관계를 종교간의 충돌로 보는 것이다. 북미간의 갈등을 문화적 차원에서 진단하기 위해 문화적 대화로 기독교와 주체사상을 선택한 것이다. 물론 원불교나 증산교, 동학에서도 주체사상과의 대화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 맞다. 이를테면 천도교와 주체사상과의 대화가 오히려 더 친숙하지 않은가?

■ 그럴 수 있다. 친숙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친숙함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문화적 갈등, 문명간 충돌을 해소하기 위한 대화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이 동학이나 불교 이런 분들은 주제사상을 굉장히 받아들인다. 지금 그렇다. 이해한단 말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기독교 한기총 같은 단체들은 아주 악의 소산으로 본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대화가 필요한 것이다. 형제들이 잘 지낼 때는 특별히 대화 안 해도 얼마든지 친구할 수 있다. 그러나 이혼직전에 있는 가정은 대화가 정말 필요한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 신은희 교수는 자신의 생각을 설명, 전달하기 위해 여러 제스처를 보였다.
[사진 - 통일뉴스 김규종기자]
□ 대단히 전략적이고 실천적 사고를 하는 것 같다.

■ 나는 현실주의자이다. 나는 인문학을 하지만 구름잡는 얘기는 딱 질색이다. 대화의 필요가 분명히 있어야 하는 것이다. 문화적 갈등이 왜 있는가? 정치적으로 억압하는 수단이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가? 무지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기독교와 주체사상은 앞으로 대화를 반드시 해야 한다. 한국사회뿐만 아니라 미국사회에서도 주체사상에 대한 제대로 올바른 이해가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그래야 정치적인 문제도 해결이 된다. 정치적인 문제가 해결된 이후에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가 비료 주고 돈 주고 해서 어느 정도 정치적 문제가 해결 됐다고 해서 문화적 이질감 극복이 되는가? 절대로 극복이 안된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평화통일과 평화공존의 이상을 갖고 있다면 문화적인 대화가 대단히 중요하다고 나는 주장하는 것이다.

□ 이해를 돕기 위해서 하나 더 묻고 싶다. 기독교는 신의 영역으로서 신학의 범주다. 그런데 주체사상은 인간의 철학, 인간의 영역으로서 철학적 범주다. 다시 말해서 신학과 철학의 문제인데 이를 비교한다는 게 가능한가?

■ 신학도 여러 갈래의 신학이 있지 않은가. 정통신학에서는 신의 개념이 절대로 타협되거나 상대화되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아주 많이 소위 신종 자유주의적인 신학에서는 신과 인간이 만난다. 그러니까 신인간론(神人間論)을 편다. 진정한 신관이 뭐냐? 인간론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없이 신을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관계성, 즉 포스트모더니즘과 또 연결이 되는데 신과 인간의 관계성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발점인 것이다.

‘조선 사람은 조선 하늘에서 조선 사람답게 조선 하나님을 믿으라’

그런 면에서 주체사상이 철학이긴 하지만 굉장히 인본주의적인 철학이다. 그리고 북쪽 사람들이 굳이 신을 거부하는 거는 아니다. 신이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것이다. 다만 신이라는 주체가 인민주체의 역사 발전에 절대적인 요소가 되지 않는 것뿐이다. 김일성 주석이 그런 얘기 하지 않았는가? 김일성 전집에서 ‘조선 사람은 조선 하늘에서 조선 사람답게 조선 하나님을 믿으라’ 이것이다. 우리식으로 믿자는 것이다. 왜 꼭 서양식으로 믿어야 되나. 그런 이분법적 사고에 근거한 신학보다는 좀더 합일적인 우리의 역사와 정서와 맞는 조선식 기독교를 믿자, 이거다. 나는 김 주석의 말이 우리나라 상황신학에 적절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주체사상과 기독교는 얼마든지 대화가능하다. 지금 계속 포스터모더니즘을 얘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은 신과 인간을 구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종교와 과학을 따로 구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 포스트모더니즘 영역에서는 주체사상과 기독교의 대화가 가능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이해를 못할 것 같다.

■ 지금 포스트모더니즘이 트렌드이니까 공부를 해서 따라 와야 한다. 그거 안하면 시대적으로 뒤지는 것이다. 시대착오적인 얘기를 하는 것이다. 과거에는 앉아서 신이 이랬는데 저기는 신이 없는데 했는데 그러면 어떻게 되나? 아니 그러면 기독교와 불교의 대화는 가능했겠는가? 불교도 신 없는 종교다. 기독교와 불교도 얼마든지 대화가능하다. 비록 영역이 종교이긴 하지만 대화가 가장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왜 인본주의와는 말할 수 없는가? 신학은 소위 무신론자(atheist)와도 대화를 한다. 요즘 신학교에서는 무신론자 학자들도 있다. ‘무신론은 어떤 근거에 의해서 신이 없다’라고 주장하는데 한번 대화해 보자는 것이다. 모든 것이 대화적인 관점으로 옮겨가고 있는 상황에서는 얼마든지 대화가 가능한 것이다.

□ 그렇다면 신 교수의 이론은 기독교와 북쪽, 양쪽으로부터 비판받을 수도 있다고 본다. 하나는 남쪽 기독교다. 기독교는 주체사상을 김일성 주석의 사상 또는 북한의 사회작동원리로 보고 있는데 그렇다면 ‘김일성 우상숭배인 주체사상’과 신학이 대화를 하다니 그건 말도 안 된다, 이런 비판을 충분히 받을 수 있다고 본다. 또 하나는 북쪽으로부터다. 북쪽에서는 주체사상을 종교가 아닌 자신의 위대한 사상으로 보는데 감히 기독교와 비교하다니, 이런 비판이 제기될 수 있다고 본다.

■ 남쪽의 경우에는 그런 얘기들을 많이 한다. 특히 보수기독교 세력에서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는데 그분들에 대한 나의 근본적인 학술적인 목적은 그런 분들의 인정을 받고자 하는 그런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나름대로 학술적 양심에 의해서 충분히 종교학적 방법론을 이용해서 이런 해석이 가능하다는 실례를 예증적으로 드는 것이 내 역할이라고 보기 때문에 끝까지 하고픈 것이다.

예수가 원래는 인간이었다. 인간의 모습으로 왔다. 예수가 원래 인간이었는데 시대를 거쳐 신격화 과정을 통해 지금 우리가 ‘신의 아들’로 추앙하는 것이다. 그것도 우상화라는 것이다. 그렇다. 우상화다. 요즘은 ‘예수 우상화’라는 얘기를 한다. 예수 우상화란 진정한 예수의 이미지를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원초적 원시적 예수의 이미지를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예수가 기독교 역사를 통해 신격화됨으로서 예수의 이미지를 잃어버렸다’라고 신학계에서 주장하는 파가 있다. 해방신학이나 민중신학 쪽에서 많이 대두가 되었다.

