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랑(경희총민주동문회 회장)


사법사상 암흑의 날 4월 9일

4월 9일을 아십니까? 지금으로부터 꼭 30년 전인 1975년 4월 9일이 어떤 날인지 아십니까?

이 날은 이 땅에 최소한의 양심과 정의 및 인권마저도 철저하게 짓밟힌 날이며, 우리 나라가 전세계적으로 씻기 어려운 망신을 당한 치욕의 날입니다.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기에 그런 걸까요?

이 날 무려 여덟 명이나 되는 사람이 대법원 확정판결이 있고 하루도 채 되기 전에 한꺼번에 사형을 당하였습니다. 국제법률가협회는 이 날을 일컬어 ‘사법사상 암흑의 날’이라고 일컬었습니다. 이 사건을 이른바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라고 합니다.

천인공노할 고문조작극인 이른바 ‘인혁당 재건위 사건’

이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죽게 되었을까요? 이들을 사형시킨 정권의 주장에 따르면 이들이 이른바 ‘북괴’(정말 이제는 까마득한 옛날의 말이네요. 북한을 가리키는 것이지요.)의 지령을 받아 ‘전국적인 학생 데모’를 배후 조종해서 내란을 일으키려 했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전국적인 학생 데모’는 이른바 ‘민청학련 사건’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사건은 이미 민주화운동으로 규정되었고, 이 사건 관련자가 지금 사회 각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는 이름만 대도 알 만한 사람들이 셀 수 없이 많습니다. 따라서 설사 이들이 이때의 학생 시위를 배후조종했다고 해도 그렇게 죽어야 할 까닭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물며 이들이 배후 조종했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임이 여러 증거로 드러났습니다. 이 사건 관련자로 작년 총선에 열린우리당 후보로 대구에서 출마한 이강철은 이때 경북대학교에 재학중이었습니다. 그는 법정에서, “나는 인혁당의 인자도 들어보지 못했는데 그것을 잘 아는 것으로 시인하지 않는다고 검사 입회하에 전기고문을 수차례나 받았습니다”하고 분명하게 증언했습니다.

이런 증언들로 보면 이 사건은 고문을 통해 조작했음이 분명해집니다. 또다른 증언을 볼까요? 이 사건 관련자로 이들처럼 사형을 당하지는 않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뒤 8년 8개월만에 풀려난 전창일의 증언을 봅시다.

처음엔 그들이 요구하는 각본에 맞춰 글을 쓸 것을 거부했다. 그랬더니 그곳 건물 지하실로 끌고 갔다. 어두컴컴한 보일러실 같은 데였다. 그곳에서 팬티까지 완전히 옷을 벗어야 했다. 수사관들은 나의 팔목과 발목을 수건으로 완전히 감은 후 꼼짝 못하게 묶었다. 긴 막대기를 내 몸 사이에 끼워 넣더니 수사관 두 사람이 달싹 들어 책상 두 개 사이에 매달았다. 마치 네발 달린 짐승이 묶여 도살장에 매달린 것과 같았다. 천정으로 향한 내 얼굴에 수건을 덮더니 콧구멍에 주전자로 물을 붓기 시작했다. 끝내 나는 기절하고 말았다.

비슷한 시기에 전씨는 하재완(사형 집행)이 전기고문을 받으며 비명을 지르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하고, 남산 정보부에서 화장실을 가다가 복도에서 우홍선(사형 집행)과 마주쳤는데 그 역시 고문 때문에 진술서를 썼고, 힘센 놈에 의해 강제로 지장을 찍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고문 조작은 가족들의 증언에서도 확인됩니다. 사형 집행된 사람 중 하나인 이수병의 처 이정숙은 사형이 집행된 남편의 시신을 넘겨받은 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습니다.

오후 6시 반쯤 집에 도착해 함세웅 신부와 함께 우선 남편의 시신을 살폈습니다. 얼굴은 잠을 자는 듯 평온한 편인데, 손톱, 발톱 부분이 새까맣게 타 있습디다. 발 뒤꿈치 아킬레스건 양쪽 움푹 들어간 곳도 새까맸어요. 등허리도 마찬가지였어요. 철판에 눕혀놓고 장기간 전기고문을 했다는 증거가 뚜렷했어요. 얼마나 혹독하게 당했으면 체포돼 사형당하기까지 1년이란 기간이 흘렀는데도 그랬겠어요? 그때 함세웅 신부와 함께 우리집에 온 외국인 의사가 그런 고문의 증거를 사진으로 찍었는데, 언젠가는 이 사진들이 남편의 무고함을 증명해 줄 겁니다.

