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교훈

내가 듣기 싫어하는 말 중에 하나가 바로 `살아보면 알아`라는 말이다. 처음에는 결혼생활에 대해 이런 말을 가장 많이 들었다. 나중에는 출산과 육아문제 따위로 발전했는데,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불쾌한 마음이 들었다. `결혼해 보면 알아`, `애 놓고 키워보면 알아`, `살아보면 알아`라는 말들은 우리가 별 생각 없이 잘 쓰는 말이다. 하지만 살아봐야지 알 수 있다면 뭐하러 공부하나. 그냥 살면 알게 될텐데. 정말 그렇다면 사회나 개인이 발전하겠나?

우리가 역사나 선조들이 살아온 경험을 공부하는 것은 과거의 문제점을 극복하고 보다 좋은 삶을 살기 위해서다. 나는 이런 말을 남발하는 사람은 좋은 친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말 친구로서, 선배로서 충고를 한다면 이렇게 해야 하지 않을까. `살다보니 이러저러한 문제점이 있더라구. 문제를 이렇게 풀었다면 보다 좋게 살수 있었을 텐데, 네가 이런 문제를 현명하게 준비하고 풀어낸다면 나보다 훨씬 나은 삶을 살수 있을 거야.`

사실 나는 어르신들에게 많은 것을 간접적으로 배웠다. 주로 당신들끼리 하는 말을 옆에서 주어 들었는데, 몇 가지 기억나는 좋은 말은 있다. `자식과 남편을 잃은 고통보다 더 심한 것은 싫은 사람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살아보니 어떻게든 살게 되더라구`, `뭐든지 10년만 꾸준히 하면 돼`, `자식이나 마누라도 결국은 남이야`, `돈에게 끌려 다니다 보니 나이만 먹었어`, `몇 백년 사는 게 아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아` ...
이런 주옥같은 삶의 철학은 어려운 청춘시절을 지나오는데 큰 힘이 되었다.

하지만 정말 고리타분한 충고도 많았는데, 대부분 `요즘 젊은것들은...`이나 `우리 때는 말이야...`라는 따위로 시작하는 말이었다. 이렇게 시작한 말은 결국 넋두리로 끝나고야 만다.

내가 어르신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특별히 노인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마음이 있어서가 아니다. 쉽게 말하자면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나이 먹는 것을 두려워하고 젊게 살고 싶어한다. 단지 패션이나 머리모양, 화장 따위로 젊어지는 것은 아니다. 생각이 늙으면 나이가 젊더라도 그 사람은 늙은 것이다. 다르게 생각해보면 30대가 40대나 50대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면 그 사람은 10~20년은 젊게 사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단순한 지식으로만 존재하면 `애늙은이`라는 비난을 받게 된다. 지식을 지혜로 발전시키는 뭔가가 필요하다.


과거를 넘어서

▶해방 전 이야기/김석룡/유화/147*165/1957

이번 작품은 좀 오래된 그림이다. 북한화가 김석룡이 그린 [해방 전 이야기]는 1957년에 제작되었다. 나이 드신 할아버지가 손자로 보이는 청소년에게 일제시대 이야기를 해 주는 장면을 그렸다. 배경에는 할머니가 바느질을 하고있고, 며느리로 보이는 아낙네가 간식을 내오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할아버지의 경험담을 듣는 아이들의 표정은 매우 진지해 보인다.

아마도 할아버지는 일제시대 때 일본인이 우리를 착취하고 고통을 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아니면 암울했던 시절, 독립운동을 하던 경험담을 들려주고 있을지도 모른다.
약간 빨간 눈으로 이 작품을 감상하면 이런 정도 내용이다. `일제 때 고통을 많이 겪었는데 이런 조선을 해방시키고 이만큼 먹고살게 해 준 분이 바로 김일성 장군....`

하지만 미술작품에 이런 단순한 감상은 별 의미가 없다. 이 작품을 다양한 눈으로 살펴보자. 일단은 상당히 계급적이다. 노인의 모습이나 살림살이를 보면 잘사는 집안이 아니라 평범한 가정이라는 알 수 있는데, 독립운동이나 해방이후 북한의 중심세력이 일반 백성으로 드러내고 있는 장치로 보인다. 친일을 하던 인사가 해방이후 우리 사회의 중심세력으로 둔갑한 사실과 견주어 볼 때, 생각해 볼만한 가치가 숨어있다. 그래서 우리는 훈계나 충고를 생각하면 으레 힘있고 잘사는 사람들이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볼품없는 노인의 말은 쓸데없다고 여기는 것의 허를 찌르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들이 일제의 만행을 알고있다는 전제를 깔고 그려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노인이 말하는 경험의 구체적인 내용은 감상자의 몫으로 남겨놓아도 별 문제가 없다. 예술이 모든 사람에게 말없이 통용된다는 말은 거짓말에 가깝다. 왜냐하면 식민지의 아픔을 모르는 제국주의 나라의 사람들은 이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 속에는 세대간의 문제도 표현되어 있다. 화롯불, 아이들 책상, 재봉틀 따위의 소품처리를 통해 할아버지 세대와 며느리 세대, 손자세대가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있다. 식민지 경험이 없는 외국인이 본다면 세대의 문제로 감상할 여지가 있겠지만, 북한식으로 보자면 혁명은 세대를 이어가야 한다는 암시를 던진다.

아무튼 [해방 전 이야기]란 작품은 남북한이 함께 경험한 역사적 사실을 담고 있다. 문제는 이것을 해석하는 사람들의 입장과 태도이다. 과거는 과거로만 존재하면 별 의미가 없다. 현재와 미래를 보여주고 밝히는 과거야말로 우리에게 살아있는 교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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