마찬가지로 북에서도 주체사상이 종교화 과정을 거쳐왔다는 일종의 비판인데, 물론 우상화 과정 있다. 종교적 용어로는 ‘회심’이다. 컨버션(conversion)되는 거다. 북의 용어로는 ‘세뇌’이다. 종교에도 세뇌과정이 있다. 예를 들면 2003년 대구유니버시아드대회 때 북쪽 사람들이 초상화 줍고 울고불고 난리치고 했었다. 남측 진보진영에서도 그걸 보며 ‘해도 해도 너무 한다’며 혀를 찼었다. 혀를 찰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 얘기가 왜 그런지 아는가? 그것이 종교였을 때 그 사람들의 마음에서 그런 반응은 당연한 것이다. 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가 지나가면 교인들이 다 난리친다. 똑같은 현상이다. 얼마 전 교황 요한 바오로2세가 사망했을 때 세계 수 만의 인파가 몰려들어 애도했었다. 똑같은 현상이다. 김일성 주석 사망했을 때와 도대체 뭐가 다른 것인가? 질적으로 그 현상을 보면 우상화가 똑같다. 신격화도 마찬가지로 일어나고 있다.

우리 인식이 문제다. 기독교는 2000년의 역사를 거치지 않았는가? 북의 역사는 짧지만 주체사상도 2000년이 지나면 이런 문화유산이 될지 누가 아는가? 왜 그것에 대한 그렇게 빠른 판단이 이뤄져야 되냐는 것이다. 우리가 종교학적으로 바라보고 해석해 볼 수 없느냐는 것이다. 그것이 인정이 되면 대화는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기독교에서 그런 비판이 있다. ‘아니 어떻게 예수를 그냥 인간이라 하는가, 말도 안 된다.’ 그렇게 얘기할 수 있다.

그런데 신학과 교회와의 괴리가 20년이 차이난다고 한다. 일반 교인들이 신학을 체계화해서 신앙으로 받아들이기까지 20년의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우리가 너무나도 빠른 변화의 시대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학은 우리의 직무다. 신학을 비판하려면 학술적으로 비판하라는 것이다. 신앙적으로 비판하지 말라는 것이다. 교인들이 조용기 목사를 보고 기도하고 할렐루야 하는 것에 대해서 내가 종교학적으로 “저거 가짜 신앙이야”라고 말할 근거가 없다. 똑같은 것이다. 김일성 주석 사망했을 때 북쪽사람들이 애도하고 울고불고 난리 쳤을 때 “저 사람들 저거 세뇌 당했어, 저 사람들 저거 잘못된 거야”라고 우리는 얘기할 자격 없는 것이다. 북쪽사람들 신앙을 우리가 도덕적으로 추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학술적 논문을 가지고 내가 “예수그리스도가 세계 최고의 구원자인데 당신은 왜 딴 사람을 대냐” 이렇게 얘기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만약에 북쪽사람들이 자기들은 ‘주체교’를 믿는다고 하면서 “김일성이 우리 민족의 구원자인데 당신은 왜 딴 나라 민족의 구원자를 믿냐?”고 하면 무슨 말을 할 것인가? 그건 대화가 안 되는 거다. 신앙은 신앙으로 각자 인정 해주되 학술적으로는 충분히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이렇게 이해하면 되는가. 우상화나 신격화의 과정은 선악의 가치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문제다.

■ 그렇다.

□ 이제 북미문제로 넘어가겠다. 북한과 미국은 1950년 6.25한국전쟁 후 정전체제하에서 서로 대립해오고 있다. 북과 미국간의 대치나 갈등의 근본문제가 무엇인가?

■ 그건 미국의 대북 강경론 때문이다. 처음부터 미국은 한반도를 동북아지배 구도 안에서 바라봤는데 북이 그것에 제일 큰 장애물로 작용했다. 북이 핵무기를 개발했던 근원도 다 거기에 있다고 본다. 미국이 북을 근본적으로 동반자로 인식한 경우가 없었다. 역사적으로 정치적으로도 미국은 대북 강경책을 통해 항상 북을 적대화해 왔다. 북미간의 갈등은 미국의 대북 강경책에서 출발된 것이기 때문에 그 근본원인은 미국에 있다고 본다.

□ 흔히 북미갈등을 군사적 대치관계로 본다. 그런데 현재 신 교수는 주로 문화적 갈등으로 접근을 하고 있다.

■ 나는 정말 미국정부에 대고 “북의 사회와 문화에 대해 얼마나 아는가”하고 질문해 보고 싶다. 미국정부에 북 전문가가 많이 있다고들 하지만 그 사람들은 수치적으로 연구를 할 뿐이다. 지정학적으로 군사적으로만 북 연구를 하는데 ‘북쪽 사람들의 마음속에 뭐가 꿈틀거리고 있는지에 대한 이해가 정말 있는가’하고 묻고 싶다. 미국이 대북 강경론만을 계속 펼칠 수밖에 없는 것은 북의 주체 영성을 제대로 이해 못해서 그렇다. 내가 계속 얘기하는 것이 ‘영성’이다. 북쪽 사람들 마음에는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차라리 자폭할 가미가제 같은 그런 영성이 그 안에 있는 것인데 그것에 대한 이해가 있느냐 없느냐, 정말 질문해 보고 싶다는 것이다.

미국정부에 “북의 사회와 문화에 대해 얼마나 아는가” 묻고 싶다

▶미국정부에 “북의 사회와 문화에 대해
얼마나 아는가” 묻고 싶다.
[사진 - 통일뉴스 김규종기자]
갈루치 같은 사람도 부시 정부에 대해 “당신네들 정말 북에 대해서 이해 못하고 있다”라고 평가를 했었다. 당신들 북에 대해서 북 사람들 화나게 해서 좋은 거 얻을 거 없다는 것이다. 북쪽 사람들과는 기분 좋게 하면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강경에는 초강경이다, 총이면 대포다. 북한사람들은 그것밖에 모른다. 그것밖에 할 수 없기 때문에 죽어도 고(go)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에서 강경책을 하면 초강경으로 나온다. 절대로 굽히지 않는다.

왜냐하면 북쪽사람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50년 동안 그걸로 일사분란하게 뭉쳐왔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은 북 사회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기초로 정책을 세워야지 군사적인 위협 그걸로 절대로 안 통한다. 북미간의 갈등은 우리 한반도의 불행이다. 그 불행이 어디에서 오나, 미국의 무지에서 오는 거다. 전문가나 해외에 계신 분들은 북에 대한 정치적 이해뿐만 아니라 사회문화적인 차원에서 종교적 차원, 영성적인 차원까지 깊이 이해를 하고 정책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 방금 갈루치 전 미국 국무부 차관보 얘기를 했다. 북미간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할 때가 몇 번 있었다. 주요하게는 1994년 핵문제와 98년 미사일문제 때 그랬다. 94년 갈루치, 98년 페리 전 대북 정책 조정관. 모두가 북미간의 갈등이 첨예했을 때 대북 협상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는 “북한과 대화를 해야 한다. 북한을 있는 그대로 봐야 한다”고 얘기를 했었다.

