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유경(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 사무차장)


▶마닐라에서 군사주의에 반대하는 국제 여성회의가 열렸다. 사진은 비케에스 여성들이
만든 퀼트를 들고 있는 회의 참가 여성들. [사진 - 고유경]
지난 11월 21일부터 27일까지 군사주의에 반대하는 '동아시아-미국-푸에르토리코 여성평화네트워크'가 5번째 국제회의인 '인간안보와 개발에 관한 여성회의'를 필리핀에서 개최하였다.

2년 주기로 열리는 이 회의에서는 군사주의로 인해 피해를 겪고 있는 여성들이 어떻게 그에 대항하고 군사주의에 맞서 평화문화를 일구어 가는지 서로 공유하고 공동의 행동을 조직하는데 그 의의가 있다.

21일 도착한 필리핀은 한여름 날씨였다. 금방이라도 소나기가 쏟아질 것 같은 푹푹 찌는 여름날씨에도 불구하고 오랜만에 만나는 각 지역의 여성들과 포옹을 하며 인사를 나눈다. 2002년 서울에서 열린 4차 회의 후 다시 만난 사람들도 있고 새롭게 참가하는 사람들도 많다.

회의는 한국에서 준비한 여신제로 첫 시작을 알렸다. 6명의 여사제들이 순조로운 행사 진행을 염원하는 기원문을 낭독하고 평화의 꽃씨를 뿌리며 회의장 가득 평화바람을 불러온 것이다.

다음 날 현장방문, 3일간의 소그룹 회의, 그리고 공개회의와 연대의 밤 등 7일간의 필리핀 여성회의 여정은 고통스런 현장의 목소리와 그 속에서 딛고 일어서는 희망이 되는 사람들, 그리고 여성들이 만들어 가는 평화문화를 느끼고 행동하게 만들었다.
 
군사주의로 인한 필리핀의 고통스런 현장과 그 안의 희망
- 전쟁, 성매매, 환경오염 그리고 여성들

22일 군사주의로 인한 필리핀의 피해 현장 4곳을 나누어 방문하였다.

필리핀 루손섬 북부 마파니크 지역은 2차 세계대전 후반기인 1944년 11월 23일 퇴각하던 일본군이 마을 남성들을 잔인하게 살해하고 나이에 관계없이 여성들을 집단으로 강간, 마을 전체 주민들의 삶을 통째로 유린한 곳이다.

▶일본군에 의해 피해를 입은 '말라야 롤라' 소속 생존자들이 증언하고 있다.
[사진 - 고유경]
1992년에야 처음으로 공개되었고 '말라야 롤라(Malaya Lolas : 자유의 할머니들)'가 조직되어 일본군 성노예전범 여성국제법정에도 참가하여 증언하기도 하였다. 이미 노쇠한 할머니들은 병에 걸려도 약값이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다. 치매증상으로 기억이 가물한 할머니는 생생한 증언을 할 수 없다. 단지 일본군에 의해 강간당했다는 사실만 기억할 뿐이다. 자신이 받은 고통을 기억할 수 없게 될 미래를 생각하며 죽기 전에 일본정부로부터 사과와 배상을 받아내야 한다는 가녀린 그러나 분노서린 목소리는 우리를 향한 연대의 요청이기도 하였다.

루손섬 중북부 올롱가포시와 안헬레스시는 각각 미해군과 미공군이 주둔했던 지역이다. 1992년 기지협정이 만료되어 주둔 미군이 철수한 후에도 방문군의 형태로 미군들은 끊임없이 들어오고 있다. 각 지역은 모두 미군 기지촌과 성매매, 환경오염으로 심한 사회적 문제를 낳고 있다.

▶클라크 미 공군기지로 인한 환경오염으로  기형으로 태어난 아이와 어머니.
[사진 - 고유경]
올롱가포시 수빅 지역에서 오염된 미군기지 정화운동을 벌이는 한 여성은 임신 3개월이었다. 미군은 이미 12년 전에 철수했지만 그들이 방치하고 간 기지의 오염물질로 인해 주민들이 암에 걸리거나 기형 아이들이 태어나는 현실을 보며, 자신의 아이도 병에 걸리지 않을까 끊임없이 불안해 하고 있었다. 태어날 아이를 위해서라도 기지 정화운동을 벌여야 한다며 호소하는 그이의 눈가에는 어느새 눈물이 맺혀있다.

클라크 미공군기지 주둔지였던 안헬레스시 또한 환경오염에 따른 주민피해가 심각하다. 미군이 철수하면서 폐기물을 적법하게 처리하지 않고 매립한 땅 위에 주민들을 거주하게 하여 소아암, 백혈병, 유산 등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으나 미국 정부나 필리핀 정부 모두 그들을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

▶안헬레스 지역 성매매 생존자 여성들의 단체 '나카(NAGKA)' 사무실과 회원들.
[사진 - 고유경]
안헬레스시 성산업지역에는 '나카(NAGKA)'라는 성매매 생존자 여성들이 운영하는 단체가 있다. 이 단체는 여성들이 쉽게 찾아올 수 있고 이야기할 수 있도록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주위 클럽 주인들이나 시에서는 이 단체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다. 클럽 주인들은 이 단체의 활동으로 자신들의 영업에 지장이 있다며 식당건물을 철거하도록 시에 뇌물과 압력을 넣고 있다. 시 또한 여성들의 편이 아니다. 그러나 여성 생존자들은 탈성매매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어려운 과정과 결심, 고통이 따르는 지 알고 있기에 어렵고 힘들지만 식당을 지켜내고 있다. 그것이 곧 성매매 여성들의 탈성매매와 자립.자활을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필리핀에는 주둔하는 미군은 없다. 대신 훈련을 위해, 테러전쟁을 위해 방문하는 미군들이 많다.
필리핀 한 여성활동가는 한국이나 오키나와에서 미군기지 반대운동이 심하기 때문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필리핀으로 다시 들어오는 것이라고 분석하였다.

