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후반기에 들어서 북한 임시인민위원회는 정권을 강화하고 합법성을 획득하기 위해 보통선거를 준비하게 되는데, 이것은 `정통성`있는 정권기관을 만들기 위한 절차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북한이 이 시기에 선거를 실시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시점에서 제반 민주개혁의 성과가 일정하게 나타났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북한사회에서 친일파와 봉건잔재가 어느 정도 일소되고, 초보적인 새 질서의 기반이 마련되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이것은 아직 취약한 상태였습니다.

북한 지도부의 판단으로는 이런 상황에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초보적인 질서를 보다 제도적으로 공고히 하는 것이었고, 여기서 가장 중요한 관건은 합법적인 절차를 밟은 정권기관을 탄생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민주개혁을 통해 싹튼 주민의 민주의식을 감안할 때 군중집회 같은 방식으로 전체 인민대중의 의사를 확인하는 방식은 한계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인민대중이 해방된 나라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피부로 느낄 만한 정치행사"가 필요하기도 했던 것이지요.

선거를 위한 준비는 8월부터 시작됩니다. 8월 2일 선거 임시인민위원회는 [공민증 교부에 관한 결정서] 제57호를 채택하고, 9월 1일부터 보안서와 공민증교부사무소를 통해 만 18세 이상의 주민에게 공민증을 교부하기 시작합니다. `친일분자`로 분류되어 선거권을 박탈당한 사람들도 공민증은 교부 받았고, 그 가족은 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중요한 정치적 의미가 있었습니다. 임시인민위원회는 공민증을 주민들에게 교부함으로써 법적으로 주민들에게 공적 증서를 부여하는 `국가권력`으로서의 권위를 갖게 된 것입니다. 임시인민위원회는 북한지역의 모든 주민을 빠짐없이 조사·등록하고, 주민 통계를 정확히 작성함으로써 주민을 정치권력에 포섭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이름을 바꾼 채 숨어살던 `친일파·민족반역자`들 가운데 상당수를 적발할 수 있었던 것도 북한 당국으로서 커다란 성과였습니다.(김광운, {북한 권력구조의 형성과 간부 충원(1945. 8∼1947. 3)}, 한양대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1999. 231∼232쪽)

1946년 9월 5일에 열린 임시인민위원회 제2차 확대위원회에서 김일성은 선거를 통해 각급 인민위원회를 법적으로 공고화할 것을 제시하였고, 각급 인민위원 선거에 대한 결정이 채택되었습니다. 투표일은 11월 3일로 결정되어, 준비기간이 58일에 불과하게 되었습니다.

선거 방식은 흑백투표였습니다. 임시인민위원회는 선거는 보통 직접·평등 선거로 무기명투표를 원칙으로 한다고 발표하였지만, 흑백함 투표를 채택하자 논란이 일었습니다. 이에 선관위는 "투표함 주위에는 사람이 배치되지 않으며, 그것을 감시하지도 않는다. 투표시 흑백 두 함 모두 손을 넣어 비밀을 보장한다"고 공표합니다. 

9월 13일 북조선 민전 중앙확대위원회는 유일후보를 공동 입후보시키기로 결정하지만 이에 반발하여 일부 지역에서는 복수 후보가 출마하기도 합니다. 또 선거과정을 주도한 북로당의 독주가 문제되기도 합니다. 북로당은 입후보자 추천에서 독점하지 않고 민주당과 청우당에도 안배하려고 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아 문제가 생겨나기도 했던 모양입니다.