■ 인정해야 한다. 나는 미국의 관료도 지금 그런 얘기를 하는 데 국내에선 과연 그런 인식이 얼마나 있는지, 우리가 비판적으로 질문을 해봐야 한다고 본다. 얼마 전에 미국 상원에서 계속 주장하는 것이 북미간에 양자회담 해라, 양자회담 해도 미국의 국익에 전혀 손해가 없는데 왜 안 하냐, 계속 비판하지 않는가? 그런 소리를 우리 남쪽에서 제대로 듣고 있는지 자문해 볼 필요가 있는 거다. 왜 계속해서 6자회담만 요구하는가? 6자회담 틀안에서 북미간 양자회담 할 수 있어야 한다. 나올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해 줘야 하는 거 아닌가? 그것 없이 무조건 나와라 하거나 말 한마디로 “너희 주권국가냐? 됐지? 야 이제 나와” 이건 아니다.

□ ‘주권국가 인정’ 정도로는 북쪽이 안 받아들일 거라는 것인가?

■ 안 받아들인다. 그거는 미국말로 립서비스이다. 돈 하나 투자 안하고 말로만 하는 거다. 그건 북에서 볼 땐 아닌 거다. 1998년 금창리 지하동굴 조사할 때 돈 많이 물게 하지 않았는가? “주권국가에 들어오려면 너희 돈 내고 와서 조사해라. 니들이 뭔데.” 그거 옳은 얘기 아닌가. 지들이 뭔데 남의 나라 들어가서 이거보고 저거 보고 다 헤집고 다니는가. 그러니까 똑바로 하라는 것이다. “똑바로 해” 그러는 거다. 그러니까 지금 6자회담에 나올 수 있는 명분을 마련해 줘야 한다. 마땅한 지원도 있어야 되고 왜 일괄타결 안하는가? 아니 북이 계속해서 클린턴 정부 때부터 국교정상화 하려고 얼마나 노력했는가? 계속 대화 안하는 나라가 평화를 위협하는 거지, 아니 북이 평화를 위협한다구? 그건 정말 어리석은 짓이다.

□ 부시 대통령을 기독교 근본주의자로 알고 있다. 부시가 주체사상을 종교나 종교적 차원으로 이해한다면 혹시 대화를 할 수 있을까?

■ 희망이다. 나도 정말 그렇게 하기를 희망하고 있지만 그럴 가능성은 상당히 없다. 그런 기본적인 태도만이 있었다 해도 ‘악의 축’ 발언이 나오지 않았을 거고 최근까지 ‘폭군’이라는 둥 이런 아주 난폭한 언어폭력이 나오지 않았을 거다. 그리고 부시는 북을 근본적으로 악의 소산으로 보고 있다. 북의 주체문화를 그러니까 주체 시민들 안에 있는 심성을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 북쪽 주민들은 완전히 희생자고 저 폭군만 제거하면 북쪽 사람들을 우리가 해방해 줄 수 있다, 정말 그렇게 믿고 있다. 그게 위험하다는 거다. 그런 도덕적 절대주의, 패권주의, 문화적 제국주의, 종교적 제국주의가 정말 무서운 거다. 그게 핵무기보다 더 무서운 거다. 사실 핵무기는 우리가 조약을 체결해서 막으면 된다. 그런데 이런 문화적인 적개심은 막을 길이 없다. 그러니까 미국 관료들도 이렇게 말한다. “부시가 김정일과 화해를 못하는 것은 편견에 사로잡힌 적개심 때문”이라고.

그같은 강도 이상으로 국내 기독교 단체들도 똑같은 심성을 갖고 있다. 북을 편견에 사로잡힌 적개심으로 보면서 제거의 대상, 붕괴의 대상으로 보는 거다. 그걸 갖고 있는 한 상호 대화는 힘들다. 없애 버려야 되는데 무슨 공부를 하겠는가? 뭐를 알고 싶겠는가? 나는 그것을 ‘문화적 극단주의’로 보고 싶다. 문화적 패권주의다. 그걸 어떻게 치유할 건지가 우리의 과제이다. 그거는 주변 관계국들이 절대로 해결해 주지 못한다. 남북간에 내부적으로 자체적으로 이뤄져야할 과제이다. 미국이 해주겠는가? 중국이? 일본이 해주겠는가? 아무도 해주지 않는다. 여기에서 남쪽이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할 이유가 있는 거다. 문화적 사회적 통합과 이질감 해소는 통일 뒤엔 너무나도 중요한 거다.

□ 북핵문제로 북미가 첨예하게 맞서 있다. 6자회담이든 양자회담이든 북핵문제의 해법은?

■ 지난 3월 키신저 전 국무장관이 “북이 가장 원하는 것을 주고 가장 아픈 것을 찌르라”고 말했다. 굉장히 위트있는 말이다. 많은 사람들은 북이 가장 원하는 것이 돈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첫 번째는 주권국가 인정이고 두 번째가 돈이다. 미국이 강경책을 철회하지 않으면 북이 물러설 데가 없다. 미국은 이념갈등을 종식하고 대북 강경책을 철회하고 6자회담 내에서 양자회담을 보장해 일괄타결로 가야 한다. 이건 94년부터 나온 일률적인 방법이다. 그런데 미국은 양자회담을 체면 때문에 못한다. 북이 허리띠 졸라매고 싸우는 것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북에 가면 눈물이 나온다. ‘주권국가를 지키겠다. 먹고 살겠다’는데 왜 대화를 안 하는지 분노할 따름이다.

□ 핵문제가 해결된다하더라도 미국이 인권문제를 물고 늘어질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 나는 선이냐 후냐고 나누고 싶지 않다. 핵문제를 타결하기 위해서 미국에서 본격적으로 인권문제를 갖고 나왔다고 본다. 나는 인권에 대한 강대국들의 원리를 이렇게 정리한다. 국가가 인권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인권이 국가를 위해서 무엇을 해 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이 얘기는 뭐냐 하면 모든 사람이 인권을 위해서 희생하고 국익을 위해서 희생하면서 봉사하는 원리가 아니라 인권이라는 이슈를 가지고 필요에 따라 이게 국익에 도움이 되냐 안되냐의 논리에 따라 국가가 인권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이다.

