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태(민족통일연구소 연구위원)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가 어려운 지경에 처했다. ‘경국대전’과 ‘관습헌법’이라는 얼토당토않은 논리를 끌어다 붙인 헌법재판소(헌재)의 지극히 정치적인 신행정수도건설 특별조치법 위헌 결정으로 일단 행정수도 이전을 위한 모든 활동이 중단되었으며, 이와 연계하여 참여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던 지역의 균형 발전과 지방분권화를 위한 여러 가지 사업과 구상도 벽에 부닥치게 되었다.

취임때부터 도전받아 온 노 대통령의 지도력

파장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언론관계법, 사립학교법, 과거사규명관계법, 국가보안법 등 4대 개혁법의 운명도 점치기 어렵게 되었다. 벌써부터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 위헌 소송을 내겠다고 한나라당이 벼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국가보안법,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 신행정수도특별법 등에서 헌재가 보인 행태로 볼 때, 또다시 위헌 결정을 내리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

이번 사태로 노무현 대통령의 지도력이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야당의 반대와 좋지 않은 여론에도 불구하고 ‘국운을 걸고 이 사업을 추진하겠다’고 밝혀왔던 터이지만, 자칫 헛말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 되었다. 이해찬 총리가 대신 읽은 시정연설에서 지역의 균형 발전을 위한 사업은 어떻게 해서라도 밀고 나가겠다는 의지를 피력했지만, 사실상 대책을 세우기란 쉽지 않을 형편이다.

국회의 권위 또한 크게 손상을 입었다. 신행정수도 특별법은 한나라당이 다수당이었을 때 절대다수의 찬성으로 통과시킨 법률이었으나 위헌 결정이 나고 말았으니 말이다. 이제 야당이 반대하면 개혁 입법 하나 만들기도 어려울지 모른다. 한나라당은 약간이라도 개혁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법안에 대해서는 사사건건 위헌 시비를 벌이며 발목을 잡을 것이며, 그러면 여당 스스로도 위축되어 미리 접고 들어갈 소지가 크기 때문이다. 어쨌든 노무현 대통령의 정국 운영이 더욱 어려워지게 되었다는 데는 더 이상 이론의 여지가 없다.

노무현 대통령의 지도력은 그가 취임한 뒤 계속해서 도전받아 왔다. 그 도전이 정점에 이른 것은 지난 4월 국회의 대통령 탄핵 결정이었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은 그 위기를 국민의 지원을 받아 벗어날 수 있었다. 아마 국민의 지원이 없었더라면 헌재는 그때 대통령 탄핵을 결정했을 것이다. 그러나 탄핵을 주도했던 민주당은 몰락했고, 한나라당은 간신히 추락을 모면했다. 반면 노무현 대통령은 열린우리당이 총선에서 과반을 넘는 의석을 얻음으로써 화려하게 부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다시 국민의 절대적인 지원에 힘입어 화려하게 살아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를 흔쾌히 지원하기에는 국민들이 느끼는 섭섭한 마음이 여러 가지로 적지 않기 때문이다.

국민들이 느끼는 실망감의 가장 큰 원인 가운데 하나는 경제문제이다. 사람들에게 먹고사는 문제는 가장 기본이면서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경제를 잘 운용해 민생을 안정화시키는 것은 대통령과 정부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지금 정부는 그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경제침체가 오랫동안 계속되고 빈부격차가 심화되면서 사람들이 느끼는 고통과 소외감은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 지금 한국 사회는 고실업과 고용불안, 가계파산과 대규모 신용불량자, 비정규직 노동자의 확대, 소득분배의 악화와 절대빈곤층의 증대라는 최악의 경제 상황을 경험하고 있다. IMF시절보다 어렵다는 것은 이미 누구나 인정하고 있는 현실이 된지 이미 오래이다.

더욱 문제는 앞날이 좋아질 것이란 희망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정부에서 내놓는 정책이란 것도 일반 서민들의 생계와 생활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이다. 골프 부양론, 건설경기 부양론 등 하나 같이 투기와 관련된 것이 아니면 돈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일 뿐이다. 실제로 생산설비를 확충하고 그에 따라 고용효과를 가져올 정책을 제대로 내놓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 내놓은 한국판 뉴딜정책 구상이나 기업도시 건설도 건설 경기 부양을 염두에 둔 것이면서 대기업이나 재벌에게 혜택이 돌아갈 공산이 큰 정책들이다.

