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감성의 나라와 어떤 이성의 나라

▶소나무
리석호/조선화/253*131/1966


가끔 북한과 남한을 비교해 보면서 드는 생각이 있다. 북한의 경우, 어떤 정치적인 사안에 대한 개인들의 생각은 한 사람처럼 목소리를 낸다. 표현하는 목소리와 몸짓까지도 비슷하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보고 북한을 몰개성적이고 폐쇄적이라고 비판한다. 그럼 우리는 어떤가.

얼마전 직장인 친구들을 만난 자리에서 B양 비디오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하지만 여기서 오고간 말은 `너, 그거 봤냐?`와 `요즘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가 너무 느리다`라는 이야기가 전부였다. 상당히 무거운 사회문제로 접근할 수 있는데도 철저히 감성적인 태도로 접근했다.

`왜 사는가?`에 대한 문제에 대해 `술이나 마시자`, `노래방에는 언제 갈 껀데?`라며 회피해 버린다. 이성적인 화제에 대부분이 신문이나 방송의 내용을 앵무새처럼 말하고, 남의 이야기를 마치 자신의 의견인양 말한다. `러브호텔`에서 `러브`를 하려면 평일에도 자리가 없어 기다려야 하고, 원조교제를 한 학생도 한 반에서 20%가 넘는다는 통계도 있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의식이 저변에 깔려있고, 자신의 영역에 간섭하거나 침범하면 쉽게 흥분한다.

단순한 자동차 접촉사고에서 사람들이 취하는 태도를 보면 간단히 보험처리나 돈으로 해결할 문제를 자신에 대한 도전이나 간섭으로 생각해 싸움을 한다. 어린 의경에게 꾸지람을 들으면서 말이다. 핸드폰 문화가 그렇고, 자녀교육 문제도 감성이 앞선다. 인터넷 공간도 감성의 잔치이다. 게임과 채팅, 메일 따위가 주류를 이루고 어떤 것을 비판할 때도 `딴지일보`처럼 적절한 욕과 감성의 배출구를 만들어야 좋아한다. 엄숙하고 진지한 것을 이토록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물론 지식인과 정치판도 마찬가지이다.

원래 북방계열인 우리 사람들은 감성이 발달한 족속이었다. 이런 혈통을 가진 사람들은 자연히 개인주의 성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서구의 개인주의와는 다르다. 일종의 `감성적 개인주의`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을 무조건 비판만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잘못하다간 `조선일보식`의 이상한 도덕주의의 함정에 빠질 위험이 있다. 우리 사람들이 가진 감성을 충분히 활용한다면 지금보다 훨씬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 이 얘기는 나중에 다시 하기로 하자.

삼국시대, 통일신라, 혹은 고려시대는 감성이 지배하는 나라였다. 성적으로 개방되어 있었고, 지배 이데올로기인 불교의 종교적 엄숙주의는 약했다. 조선의 선비들은 고려의 이런 문제를 극복하고자 불교를 배척하고 `주자 성리학`을 통치사상으로 내세운다. 철저한 `이성`으로 나라와 백성을 다스리고자 한 것이다.

한여름에도 옷을 벗지 않고 꼿꼿한 자세로 격식을 차리고 글을 읽는 선비의 모습은 조선시대의 본보기이다. `사농공상`의 체계도 그렇고, 퇴계와 율곡의 논쟁에서도 강직한 이성의 힘을 느낄 수 있다. 일제의 식민지가 끝나고 남북이 건설되는 과정에서 북한은 조선시대의 이성의 힘을 활용했고, 남한은 조선백성의 꺼지지 않았던 감성의 힘을 빌렸다는 생각이 든다. 경제성장과정도 마찬가지다. 북한은 계획경제와 집단성을 기반으로, 남한은 먹고살기 위한 개인의 치열한 발버둥을 바탕으로 했다. 물론 이 이야기의 학술적 근거는 없지만 남북한 통치자들은 아마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절개의 상징, 통일을 위한 일편단심

위의 그림은 북한화가 리석호의 <소나무>란 작품이다. 그려진 연대는 1966년, 지금으로부터 약 40여년 전이다. 크기는 높이가 3m정도의 대작이다. 형식이 <조선화>라고 되어 있는데 아마도 <조선화>로 이행해 가는 과정에 서 있는 작품으로 이해된다. 세월을 이긴 소나무가 꼿꼿한 빛깔로 서 있고, 나뭇가지 한켠에 매 한 마리가 어딘가를 쳐다보고 있는 장면이다.

소나무는 사시사철 푸름을 유지해 조선시대 선비들로부터 절개의 상징으로 사랑 받았다. 우리 애국가 중에 `남산 위에 저 소나무...`로 시작하는 구절이 있는데 아마 이런 선비의 절개, 즉 조국을 변함없이 사랑하자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세월의 풍파 속에서 약간은 휘어지고 늘어지며, 거친 몸통을 가지고 있지만 그 푸름은 여전해 보인다.

그 위에 홀로 어딘가를 주시하는 매. 썩은 고기를 먹지 않고 굶어죽는 `킬로만자로의 표범`처럼 매는 독수리같이 썩은 고기를 먹지 않고 사냥을 하는 외롭고 고고한 새이다. 결국 이 작품은 고고한 선비정신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고고한 선비의 생각은 `주자 성리학`이 아니라 북한 노동당에서 요구하는 그 무엇일 수 있다. 

지금 우리는 통일문제에 있어 중요한 상황에 직면해 있다. 외세의 어떤 풍파에도 꼿꼿이 중심을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 내용은 조선시대 선비의 생각도 아니고, 노동당의 지침도 아니다. 우리 겨레의 통일을 위한 일편단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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