즉 인권이라는 이슈가 국익을 얼마나 줄 수 있는가 없는가의 원리로 인권을 제기하는 것이 인권문제라는 것이다. 나는 서양의 인권문제를 그렇게 정리한다. 그러니까 국가가 인권을 위해서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권이 국가를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따라서 인권문제의 중요성은 그때그때 정해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핵문제가 해결된 다음에도 미국이 인권문제를 들고 나올까. 글쎄, 핵문제가 해결되면 인권문제는 잠잠해 질 거라고 본다.

“민족자결권도 인권이다”

▶신은희 교수는 장시간 인터뷰에도 아무런 주저나 거리낌 없이 답변했다. 빠른 언변에
달변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자기 학문에 정통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규종기자]
특히 인권문제는 민족자결권 문제를 인정해야 한다. 인권은 민권, 생명체의 권리, 소수권의 권리, 민족자결권 등이 있다. 국내 인권단체에서 개개인의 인권 보호만을 얘기하는데 민권, 소수권, 민족자결권도 얘기해야 한다. 미국식 인권, 미국의 이익을 따라 옮겨가는 인권에 춤출 수는 없는 것이다. 중국으로 하여금 식량지원 중단하라는 말이 어떻게 나올 수 있는가. 미국은 공동체가 필요 없고 개인만 필요하다. 이라크 경우 국권이 해체된 뒤 무슨 인권이 나올 수 있는가.

□ 이제 북쪽 사회와 관련해서 묻고 싶다. 김일성종합대학교와 김형직사범대에서 강의를 했다고 들었다. 북쪽에 가면 주로 어떤 대화를 나누나?

■ 김일성종합대학교에서는 앞에서도 말했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이랑 주체사상, 기독교와의 대화를 강의했다. 그분들이 기독교에 대해서 굉장히 궁금해 한다. 북에서도 실제로 기독교를 가르치고 있다. 그분들은 기독교를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고 있다. 그러면서 자기네들이 기독교를 가르치는데 이게 국제사회에서 어떻게 비쳐지고 어떻게 보여지는지 그런 거를 좀 확인하고 싶어 한다. 그런 면에서 주로 사상적인 대화를 많이 했다. 누가 누구를 가르치는 입장보다는 대화를 많이 한다. 나는 주로 그분들이 주장하는 주체사상에 대한 원론 얘기를 많이 들었다.

조금 의외로 놀란 것은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다양한 인문학 공부를 하고 있더라는 거다. 그것이 얼마나 준비됐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예를 들면 우리는 ‘환경생태신학’인데 그 사람들은 ‘미화신학’이라고 한다. 용어가 다르고 표현이 달라도 그 내용은 다 들어 있다. 그리고 유불선, 이기론, 도교설, 강증산 이런 거를 다 알고 있다. 솔직히 속으로는 좀 의외였다. “그런 거 다 공부하시냐”고 물으니 다 한다고 했다.

그분들은 서양철학사도 배우고 기독교사도 배우는데 특히 요즘 기독교가 굉장히 인기 있다고 들었다. 왜냐하면 서양에 대해 배워야 하는 분위기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리고 소위 민족운동 하던 분들이 다 기독교인들 아닌가? “목사가 뭐냐”고 물어보면 그 사람들은 목사를 민족투사라고 대답한다. 민족투사인 줄 알고 있다. 목사를 종교적인 사람, 기독교인으로 보지 않는다. 왜 그런가? 홍동근 목사, 문익환 목사. 이런 분들이 모두 목사계열인데 이런 분들이 민족 얘기하고 통일 얘기하고 싸우고 남에서 고난받고 그랬다. 그러니까 목사가 민족투사인 줄 알고 있다.

1990년대 전에는 조선대사전을 보면 종교는 정말 ‘민중의 아편’이다, 이거 배워선 안 된다, 허구다, 이렇게 가르쳤는데 그 이후에는 종교에 대해서 굉장히 객관적인 정의를 내렸다. 왜 이렇게 종교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는가 물어보니까 독립운동 하시던 이런 분들, 민족투사, 목사들에 의한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 종교간의 대화가 첫 물꼬를 틀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분들이 해외동포인 우리를 불쌍하게 보면서 “백인 사회에서 얼마나 고생하고 사냐” 그런 얘기를 한다. 그렇게 안쓰럽게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대학에서 아시아사상사 가르치면서 북한사상을 주 텍스트에 꼭 넣는다. 미국애들도 알아야 되니까. 왜냐면 완전히 다른 관점이기 때문이다. 대학생들의 기대수준이 높진 않겠지만 내가 미국에서 북한사상을 가르치는 것은 일단 나의 양심고백이다. 나는 한국사람이고 또 북한사회의 문화도 우리 한국학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주장하기 때문에 현대사에서 알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시아사상사 가르칠 때 꼭 주체사상을 강의한다. 북에서는 그것을 너무 고마워한다. 나는 친북적이거나 친남적인 관점을 떠나 있다. 내가 미국에서 그런 일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북에서는 주체사상이 일단 세계철학사 속에 한 부분 꼈다는 그 자체에 대해서 굉장히 고맙게 생각한다.

□ 신 교수의 강의는 철학인가 종교학인가?

■ 종교철학이다. 아시아 종교철학이 전공이다. 크게 보아 세계종교문화에는 동양문화권이 있고 서양문화권이 있다. 서양문화권이라 하면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권을 이야기하고 동양권에서는 유교 불교 도교 그리고 나는 주체사상까지 신흥종교나 현대사상으로 보면서 이들을 비교문화 하는 거다. 그래서 무엇이 유사하고 무엇이 다른가, 어떤 종류의 문화충돌이 일어났을 때는 어떤 인식론이 달라서 이런 문제가 일어나는가, 이런 것들을 문화적으로 대화하고 통찰하고 분석하는 거다.

□ 그중에서도 특히 기독교와 주체사상을 중심 논제로 갖고 있는 것인가?

■ 그렇다. 주체사상과 기독교를 중심 연구논제로 갖고 있다. 왜냐하면 두 가지 문화가 내 안에 다 있으니까. 미국에 살고 있지만 난 조선사람 아닌가? 그리고 북미간 긴장관계가 높지 않은가? 누가 할 것인가? 우리가 해야 할 거 아닌가.

□ 외부 세계에서는 북한을 ‘폐쇄국가’로 보고 있다. 굳이 신 교수가 북한 사회를 규정한다면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 예를 들면 용어문제인데, ‘폐쇄’라고 했을 때는 누구의 관점에서 그 사회가 폐쇄인지 아닌지를 먼저 정의해야 한다. 우리 남한의 관점으로 보면 북이 폐쇄된 사회다. 그런데 북의 관점으로 보면 생존을 위한 몸부림의 사회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적인 거다. 나는 상대주의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우리의 용어로 얘기하면 답답한 부분이 분명히 있다. 왜냐? 일단 북에 딱 들어가면 정보의 제한을 받기 때문에 답답하다. 신문 자유롭게 볼 수 없다. 인터넷 연결 안된다. 셀폰 못쓴다. 우린 불편하니까 싫다. 답답하다. 그러니깐 폐쇄사회라고 한다. 그렇지만 그 사회 나름대로는 그럴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문화적 특수성이 있지 않은가?

