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오전 국가정보원 강당에서 과거 의혹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의 계획을 밝히는
기자회견이 열렸다. 사진 맨 오른쪽이 오충일 위원장. [사진-통일뉴스 김규종기자]
"부끄러운 역사를 감추고 싶지 않기에 진실 앞에서 고통을 가지고 이 일을 시작했습니다."

국가정보원(국정원, 원장 고영구)이 드디어 스스로의 '진실고백'을 선언했다.

이른바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위원장 오충일, 이하 국정원발전위)가 개최한 기자회견에서 오충일 위원장은 "나는 다만 진실을 말하는 새 세상을 만들고 싶지 누구도 정죄하고 싶지 않다"며 이같이 말했다.

3일 오전 10시 30분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에 위치한 국가정보원 내 국가정보관 3층 강당에서 국정원발전위는 본격활동에 앞서 민간위원인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의 사회로 기자회견을 갖고 그간 활동경과와 사건조사 계획에 대해 설명하며 7가지 우선조사 대상을 발표했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오충일 위원장을 비롯해 안병욱 간사위원, 김만복 기조실장(국정원측 간사위원), 곽한왕, 이창호, 박용일, 문장식, 한홍구 위원이 참석했다.

▶이날 기자회견에서는 'KAL858기 폭파 사건'을 비롯한 7가지 의혹사건에 대해 우선
조사할 방침을 밝혔다. [사진-통일뉴스 김규종기자]
오충일 위원장은 국정원발전위의 발족취지에 대해 "과거 의혹사건의 진실규명을 통해 국민의 신뢰를 획득함으로써 국정원 발전의 항구적 토대를 마련한다는 취지에서 국정원장 직속으로 민.관 합동기구인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를 설치.운영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한 "우리 현대사를 바로 세워나감은 물론 과거의 인권침해 및 월권과 탈법행위 등에 대한 재발 방지를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함으로써 국가정보원이 국민의 신뢰를 바탕으로 '국민 봉사기관'으로 거듭 태어날 수 있도록 하자는 데 그 목적이 있다"고 말했다.

국정원발전위는 작년 11월 2일 출범, 미래 12차 회의를 개최해 오충일 목사를 위원장으로, 안병욱 가톨릭대 교수와 김만복 국정원 기조실장을 간사위원으로 선임했다.

또한 작년 연말에 민간조사관 10명, 민간조사지원팀 2명을 선발하여 국정원 계약직 직원으로 임용하였고, 이들과 국정원 직원 10명으로 조사팀 구성을 마무리했다.

▶[사진-통일뉴스 김규종기자]
국정원발전위는 조사대상사건에 대한 예비적 검토작업과 제보를 접수해 취합된 90여건의 의혹사건 가운데 30여건에 대한 예비조사를 완료했고, 앞으로도 계속 진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특히 우선 조사대상 선정에 대해 "국가정보원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되는 의혹사건 가운데 사회적으로 의혹이 큰 사건, 시민.사회단체 및 유가족 등 사건 관련자들이 지속적으로 의혹을 제기한 사건으로서 향후 진실위원회의 조사를 통해 진실이 규명될 것으로 기대되는 사건을 우선 조사키로 결정하였다"고 밝히고, 7건을 우선조사 대상으로 선정했다.

우선조사 대상 7건

부일장학회강제헌납 및 경향신문 강제매각사건, 동백림 간첩단 사건, 1,2차 인혁당 및 민청학련 사건, 김대중 납치사건,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실종사건, KAL 858기 실종사건, 남한조선노동당 중부지역사건

▶위원들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공세가 이어졌다. [사진-통일뉴스 김규종기자]
본보는 지난 1월 28일자 「국정원과거사위, 'KAL858'등 우선조사」 기사를 통해 우선조사대상으로 △'KAL858기폭파' 사건, △'민청학련.인혁당' 사건, △'김형욱실종'사건, △'중부지역당' 사건, △'정수장학회' 사건 등 5건을 선정했다고 보도한 바 있다.

위 7건중 '부일장학회 강제헌납 및 경향신문 강제매각사건'은 '정수장학회' 관련 사건이다.  

국정원발전위는 이어 우선조사대상 7건 선정이유를 구체적으로 밝혔다.

우선조사대상 7건 선정이유


7가지 사건을 선정하게 된 배경은 과거 공안기관이 정보부, 안전기획부 시절에 한국의 정치.사회 여러 분야에 다양하게, 때에 따라서 과도하게 때로 따라서는 불법적으로 개입한 의혹을 받고 있다. 그런 여러 분야의 사건들을 골고루 감안해서 선정했다.