국민들이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지지했던 것은 그가 약자의 편에 서서 서민의 눈물을 닦아주는 대통령이 될 것이란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1년 8개월 동안 노무현 정부가 편 경제정책은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참여정부는 확고한 경제 철학도 없이, 이 눈치 저 눈치 살피면서 단지 눈앞의 지표에 급급한 나머지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할 뿐이었다. 보수 신문이나 한나라당에서는 참여정부의 경제정책이 좌파적이라고 했지만 그건 둘러씌우기에 불과할 뿐, 실제 노무현 정부의 경제정책은 이헌재 부총리나 유시민 의원의 표현대로 우파, 그것도 상당히 우파적인 쪽에서 왔다갔다할 뿐이었다. 그렇게 오른쪽에서 흔들리고 있는 돛배 위에서는 결코 약자를 배려한 정책을 발견할 수 없었다.

첫 단추부터 잘못 낀 ‘대북송금특검’

내정에서 경제가 핵심이라면 대외관계에서 핵심은 무엇일까? 남북관계? 아니면 대미관계? 글쎄, 이 둘은 연관관계가 있기 때문에 반드시 갈라 보기 어려운 측면이 있지만, 어쨌든 역대 정부 대부분은 남북관계보다 대미관계가 우선 순위를 차지했던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노무현의 참여정부는 어떠할까? 당연히 노무현 정부도 그걸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어떤 면에서는 역대 어떤 정부보다 참여정부가 훨씬 더 대미관계에 매달려 남북관계를 풀어 가는, 그래서 미국에 대단히 종속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 결과 외교와 안보, 남북관계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보여준 모습 또한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그 결과 그를 지지했던 많은 사람들이 노무현 정부의 대외정책(그 핵심은 대미관계)과 대북정책을 보면서 노무현 정부에 등을 돌리게 되었다. 왜 그랬을까?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던 중요한 동력의 하나는 촛불시위에서 나왔지만, 그는 대통령에 당선된 뒤 그 사실을 잊어버렸다. 아니 애써 잊으려고 노력했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촛불 시위에 참여하거나, 비록 참여하지는 못해도 마음으로 촛불 시위에 지지를 보낸 사람들의 마음은 하나였다.

어린 여중생이 백주대낮에 미군 궤도차에 치어죽었는데도, 범인을 처벌하지 못한 채 미국으로 도망가게 놔두어야 하는 이런 부조리한 현실에 분노하면서, 그런 현실을 만든 불평등한 한미관계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분노는 힘이 되었다. 그 힘이 노무현을 대통령에 당선시켰다. 그렇다고 해서 그 자리에 모였던 사람들이, 노무현을 지지했던 많은 사람들이, 노무현 대통령에게 반미를 하라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비정상적인 한미 관계를 정상적인 관계로 돌려놓기 위해 노력하라는 것, 그것이었을 뿐이다.

대통령에 당선된 뒤 처음 노무현이 보인 행보는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듯 보였다. 2003년 초반부터 부시 행정부는 북한 영변에 대한 정밀폭격 운운하면서 전쟁위협을 가해왔다. 이에 대해 노무현 당선자는 북폭은 물론이고 북폭 시나리오 자체를 반대한다는 의사를 분명히 하였다. 2월 13일 한국노총을 방문한 자리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언론이 미국과 다르다고 하는데 안 다르면 결과적으로 전쟁을 감수하자는 것이냐. 막상 전쟁이 나면 국군에 대한 지휘권도 한국 대통령이 갖고 있지 않다. 다른 것은 달라야 한다. 다른 것을 조율해 전쟁 위기를 막아야 한다.”

대통령 취임 직후인 3월 3일 '뉴스위크'와의 회견에서는 “북한을 범죄자가 아닌 협상 상대로 대해야 한다”고 했고, 3월 5일 영국의 '더 타임스'와 회견에서 “(북한의 미군 정찰기 위협사건에 대해) 미국이 너무 앞서가지 말라”고 하였다. 또 3월 9일 민주당 지도부와의 만찬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공개적으로 전쟁을 반대하지 않으면 연일 전쟁 불안감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경제가 어찌 되겠는가. 한국정부가 명확하게 전쟁을 반대하는 것으로 폭격 가능성과 불안감을 줄이려 한다. 그런 태도를 바꾸지 않으면서 미국과의 공조를 하겠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의 태도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상한 모양으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그 이상한 헛발질을 ‘대북송금특검’의 수용에서 시작되었다. 많은 국민들의 반대와 모든 국무위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중간에 누구의 이야기를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노무현 대통령은 여야가 협의한다는 전제를 달기는 하였으나 대북송금특검을 늠름하게 받아들였다.