그런데 미국은 그런 외부적인 위협이 없다. 미국사람들 북이 핵 쏴서 자기네 LA 친다고 난리 치지만 누가 들어도 말이 안 되는 조크이다. 요컨대 외부적인 위협이 없으면 얼마든지 문 활짝 열고 살 수 있다. 그러나 외부의 위협적 요소가 있을 때는 긴장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외부적인 위협이 높아질 때는 북은 사상적으로 강화된다. 그건 당연한 거다. 우리도 그렇지 않은가. 그렇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이해하게 되면 북을 어떤 특정한 한 가지 용어로 규정하기 어려운 나름대로의 독특한 사회라고 밖에는 규정을 못하겠다. 그러나 상당히 과도기인 거는 분명하다. 과정 속에 있는 나름대로의 주체사회라고 나는 보고 있다.

□ 이제 한국사회에 대해서 묻고 싶다. 한국사회와 관련 민족, 평화, 통일, 평등 등등의 거대담론이 있다. 일반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러한 거대담론을 생각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거대담론을 해체하고 미시적으로 접근하지 않나 하는 평가들이 있다.

■ 해체주의적인 포스트모더니즘은 그렇다. 그런데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아까 말했듯이 시대구분적으로 볼 경우에는 분명히 거대담론이다. 그러나 우리가 부분적으로 그 방법론을 적용할 때에는 미시담론이 된다. 이렇게 두 가지가 다 있다. 그래서 포스트모던 논리는 ‘either or’로 가지 않는다. ‘이거냐 저거냐’로 가지 않고 항상 ‘both and’로 간다. ‘둘 다’로 가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너무 미시담론 아니냐, 그런 얘기하는데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문화가 만나서 충돌하는 것에 대한 어떤 치유 양식을 제공하고 있다는 면에서는 거대담론이다. 문명의 전환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니까 그렇다. 그러나 예를 들어 공동체주의나 해체주의와 같이 부분적인 어떤 특정사회에 대한 접근으로 들어갈 때는 굉장히 미시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부분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에 포스트모더니즘 원리 있다”

▶ 포스트모더니즘이 미시담론만이 아니라 거대담론도 다루고 있음을 강조하는 신은희
교수. [사진 - 통일뉴스 김규종기자]
그런데 포스트모더니즘이 얼마나 평화를 얘기하는가? 그 평화라는 것을 문화적으로 볼 때 지배문화가 소수문화를 먹는 게 평화 아닌가? 과거에는 거대문화가 있어 작은 문화들은 다 이리로 귀속되라고 했다. 이거를 평화로 봤다. 그러나 지금은 다양한 작은 문화들을 인정하고 그들 문화를 서로 어떻게 연대할까 하면서 우리가 그렇게 상호 인정하면서 전체를 하나로 만들어 가면 안 되는가? 모자이크처럼 작은 작은 문화이지만 그 나름대로의 독특성을 인정하면 ‘전체성’이 된다는 거다. 공동체가 된다는 거다. 소수 문화들의 고유한 독자성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하나가 된다.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북 사회의 원리인데 거기에 포스트모더니즘의 원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미국사람들은 자기네 것으로 귀속하라는 것이다. 미국은 자기네만이 절대선이라는 것이다. 이게 문화제국주의 아닌가? 자기네 문화가 용광로(melting pot)라는 것이다. “우리가 주된 문화고 너희 작은 문화는 여기 와서 다 녹아들어라” 이거다. 그래선 안 된다. 나는 모자이크 문화를 주장한다. 모자이크 문화란 이렇다. 주체도 있고 기독교도 있고 불교도 있고 뭐든 다 있다는 것이다. 이들 문화를 상호인정하면서 공존하고 상시적 긴장감속에서 같이 살아갈 수 있는 전체문화를 이루자는 것이다. 거시담론인 동시에 미시담론인거다. 문화적인 접근에 있어서는 입체적인 사고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부시가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를 강조한다. 미국식을 얘기하는 거다. 미국식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를 전세계에 퍼뜨리겠다는 것이다. 그것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나라는 용서치 않겠다고 한다. 북도 거기에 하나이다. 미국으로선 북이 제일 문제인 거다. 일본과는 막 손 잡고 중국은 설득하는 과정이다. 여기서 인식의 전환이 강대국에서 이루어져야 되는데 이런 운동이 참 어렵다는 걸 느낀다. 그런 면에서 남쪽의 우리가 소수이지만 이런 인식의 전환이 있을 때 조금 더 우리가 주권을 가지고 통일문제나 평화문제에 참여할 수 있지 않겠나 한다. 그래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장점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선택의 주체는 누구인가? 우리라는 거다. 강대국이 아니라는 거다. 그래서 우리는 나름대로의 민족공조 속에서 우리가 중심이 되어서 공존의 문화를 형성해야만 통일과 평화가 정착이 되는 거지 앉아서 기다린다고 그게 되겠는가?

□ 한국의 기독교는 보수단체인 한기총으로 주로 소속돼 있다. 한기총은 북한사회를 선교의 대상이나 더 나아가서 부정적인 걸로 보고 있다. 이런 한기총에 대해 말해 달라.

■ 그러니까 선교라는 개념이 기독교에서는 미션(mission)이다. 선교사적인 종교이다. 마태복음 마지막 절에 예수가 ‘너희는 전세계에 나가서 모든 인류를 주의 제자로 삼아라.’ 이렇게 말하면서 복음서가 끝난다. 그것에 근거해서 제자를 삼으라는 것이다. ‘모두 제자로 만들어라, 주의 제자로.’ 그래서 사람들 전부를 기독교인으로 개종(conversion)시켜야 하는 것이 기독교 보수주의의 근본적인 선교 목적이다.

나는 선교에 대한 정의를 다시 하라는 권고를 드리고 싶다. 앞으로의 선교는 하나가 하나를 먹는, 개종시키는 것이 아니라 다양하게 대화하고 사회복지를 위해 노력하는 상호 협력적인 체제로 가는 것이 선교의 근본적인 목적이다. 대화적인 선교를 해야지 제국적 선교하지 말라는 거다. 이 제국적 크리스챤, 제국적 선교는 이미 십자군 원정시대에 역사를 통해서 절단 받은 것이다.

특히 그런 종류의 기독교를 우리 역사 속에서 다시 하지 말라는 거다. 우리는 과거에 이미 너무나도 많은 비극적인 역사를 갖고 있는데 더 이상 이런 종교적인 걸로 분열 일으키지 말고 북을 악으로 대상화 하지 말고 협력자와 동반자의 위치로 제발 봐 주셨으면 하는 거다.