1. 부일장학회 강제헌납 및 경향신문 강제매각사건('정수장학회' 사건)

과거 공안기관이 권위주위 정권에서 우리 언론을 어떻게 통제하고 억압했나 한편으로는 지난 근대화, 산업화 과정에서 경제인들을 정권이 어떻게 통제해 왔나, 경제인들을 정경유착에 어떻게 끌여들었나에 관련된 사건으로 적어도 군사정권이 들어선 이후 가장 핵심적이며 최초의 사건인 이유로 선정했다.
 
2. 동백림간첩단 사건

인권탄압 사건이면서 반정부 활동에 대해서 국가보안법이나 반공법을 내세워 탄압한 전형적인 사건이다. 이 사건은 국내의 정치적 탄압이 국제 사회에 어떤 파동을 일으켰는가라는 부분에서 대단히 상징적인 사건이며, 따라서 과거 권위주의 정권 안에서의 독재정권의 성격을 상징적으로 이야기 주는 대표적인 사건이다.

3. 1.2차 인혁.민청학련사건


8명을 사형선고 내리고 20시간만에 사형이 집행됐다. 세계적인 인권탄압사건으로 당시 유신정권을 반대하는 학생들의 우국충정 어린 데모를 반국가 기구로 몰아 엄청나게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으며 20세기 최대의 권력 남용 사건이다.

4. 김대중납치사건

상당부분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세계적으로 공안기관들이나 권력에 앞장선 탄압기관들이 자행하고 있는, 정적을 납치하거나 살해하거나 혹은 실종시킨 사건들이 세계사적으로 많았다. 우리 현대사에서도 예컨대 김구, 여운형 암살 사건이라든지 가장 비극적인 현대사 사건이 정적에 대한 살해, 납치, 실종사건이다. 그런 가장 대표적인 사건에 해당되기 때문에 김대중납치사건을 선정했다.

5. 김형욱 실종사건

베일에 가려진 일종의 미스테리사건, 특히 김형욱이 중앙정보부장이었기 때문에 조사하지 않을 수 없었던 배경이 있었다. 따라서 권력기관이 한편으로는 권력의 앞잡이로 정치탄압을했고, 한편으로 내부 스스로 개인에 관여하고 있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어서 선정했다.

6. KAL 858기 사건


현재 국민적으로 최대 의혹 관심사항이기 때문에 조사하기 상당히 부담을 느끼지만 기왕에 진실위원회가 발족됐는데 조사하지 않을 수 없어 불가피한 사정 때문에 선정됐다. 선정 과정에 내부 논란이 있었다. 왜냐하면 위원회가 과연 진실 규명을 해낼 수 있겠는가, 대형 사건을 조사해 낼 수 있는 역량이 있는가 등등 여러 면에서 많이 고심했지만 국민적 의혹이 가장 높기 때문에 선정했다.


7. 남한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사건

가장 최근 일어나고 있는 의혹 사건이면서 지난해 정치권에서 심각한 논의를 일으킨 바 있으며, 그 여파로 관련자들이 사건조사 받는 과정에 심각한 인권유린을 받았다고 문제제기를 했기 때문에 진실 규명을 위한 대상으로 선정했다.



안병욱 민간조사위원 간사의 우선조사 대상 사건에 대한 설명이 끝난 뒤 조사위원들은 기자들의 질의에 답했다. 

국정원발전위가 이날 7건의 우선조사 사건을 확정하고 본격적인 조사에 착수하게 돼 앞으로의 조사결과가 주목되고 있으며, 이 기구는 1차로 2년간 조사활동을 벌이게 되고 시한이 경과할 경우 추가로 1년을 연장할 수 있다.

<이모저모> "나도 '신세진 사람'"


3일 오전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위원장 오충일, 국정원발전위)가 기자들을 국가정보원(원장 고영구, 국정원)으로 초청해 진행된 기자회견은 '처음 있는 일'이니만큼 이야기거리도 많았다.

'기억에 남는 일'

서울시청 인근 프레스센터 앞에서 버스로 출발한 기자일행이 서초구 내곡동에 자리한 국정원에 도착하자 개별적으로 미리 도착해 기다리고 있던 기자들이 우루루 버스에 올랐다.

이때 함께 승차한 국정원 공보담당 관계자가 "여러분을 환영하며 '기억에 남는 일'이 되길 바란다, 최선을 다해 불편함이 없도록 하겠다"는 취지로 첫 인사를 건네왔다.

'기억에 남는 일'이라는 단어가 인상적이어서 이 말을 되뇌이고 있는 순간 바로 '기억에 남는 일'이 벌어졌다. 버스가 정문 승차지점 10여m 앞 현관에 멈춰 기자들이 내리게 된 것.

