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된 지 불과 2년 정도밖에 안된 시점에서 북한 사회는 급격한 변화를 겪었습니다. 권력기관에서 친일파를 철저히 청산하고, 토지개혁과 제반 민주개혁을 실시했으며 `합법적` 선거를 통해 인민위원회를 출범시켰습니다. 이로써 제도적으로는 식민지반봉건사회와 완전히 결별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북한 사람들의 의식과 생활 속에는 아직도 일제시대의 사상적 잔재와 봉건적 유습이 뿌리깊게 남아 있었습니다. 씨족관념이나 관존민비 의식과 같은 유교적 봉건사상뿐만 아니라 일제 식민지 통치시기 농촌사회에 뿌리내린 투전이나 도박과 같은 나쁜 생활습관, 더 나아가 식민지적 노예근성과 사대주의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의 의식은 매우 복잡했던 것입니다. 

북한 지도부는 주민들 속에 이런 의식들이 남아 있는 한 인민민주주의 혁명도, 인민경제 계획도 제대로 이루어지기는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북로당은 대대적인 사상개조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합니다.

1946년 11월 당 중앙위 제3차 회의와 12월 상무위원회에서 건국사상총동원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했고, 이어 임시인민위원회에서 [건국사상총동원 선전 요강]을 제작 배포합니다. 그렇게 해서 1946년 12월부터 1948년 초반기 이르기까지 건국사상총동원운동이 대대적으로 전개됩니다.

이것은 북한 사회주의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한 가지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북한 사회주의가 과거 구 소련이나 동유럽 사회주의와 가장 차이를 보이는 부분은 사상에 대한 강조입니다.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사상의식으로 보아 사람들의 의식을 끊임없이 변화 개조해 공산주의적 인간으로 만들고자 합니다. 그래서 북한에서는 사상교양과 학습이 강조되고 사람들의 의식을 변화시키기 위한 대중적인 사상운동을 끊임없이 진행해 갑니다.

건국사상총동원운동은 국가 건설을 앞두고 벌어진 대중동원이면서 동시에 그 후 북한에서 끊임없이 전개되는 사상개조운동의 시발이라는 중요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과거 북한에서 고위직에 있었던 한 인사는 그것의 의미를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북한 정권 창출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군중운동이 바로 건국사상총동원운동입니다. 이 운동은 낡은 사상 유습을 타파하고 새로운 애국·민주 사상을 주민들에게 파급시키기 위한 것이었어요. 특히 정권 창립에 앞서 주민들의 전면적인 사상개조운동을 벌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북한 사상개조운동의 단계를 보면 첫 단계가 건국사상총동원운동이었어요. 그 다음의 사상개조운동은 54∼55년 두 해 동안 이뤄진 계급교양·계급사상 무장운동이었습니다. 50년대 말의 공산주의 교양에 이어 60년대에 유일사상체계, 70년대에 주체사상체계로 이어진 겁니다. 북한의 사상운동은 이같은 단계를 밟아 나갔으며, 건국사상총동원운동은 그 첫 단추를 끼운 것에 해당됩니다."([서용규 증언], 중앙일보특별취재반,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하)}, 269쪽)

건국사상총동원운동이 주요 대상으로 삼은 것은 나태와 안일, 사기와 횡령, 탐오랑비(貪汚浪費, 직무를 이용해 국가 재산이나 공공 재산을 훔치거나 함부로 써버리는 행위)에서부터 사업에서 고용자 근성과 무책임성, 형식주의, 관료주의, 그리고 더 나아가 일제시대의 식민지적 사상잔재와 봉건적 사상잔재, 사대주의에 이르기까지 실로 광범위한 것들이었습니다.

북로당은 건국사상총동원운동을 효과적으로 진행하기 위해 선전대를 조직해 북한 전역에 파견합니다. 선전대는 당의 지도를 받아 청년과 학생들이 주축이 되었고, 특히 농민들 속으로 많이 들어갑니다. 농민들은 당시 사회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던 반면, 의식이 낙후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주로 내건 구호들은 "과거의 썩은 생활을 고치자", "쌀 한 알, 실 한 오라기라도 절약해 조국건설에 바치자", "무식은 파멸이다" 등과 같이 구체적인 것들이었습니다. 이런 운동의 과정에서 `애국미 헌납운동`이 시작되기도 했습니다.

애국미 헌납운동의 첫 발기자는 김제원 농민이었습니다. 일제시대 소작농이었던 김제원은 해방 후 농지개혁에서 3,390평의 토지를 분배받아 자신을 땅을 갖고자 했던 소원을 풀었습니다. 그는 첫해 농사에서 66가마니를 수확했고, 여기서 현물세를 내고 남은 쌀 가운데 30가마니를 국가에 헌납한 것입니다. 이를 계기로 북한 전역에 애국미 헌납운동의 불길이 번져갑니다. .

애국미 헌납운동은 노동자들에게도 파급되어 증산경쟁운동이 전개됩니다. 특히 정주 철도기관구의 기관사 김회일은 무사고와 수송량 기록을 계속 경신해 노력혁신자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그는 전쟁 후에 그 공로를 인정받아 철도상에 되었고, 1980년대에는 정무원 부총리 겸 교통위원장으로까지 승진하게 됩니다.

증산운동은 물품 생산을 늘리는 데만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공장·기업소의 기술자·노동자들이 기계와 물품을 아끼며 제때에 정비해야 한다는 것을 깨우치는 운동이기도 했습니다. 말하자면 주인의식을 갖자는 것이었지요. 1947년 7월 흥남비료공장 노동자들이 전국의 공장·기업소 노동자들에게 증산경쟁운동을 호소하면서 북한 전역에서 `47년 인민경제계획`을 완수하기 위한 돌격운동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그리고 1947년 9월에는 농촌지역을 중심으로 문맹퇴치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졌는데, 이 역시 단순히 문맹퇴치 차원을 넘어 애국사상무장운동과 맞물려 진행되었습니다. 이 운동 과정에서 농촌의 각 부락 단위로 1천 개 이상의 한글학교가 조직되었는데, 그것은 특히 1947년 겨울부터 1948년 봄까지 4개월에 걸친 농한기에 집약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그 결과 북한 주민들의 문맹률은 급속히 낮아집니다.

이처럼 북로당은 건국사상총동원운동을 통해 주민들에게 정권 수립이 가까웠음을 알리고, 주민 스스로가 새 정권의 `공민`이라는 자각을 갖도록 유도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북로당은 건국의 기반을 한층 견고하게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건국사상총동원운동은 북한에서 인민정권 수립을 위한 사전 정지작업이었던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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