그 결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우리 모두가 너무 잘 알기에 여기서 더 이상 언급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아무튼 이 일로 인해 2000년 6월 15일 남북정상의 만남은 그 의의가 적지 않게 훼손되었다. 임동원 전 통일부장관을 비롯해 남북정상회담의 성사를 위해 노력했던 많은 사람들이 범죄인이 되어야 했다. 그리고 우리는,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이 그 유탄을 맞고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비극을 보아야만 했다.

2003년 5월 방미 발언, 원칙과 철학 없는 ‘실용주의자’의 헛발질

노무현 대통령의 ‘이상한 행보’는 2003년 5월에 열린 한미정상회담에서 더욱 심각하게 계속되었다. 그는 미국의 대북한 군사행동에 제동을 걸며 ‘전쟁 절대 불가’를 분명히 하기는커녕 “한반도에서 평화와 안정에 대한 위협이 증대될 경우에는 추가적인 조치의 검토가 이뤄지게 될 것”이라는데 합의했다. 이건 미국이 계속 요구했던 ‘모든 가능한 수단을 동원’하는 것에 사실상 동의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거기다가 김대중 정부 시절에 어려운 속에서도 남북관계를 이어가는 중요한 끈이 되었던 정경분리 원칙을 노무현 대통령은 부시와의 회담에서 철회하고 ‘핵과 경협을 연계시키는 정책’을 받아들였다. 이것은 한반도에 드리운 전쟁의 위험을 감소시키고 화해와 교류를 통한 남북관계의 발전을 가로막는 먹구름이었다. 그러나 이건 약과였다. 그 뒤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은 도무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들’로 점철되었다.

“북한 지도자들은 미국이 이라크 전쟁에서 보여준 군사적 능력에 대해 불안해하고 있다”라고 했고, “미국의 공격위협이 북핵 해결에 도움”이 된다고 하면서 “한국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평화적 해결이 여의치 않을 때는 미국과 협의해 다음 행동을 취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미국의 무력사용에 사실상 동조하는 듯한 태도를 보인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은 그 뒤에도 계속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코리아 소사이티 주최 만찬에서 정말 충격적인 발언을 하였다.

“미국이 53년 전 (한국전쟁에서) 도와주지 않았다면 나는 (북한 체제 아래서) 정치범 수용소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세상에, 정말 ‘오마이 갓’이 아닐 수 없었다. 그의 놀라운 발언은 점입가경으로 계속되었다. PBS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나는 북한이 믿을 만한 파트너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그 정권에 동의하지도 않는다”라고 하여 점점 부시를 닮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나아가 이런 말도 하였다.

“북한은 낡은 체제를 고집하고 있으며,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는 북한 주민들의 이익에 맞지 않는다. 그들의 행동과 요구는 국제사회로부터 받아들여질 수 없다.”