뒤늦게 버스에 승차한 기자들 왈 "가장 짧은 버스여행이었다. 확실히 기억에 남을 일이다".

국정원 관계자에 따르면 국정원은 누구도 걸어서 들어갈 수 없고 지정된 차량에 탑승해서만 들어갈 수 있다고. 국정감사를 온 의원들도 별수 없다며 위로아닌 위로를 해준다.

'터널을 뚫어야 하나' 고민하는 국정원 직원들의 마음씀씀이가 그나마 위안이었다.

'이런 기자회견은 처음'

▶오충일 위원장(왼쪽)과 김만복 국정원 기조실장이 잘해보자는 악수를 나누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규종기자]
'국정원' 하면 대부분 떠오르는 이미지가 주로 지하취조실이거나 잘해야 무슨무슨 간첩단사건 발표 기자회견 정도일 것이다.
국정원 직원들의 전언에 따르더라도 이번 기자회견은 특별했던 모양.

20여명 안쪽의 주요일간지 기자들을 대상으로 간첩단 사건 발표 정도로 이용됐던 국가정보관 2층이 비좁아 3층 강당에서 진행된 이날 기자회견에 대해 국정원 직원들도 "이런 기자회견은 처음"이라고 입을 모았다.

긴급가설한 인터넷 회선연결을 직원들이 도와주었고, 기사전송을 위한 전화와 팩스도 설치돼 있어 기자들이 현장에서 속보를 바로 전할 수 있었다.

물론 '보안은 생명'. 배부된 기자회견 자료마저 팩스로는 보내줄 수 있지만 이메일로는 보내줄 수 없다는 '보안의 장벽'에 가로막히기도 했지만.

기자회견을 마치고 2층에서 중국요리로 점심까지 얻어먹은 기자들, "세상 많이 좋아졌네".

참고로 국가정보관은 일반인들이 미리 신청하면 시찰이 가능한 곳이어서 외식업체가 입주해있다고.

'조선, 문화와는 말 안한다'

이날 기자회견은 자리가 자리인 만큼 독특한 장면들도 많았다.

인터넷 매체들중 오마이뉴스와 통일뉴스가 취재에 나섰고 특히 지난 1월 28일 가장 먼저, 가장 정확하게 5가지 우선조사 대상을 보도했던 통일뉴스 기자에게는 조사위원들과 국정원 직원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어디서 알았느냐?".

답은 뻔할 뻔자. "출처가 조사위원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히 말할 수 있다". 평소 기자와 아는 편인 조사위원들도 괜히 의심받을까봐 아마 너무 친한 척은 못했을 듯. 

▶기자회견이 끝난 뒤에도 기자들의 질문은 계속 이어졌다.
[사진 - 통일뉴스 김규종기자]
기자회견을 마치고 로비에서 이어지는 기자들의 질문에 성실히 답해주고 있던 안병욱 민간위원 간사가 갑자기 "어디죠?", "조선인데요", "조선, 문화와는 말 안합니다".

하루전 추측 기사를 내며 '정치적 해설'을 곁들인 조선일보와 문화일보에 대해 조사위원들이 보이콧하기로 내부 방침을 정했단다. 단 "오늘은 이야기 안 한다"고 한발 슬쩍 빼기도.

'신세진 사람'

기자들과의 일문일답도 끝나고 마무리 발언에 나선 오충일 위원장이 "저도 그동안 안기부에 밥도 먹고 잠도 잔, '신세진 사람'인 데 이번에 와서보니까 이미 국정원은 많이 달라져있었다"고 말해 기자들이 웃음을 터트리기도.

이날 기자회견에 나선 조사위원중 김만복 국정원 기조실장을 제외한 조사위원들이 대체로 민주화운동 경력자들. 캐보면 '신세진 사람'이 더 있을 법.

평소 KAL858기 사건에 관심이 많았던 기자도 국정원 입구쪽에서 집회나 시위를 벌인 KAL858 가족회나 대책위를 취재한 적은 있어도 국정원 기자회견에서 공식 질문을 할 기회가 올 줄 몰랐다.

급한 마음에 별렀던 질문을 던졌으나 돌아온 대답은 "김현희 소재는 국정원에서 모르고 있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정작 필요한 경우에는 수소문하여 위치를 파악하여 필요한 진술에 응할 수 있게끔 하겠다. 그리고 가능하리라고 예상하고 있다". 국정원도 모르는 일, 알려고 하지도 않는 일이 있기는 있는 모양.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