미국의 군사훈련, 실험장 : 하와이, 비에케스

필리핀 현장뿐만 아니라 하와이, 미국, 비에케스에서 참가한 여성들의 증언들은 다른 지역과 비슷한 고통과 행동을 벌이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하와이 여성들은 미국의 식민지를 인정하지 않았던 선조들이 미국 정부에 보낸 저항서를 100년이 넘은 후에 미국 도서관에서 발견하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유명한 관광지로만 알고 있던 하와이가 미 육군, 해군, 해병대, 공군의 무기 실험장으로 게다가 미국의 미사일방어 시스템이 위치한 엄청난 규모의 전쟁 연습장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최근 미국이 스트라이커 부대 훈련장을 하와이에 건설하려는 계획에 따라 이에 반대하는 주민들의 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다. 한국에서는 작년 8월 스트라이커 부대가 훈련차 들어온 경험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홈페이지 http://www.nohohewa.com 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클라크 미 공군기지는 떠났지만 흔적은 남아있다. 환경오염과 함께. [사진 - 고유경]
비에케스는 미해군 훈련장이었다. 주민들의 투쟁으로 결국 훈련장을 폐쇄시키기는 하였지만(아직 레이더 기지는 남아있다) 오염된 토양과 바다로 인해 암으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 회의에 참가한 한 여성은 암으로 딸을 먼저 저세상으로 보내야 했다.

미국정부는 천연자연보호구역이라는 명분으로 접근.개발 금지구역을 설정하여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는다고 한다. 어떤 구역은 오염상태가 너무 심각하여 더 이상 군사시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일반인들의 접근을 금지시키고 있다.

그들에게 앞으로 남은 일은 '깨끗한' 비에케스를 '돌려받는' 일이다. 환경 정화도 문제이지만 돈이 많은 미국 본토 사람들이 비에케스 땅을 사서 별장을 지어 임대사업을 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들과 경쟁하기에는 비에케스 사람들은 너무 가난하다.

비에케스, 하와이, 필리핀 여성들은 대규모 미군기지를 반환받게 되는 한국의 상황에 대해 모두 환경정화문제를 언급했다. 미국이 자신들의 돈을 들여 완전하게 정화했다는 사실이 확인되기 전까지는 미군을 돌려보내지 말라는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여성들의 공감(共感)과 공동행동

회의장 한 켠을 장식한 퀼트는 비에케스 여성들이 준비한 것이다. 지역에서 함께 활동하는 여성들의 교육 프로그램으로 자신들의 삶을 하나의 천조각에 표현하고 그것들을 이어 만든 퀼트 작품은 그 자체가 여성들의 소망을 보여주고 있다.

회의 기간 내내 전사(warrior)라 불리운 하와이 여성이 마지막 연대의 밤에 보여준 민속춤은 무엇을 위해 그들이 싸우는지 언어를 통하지 않고서도 알 수 있게 하였다.

▶퀼트 작품을 배경으로 펼쳐진 재현극. [사진 - 고유경]
회의 참가 여성들이 가장 흥미를 느꼈던 것은 '재현극'과 '나의 소리'였다. 재현극은 특정한 상황을 제시하고 그것을 자신의 몸짓과 소리로 표현하면서 자신을 찾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었고 해설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나의 소리'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성매매 여성생존자들의 마음을 치유하는 프로그램으로도 많이 쓰이는 그림그리기는 자신을 표현하고 바라보게 한다. 이 행위의 공통점은 모두 참가하고 기뻐하고 서로와 자신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폭력을 대신할 평화의 문화를 창조하는 것이다.

마지막 연대의 밤, 여성회의 기간동안 느끼고 소망한 것을 담은 재현극이 펼쳐졌다. 전투기와 무기들이 병원이나 학교로 변했으면 좋겠다는 참가자의 소망을 배우들은 스스로 해체하는 전투기가 자신의 잔해를 병원과 학교로 변화시키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회의 기간 내내 언어 스트레스 때문에 변비에 걸렸다며,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문화적 연대를 만들고 싶다는 참가자에게는 그림, 노래, 극을 보여주며 화장실 다녀온 시원한 표정을 안겨 주었다.

▶참가 지역들을 표시한 현수막. [사진 - 고유경]
여성들의 행동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변화를 이끌어 내는 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다.
공감과 공동행동이 어우러질 때, 군사폭력을 지운 자리를 메꾸어 평화의 문화가 생성될 수 있을 것이다.

하와이 여성이 한국의 촛불시위에 상당한 관심을 갖고 이번 회의를 통해 공동의 촛불행사를 제안했다. 동아시아와 태평양 지역을 모두 아우르는 평화의 촛불이 켜질 때 우리는 다시한번 공감과 공동행동을 만들어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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