한기총 같은 보수적인 기독교 단체에서는 복음이라는 건 항상 전파되는 거다, 기독교에만 복음이 있는 거다,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는 거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예수 외에는 구원자가 없다는 거다. 그런 배타적인 틀을 깨줬으면 하는 거다. 복음이란 발견되는 것일 수도 있다. 이미 우리 문화권속에 내재되어 있던 것이 발견되는 것이지 밖에서 일방적으로 들어가 퍼뜨리는 것이 아니다. 아니 예수가 2000년 전인 기원후 1세기 때 왔는데 그전에는 그럼 복음이 없었단 말인가? 한국사회와 한국문화에서 다른 종교에서 예수를 못 봤던 사람들은 다 지옥 갔다는 말인가? 그런 원시적인 기독교 교리가 어디 있는가? 말이 안 되지 않는가? 말이 되지 않는 것에 종교적인 기초를 둔 이 열광적인 기독교, 내가 볼 때에는 정말 이단이다.

그런 이단이 되고 싶지 않으면 시대에 맞게 교리적인 재해석을 다르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대 문화가 변화하면서 복음의 내용도 변하는 거다. 영원한 것은 없는 거다. 복음이라는 것은 문화적 양식, 인간적 유산인데 왜 그것에 대한 인식 없이 그때 과거 예수가 한 말을 문자적으로 해석을 하는가.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있는 데는 우리나라 밖에 없다.

□ 자료검토를 하다보니까 신 교수 글 중에서 ‘남측의 기독교 근본주의와 북의 주체근본주의의 비판적인 재해석을 통해 포스트모던 사회에 어울리는 공존의 문화로 변화해야할 필요성이 있다’고 지적한 것을 봤다. 여기서 비판하려고 하는 게 무엇인가?

■ 각 전통에서 자기들만이 절대적인 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다 포기해야 한다는 거다. 그건 어떤 문화도 마찬가지이다. 기독교문화뿐만 아니라 주체문화 불교문화 어느 종교문화에도 배타주의는 문제니까 배타주의와 근본주의를 척결해야 한다. 우리가 앞으로 진정으로 공존을 지향한다면. 그건 북의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주체근본주의와 기독교근본주의는 극복될 필요가 있다”

내가 김일성종합대학의 선생님들을 만나면 그분들 그런 얘기한다. 철학과 관련한 실용적인 대화를 하고 나면 “정답이 뭡니까?” 그런다. 항상 정답을 어떻게 정했냐는 거다. 정답이 뭐냐는 질문을 참 많이 하신다. 그러면 북측 분들한테 나는 “철학에 정답이 어디 있어요. 철학은 인간사회의 다양성을 추구하는 학문인데”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분들은 정답이 딱 있는 줄 안다. 왜 그런지 나는 이해를 한다. 그 사회는 그럴 수밖에 없다. ‘주체인간’을 만들어야 하니까 딱 정답이 있어야 하는 거다.

그러나 앞으론 그것만 가지곤 안 된다는 거다. 그분들은 모든 인문학적 대답이 ‘주체’로 끝난다. 그러나 거기서 한 걸음 더 나가야 한다. 주체 좋다. 그러나 그 주체가 중심이 되어서 다른 문화를 같이 포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포괄성이 없는 문화라는 것은 굉장히 정태적인 거다. 정태적이 될 수밖에 없는 거다. 그런 의미의 주체근본주의는 극복될 필요가 있는 거다. 그런 얘기를 북에도 해드리고 싶고 기독교도 마찬가지이다. 기독교의 경우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니까 각 문화에 있어서 자기가 믿는 절대주의라는 것은 상대적이라는 것을 항상 인식하고 상대적 절대주의의 입장을 좀 인정하라는 거다. 그런 모습으로 우리가 인정하고 나왔을 때 나의 정체성은 변화하지 않지만 상대방의 고유성을 인정해 줄 수 있는 인식의 공간이 마련되는 거다. 그거 없으면 우리가 문화적으로 침투할 수 없지 않은가? 침투할 수 없으면 각자 등 돌리고 살아야 되는 데 기분 나쁘면 전쟁하고, 그게 뭐하는 짓인가. 문화 전쟁이다.

□ 공존의 문화를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남북이 공존하는 문화가 무엇인가? 통일문화 정착을 위해서 어떤 대안을 갖고 있는가?

■ 얼마 전에 우리정부가 지역별 통일교육센터를 지정해 통일교육을 확대한다고 발표했는데 사실 나는 박수도 많이 치고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런 것들이 과거에는 일종의 안보교육이었다. 반공교육 안보교육이었는데 앞으로는 그것을 정말 허심탄회한 대화의 장으로 열었으면 좋겠다. 얼마 전에 ‘친북사이트’ 이런 거 다 차단하고 검열하고 했다. 물론 나름대로 필요해서 했겠지만 앞으로는 내가 남한사회를 봤을 때 그러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이제는 솔직히 대학생들한테 주체사상 강의하고 주체를 믿으라고 해도 안 믿는다. 그러나 우리에게 지적 호기심이 있는 거다. 왜 저 사회는 저걸 추구할까, 왜 저럴 수밖에 없는가에 대한 기본적이고 일차적인 왜는 필요하지만 젊은 세대가 추앙하거나 따라하거나 열광적으로 신봉하거나 그러지는 않을 것이라고 판단한다. 왜냐하면 남쪽 사회는 이미 다원주의 사회가 되었다. 너무나도 많은 정보와 다양화된 가치 속에서 우린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다. 유불선이 이때까지 내려와서 접합되면서 종교문화를 이루고 우리나라 문화 속에 세계 박물관이 있다.

“주체문화도 현대 문화유산으로 포함될 가능성 있다”

▶"주체문화도 현대 문화유산으로 포함
될 가능성이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규종기자]
미국에선 볼 수 없는 현상들이 한국에 있는 것이다. 그 안에 ‘주체교’가 하나 들어와도 별 영향이 없다는 거다. 우리나라에 신흥종교가 많지 않은가. 증산교, 대순진리회 등 신흥종교 많다. 따지고 보면 북쪽 사람들이 믿는 주체사상도 종교성과 민족성에 근거한 민족종교이다. 주체문화도 그렇게 현대 문화유산으로 포함될 가능성이 있다는 거다. 김일성주의 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북의 문화를 하나의 종교문화유산으로 받아들일 역량이 다원주의 사회인 한국사회에는 충분하게 있다는 거다. 물론 문화적인 차원에만 있는 건 아니다. 경제적으로도 우린 이미 세계 10대 강국에 들어가고 외환보유고도 4위이다. 밖에 나가서 보면 우리나라 한국은행 총재가 한 마디 달러 얘기하면 달러가치가 왔다 갔다 한다. 우리의 국력이 세계 10위권에 드는 사회다.

