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규섭(화가/ynano@hanmail.net)


가을 남자

여름은 늦게까지 기승을 부렸다. 땡볕 더위에 숨이 턱턱 차던 날씨는 9월 끝자락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비가 내리고 성큼 기온이 내려갔다. 미처 긴소매 옷을 꺼내놓기도 전에 서리가 내리고 설악산, 태백산에는 단풍소식이 들려온다.

가을을 흔히 남자의 계절이라고 한다. 지금까지의 경험이나 주변의 남자들을 보면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확실히 여자보다 남자들이 훨씬 더 가을에 흔들린다.

남자의 축 쳐진 어깨 위로 낙엽이 떨어지고, 가슴 한 구석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린다. 괜히 우울해지고 힘들고 악착같이 살았던 인생이 허무해짐을 느낀다. 바바리코트의 깃을 세우고, 깎지 않은 수염에 헝클어진 머리, 우수에 찬 눈빛... 찬바람을 맞은 가을 남자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평소 메마른 감성으로 일만하던 남자들이 갑자기 계절에 변화에 민감한 이유는 뭘까?
이런 현상을 음양의 원리로 설명하는 사람이 있고, 일조량과 생체리듬 따위의 변화에 주목하여 분석하는 사람도 있다. 뭐 어떤 이유든 상관이 없다.

나는 가을을 남자의 계절이라고 부르는데 동의한다. 여기에 조금 보태면 ‘남자가 철드는 계절’, 혹은 ‘남자가 깨닫는 계절’, ‘남자가 성숙하는 계절’이라고 부르고 싶다. 자신의 삶을 뒤돌아 볼 줄 아는 사람, 인생의 허무를 깊게 관조할 수 있는 사람, 돈과 명예와 권력의 무상함을 아는 사람은 성숙한 사람이거나 깨달은 사람이다.

가을은 풍성한 열매를 얻는 계절이자 꽃과 잎을 버리고 긴긴 겨울을 맞이하는 계절이다.
인생은 이러한 사계절의 변화와 닮아있다. 태어나서 자라고 열매를 맺고 죽는 과정은 자연의 질서이기에 인간도 피해 갈 수 없다. 하지만 죽음은 또 다른 탄생을 품고 있다. 자연은 기꺼이 낡은 껍질을 버리고 새로운 삶으로 거듭 태어난다. 탄생이 있기에 죽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있기에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예전에는 어른의 나이를 물을 때, ‘춘추(春秋)’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봄과 가을을 보낸 횟수가 바로 사람의 연륜을 나타내었다. 다른 말로 하면 ‘몇 번 죽었다 살았나’, 혹은 ‘죽음과 삶을 몇 번 반복 했나’가 사람의 나이인 것이다.

여성은 원래 생명의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또한 몸속에서 끊임없이 삶과 죽음을 반복하고 있다. 이에 비해 남성의 생명창조 능력은 뒤떨어진다. 남자의 창조능력은 자신을 죽여야 얻을 수 있다. 자신의 낡은 환경과 때 묻은 생각을 버리고 겨우 내내 새로운 변화를 탄생시켜야 한다. 지금까지의 남성이 주도하는 문화는 대부분 이러한 맥락과 닿아있다.

과거의 낡은 세계를 버리고 새로운 세계를 맞이하는 일도 이와 다르지 않다. 과거의 알량한 권력이나, 더러운 돈 맛에 집착하는 사람은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없다. 그들은 여름의 화려함과 가을의 풍성함을 즐기지만 혹독한 겨울을 견디지 못한다.
가을이다. 지독한 허무와 외로움을 견뎌야 하는 시간이다.


룡악산의 가을

▶룡악산의 가을/백화성/유화/2000
이번에 소개할 작품은 백화성이 그린 <룡악산의 가을>이다. 유화로 그렸으며, 2000년도에 제작되었다. 작품제목에 나오는 룡악산은 평양 근처에 있는 산이다. 높이 292m이며 경치가 매우 아름다워 평양의 금강산으로 알려졌다. 용이 하늘로 오르는 것 같은 기묘한 모습을 하고 있다는 데서 이름이 유래한다. 작품속의 나무와 건물은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대략의 정보로 추측하면 나무는 북한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느티나무, 회화나무, 참죽나무 중에 하나일 것이고, 건물은 법운암이다. (네이버 사전참조)

이 작품은 가을 풍경을 그렸다. 바위에 뿌리를 내리고 당당히 서있는 나무가 있고, 그 뒤로 법운암, 저 멀리 평양시내가 보인다.

북한화가들은 풍경화 속에도 어떤 사상적 의미를 넣으려고 애쓴다. 사상적 내용이 없는 풍경화는 대부분 수출용이나 판매용이다. 미술작품은 뛰어난 표현기량도 있어야 하지만 역시 작품의 격을 보여주는 것은 사상의 알맹이다. 어떤 화가든 내용이 있으면서 높은 표현 기법을 추구하기 마련이다.

이 작품에서 멀리 평양시내의 모습을 표현한 것도 단순한 풍경화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한 장치가 아닐까 여겨진다. 그러나 룡악산이나 법운암에 대한 지식이 없는 필자는 이 가을 풍경과 평양시내의 연결고리를 찾지 못한다. 그냥 가을 운치가 물씬 풍기는 그림이라고 보는 게 마음 편하다.

낮은 채도의 올리브 그린과 옐로우 오커로 표현한 가을 나뭇잎은 회갈색조의 전체분위기와 차분하게 어울린다. 한쪽을 차지하는 큰 나무도 감상자에게 시각적 부담을 주지 않는다. 구도와 색조가 안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짙고 긴 그림자는 작품 속의 시간을 오후 4시쯤으로 보이게 한다. 가을이라는 계절과 시차를 연결시키고자 하는 작가의 자연스런 의도이다. 역시 이런 육중한 가을 분위기는 조선화보다는 유화가 제격이다. 참고로 조선화에서 풍경을 그릴 때는 색채에 집중한다. 이 작품과 같이 깊고 진한 명암법을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다.

작품을 오랫동안 보고 있으면 묘한 쓸쓸함이 느껴진다. 바람도 없고 인적도 없다. 인공적인 장치도 없고 작가의 의도도 어디론가 사라졌다. 자연의 질서를 그대로 작품 속에 옮겨 놓은 듯 하다. 그저 바라보면서 상념에 젖을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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