어떻게 3개월 사이에 대북 인식이 이렇게 180도로 뒤바뀔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나중에 필자는 어떤 자리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당선되자마자 북한에 대해 사태를 악화시키지 말라고 계속 메시지를 보냈는데도 북한은 전혀 반응이 없었을 뿐 아니라 사태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고 갔다’고 말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래서 북한에 대해 공개적으로 경고장을 보냈다는 것인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국가의 운명이 걸린 문제를 그런 방식으로 처리하겠다는 사고나 발상이 어떻게 나올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2003년 5월 방미 이후 노무현 대통령이 남북관계와 관련해 더 이상 결정적인 실수를 하지는 않았지만, 그때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들은 사실상 참여정부의 대북정책의 근간에 무엇이 깔려 있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미국에서 한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들은 결코 실수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어쩌다 보니 너무 나갔다’는 식으로 넘어가려 했지만, 어쨌든 그것은 의도된 발언이었다. 거기에는 노무현 대통령의 북한을 바라보는 시각이 스며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실제로 북한을 그다지 신뢰하고 있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2002년 겨울,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미국과 북한이 싸우면 우리가 말리겠다’고 하였다. 표가 된다고 생각하고 한 정치적 수사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 그때는 그렇게 생각한 듯하다. 그런데 막상 대통령이 되고 나서 미국과 대면해 보니까 그게 아니었다. 미국의 힘은 생각보다 훨씬 컸고, 그 앞에 섰을 때 압박감으로 주눅이 들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노무현 대통령은 미국을 설득하는 일을 포기하였다. 그 결과 자기 가슴속에 담아두어야 할 대북관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말았다. 그것도 술자리에서나 할 법한 표현 방식으로. 이것은 원칙과 철학이 없는 ‘실용주의자’의 헛발질이었다. 그 덕택에 모처럼 조중동과 한나라당으로부터도 ‘대미외교만큼은 잘했다’는 찬사를 받았다.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그러나 한미정상회담 뒤에도 남북관계가 크게 뒤틀어지지는 않았다. 과거 같았으면 ‘수용소 발언’을 비롯한 노무현 대통령의 방미 때 발언은 남북관계를 완전히 얼어붙게 만들 심각한 내용이었다. 대북송금특검 문제도 그랬다. 아마 10년 전쯤이었으면, 서울 불바다 발언이나 조문파동 만큼이나 남북관계를 뒤흔들 폭발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하지만 북한은 이를 비난하긴 하였지만 그걸 빌미로 남북관계를 단절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것은 북한이 처한 상황이 과거보다 훨씬 어려워졌다는 반증이다. 또 한편으로는 북한이 그만큼 유연해졌다는 이야기이기도 하였다. 사실 사람들은 남북관계를 말할 때, 남한의 변화는 생각하지 않고 북한의 변화만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엄밀하게 따져보면 남한의 변화 속도가 북한의 변화 속도 보다 반드시 빠르다고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단적으로 국가보안법 논쟁에서 냉전 시대를 벗어나지 못한 남한 사회, 변화하지 않는 남한 사회를 보면 그걸 알 수 있을 것이다.

참여정부, 국민의 정부보다 남북문제 결정 늦어

참여정부는 대북정책을 ‘평화번영정책’으로 이름하였다. 사람들은 김대중의 국민의 정부가 내건 ‘햇볕정책’이란 표현을 그대로 쓸 수 없는데다가, 동북아 중심국가란 슬로건과도 연관시켜 지었으나, 그 본질적 내용은 김대중 정부와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국정의 최고 책임자이면서 군 통수권자이고 대외적으로 국가를 대표하는 국가 원수인 노무현 대통령의 북한을 바라보는 사고방식이 이런 것이라면, 그것으로는 ‘햇볕정책’이라 이름 붙인 김대중 정부의 대북정책을 계승할 수 없을 것이었다.

여기에 대해 침묵을 지키고 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은 1년 이상이 지난 뒤 2004년 9월쯤에 입을 열었다. 그래도 크게 보면 평화번영정책과 햇볕정책이 다르지 않다라고. 이 말을 하기까지 김 전 대통령의 가슴은 결코 편치 않았을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이 발언이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실질적인 판단이라 하더라도 참여정부 초기 노무현 정부의 대북정책은 확실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이런 상황을 보면서 리영희 교수는 ‘노무현 대통령이 미국에 대해 잘 모르고, 외교와 남북 관계를 풀어갈 준비가 돼 있지 않다’고 비판하였지만, 그건 확실히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한국정부가 미국과의 관계를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외교나 국방, 남북관계를 풀어간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을 만큼 미국은 한국의 목을 조이고 손을 비틀 수 있는 온갖 수단들을 갖고 있다. 그것은 이른바 ‘한미동맹 50년의 결과물’로써 해방된 지 60년이 되는 대한민국의 서글픈 현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독립국으로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미국의 일방적인 규정력에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는 데 대해 부정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다만 그것을 현재 어떤 수준에서 어떤 방식으로 추구하느냐 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문제로서 고도의 정치적 판단을 필요로 한다.