선거운동에서 등장한 구호는 주로 남한의 미군정과 이승만·김구에 대한 반대였습니다. 선거운동이 본격화되면서 {로동신문}은 정권을 인민위원회에 이양할 것과 미군정 반대투쟁에 궐기할 것을 크게 보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9월 20일경까지도 주민들의 상당수가 선거에 대해 모르고 있거나 무관심하자 선거 분위기를 높이기 위해 대대적인 군중집회를 조직하게 됩니다. 10월 9일 해주에서는 7만 명의 유권자가 모여 선거법령의 의의에 대한 해설과 토론을 진행한 뒤 시가행진을 가졌으며, 10월 12일 {로동신문}은 "남녀선거자들이여! 인민위원회는 인민의 이익을 옹호하는 진정한 민주주의주권이다.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에서 추천한 우수한 대표자를 인민위원으로 선거하자"고 호소하는 등 선거과정을 대중들의 정치의식을 높이고 조직화하는 계기로 활용하고자 합니다.

11월 3일에 치뤄진 도·시·군 인민위원 선거 결과는 11월 5일 발표됩니다. 총 유권자의 99%가 참가하였으며, 그 가운데 북조선 민전이 추천한 후보에게 96.9%가 찬성 투표한 것으로 발표되었습니다. 도·시·군 인민위원으로 선출된 3,459명 가운데 정당별로는 노동당 31.8%, 민주당 10.0%, 청우당 8.1%, 무소속 50.1%였으며, 계급별로는 노동자 14.5%, 농민 36.4%, 사무원 36.6%, 상업 4.3%, 기업가 2.1%, 문화인 9.1%, 종교가 2.7%, 전(前)지주 0.4%였습니다. 남녀 비율에서는 여자가 13.1%였습니다.(김광운, 앞의 논문, 239쪽)

이 결과로 보면 다양한 성분과 정당을 망라한 각계각층이 선출되었으며, 특히 일제 시기 착취대상이었던 노동자·농민이 중심으로 부상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노동당의 지배력을 쉽게 알 수 있으며, 13.1%나 차지한 것만으로도 여성의 지위가 높아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도·시·군에 이어 리(동)·면 인민위원 선거는 1947년 2월 25일과 3월 5일에 각각 실시됩니다.

도·시·군 인민위원 선거가 끝난 뒤 1947년 2월 17일부터 20일까지 평양에서 전체 인민위원들이 참여하는 도·시·군 인민위원 대회가 개최됩니다. 여기서 인민위원 선거에 대한 총화가 있었고, 합법적인 중앙집행기관으로서 북조선인민위원회를 구성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렇게 해서 마지막 날인 2월 20일 인민회의 대의원 선거가 실시되었습니다. 선거 결과 237명의 대의원이 선출되었습니다.

북조선 인민회의 제1차 회의가 열린 것은 도·시·군 인민위원 대회가 끝난 바로 다음 날인 2월 21일. 여기서 북조선인민회의 상임위원회가 구성됩니다. 위원장 김두봉(북로당 위원장), 부위원장 최용건(민주당 위원장)·김달현(청우당 위원장), 서기장 강량욱(임시인민위 서기장)이었고, 위원에는 김창만(북로당 선전부장)·강진건(농민동맹 위원장)·박정애(여맹 위원장)·최경덕(직맹 위원장)·이기영(문예동맹 위원장)·김제원(농민대표)·김상철(노동자 대표) 등이 선출되었습니다.

동시에 인민회의는 인민위원회 규정을 채택하고 위원장으로 김일성을 선출합니다. 그리고 부위원장 김책·홍기주(민주당 부위원장), 기획국장 정준택, 내무국장 박일우, 외무국장 이강국, 상업국장 장시우, 교육국장 한설야, 노동국장 오기섭, 사법국장 최용달, 인민검사국장 최창익, 선전국장 허정숙 등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다음날인 2월 22일 북조선 인민위원회가 `임시`라는 글자를 떼어내고 정식으로 출범합니다. 북조선 인민위원회의 출범은 사실상의 정권기관이 북한에 탄생했음을 의미합니다. 북한은 북조선 인민위원회를 `우리나라에서의 첫 프롤레타리아 독재정권`이라고 정의하고 있으니까요. 북조선 인민위원회는 정식 정부는 아니었지만, 정권으로서 갖추어야 할 조건들은 대부분 갖추고 있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언제라도 정식 국가로 출발할 수 있었습니다.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