□ 북의 주체문화도 더 이상 북만의 문화가 아닌 ‘우리민족의 문화유산’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 특이하고 새롭다. 그렇다면 지난 2월10일 북에서 핵무기 보유선언을 했다. 북의 주체문화가 우리민족의 문화로 될 수 있다면, 북한 핵도 우리민족의 핵으로 될 수 있지 않은가? 여론조사를 보면 그런 응답이 많다.

■ 나는 그거는 구별해서 보고 싶다. 근본적으로 한반도는 비핵화 돼야 된다고 본다. 우리가 평화공존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젊은이들이 심리적으로 쌍소리 섞어가면서 ‘미국이 (핵무기) 있으면 우리도 있어’ 이럴 수 있는데 근본적으로 비핵화를 추진해야 된다고 본다. 왜냐하면 북에서 핵을 가지고 있으면 핵 도미노현상이 일어날 것은 너무 뻔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회복지를 이루고 문화적인 사회로 나가야지 그런 정력을 소비한다는 것은 반대다. 그런 거는 좀 구분해서 보고 싶다.

그렇지만 문화적 차원에서 북쪽이 갖고 있는 주체사상이나, 영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본다. 북에서 단군릉 복원하고 이러지 않은가? 물론 그것은 김일성이즘과 연결시켜서 나름대로 정치적 목적이 있지만 북이 민족주의가 강하다. 우리가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 소수 민족주의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다원화된 사회일수록 자기 것이 어떠한 것인지가 자부심 있게 뼈저리게 느끼는 거다. 모자이크가 되면 될수록 자기 주체성이 분명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주체관점은 우리가 배워야 할 부분이다. 주체사상이라고 다 그냥 떠넘기지 말고 우리가 필요하고 배울 것은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민족이 발견하고 우리민족이 만들어낸 것 받아들일 수 없나? 다만 핵무기까지 우리 거 된다? 그것은 아니다. 문화와 구별해서 보고 싶다. 군사문제에 대해서는 조금 보수 경향이 강한데 나는 비핵화를 강하게 주장하고 싶다.

□ 남쪽에 국가보안법이 아직 있다. 국가보안법은 신 교수가 주장하는 다양한 문화, 포스트모더니즘에 맞지 않는다고 보여진다. 보안법에 대한 견해는?

■ 철폐해야 한다. 아직도 철폐 안된 게 문제다. (현 정부가) 무능하다. 과반수가 되었을 때 철폐했어야 했는데. 아쉽다. 근데 대체입법 만들고 어쩌고저쩌고 하는데 그게 아니고 국보법은 철폐해야 된다고 본다. 시대적으로 완전철폐 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뭐가 그렇게 겁나는가. 굉장히 불안감이 많은 거 같다. 심리전일 뿐인데. 자기문화에 대한 인식이 충분히 없어서 그렇다.

□ 지난해 11월 정부가 이른바 ‘친북사이트’를 차단했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 근데 왜 그렇게 한 건가? 오히려 묻고 싶다. 사상검증하려고 한 건가? 난 굉장히 의외였다. 참여정부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 그럴 필요가 있을까? 여전히 국가공권력이 개인의 사상을 억압하는 건데 시대 흐름에 역행하는 것이다. 국가에서 그렇게 하건 안하건 관심있는 사람들은 다 (‘친북사이트’를) 들어가서 본다. 개인의 선택문제인 것이다. 한국국민들이 개방한다고 해서 매몰될 분들이 몇 프로나 있을까. 그것도 궁금하고 오히려 못하게 하니까 더 호기심을 자극해서 궁금해서 더 보게 된다. 그런 것보다는 오히려 완전개방을 했으면 좋겠다.

완전개방을 해서 시민토론 등을 통해 주체사상에 대한 담론들이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비판할 것은 하고 또 좋은 것은 좋게 받아들이고 하면서, 이런 큰 작업들이 시민단체 내에서 이루어질 때 주체사상과 북에 대한 인식이 건전하게 자리를 잡는 거다. 그렇게 통제하면 은밀하게 보는 게 더 문제가 크다고 본다. 과거에 지하운동 하듯이 그렇게 할 수는 없다고 본다. 그래서 (정부가) 자신감을 가지고 개방해서 실제로 북에서 내려와서 강의도 하라 하고 하면 어떤가? 한국사회에서 이미 3-40년 고착된 자유주의가 쉽게 바뀌지 않는다.

□ 여기서 잠깐 신 교수의 이력을 묻고 싶다. 신 교수가 누군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 대학교 다니다가 캐나다로 이민갔다. 토론토 대학교에서 철학박사까지 마쳤고 그다음에 4년 전에 미국에서 교수직을 받아서 4년 정도 재직을 하고 있다. 심슨대학교 종교학과다. 작년부터 여름마다 한국에 와서 연대와 한국외대에서 북한사회문화와 한국사상 등을 특별 강좌 하고 있다.

□ 주체사상을 연구해서 그런지 신 교수가 민족주의자가 아닌가 한다.

■ 난 내 정체성이 분명한 거 같다. 민족주의자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미국에서 살고 있고 서구문물을 많이 받아들였지만 나는 한국 사람이다. 한국의 문화유산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것들로 인해 내가 ‘주체’가 되어서 어떤 형태의 다양한 문화권과 대화를 나누기를 바란다면, 그런 측면에서 민족주의가 강하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조금 ‘열린 민족주의’를 하고 싶다. 민족주의 한다고 우리 것만 딱 챙기지 말고 서로 공존하고 평화를 추구하는 그런 민족주의를 하고 싶다. 내가 없이는 타자가 없는 거 아닌가? 내가 없이 어떻게 대화를 하는가?

□ 신학자 박순경 선생을 아는가? 박순경 선생은 1970년대부터 통일문제를 신학적으로 접근해서 통일신학을 연구했다. 그 작업을 통해 기독교에 내재된 반북.반공 이데올로기를 깨는 역할을 했다. 박 선생 이후에 신 교수가 신학적 차원에서 그런 역할을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박순경 선생이 마르크스.레닌주의 시대때 주체사상을 기독교와 접맥시키는 시도를 했다면, 신 교수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주체사상과 기독교사상을 만나게 하는 시도를 하고 있지 않나 한다.

■ 박순경 선생을 개인적으로는 잘 모른다. 박 선생이 살던 시대와 내가 살고 있고 살아갈 시대가 다르기 때문에 사상적 흐름도 다를 수 있지 않겠나? 원리적인 면에서는 같다고 보지만 나는 신학적인 틀에서 벗어나고 싶다. 신학적인 틀에서 상당히 답답함을 많이 느낀다. 왜냐하면 일단 신학은 신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신에 대해서 우리가 상상한다는 것은 조금 답답하게 느껴진다.