참여정부는 한 사람에 의해 국정이 좌우되는 과거의 낡은 방식으로는 21세기 현대 사회에 적응하기 힘들다는 전제 위에서 시스템에 의한 국정 운영을 모토로 내걸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하더라도 대통령이 책임져야 할 사항이 장관에게 넘어가서는 안 된다. 분단된 조건에 놓여 있고,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대한민국의 외교와 국방, 남북관계는 기본적으로 대통령의 정치적 판단 위에서 진행되어야 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관료들에게만 맡겨두면 그 결과는 뻔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참여정부의 대북정책은 애초에 국민의 정부의 대북정책보다 그 정교함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참여정부는 외교, 국방, 남북관계에 대한 총사령탑으로 사실상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설정하였으나 NSC가 대통령의 역할을 대신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NSC가 외교부, 국방부, 통일부, 국정원 같은 힘있는 부서들 사이에서 정책을 실제로 조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렇게 해서도 안 되는 일이다. NSC의 역할이 높아지는 만큼 오히려 정치적 판단과 결정은 계속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참여정부는 국민의 정부보다 훨씬 남북문제에 대한 판단이 안일하고 그 결정도 늦었다. 그것은 실무적 차원의 판단으로는 힘을 갖지 못하는 문제에도 계속해서 실무적으로 판단하고 실무적으로 진행해 가려고 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남북문제와 대미관계에서 정치적 결단 한번도 하지 않아

노무현 대통령은 국내 정치 문제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과단성 있게 결단하고 승부를 던져갔지만, 남북문제에서는 전혀 그렇게 하지 못했다. 강준만 교수는 노무현 대통령의 이런 태도를 ‘정치적 헤게모니와 관련된 부분에서는 목숨을 걸고 싸웠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고 평가하였는데, 맞는 말이다.

사실 남북문제와 대미관계는 정말 국내 정치의 주도권보다 더 목숨 걸고 싸워야 할 부분이지만 전혀 그렇지 못했다. 노무현 정부는 대미관계에서 자주성을 찾기 위해 정치적 결단을 한번도 하지 않았다. 고통 없이 얻어지는 자유란 없다. 미국에게 터지지 않고 기분 좋게 독자성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착각이 아닐 수 없다. 어떻게 해서라도 문제를 제기하고 끈질기게 달라붙어야 깔보지 못한다. 눈 내리깔고 관대한 처분만 기다린다고 미국이 잘 봐줄 리가 없다.

핵문제를 잘 해결해 달라고, 경제 때문에 미국에 밉보이지 않기 위해 이라크에 미국, 영국 다음으로 많은 군대를 파병하는 식의 사고로는 절대로 미국으로부터의 예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런 근본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노무현 정부는 6자회담, 남북경제협력, 용산미군 기지 이전 협상, 미래한미군사동맹, 이라크 파병 등 모든 문제에서 미국의 요구를 일방적으로 추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가 한반도 문제를 풀어가는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한미관계와 남북관계를 동시에 발전시켜’야 한다. 그래야 대미관계에서 자주성을 확보할 수 있는 공간이 생기고, 한반도 문제도 주도적으로 풀어갈 수 있는 여지가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는 한미관계를 주된 것으로 두었고, 남북관계도 동북아 전체의 평화구축이라는 차원의 범주 안에서 바라보았다.

그 때문에 노무현 정부는 ‘핵의 덫’에 걸려버렸다. 핵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남북관계의 발전도 한계가 있고, 정상회담도 사실상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거꾸로 정상회담을 통해 핵문제의 돌파구를 열기 위한 방안을 찾을 수도 있고, 남북관계를 발전시킴으로써 전쟁의 위협을 줄일 수도 있다.

우리가 아무리 부정하더라도 남과 북은 일반적인 국가간의 관계가 아니라 ‘통일을 향해 가는 과정에서 만나는 특수한 관계’라는 사실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미국이나 중국과의 관계보다 더 가까운 사이로 발전해 가기 위해 목숨 걸고 노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물론 그것은 상대가 있기 때문에 남측의 일방적 노력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여러 가지 현실적 제약과 한계가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남북관계를 바라보는 근본 사고가 분명하다면 방안은 얼마든지 찾아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노무현 대통령의 사고 전환이 필요하다. 국내 정치를 풀어가는 데서 보여주었던 것 이상의 결단과 승부욕이 필요한 것이다.

지금 조문단 파견과 남한 핵문제로 시작된 남북관계의 냉각기간이 길어지고 있다. 아무래도 미국 대선이 끝나야 비로소 다시 본격적인 행보가 시작되겠지만, 미국 대선의 결과에 상관없이, 한반도 운명의 주인은 남과 북이라는 인식을 갖고 남과 북이 방안을 찾겠다는 각오를 가져야 새로운 전환이 가능할 것이다. 참여정부의 투지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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