심지어 송상진의 경우 시신마저 가족들에게 넘겨지지 않고, 수백명의 경찰들이 둘러싼 가운데 서대문구치소에서 성당으로 옮겨지던 시신을 실은 차를 크레인으로 탈취하여 벽제 화장터로 가서 화장을 하여 버렸습니다. 무엇이 두려워서 시신을 서둘러 강제로 화장해 버린 것일까요? 이때 시신을 빼돌리는 차량을 막으려다가 문정현 신부는 차바퀴 밑에 깔려서 지금도 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물론 이때 고문을 직접 자행했거나 지휘했던 자들은 고문 사실을 부인합니다. 그러나 2002년에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는 이 사건 관련자로 옥사한 장석구가 고문의 후유증으로 죽은 것임을그 당시 교도관의 증언에 따라 밝혀낸 바가 있습니다. 또 이 사건 전체를 재조사할 것을 결정하였습니다...

우리는 권인숙에 대한 부천서 성고문 사건이나 김근태에 대한 남영동 대공분실의 고문 때도 고문을 자행한 자들은 철저하게 부정할 뿐 아니라 오히려 고문당한 사람들이 그것을 이용한다는 터무니없는 소리까지 지껄였음을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이때보다 훨씬 더 극악한 탄압을 자행하던 시절에 이건 누가 보아도 뻔한 일입니다.

이 사건 관련자들은 살인적인 전기고문 등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1974년 4월에 체포된 뒤 이듬해 사형을 당할 때까지 가족들의 면회조차 일절 금지당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재판에도 가족 중 한 사람만 방청이 허용되었고, 변호사는 한 명의 증인도 신청하지 못했고, 검찰측 증인에 대한 변호사의 반대심문도 허용되지 않았으며, 외신 기자들의 방청도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국제사면위원회 한국관계보고서 : 75년 3월 27일-4월 9일’ 42쪽)

이른바 ‘인혁당 사건’을 통해 스스로 반민주적 파쇼임을 입증한 박정희 정권

그러면 이들은 왜 그렇게 고문까지 자행하고 전세계의 비웃음거리가 되면서까지 그런 짓을 자행했을까요?

그건 당시 상황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있다면 삼척동자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1971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사실상 패배한 박정희는 유신체제라는, 영구집권을 위한 말도 안 되는 체제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유신체제를 만든 뒤에도 저항은 계속되었습니다.

드디어 그는 일거에 저항세력을 초토화시킬 기회를 노렸고, 학생들이 전국적으로 시위를 할 계획이란 걸 알고 이것을 북한이 조종한 것으로 만들어 한번에 모두 없애 버리려 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64년에 있었던 이른바 1차 인혁당 사건에 연루됐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배후 조종 세력을 조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앞에서도 보았듯이 그것은 아무런 물증도 없는 터무니없는 조작일 뿐이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덧붙여서 밝혀야 할 것은 이른바 ‘1차 인혁당 사건’이란 것도 조작 투성이로 두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무죄로 석방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기소 단계에서부터 일선 검사들의반발로 기소에 어려움을 겪었는데 당시 중앙정보부가 검찰 수뇌부에 압력을 넣어서 무리하게 기소한 사건이었습니다. 그 결과 엄청난 공안사건치고는 참으로 웃기는 결과를 낳은 것이지요. 이 때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형욱조차 나중에 자신의 회고록을 통해 인혁당 사건을 “검찰의 양심에 판정패한 셈”이라고 말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이른바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정말 중세시대에나 있을 법한 무법적인 폭압으로 반대자를 처형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으로 박정희 정권은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이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죽이는 반민주적인 파쇼 정권임을 스스로 확인하였습니다.

민주 국가에서는 어떤 사상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이처럼 잔혹한 고문 끝에 사형을 당하고, 시신까지 탈취당해야 할 이유는 없지요. 만약에 그럴 수 있는 나라라면, 그 나라는 민주국가가 아니지요. 아니 민주국가가 아닐뿐더러 히틀러의 체제와 다름없는 극악한 파쇼국가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민주 민족 통일운동의 선구자였던 이른바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들

하지만 아직도 의문은 남습니다. 좀더 본질적인 문제로 들어가 봅시다. 박정희는 반대자들도 많은데 왜 하필 이들을 그토록 싫어했고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죽였을까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이들을 죽인 이른바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조작되었다는 점을 강조하다 보니 이들이 마치 사회적인 배경이 없는 사람들이어서 박정희가 함부로 죽일 수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판단입니다.

