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서 발해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발해를 꿈꾸며`라는 곡을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또 97년 말에 발해 건국 1천 3백주년을 맞아 발해인들의 해양 개척 정신을 기리고 당시 뱃길을 탐사함으로써 선조들의 역사를 복원한다는 큰 포부를 갖고 뗏목 탐사를 떠났던 젊은이들이 다음해 1월에 일본 근해에서 좌초해서 전원 사망하는 안타까운 일이 발생했습니다.

이러한 관심과 노력은 여러 군데에서 민간인들의 힘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이 문제를 정부 당국이 심혈을 기울여 다룬다는 흔적은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의 역사는 이런 식으로 정권 담당자의 무관심 혹은 외면과 민초들의 피나는 노력으로 이어져 왔습니다.

우리는 고려가 고구려의 정통을 계승하려고 한 나라라고 흔히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정확한 것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것은 고려가 고구려의 뒤를 이은 발해를 우리 역사의 한 부분으로 정확하게 자리매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태조 왕건은 발해를 `친척의 나라`라고 불렀고, 발해 유민들을 많이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고려는 발해의 역사를 편찬하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조선 후기 실학자로서 `발해고`를 썼던 유득공의 말을 잠시 들어 봅시다.

고려가 발해사를 수찬(修撰)하지 못한 것을 보면 고려가 크게 떨치지 못했음을 안다. 옛날, 고씨(高氏)는 북쪽에 고구려라 하였고, 박(朴), 석(昔), 김(金)씨는 동남에 있어 신라라 하였고, 부여(夫餘)씨는 서남에 있어 백제라 하여 이를 삼국이라 하였으니 마땅히 삼국사가 있어야 하며, 고려는 이를 수찬했었다. 부여씨가 망하고 곧 고씨가 망하니 김씨는 남에 있었고, 대씨는 북에 있어 발해라 하였으니 이를 남북국이라 하는 바, 마땅히 남북국사가 있어야 하거늘, 이를 찬(撰)하지 않았다. 무릇 대씨는 어디 사람인고 하니 고구려 사람이요, 그들이 차지했던 땅은 어딘고 아니 고구려 땅이었다. 그 땅은 동서북으로 쳐부수어 대단히 컸다. 김씨도 망하고 곧 대씨도 망하매, 왕씨가 이 땅을 통일하여 고려라 했는데, 김씨 땅은 온전히 차지하였으나 북으로 대씨 땅은 온전히 차지하지 못하였다. 거기엔 여진도 들어오고, 거란도 들어왔다. 당연히 이 때 고려를 위하여 꾀한 자면 발해사를 급히 찬했어야 할 것이다. 여진을 잡아 책할 때, `왜 우리 발해 땅에서 돌아가지 않는가? 발해 땅은 곧 고구려 땅이니, 한 장군을 시켜 거두어 들일 것이며 압록 이서(以西)를 가질 것이다.`고 할 것이었다. 결국 발해사는 수찬되지 않았으니 토문(土門) 이북과 압록 이서가 누구의 땅인지 알지 못하였다. 여진을 책망하려도 할 말이 없고, 거란을 책망하려도 할 말이 없었으니, 오히려 고려는 약소국이 되고, 발해의 땅은 찾지 못하였다. 어찌 탄식하지 않으리오!

유득공이 쓴 `발해고` 서문의 일부입니다. 유득공의 말처럼 탄식할 만한 상황은 천 년이나 지난 지금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옛 발해 땅을 둘러싼 나라들이 서로 발해 역사를 자기네 역사의 일부 혹은 자기네와 긴밀하게 관련된 역사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로서는 정말 어이가 없는 일이지요.

그러면 발해를 둘러싼 논쟁의 주요한 점들을 한 번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이 고구려인이냐 아니면 말갈인이냐 하는 논쟁입니다. 우리쪽 기록인 `삼국유사`의 `신라 고기(古記)`에 따르면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은 고구려의 장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중국쪽 기록인 `구당서`를 보면 대조영을 `고구려 별종`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별종`이 무엇을 뜻하느냐가 논란이 될 수 있는데, 대체적으로 고구려 사람으로서 변방에 있던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송나라 때 편찬된 `신당서`에서는 대조영을 `속말말갈인으로서 고구려에 딸려 있던 사람`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이처럼 저마다 다른 서술 때문에 대조영이 어떤 종족 출신이냐 하는 논쟁이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중국쪽은 `신당서`의 기록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그에 근거를 둔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당서`는 발해가 멸망한 지 19년밖에 안 된 945년에 쓰인 것이지만, `신당서`는 자그마치 134년이나 지난 1060년에 쓰인 것입니다. `구당서`가 발해가 멸망한 지 얼마 안 된 시점에 비교적 발해의 종족 계통을 정확히 밝힌 데 반해, `신당서`는 그 무렵 송나라가 거란이나 여진과 맺고 있던 관계 때문에 필요에 따라 고쳐 썼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구당서`가 더 신뢰할 수 있는 사료라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발해인 스스로가 남긴 기록을 살펴보면 더욱 명확해집니다. 발해인들은 자신들이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기록을 여러 군데에 남기고 있습니다. 발해는 727년에 작성된 일본과의 외교 문서에서 자신들이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았고, 부여의 풍속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3대 국왕인 문왕 대흠무는 스스로 `고구려 국왕`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더욱이 발해인들과 같은 시대 사람들인 신라나 고려 사람들이 발해를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로 인정했습니다. 신라 하대의 최치원은 그의 저서 `동문선`에서 고구려의 남은 무리들이 모여 발해를 세웠다고 쓰고 있습니다. 또 앞에서도 말했듯이 고려의 태조 왕건도 발해를 `친척의 나라`라고 불렀습니다. 이런 점들을 살펴볼 때 대조영이 고구려 사람이고,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라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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