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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정부수립 기반 닦기 ① 분단정부를 준비하는 남과 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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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1.03.23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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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3상회담 결정에 따라 열린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미·소와 좌·우간의 의견대립으로 무기휴회에 들어가는 1946년 5월은 해방 후 우리 나라의 앞날을 결정하는 중요한 시점이 되었습니다. 이를 기점으로 미국과 소련은 각기 남과 북에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정권을 세우는 방향으로 틀을 잡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과 소련의 그런 정책은 남북의 정치지도자들에게도 민감하게 전달되었습니다. 소련군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북한의 김일성은 물론이고, 미군정 사령관 하지와 때로는 적지 않은 마찰을 일으키기도 했던 이승만도 그런 사정을 예리하게 꿰뚫고 있었습니다.

이승만은 1946년 4월 15일부터 6월 9일까지 두 차례에 걸쳐 남한 각지를 순회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 방안이 나온 것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기로는 2차 순회 기간 동안인 6월 3일 정읍에서 한 발언이 그 최초의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거의 한달 전에 이미 단독정부 방침이 주장되었습니다.

이승만은 5월 6일 목포에서 행한 연설에서 자신의 선동가적 기질을 유감없이 보여줍니다. 이승만은 자신을 믿고 따르라고 한 뒤, "공산주의자는 소련으로 보내야 한다. 가족의 일원일지라도 거부하라. 공산주의자는 파괴주의자다. 그러므로 공산주의자는 전부 체포하라. 목포에도 몇몇 공산주의자가 있는 모양인데 전부 체포할 준비가 되어있다. 만일 개전하면 관대히 처분하겠다"고 했습니다.

이어 이승만은 클라이막스에 이르러 단독정부와 무력통일을 주장하기에 이릅니다. 이승만은 "자기의 주장을 하지중장에게 통하여 자기 소망이 관철되지 않으면 미소공동위원회는 결렬되고 공동위원회가 결렬되면 남조선에 단독정부를 세워 병력으로써 38선을 깨뜨리고 소군을 내어쫓고 북조선을 차지하겠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보다 자세한 내용은 정병준, (이승만의 독립노선과 정부수립 운동}, 서울대 국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01. 234∼238쪽 참고)

그 때문이었을까? 3월 20일 처음 개최된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는 그동안 참가대상의 자격문제로 의견대립을 보이더니 5월 6일 드디어 무기휴회를 선언합니다. 그 뒤 1947년 5월 21일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재개될 때까지 1년 동안 미국과 소련은 지리한 성명전과 정치공세만 계속하였으며, 재개된 뒤에도 대립을 계속하더니 결국 7월 10일 결렬되고 말았습니다. 이때부터는 남북의 분단정부 수립은 초읽기에 들어가게 됩니다.

어쨌든 5월 6일 이승만은 최초로 단독정부 수립과 북진무력통일이라는 자기 정치노선의 핵심을 밝혔으나 언론에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약 한 달 가량 지난 6월 3일 정읍발언은 내외의 커다란 주목을 받아 단독정부 수립의 최초 주장으로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이런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무기휴회된 공위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치 않으니 우리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같은 것을 조직하여 38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공론에 호소하여야 될 것…"

이승만은 이미 1946년 초부터 "미소협력 불가를 내세우며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과 무력을 통한 북한 소청(掃淸)을 주장"했으며, 앞에서 말한 것처럼 5월 6일 공개적으로 주장한 바 있어 새로운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 발언이 나오자 남한에서는 좌우를 망라하고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이에 이승만은 6월 11일 독촉국민회 연설에서 단정발언을 부정하는 듯한 태도를 취했으나 그것은 여론을 무마하기 위한 시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때부터 남한에서는 이승만을 중심으로 단독정부 수립 움직임이 구체적으로 나타났으며, 그것은 1년 뒤 미소공위가 완전히 결렬되면서 미국의 공식 입장으로 표면화되기에 이릅니다.

그렇다면 북한은 사정이 어떠했을까요?
소련과 북한 지도부의 기본방침은 모스크바 결정을 지지하고 그에 따라 통일임시정부를 세운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남한 우익의 반탁운동과 그에 대한 미군정의 미온적인 태도, 그리고 남로당 등 남한 좌익에 대한 미군정의 탄압을 보면서 소련과 북한 지도부는 미국이 과연 모스크바 결정을 실행할 의지가 있는지에 대해 적지 않은 의구심을 갖게 됩니다.

결국 소련과 북한 지도부는 이런 미국의 정책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북한 지역에서 빠른 시일 내에 권력기반을 강화해야 한다고 판단하게 되지요. 그래서 북한지역에서는 앞에서 이미 살펴본 것처럼 토지개혁을 시발로 제반 민주개혁을 시행함과 더불어 북조선공산당과 조선신민당의 통합을 추진하는 등 공산당의 대중적 지지기반을 확대하기 위한 작업을 신속하게 시행해 갑니다.

이렇게 볼 때 소련과 북한 지도부에게도 1946년은 5월의 제1차 미소 공위 휴회는 중대한 분기점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남한에서 잠재되어 있던 이승만의 단정노선이 표면화될 수 있었던 것처럼 북한에서도 이를 계기로 사실상 북한 단독정권 수립의 방향으로 틀이 잡혔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947년 2월 북조선인민위원회가 출범하면서 북한의 정권 수립 준비는 형식적인 측면에서는 끝난 상태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국가를 지도할 당이 정비되었고, 인민위원회가 리(동) 단위까지 선거를 통해 구성이 완료되었기 때문에 체계는 대체로 준비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국가 건설을 위해서는 대중의 참여의식을 높일 필요가 있었고, 그래서 건국사상총동원운동이 벌어집니다. 또한 군대도 필요했습니다. 북한 지도부가 해방 직후부터 준비해온 군 간부 역량을 바탕으로 조선인민군은 1948년 2월 8일 정식으로 창군을 선포합니다. 이로써 국가 건설은 사실상 끝난 상태가 됩니다. 다만 그것을 공식화하는 과정이 남았을 뿐입니다.

이 과정은 한반도 전체로 보면 분단 국가로 가는 불행한 역사였지만, 북한 역사에서 볼 때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 건설의 초석이 다져지는 과정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이 문제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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