이들은 8. 15 전후부터 민족민주운동을 했던 사람들이거나 아니면 4. 19 민주혁명 및 6. 3 한일협정 반대 시위 때 중심역할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물론 남한 단정 수립과 한국전쟁 그리고 독재정권을 거치면서 우리 사회에서 민족민주운동은 비밀리에 진행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활동을 소상하게 알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활동에 대한 기록을 전혀 남겨 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들의 과거 전력 및 비교적 활동이 자유로웠던 4. 19 공간에서의 활동을 보면 이들이 민족민주운동을 일관되게 해왔던 사람들이라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4. 19 공간에서 이들은 모두 대표적인 민족민주운동 조직이었던 민민청 혹은 통민청 그리고 대표적인 학생통일운동조직인 민통학련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4. 19공간에서의 반독재 민주화운동이 우리 사회의 본질적 문제인 민족문제와 통일문제로 발전되어 나가자 반민족세력은 외세의 지원 아래 군사쿠데타를 감행하여 민족민주운동을 압살하려 하였습니다. 그것이 5. 16군사쿠데타의 본질입니다. 그것은 우리 사회에서 반독재 민주화운동이 민족운동과 통일운동으로 발전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한 반민족 수구세력들의 반동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반독재 민주화운동은 민족운동과 통일운동으로 발전해 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모순이 해결되어 나가는 필연적인 과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미국의 사주에 의해 얼렁뚱땅 일본제국주의에 면죄부를 주려 한 한일협정에 대한 청년학생들의 반대운동으로도 명확하게 드러났습니다.

그러자 군사독재에게 민족민주운동의 이념으로 무장되고 조직적으로 그것을 확산시키려고 하는 이들이 눈엣가시였음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마침내 군사파쇼는 이들을 엮어서 한꺼번에 죽이려고 이른바 ‘1차 인혁당 사건’을 조작하였습니다. 그러나 민주주의라는 형식적인 외피마저 던져 버릴 수 없었던 군사정권은 이 시도에서 실패하고 맙니다.

하지만 그 외피마저 벗어던진 유신체제 이후에는 그 악랄한 마수를 마침내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박정희를 정점으로 하는 이 땅의 반민족 반민주 수구세력은 민주 민족 통일운동의 선구자들을 최소한의 민주적 절차마저 무시한 채 학살해 버렸던 것입니다. 그것이 이른바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본질입니다.

열사들의 추모는 민주 민족 통일운동의 역사를 이어가는 것

여덟 분이 군사독재에 학살당하신 지도 벌써 30년이 흘렀습니다. 그 동안 그 유족들이 당한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정도였습니다. 독재정권은 여덟 분을 무참히 죽인 것도 모자라서 그 유족들을 항상 감시하고 협박하여 제대로 된 추모 행사조차 하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분들의 정신이 계승되고 확산되는 것을 저지하고자 하는 의도에서였지요. 그뿐 아니라 다행히 죽음만은 면하신 분들까지 갖은 악랄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돌아가시거나, 고통 속에서 여생을 보내시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른바 ‘인혁당 사건’을 조작하여 열사들을 학살한 박정희 정권은 결국 민중의 힘으로 붕괴되었고, 그 뒤를 이은 전두환 군사독재정권 역시 민중의 힘으로 축출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이른바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진실을 밝혀 내고 열사들의 정신을 추모 계승하고자 하는 움직임들이 일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른바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먼저 가신 열사분들을 추모하는 것은 다시는 이 땅에 이와 같은 만행이 없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땅에 완전한 민주화를 이루기 위한 운동의 하나입니다. 또 이분들을 학살함으로써 외세와 그 하수인인 반민족수구세력들이 끊어 놓으려고 한 민족민주운동의 역사를 온전히 복원하는 길입니다. 바로 이 분들이 그 엄혹한 시절에 온몸을 던져서 외세 및 그 하수인인 군사독재와 싸워 왔던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님들은 가셨지만 그 정신은 남아서 한라에서 백두까지 이 강산에 꽃으로 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이 살아 있는 한, 우리 민중이 살아 있는 한, 역사에 정의가 있는 한, 민주 민족 통일을 위해 온몸을 바친 님들의 정신은 결코 사라질 수 없습니다.

이제 살아남은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바로 가신 님들을 추모하여 그 정신을 계승하고 확산시킴으로써 이 땅에 진정한 민주와 민족 자주와 통일의 그 날이 어서 오도록 앞당기는 일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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