“신학자이지만 신학에서 벗어나 인본주의로 가고 싶다”

▶"NGO활동에 열심히 참여하고 싶다."
[사진 - 통일뉴스 김규종기자]
그래서 난 인본주의로 가고 싶고 신학에서 벗어나서 좀더 철학적이고 세계 종교.문화적인 다원화된 좀 더 큰 폭에서 해석을 하고 싶다. 주체사상이건 우리문화건 큰 틀에서 얘기를 하고 싶다. 그렇지만 평화통일을 얘기하는 데 있어서는 통일신학과 같은 것이 아닐까? ‘주체신학’이 더 어울린다고 본다. 통일신학이란 누구에 의해서 어떤 주제로 어떤 방법을 통해서 통일하는지 미묘하다. 여성신학이 있잖은가. 그것은 여성이 중심이 된 신학이다. 흑인신학은 흑인이 중심이 된 거다. 주체신학은 민중들이 주체가 되는 거다.

그래서 주체신학이라는 용어가 나는 조금 더 합당한 거 같다. 통일론도 매우 다양해서 연방제로 할 거냐, 연합제로 할 거냐가 있다. 어떤 종류의 통일신학을 얘기하는 거냐다. 그리고 또 신학적인 도구를 사용할 때 어떤 기독교적인 모체에 내용을 주체로 넣을 거냐, 아니면 주체의 틀에다가 기독교를 넣을 거냐, 이것 또한 중요한 선택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통일신학에서는 그러한 점이 분명하지 않단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나는 아예 주체틀에다 주체를 넣고 대화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주체신학화 작업을 하자는 거다. 조금 더 현실에 맞게 방법론적으로 새로운 것, 현대적인 것을 추구한다고 이해하면 되지 않을까. 그런데 난 개인적으로 박순경 선생께서 하신 작업에 대한 비판적인 의견은 전혀 없고 내가 존경하는 분중의 한 분이고 다만 시대가 다르기 때문에 우리 시대에는 과거의 신학적 방법론만으로는 한계가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입장이다.

□ 박순경 선생은 팔순이 넘으셨다. 오래전부터 실천운동 특히 민간차원의 통일운동을 해 왔다. 신 교수도 그럴 의도가 있는가? 의도적으로 통일운동 할 의향은 없나?

■ 나는 국내 NGO에서는 평화통일시민연대에서 대외협력위원장을 맡고 있다. 거기 평화연구소에서 자원봉사로 열심히 강의를 하고 있다. 나는 그런 좌담 대담 등을 통해서 느끼는 게 인식의 전환이 가장 필요하다고 본다. 그리고 국내에서 앞으로 운동 평화운동하시는 분들도 북에 대한 사상연구를 상당히 많이 하시기 때문에 그런 분들을 위해서 내가 할 역할이 있다면 열심히 참여하고 싶은 입장이다. 시민들이 이해하기 쉬운 북 바로 알기 운동과 같은 것을 앞으로 열심히 하고 싶다.

□ 곧 6.15남북공동선언 5주년이 된다. 5년전 남북이 합의한 6.15공동선언에 대해 평가를 내린다면?

■ 나는 6.15공동선언이 위대한 선언이고 또 역사적인 사건으로 평가한다. 그런 제2의 6.15선언이 또 나와야 한다고 본다. 한 번 하고는 지금 주춤하고 있는데 참여정부시대에서 제2의 6.15공동선언이 나왔으면 좋겠다. 조금 더 확대된 좀 더 포괄적이고 다원화된 그런 6.15선언이 또 한 번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 개인적으로 정상회담이 빨리 이뤄져야한다고 본다. 민족공조를 꽃피는 중요한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고 본다. 남과 북이 노력해서 그런 제2의 사건이 일어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 제2의 6.15선언에 다양한 내용이 들어가야 한다고 말했는데 어떤 내용이 들어가야 하나?

■ 방송이나 신문 같은 것들이 완전히 공유될 수 있는 풍토가 되어야 한다. 게다가 지금 동아시아에서 한류열풍 대단하지 않은가? 그런 식으로 한류문화나 미국문화가 남북간에 교류가 된다면, 그 정도의 공감대가 이루어진다면 국내에서 문화통일이 금방 될 거 같은 느낌이 든다. 윤도현 밴드나 안치환이 북에 가고 또 북쪽 예술단 조명애 같은 사람이 남쪽 cf 모델도 하고 이런 일이 많아져야 한다. 이런 작은 문화교류와 스포츠교류도 이뤄진다면 얼마나 많은 인식이 바뀌겠는가.

□ 아무래도 문화학자라서 그런지 문화적인 접근을 많이 한다.

■ 앞으로는 문화전쟁이다. 중국이 문화전쟁 선포하고 10년 후엔 미국의 문화를 따라잡을 거라고 선언했다. 정치적 이슈가 조금 안정되면 나머지는 문화정치가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의 모토를 문화정치로 보고 싶다. 문화가 있는 나라가 항상 이긴다. 미국은 굉장히 넓은 땅이지만 자기들의 문화가 없다. 원주민 해치운 역사밖에 없다 피의 역사 밖에 없다. 그것에 대한 엄청난 열등의식이 있다. 그래서 요즘 미국은 원주민 문화를 재문화해서 미국의 문화인 것처럼 창출하는 과정들에 있다. 그게 중국문명을 견제하기 때문에 그렇다. 미국은 200년 역사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거다.

그런 면에선 한국상황은 굉장히 긍정적이다. 중국이나 일본은 뭐 하나 특별한 게 있으면 완전히 문화재로 만들어서 관광코스로 만든다. 우리는 문화재가 있어도 제대로 보관도 못한다. 그게 지금 차이다. 남북간에 진행할 문화교류가 얼마나 많은가. 특히 북의 주체문화를 북만의 문화가 아니라 우리 문화로 하는 것이 단지 이상적이라고만 생각되지 않고 10년 내에 반드시 이뤄질 거라는 생각이 든다.

□ 통일뉴스는 인터넷 언론이다. 끝으로 젊은 네티즌이나 통일뉴스 독자들에게 민족문제, 통일문제에 대해 한 마디 한다면.

■ 젊은 사람들이 많이 모였으면 좋겠다. 내가 가는 학회나 토론회장에는 이상하게도 나이 드신 분들이 굉장히 많다. 그래서 나는 토론회장 갈 때마다 왜 젊은 사람들이 없는가 한다. 우리 차세대들이, 10년 후 주체가 되어야 할 사람들이 민족문제와 통일문제에 그렇게 관심이 없고 무지해서 되겠나 싶다. 이런 인터넷 뉴스매체를 통해서 다양하게 연구하고 논쟁하는 토론의 장, 특히 통일을 주제로 한 토론문화가 꽃피는 대화의 장이 되면 좋겠다. 통일뉴스가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해서 토론하는 매체가 되기를 바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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